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따라 세월 산책
- 의상로
김덕우
의상로義相路는 영주시 상망동 ‘상망교차로’에서 부석면 ‘소천사거리’까지 가는 935번 도로이다. 길 이름은 ‘의상로’이지만, 의상대사가 이 길로 다녔다는 얘기는 없다. 영주시가지를 빠져나온 광복로가 ‘상망교차로’에서 봉화 통로와 갈라져 영광고등학교 앞을 지나 부석으로 가는 길이다.
‘의상로’엔 고개도 많다. 보름골에서 진우마을로 가려면 마근댕이고개를 넘어야 하고, 진우마을을 지나 양지마 앞을 흐르는 조와천助臥川이 끝나자마자 갈가리재를 넘는다. 그리고 대마산목장을 보고 고갯길을 내려서면 너운티고개, 배남쟁이고개…, 크고 작은 고개가 계속된다. 또 우곡을 지나 소천에 들어가려면 마지막 고개인 낙하암落霞巖을 지나야 한다.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는 모양새이다. 예전에 이 많은 고갯길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예전에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봉화 도촌에서 골내와 수식을 지나 감곡으로 들어오는 하천을 따라 오는 둑길이었는데, 1960년대에 와서 영주에서 바로 들어오는 이 신작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감곡에 살았던 이 교수(73)는 1960년대 초에 이 길을 내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하고 부역賦役을 나갔어요. 그 전엔 산판길 정도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길을 다 만들었지요.”
문득 도촌 ‘공북헌拱北軒’에서 감곡 ‘인수정因樹亭’, 단산 ‘구구리’까지 돌아보았던 10여 년 전이 생각난다. 도촌에서 들어오는 낙하암 둑길은 승용차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그때 목적지는 이여빈의 인수정이었다. 1615년(광해 5년)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을 보내고 죽이려고 했던 계축화옥癸丑禍獄 때, 서슬 퍼런 그들에게 외롭게 그 부당성을 주장하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해버린 선비였다. 인수정은 ‘나무에 기대어 집을 만든다.’란 뜻이란다. 그렇게 나무 뒤에서 말없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셨을까?
그런데 ‘공북헌’과 ‘구두들’을 함께 돌아보자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주인들이 모두 이여빈의 할아버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여빈의 고조부인 ‘이수형李秀亨’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화를 참지 못하고 도촌으로 들어와, 3면을 벽으로 막고 북쪽으로만 문을 낸 집을 만들어 공북헌拱北軒이라 이름 짓고, 영월에 있는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살았던 분이고, 또 이수형의 고조부인 ‘이억’은 고려가 망하자 단산면 구구리에 들어와 은거하였는데, 요동 정벌을 함께 했던 옛 동료를 회유하기 위해 아홉 고을을 식읍食邑을 준 이성계의 마음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아 낟가리 아홉 더미 만들어내면서 ‘구두들’이란 마을 이름을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었다. 참 별나고 대단한 유전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길이 만들어지고 몇 해 뒤 버스가 다녔다고 한다. 2〜30리 길은 예사로 걸어 다니던 시절에 버스는 대단한 새 문명이었다.
“고등학교 때, 영주에서 자취했는데, 어머님이 장물을 한 병 담아주시는 겁니다. 그땐, 그걸 들고 가는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지요. 안고 가지도 못하고 다리 사이에 끼고 가다가 그만….”
비포장길을 달리는 버스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병이 구르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버스 안은 간장 냄새로 가득하고….
“그래도 차장이 야단도 치지 않고 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이 교수는 씩 웃으며 그때를 이야기한다. 토요일 오후, 버스를 타지 못하면 모두 모여서 집까지 걸었다고 한다. 집까지 가려면 서너 시간은 걸어야 해서, 날이 어두워져서야 집까지 갈 수가 있었다. 서로 모여서 가야 했던 것은 늑대 때문이었다. 해가 지면 너운티고개와 배남쟁이고개 쯤에서 늘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것은 늑대들의 소리였다.
1968년 이런 신문 기사가 났다.
“보호保護 대상이 된 해수害獸. 해수害獸로 퇴치의 대상이 되어왔던 늑대가 이제는 멸종 위기에서 보호 대상이 되고 있다. 창경원에서 사육 중인 이 한국산 늑대는 ‘경북 영주군’에서 생포된 것.”
이 늑대는 바로 이 ‘의상로’ 길가에서 생포된 것이었다고 한다.
아기 소리를 내는 늑대의 울음은 1960년대에만 해도 밤이 되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상석리 마을회관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상석교 너머로 멀리 백로 서식지가 보인다. 그리고 부석 쪽으로 200여m를 가면 서쪽 산기슭에 도강서당이 있다. 1999년 경상북도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건물이 대단한 것도, 역사가 오래된 것도 아닌데, 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이 서당에서 제자를 기른 정산貞山 김동진(1867-1952) 때문이 아닐까? 정산은 독립운동가였으며, 소수서원紹修書院 원장을 3번이나 지낸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유림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3년 대한독립의군부 설립에 가담하였고, 1919년에 일어난 파리 장서 사건을 적극 지원하였던 지사志士였다.
그리고 그는 동계구곡東溪九曲을 만들고 그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였다. 어쩌면 도강서당은 주자朱子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만들고 그 안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어 제자를 기른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배움에 성인을 표준으로 하지 않고, 그 말이나 모양에 그친다면 성현의 가르침을 배운 보람이 없다.”라고 한 선생의 가르침을 새겨 본다. 그리고 3곡인 회고대懷古臺 아래를 지나다가 차를 멈춘다. 차에서 내려 바위에 새긴 글자 속으로 보이는 옛 선비의 모습에 부끄러운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도강서당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새로 난 길을 따라 차를 몰다가 지나쳐버린 상석초등학교가 떠올라 차 머리를 돌린다. 1939년에 시작한 이 학교는 2002년 부석초등학교로 통폐합되었다고 한다. 63년의 세월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쳐 갔을까? 1970년쯤에는 한 학년에 세 반씩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이젠 아기들의 울음소리도 그친지 오래인 마을 한가운데 빈터로 남아있다. 새로 잘 난 길로 “휭-”하면서 관광버스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