매번 휴대폰에 후원회 감사미사가 2시에 있고 후에 다과와 말씀이 있다고 떴읍니다. 저에게는 습관이라고 할수 있는 새벽미사를 그냥 지니친 것은 오늘 이 아름답고 힘찬 말씀으로 은총을 주실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자매님들 20여분에 저혼자 2층 기도실에 아담하게 무릅을 꿇고 드리는 미사의 기쁨은 남다름니다. 신부님의 느낌이 대학때 복학한 고참선배처럼 포근하게 느껴졌읍니다. 짧은 미사중 강론에 이어 신부님이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한 남다른 성찰과 접근방식이었지요,...
신비 그 자체이신 하느님은 지금 이 상황 너머에 항상 계시기에 그 초월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들의기도생활가운데 그 초월성이 부재체험으로 흐르는 경우가 있고 그때는 아주 멀리 있다고 느꺼질 때 마다 그 상황이 나의 신앙여정 전부인 마냥 초조해하고 어떤 행위를 선한 결과를 내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는 거죠,...
그러나, 하느님을 항상 내안에 타인안에 관계안에 현존하신다는 내재성 (지금 있는 지금 이 자리,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현존이 반드시 한켠을 차지할수 밖에 없는 비어진 공간이 있음을 인정)으로 살아낼 때 위 부재체험을 이겨낼 수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항상 가까이 계시는 현존체험만 있을 것이라는 충분한 착각은 유아기적 신앙이라는 말씀과 함께, 신부님은 말씀 중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명에 인간이 육으로 있는 한 어찌 완전한 사람이 되나,... 많이 함들어 하셨다면서, 2가지의 전통적인 이해방식을 말씀하셨지요,... 하나는 희랍전통으로 완전무결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상형을 만들어 놓고 고민하는 방식이고, 히브리전통으로 우리의 수많은 부족과 낙망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단순히 함께 걷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방식이란거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초딩자녀들이 집에 와서 조잘조잘 있었던 거짓없이 일을 예기하다가 중딩이되면 문을 걸어잠그고 거짓을 부모한테 슬슬예기할 때 속이 타들어가는 부모의 마음이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일거라는 것,...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의 가감없이 욥처럼 그분하고 솔직하게 기도(일상의 대화)를 할 때 얼마나 이쁘게 돌보아 주시겠는가 ! 인거죠,..
요즈음, 저는 과연 하느님은 제 존재 자체로도 나를 사랑하실까,... 업적을 내야 하고 순간 순간 허접한 유혹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올곳음으로만 살아내야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까,... 고민의 시작단계였었지요,...
강의후에 너무나도 홀가분해진 마음에 신부님에게 감사를 구체적으로 표했읍니다. 그러면서 한참을 묵상했던 말이 생각났네요, 아버지 하느님은 '내가 어떠한 어떠한 모습으로의 나중의 모습이 아닌, 지금 있는 이 모습 초라하고 쓸쓸한 이 모습 자체를 사랑하신다.'
--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첫댓글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해 주시는 주님 감사드립니다~~~~
너무나 초라한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사랑해 주시니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