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0108.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 사랑은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영적 승리의 삶.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05 추가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08 04:32
- 사랑은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이것이 요즘 요한의 서간을 읽으며 내내 성찰하게 되는 주제인데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느님 사랑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면 하느님을 사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물론 사랑받는지도 모르고 부모의 사랑을 늘 받았고
우리도 사랑한다는 생각 없이 늘 부모를 사랑했지만
우리가 부모를 언제 사랑하기 시작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부모를 사랑해야겠다고 처음 마음먹게 된 것은 처음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깨닫게 된 다음부터지요.
저의 경우는 중학교 때입니다.
가난했기에 20리 넘는 길을 가능한 한 걸어서 통학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 너무 더워 버스를 타고 하교했습니다.
그런데 오는 길에 창밖을 보니 어머니가 그 더위에
호박이니 오이 같은 것이 담긴 광주리를 이고 걸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제가 버스를 타고 다닌 것이지요.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어머니는 그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그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 길을 걸어서 가시네,
결국 어머니가 나를 머리에 이고서 통학시키시는 것이네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어머니를 사랑해드려야지,
적어도 나 때문에 힘 드시는 일이 더 이상 없게 해야지 하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깨닫는 것,
사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
그리고 받은 사랑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
이것이 사랑을 실제로 살아갈 때 거치는 단계요 순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를 사랑하면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하듯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한다고 얘기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자녀인 형제들이 생겼기에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어쨌거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하느님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오늘
우리는 서간에서 가르침 받고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려는 오늘 우리입니다.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삶
<자비와 지혜>
믿음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
세계적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의 “성서를 신문보듯하고, 신문을 성서보듯하라”는 충고를 잊지 못합니다. 병오년 적토마의 해를 맞이해 국운융성의 조짐들에 힘이 납니다. 이념이나 정파의 진영논리를 떠나 이대통령의 국익중심의 실용과 균형의 외교활동에 깊이 감탄, 공감했습니다. 미일중소 세계 4대 강국이 만나고 있는 한국의 명운은 <외교력>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옛 현자 다산도 유비무환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위기란 맞닥뜨려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것이다.”
“개미구멍을 막지 않으면 큰 홍수가 온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미를 알고 조심스레 미리 둑을 쌓는다.”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참으로 디테일에 강해야 함을 배웁니다. 2026년 병오년 1월4일-7일까지 4박5일동안 중국 국빈 방문후, 수백명의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1시간 넘는 오찬중 기자간담회를 시청, 경청하면서 이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지혜를 배웠습니다. 얼마 전엔 미국의 트럼프와 성공적인 만남을 가졌고, 경주에서의 아펙(APEC)도 성황리에 마쳤고, 중국에 이어 1월 중순에는 일본을 방문합니다.
이젠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한국을 함부로 가볍게 대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으니 신장된 국력에 외교력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고래 싸움에 <새우>가 아니라 <범고래>가 된 느낌입니다. 북한과의 힘든 과제도 때가 될 때까지 <신뢰>조성에 부단한 인내와 창의적이고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디 싶습니다. 국제관계의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승리에 기초가 되는 영적 승리는, 인자무적(仁者無敵) 사랑의 승리입니다.
바로 영적 승리의 기본적 자질이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입니다. “착하고 똑똑하다”는 너무 가볍고 좁고 얕습니다. “자비롭고 지혜롭다”가 비할나위없이 무겁고 넓고 깊습니다. 자비와 지혜는 하느님의 본성이며 영적 승리의 삶을 담보하는 최상의 두 영적 무기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둘이자 하나이니 자비에서 나오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이 권하는 아가페 순수한 사랑이 자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 승리의 삶에 우선적 답은 이런 형제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힘겹지 않으니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우리는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영적 승리는 사랑의 승리, 믿음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로 직결됨을 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영적 승리의 대 활약상을 미리 보여줍니다. 이사야 예언서에서 자신의 신원을 발견한 주님의 선언이요,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가 완전히 녹아 하나된 경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을 미리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도대체 이 말씀에 해당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예수님 빼놓고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흡사 악의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처럼 들립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영적 승리의 삶을 원한다면 이와같은 주님의 사명을 내 사명으로 믿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참으로 모든 빈곤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참 자유인이 되어 해방의 사명을 지니고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이요, 마침내 세상을 이긴 믿음의 승리를,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장중한 선언이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현재의 <오늘>부터, 이미 영적 승리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예수님께서 이겨놓은 싸움을 싸우게 됐다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 하루도 우리 모두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아멘.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여전히 주님 공현 후 주간 안에서, 주님의 현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지난 월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에서의 공생활의 시작은 그 “하늘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주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가 선포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마치, 창조 때 하느님께서 “~(라고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9.11.15.24.30)라고 하시며 말씀을 이루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말씀을 이루시는 구원자’로 당신을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 말씀이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곧 ‘듣는 행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듣는 행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이 사실은 ‘들을 때, 듣는 자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곧 말씀을 영접하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이루는 길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진리를 행하지 않으면서는 진리에 나아갈 수 없는 까닭입니다. 곧 진리를 이루지 않고는 진리에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길은 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랑을 실행하지 않고는 사랑의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가능한 까닭은 이미 그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19-21)
그래서 우리는 잠시 후에, <예물기도>를 이렇게 바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침으로써, 저희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게 됩니다. 그러기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 받은 것’, 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이미 받은 말씀’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이미 받은 사랑’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바로 그 안에서 현현하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
제가 들은 말씀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말씀이 저를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말씀을 이루소서.
굳게 닫힌 제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와 굳은 심장을 녹이소서.
이기심과 자애심에 묶인 저를 해방하소서.
제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들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하느님께서는 공평하게 하루에 24시간을 주셨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의미 있는 일, 소중한 일을 먼저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의미 없는 일, 필요 없는 일을 먼저 합니다. 하루는 큰 차이가 없지만,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지나면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소방관에게 소중한 일은 ‘화재’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소방관이 불이 났는데도 다른 일을 한다면 소방관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환경미화원에게 소중한 일은 쓰레기를 치우는 일입니다. 환경미화원이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역시 환경미화원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오후 1시 30분에 ‘운동치료’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성체’ 부탁이 있었습니다. 제게 소중한 일은 건강을 위해서 운동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소중한 일은 지금 몸이 불편한 분에게 ‘성체’를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이 하루나 일주일이면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한 달이나 일 년을 넘게 되면 표시가 나게 됩니다.
주변을 보면 돈이 삶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의 정책도 예산이 중요합니다. 본당에서도 재정이 중요합니다. 매달 재정평의회가 있습니다. 수입과 지출을 보면서 수입이 지출보다 많으면 기분이 좋다가도 지출이 수입보다 많으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가정에서도 돈은 꼭 필요합니다. 저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원망한 적도 있습니다. 29년 전에 한국에는 IMF가 있었고, 저와 저의 가정에도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가족들은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양원으로 미사를 가거나, 가정으로 봉성체를 가면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주님을 모시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100세 되신 어르신이 주님을 모시는데 마치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은 결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 얼마나 기도했는지가 중요합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있다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아닐 것입니다. 가정에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성사의 열정이 식어가기 때문에, 복음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멀리 떨어진 가족들에게 안부 전화하는 것, 어려운 이웃의 짐을 들어 주는 것, 처음 사제서품을 받은 그 열정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파도가 밀려온다고, 사나운 파도가 친다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쩌면 그 파도를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2026년 우리의 삶에도 많은 파도가 밀려올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고, 때로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웃과 헤어지기도 하고, 사업이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던 남편이 별 이유 없이 성당에 나가지 않을 때도 있고, 성당에는 가지 않으면서 결혼은 성당에서 하고 싶다는 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파도는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물속에서 파도를 즐기는 물고기처럼 이왕 피할 수 없다면, 우리들 또한 삶의 파도를 받아들이고, 그 파도 속에 녹아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제 단순히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만이 형제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묶인 이, 감옥에 갇힌 이, 억울한 이, 절망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형제요 자매라고 말합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계시와 변모!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경의 계시는 우리를 참으로 새로운 체험으로 초대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산산히 쪼개진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복음)
계시와 변모
2026년 1월 7일 수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성경을 끊임없는 계시와 변화를 가져오는 원천으로 설명합니다:
책과 서간들의 놀라운 모음집인 성경은 지적 만족이나 "작은 자아’"의 안락함, 혹은 단순한 의로움이 아니라, 신적 변모(神化, theosis)를 위한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우리를 참으로 새로운 체험으로 초대합니다. 놀랍게도, 21세기의 인간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러한 체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또한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단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사상들의 집합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은 새로운 눈을 열어 주는 초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그 사상들 중 많은 것은 이미 낡고 지친 것들로서, 지배적인 문화의 상벌 체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이 중대한 계시에서 어떤 새로운 것, 어떤 참된 선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네 복음저자와 사도 바오로가 이 새로운 계시를 지칭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복음"(Gospel), 곧 오늘날 우리가 "기쁜 소식"이라 번역하는 이 말은 사실 전쟁과 전투가 지배하던 세상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복음'은 승리한 편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승전의 메시지였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메시지는 참으로 선하고 참으로 새로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실입니다—우리가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처럼 영적 빈곤을 지닐 때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때때로 성경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책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단순히 올바른 결론만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열왕기의 이야기들, 레위기의 율법들, 수많은 전쟁의 기록들, 그리고 우리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을 접할 때는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끝없는 역사와 낡아 보이는 과학, 그리고 노골적인 폭력이 오늘날 우리 삶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되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포기해 버리곤 합니다.
성경 계시의 탁월함은 단순히 결론만을 제시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과, 그 과정을 신뢰할 수 있는 내적·외적 권위를 함께 줍니다. 삶 자체—그리고 성경 역시—언제나 세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두 걸음 뒤로 물러섭니다. 요점을 붙잡았다가 잃어버리거나 의심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성경은 우리의 인간 의식과 여정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호기심 많은 어린이의 '초심(初心)'을 필요로 합니다. 어떤 이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되는 현존'이라 부르는 것이야말로 영적 지혜에 이르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만일 우리의 관심이 오직 우리 집단의 영적 지위나 개인적인 ‘영적 안전망’에만 머문다면, 성경은 새롭지도, 선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은 후에도 우리는 자동 조종 장치처럼 무감각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단지 우리 문화 속에서 기대하는 "종교"일 뿐, 모든 것을 새롭게 재배치할 수 있는 참된 "복음"(기쁜 소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오늘의 묵상(today’s meditation)을 읽으며 제 마음이 점점 넓어지고 깊어짐을 느낍니다. 그 안에서 많은 은총을 얻고 있으며, 리처드 신부님께서 복음을 늘 새로운 방식으로, 마치 다이아몬드의 다른 면을 보여주시듯 전해 주시는 데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끝없는 시도와 헌신, 빛나는 지혜와 사랑이 제 마음을 크게 합니다. 참으로 놀랍고, 오늘의 말씀 속 성경 구절과도 그대로 맞닿아 있습니다. 리처드 신부님과 CAC에 제 넓어진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드립니다!
—Jane M.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ings Hidden: Scripture as Spirituality, rev. ed. (Franciscan Media, 2022), 1, 2, 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ul Macallan,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밝은 꽃처럼, 관상과 실천의 은총은 고통스러운 현실 한가운데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합니다.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루카 4,14–22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펼치시고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 장면을 두고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이제 말씀은 우리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모님은
이 말씀의 첫 번째 증인이셨습니다.
그분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자신을 내어 맡기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말씀이 아직도
과거의 이야기로 남아 있는가,
아니면 오늘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
성모님의 길은
말씀을 살아내는 길입니다.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입고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펴시며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순간은 단순한 성경 봉독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이심,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분입니다. 기쁜 소식은 먼저 삶의 무게에 눌린 이들에게 전해집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가장 먼저 바라보고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시력 회복을 주십니다. 단지 육체적 질병이나 외적 억압을 넘어서 마음 속 두려움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는 분, 즉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메시아이십니다. 주님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한복판에서 이미 펼쳐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로 오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치유와 해방을 이루시도록 오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보세요.
그리고 우리도 주님을 닮아 세상 속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작은 그리스도가 될 수 있기를 청합시다.
⭐어울리지 않는 곳이 어딘가?
한국인의 또 다른 소울푸드 ‘누룽지’
아침에 한 움큼 끓여내어 짠지나 김치를 올려 먹으면
해장이 따라오는 것은 기본이요.
된장찌개에 넣어 먹으면 ‘누룽지 된장’이고
짬뽕 국물에 넣어 먹으면 ‘누룽지 짬뽕’이 되고 마는 너….
솔솔 설탕이라도 올리면 한국인의 훌륭한 간식 ‘누룽과자’가 된다네.
누룽지 너의 이름은 팔방미인이라네^^
우리도 누룽지 같은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디에 있어도 자기 모습대로 살아가고 누구와 함께여도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는 누룽지 같은 모습 말입니다.
오늘은 ‘누룽지탕’ 드셔보세요.
따뜻하게~~~^^
----------------------------------------------------
==========================================================
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을 만나면서 배웁니다. 선생님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나의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스승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울 것이 없다면서 부정적으로만 보게 됩니다.
학창 시절, 성적이 좋았던 과목을 보면 “잘 가르치신다.”라고 내가 인정한 분의 과목이었습니다. “진짜 못 가르치신다.”라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과목은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도움이 될까요? 전혀 될 수 없습니다.
배울 것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텔레비전, 라디오, 책 등 어디에나 스승님이 계십니다.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제일 많이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사람’에서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수도 생활 장소(‘라 베르다’)로 늘 사람이 있는 마을이 보이는 곳을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고 또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만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실패해서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실패한 것입니다. ‘인생은 넘어졌을 때가 아니라, 일어서는 것을 포기했을 때 실패하는 것이다.’(박용후)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패는 만남을 포기했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이 만남만큼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율법(모세오경)과 예언서를 봉독했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건네진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펼쳐 읽으십니다. 바로 당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리고 자리에 앉으신 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오늘’은 단순히 시간적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때가 지금 예수님을 통해 왔다는 ‘종말론적인 지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으로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바로 ‘오늘’ 여기에서 하느님의 은혜로운 해가 시작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사랑 안에서 생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만남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자신이 찾는 것만 보고, 자신이 아는 것만 찾으려 한다(괴테).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책은 다른 책에 관한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 책들을 시야의 가장자리에 두고 반쯤 인용하거나 동의하거나 반박합니다. 그것이 대개 우리 인간들이 책을 쓰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입니다. 심지어 가장 외로운 행위 중 하나인 책을 쓰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일어나 이사야 예언서(성경)를 읽으셨습니다. 랍비들과 율법학자들은 주석에 주석을 덧붙이며 인용하기를 즐겼지만,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의 독서를 마치신 후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그 극적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미래도 아니고, 영원의 저편도 아니며, 바로 오늘, 지금입니다. 책이 현실 속으로 흘러넘쳐 현재의 순간에 스며드는 것은 어색합니다. 마치 벽에 걸린 그림이 틀을 넘어 확장되어 그 안의 인물들이 내려와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성경은 "구원"이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실현되는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은 바로 지금 하느님께 의탁하며 지금 은총이 실현되고 있음을 믿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미사와 성사 안에서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고 우리 삶 속에 들어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세상을 성사적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작은 순간에도 하느님의 선물을 인식하고 감사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하는(수양하는)이들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일 것이고, 또 지금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사랑으로 그분께 응답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결국 "지금을 사는 지혜"란, 오늘의 순간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미래의 불안이나 과거의 상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은총의 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엊그제도 소개해 드린 조셉 머피 박사는 "삶의 법칙은 믿음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는 우리가 잠재의식에 심는 미음이 현실로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니 긍정을 잠재의식에 심는 것이 얼마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부정적인 말을 끝까지 하지 말라. 즉시 뒤집어라. 그러면 삶에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생각과 언어가 잠재의식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에, 긍정적 선언이 곧 현실을 바꾼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잠재의식이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면, 그것을 실행하기 시작한다."고합니다. 머피 박사의 핵심 메시지는 잠재의식이 우리의 삶을 창조하는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또하 에크하르트 톨레는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가진 전부임을 깊이 의식하고 깨달으라!"고 강조합니다. '지금'을 삶의 중심으로 두라는 것입니다. 톨레는 과거와 미래의 환상에서 벗어나 현재에 집중할 때 참된 자유가 온다고 말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힘은 현재의 순간에 있는 것입니다. 좋은 미래는 좋은 현재를 창조함으써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고 그는 말합니다.
한 선승(禪師)이 한 시간 동안 '현재의 순간', 곧 '지금'의 힘에 대해 설파했다고 합니다. 강론이 끝나자 누군가 말했습니다. "스님의 '지금'이라는 개념이 마음에 듭니다!" 그때 선승은 뭔가에 충격을 심하게 받은 듯 격렬히 반응했습니다. "그것은 개념이 아닙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지금'은 현실이며, '오늘도 현실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지는 복음은 현실이어야 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도 현실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공동체이며, 단지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적 공동체와는 다릅니다.
이런 삶을 자그만 일에서부터 실천하는 삶이 바로 성사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공식적인 성사 안에서만 성사를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자체가 성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어쩌면 우리가 거행하는 성사의 의미가 우리 삶에서 진심으로 이어질 때 그 성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을 성사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일의 경중이나 그 일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작으냐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에 정성을 들이는 것,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틱낫한 스님은 "정성 가득한 마음(mindful)으로 걷기", "정성 가득한 마음으로 물을 마시기", "정성 가득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기" 등의 일상적인 일들을 명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영국의 한 묘비에는 토마스 콥(Thomas Cobb)이라는 이의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토마스 콥이 잠들다. 그는 40년 동안 구두를 수선하며,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쳤다."
이는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크고 작은 모든 일, 평범하거나 전문적인 모든 활동 안에서도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의무와 책임은 단순한 과업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의 길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성소(聖召)의 연장선이며, 그리스도께서 내 삶 안에서 창조와 구원의 일을 이어가시는 통로가 됩니다. 작은 일이라도 성실히 수행할 때, 그것은 곧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이 됩니다. 신발을 고치는 일, 집을 청소하는 일, 사람을 돌보는 일 모두가 성체성사의 삶처럼 하느님께 봉헌될 수 있습니다.
내가 맡은 모든 과업을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성사적 행위로 바라볼 때, 그 안에서 은총이 흘러넘칩니다.
예수님을 그저 '목수의 아들', '목수'로 바라보면서 그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나자렛 사람들의 시선을 우리의 시선과 빗대어 바라보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도 모두 놀라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 즉 온 우주의 구세주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작은 일 하나도 아버지 하느님과 더불어,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통하여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사적인 삶이고, 그분의 이런 성사적인 삶이 우리 주변과 세상을 치유하고 용서하고 구원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몸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목수는 평범한 나무를 다듬어 새로운 것을 만들고, 손상된 것을 고쳐 다시 쓰임 받게 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고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시는 사명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맡은 일 역시 그분의 창조와 구원의 손길을 이어가는 신비로운 협력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X X X X X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에 X X X X X 로 표시)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4,14-22ㄱ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께서 사람들 앞에서 읽으신 성경 말씀이 그들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당신께서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나지요.
세례자 요한이 투옥된 이후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을 방문하시어 그곳 회당에서 진행되던 종교 예식에 참여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성경 말씀을 봉독하실 차례가 되자 당신께 주어진 이사야서의 내용 중에 이 부분을 선택해서 읽으시지요.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자기들을 해방시키기고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50년을 주기로 거행되던 “희년”에 대한 내용입니다. 희년이 되면 사람들 사이에서 졌던 ‘빚’이 완전히 탕감되고, 돈이나 잘못 때문에 노예가 되었던 이들이 본래의 신분을 회복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기쁨을 누렸던 겁니다. 안타깝게도 기득권 세력의 탐욕 때문에 희년이라는 제도 자체가 금새 흐지부지 되었지만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굳이 그 구절을 선택해서 읽으신 것은 당신께서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사람들로하여금 가난이라는 속박, 신분이라는 속박, 질병이라는 속박, 권력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자비를 맘껏 누리게 하시려는 것임을 널리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앞으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중점적으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구원의 출사표’인 셈이지요. 예수님은 당신께서 선포하신 그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하느님 말씀을 귀기울여 들음으로써 죄로부터의 해방을, 참된 자유와 평화를, 영원한 생명을 한 마디로 ‘하느님 나라’를 이미 누리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의 강생과 구속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 말씀은 그저 귀로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따라야만 비로소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의 참된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 말씀은 우리가 삶 속에서 실천해야 비로소 그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당장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뀌지는 않지만, ‘일신우일신’의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내 ‘삶’이 바뀝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 삶을 바꾸는, 즉 참된 회개를 실천하는 이들을 당신 나라에 받아주십니다.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지난달을 끝으로 우리 본당이 변형이 있었습니다. 변형된 커리에 제가 맞추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미사도 신앙도 낭인이 될? 그것은 아닙니다. 우선 매일 미사를 명동에서 하고 있습니다. 외부가 혼란 스러울때는 back to Jesus입니다. 예전에 박사 학위 과정 중에 아주 힘이 들었습니다. 당시 저의 힘은 주님.. 미사였습니다. 매 정해진 시간에 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다음은 기도입니다. 지금은 정해진 것이 미사와 성무 일도, 묵상입니다. 이것이 저의 힘입니다. 돈이 힘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재능도 아닙니다. 저의 힘은 미사, 성무 일도, 묵상입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저의 힘입니다. 충실도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항구성을 더 중요합니다. 인생의 파고가 어찌 일정할 수 있나요? 어제 복음에서와 같이 제자들이 바다에서 바람의 파고로 인해서 죽을 위험에 처합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일정한 것은 규칙적인 기도 생활입니다. 규칙적인 미사와 묵상, 성무일도입니다. 그 안에서 행복이 있습니다. 아버지도 항상 일정한 신앙 생활하십니다. 아침 5시에 기상하셔서 묵주기도와 미사, 3시에 평화 방송에서 하는 찬미 기도, 저녁에 주무시기 전에 마침기도를 하시고 주무십니다. 우리 집은 모든 커리가 규칙적인 신앙 생활입니다. 그 안에서 신앙의 안정을 찾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에서 신앙의 만족을 찾는 것은 거짓 신앙입니다. 항구하게 기도 생활하면서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를 말씀하시고 그 메시아가 당신이임을 말씀하신 그 순간에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이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주님은? 당신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의 틀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자?을 알 수 있는 길은 ?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의탁하는 자.. 영적인 가난, 겸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자 만이 주님을 알 수 있고 그 안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현대에서는 수도자들의 삶이 그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재속회가서 보니 그곳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버림이 있어야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 늘 하시던 외딴 곳에서 기도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예전에 공권력이 깡패 색출하기 위해서 잡으러 돌아다닐때 산으로 들어가서 가짜 스님이 된 일이 있습니다. 겉 모습만 봐가지고는 잘 모릅니다. 진짜 중이 누구고 깡패인지? 진짜 스님은 공 사상 안에 있는 자가 진정한 중이었습니다. 그 공 안에 머무는 중은 늘 외딴 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득도에 단계를 거쳐서 득도를 하였지요. 우리도 완덕의 7공방과 같은 것이 있고 이름만 바뀔 뿐이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분도회 및 여러 수도회도 같이 연구하고 같이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 머무는 것, 성령에 내 자신을 내어 맡기고 그분의 인도에 따라서 나의 발을 딛는 것이 참 자유인의 길입니다. 성령의 인도..오늘 복음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이 ..성령 안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하늘의 기운으로 세상을 걸어 가신분.. 성령께서 그분 안에서 활동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에게 활동하셔서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성령 안에 내어 맡김입니다. 늘 외딴 곳에서 주님과의 합일을 기도합니다. 아멘
++++++++++++++++++
김건태 신부님_은혜로운 해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의 선교 사명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의 유다교 회당에서, 안식일 전례 중에 선포되고 개시됩니다. 유다교 전례에서 안식일에는 보통 두 개의 성경 본문이 봉독되었습니다. 하나는 ‘토라’ 곧 오경에서 택한 본문으로서 율법학자가 읽고서 해설했으며, 다른 하나는 ‘느비임’ 곧 예언서에서 취한 본문으로서 30세가 된 성인이면 ‘누구든지’ 읽고 해설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누구든지’는 회당장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지명 또는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은 막 30세에 이르신, 유다교 전통에 따라 공적인 자리에 서서 말할 자격이 부여되던 나이에 이르신 예수님이 지명을 받으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예언서 가운데 당신의 직무를 예고하고 있는 부분을 펼쳐 드십니다.
오늘 예수님이 봉독하신 독서는 이사야서 61장 1-2절의 말씀입니다.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던 역사적 인물 이사야의(1-39장) 정신을 이어받아, 바빌론 유대시대에 흔히 2이사야라 불리는 예언자가 40-55장을, 유배시대 이후 제3이사야가 56-66장을 남겼습니다. 유배시대 이후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재정착에서 비롯된 각종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던 시대, 따라서 조언과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절실했던 시대였습니다.
이사야서를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을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 아람어로는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세상을 위한 구원사업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이 뜻을 완수하기 위해 그분으로부터 기름으로 축성되고 파견된 존재임을 선언하고 계신 겁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 잡혀간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해방,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기, 한 마디로 은혜로운 해 선포에 당신의 사명이 있음을 천명하십니다. 물론 말씀으로만 이루어지는 선포가 아니라, 온몸을 투신하여 이루어내실 선포를 말합니다. 당신의 구원 사업 일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완성까지 담고 있는 선포입니다.
루카 복음저자는 유다교에서 은혜로운 해, 곧 희년(禧年)이라는 표현을 빌려오면서도, 이 세상에 예수님 오심을 비롯하여,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포함한 지상에서의 구원사업 전체를, 끝으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리라는 약속 일체를 은혜로운 해의 핵심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가슴에 더욱 깊이 새겨집니다.
이 한 해,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따돌림 받고 있는 사람들, 억울하게 묶여 있거나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펼치며 그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도 힘차게 외치면서,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은혜로운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 님
생활묵상 : 보이지 않는 영혼의 때 두 번째 이야기
계속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피부과 의사로 유명한 함익병 원장 선생님이 있습니다. 예전에 예능 쪽으로 나온 걸 조금 봤습니다. 그땐 잘 몰랐는데 사실 저는 2000년 이후로는 티브이를 잘 보지 않아서 유튜브로 어쩌다가 보게 된 의사입니다. 최근에 마산 출신이라는 걸 우연히 부인이 방송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고 검색해 알았습니다. 이 의사도 방송에서 때를 미는 건 피부 건강에는 별로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이건 보통 잘 아는 상식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전에 못살던 시절에 목욕 문화가 좋지 않은 그 영향으로 인해 목욕탕 하면 때를 제거하는 장소마냥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누구나 목욕탕에서 때를 민 경험은 다 있을 겁니다. 목욕탕 가는 주기가 짧은 사람은 민다고 해도 적게 나오지만 주기가 긴 사람일 경우에는 때가 많이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육신의 때는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때수건으로 밀면 나오고 또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때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또 느낄 수도 없기 때문에 사실 더렵혀져도 얼마나 더러운지는 잘 모르게 됩니다. 청소를 시작한 지 며칠째 된 날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한 일주일 정도 했을 때 순간 소름이 올라왔습니다. 만약 우리의 영혼의 때도 이렇다면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났습니다. 이 생각에 이어서 바로 떠오른 생각이 성당과 고해소가 생각났습니다. 성당과 고해소가 마치 육신의 때는 목욕탕에서 없애듯이 영혼의 때를 맑게 해 주는 곳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일단 작은 범주에서 큰 범주로 확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해소에서는 죄를 고백하고 그 죄로 인해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에 대해 하느님과의 소원한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하는 의미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해의 성사라고도 하긴 합니다. 그나마 죄를 짓거나 또 영혼이 혼탁했을 때는 이렇게 성사를 통해서도 나름 어느 정도 깨끗하게 유지를 할 수 있게 되지만 사실 성사생활을 엄밀히 말하면 교회의 가르침대로 정확하게 하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자신이 어떤 죄에 대해서도 스스로가 합리화해서 죄를 무마시키는 것처럼 하니 말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가 발생했을 때 또 이런 게 장기화가 되고 습관성이 되다 보면 나중에는 죄라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되고 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목욕탕 가는 주기가 길면 묵은 때가 엄청 나오듯이 우리 영혼의 때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집안에 청소를 할 때 먼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것은 처음부터 수북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주 미세한 먼지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나중에 그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때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먼지를 청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샤워를 하고 단정하게 꾸미고 미사를 참례하며 하느님을 경배한다고 해도 그게 제대로 된 경배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은 아니지만 상상의 날개를 펴서 하느님이라고 가정을 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얼마나 역겨우실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호세야가 고메르를 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때 호세야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고 해서 그렇다면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나마 인식을 할 수 있는 지표가 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다 양심은 있습니다. 아무리 악인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제가 제 글을 찾아보면 알 수 있는데 언젠가 저를 속이고 돈을 가져갔던 제 상사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7년 전에 있었고 그에 대한 글은 5년 전에 한 번 언급했습니다. 연락을 완전히 끊고 해서 저는 그때도 언급을 했지만 포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연락이 됐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저는 돈 때문에 연락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그 이후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혹시나 해서 한번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내려와 사실 이분이 창원에서 한 때는 영어학원의 대부라고 했던 분이고 본인은 사업적인 수단만 가지고 했고 실제는 부인이 영어를 아주 잘 하셨습니다. 전에 외교부장관 하셨던 강경화 장관님과도 같이 학교를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래서 잠시나마 원장님 아래에 있었던 인연으로 교류를 했는데 그만 어떻게 원장님도 일이 잘 안 돼 결국에는 저한테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했던 사람이 언제부터는 제 번호를 차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처음엔 약간 놀라웠습니다. 보통 전화를 하면 '강원장'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제 이름을 부르는데 이번에는 그냥 흔히 전화를 받는 멘트를 했습니다. 목소리들어보니 당연히 본인이었습니다. 화가 나지만 이성적으로 차분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차라리 저한테 사정이 있어서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는 식으로 용서 아닌 용서를 빌었다면 그냥 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고생을 안 했을 건데 왜 그렇게 거짓말로만 일관을 했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왜 그토록 전화도 차단을 하고 끊고 했는데 지금은 전화를 받는지를 여쭤봤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몹쓸병이 걸려 병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수술을 몇 차례 했는데 할 때마다 생각한 게 있다고 했습니다. 다리에 이상한 병이 왔습니다. 상태를 사진으로 보여줬습니다.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저한테 한 나쁜 짓 때문에 몹쓸 병이 왔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시일은 걸리지만 나중에 제가 혹여라도 연락을 하게 되면 제 돈을 갚을 마음이 있어서 그래야 나중에 자기도 마음이 편할 거라 해서 전화를 차단을 풀었다고 했습니다. 이건 사실 그분의 병과 인과관계가 없지만 그분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기 때문에 자신 속에 있는 최소한의 양심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 겁니다.
처음엔 제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치 화가 나긴 하지만 지금 그분이 했던 행동을 보면 분이 안 풀리겠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런 막다른 골목에 있는 사람에게 제 돈을 갚으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제가 문자로 전했습니다. 제 돈 안 갚아도 되니 하시는 치료나 잘 하시라고 했습니다. 제가 만약 하느님을 안 믿었으면 그래도 화가 나 갚으라고 했을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도 제 성격상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모질게는 하지 못했을 겁니다. 양심이라는 걸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아무리 죄를 짓고 양심이 무디어졌다고 해도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하느님이 저희를 창조하실 때 심어준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양심이 있기 때문에 원래 우리의 영혼의 고향인 본향에서 가졌던 양심으로 회복될 가능성의 여지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간단하게 한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음이 닥칠 것입니다. 육신은 흙으로 가지만 영혼은 하느님께 가게 됩니다. 그때 맑고 고결한 영혼으로 갈 것인지 더럽고 추악한 영혼으로 갈 것인지는 순전히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때 제가 목욕탕을 청소하면서 보게 되는 배수구에 쌓인 때를 보며 역겨워 힘든 것처럼 하느님께 우리의 영혼의 때도 만약 그와 같다면 어떻게 하느님 얼굴을 뵐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고해를 통해 영혼 관리를 잘 해야 되는데 생각보다 이것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또 충분히 죄를 짓고도 마치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것이라고 애써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지경까지 가게 되기 때문에 이런 일련의 행동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영혼도 어쩌면 제가 목욕탕에서 본 그 육신의 더러운 때처럼 우리 영혼의 때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묵상을 많이 해봤습니다.
고해성사는 차치하고 어떻게 하면 그나마 맑고 깨끗한 영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묵상입니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딱 떨어지는 정답은 없습니다만 나름 생각한 것은 죄에 넘어지고 넘어져도 마지막에 하느님을 만날 그때 그 모습을 생각하며 더럽고 역겨운 영혼으로는 가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을 계속 품고 그 마음을 초지일관 변하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하는 자세를 견지하려교 한다면 아무래도 죄를 짓더라도 조금 더 들한 죄를 짓게 되고 또 그렇게 하다 보면 나중에는 죄를 들 짓게 될 것이고 그런 노력을 경주하다 보면 언젠가는 맑은 영혼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생활묵상 : 보이지 않는 영혼의 때에 관한 세 번째 이야기
계속 이어서 또 전하겠습니다. 여탕과 남탕을 비교했을 때 여러 차이가 나는 게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비근한 예로 파우더 룸만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탕에서 나와 마치 주택의 거실과 같은 공간입니다. 솔직히 표현하면 여자분들에겐 죄송하지만 경악을 금치 못할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세세한 이야기는 차마 할 수가 없습니다. 표현을 완곡하게 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공중 기물을 사용하는 걸 보면 완전 미개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사실 최근에 아니더라도 쇼츠 유튜브를 보면 k 한국 문화에 대해 외국인이 극찬하거나 아니면 한국인이 비교 영상을 올려 설명하는 게 많이 있습니다. 그것만 보면 정말 한국은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작년에 목욕탕 청소를 한 경험을 비추어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목욕탕 주인 아주머니에게 한번은 여쭤봤습니다. 왜 여자들은 이렇게 지저분하게 공중 기물을 사용하고 또 정리정돈까지는 아니더라도 엉망으로 사용하는지 사실 저는 조금 충격이었다고 말씀드리리 하시는 말씀이 아마도 이건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거의 비슷할 거라고 말하셨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도 목욕탕을 근 30년 넘게 운영을 해왔지만 대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우연히 여탕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데 신기한 게 탕에서 사용하는 수건이 잘 회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 같으면 사실 기분상 찝찝해서라도 목욕탕에서만 잠시 사용하지 그걸 또 좋지도 않을 걸 왜 더군다나 수건에 재미있는 문구로 인쇄된 게 있는데 '가져가지 마세요' 이런 게 있고 또 00 목욕탕이라고 버젓이 쓰여 있는데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걸 처음에 언급했듯이 전혀 여자분드를 폄훼하려고 하는 의도는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만, 이런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역으로 신앙에 한번 접목해 신앙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게 제 의도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이점 다시 한 번 더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이건 원래 신앙을 떠나서 세상적인 관점에서 인류의 진화와 관계가 있다는 재미있는 연구가 있습니다. 여자는 원래 채집 본능이 남자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이론을 보면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만 소개를 해보면 원래 남자는 사냥을 하고 했기 때문에 목표물을 조준해야 해서 어느 한 곳에만 몰두해야 하는 특성을 가진 반면 여자는 가족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주위를 잘 봐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보다 멀티 기능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도 멀티 기능을 할 수도 있지만 여자보다는 못한 게 사실입니다. 이건 솔직히 맞는 사실입니다. 인정합니다. 남자는 좀처럼 여자만큼은 안 됩니다. 그럼 이게 왜 남자와 여자의 주변 환경 청결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는 건 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건데 그걸 이해를 하게 되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근본 원인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 여자와 남자의 차이 중 하나가 남자보다 단체 공동생활을 잘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 하나는 나름 야무지게 할 수 있는데 이게 무리를 구성할 때는 불협화음이 많이 생기고 또 개인적인 개성을 잘 드러낸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경험을 해봐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예전에 기숙사감을 해봤고 또 사회에서 어떤 모임에서 여자분들만 따로 교육을 해야 하는 그런 일도 있어서 그런 경험에 비추어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이젠 이런 사례를 신앙에 접목해 한번 묵상해보겠습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만약 어떤 공공장소에 처음부터 청결하면 그런 장소를 더럽힐 수가 잘 없게 됩니다. 근데 조금 지저분하게 되면 사람의 심리가 자신이 그런 환경에서는 더럽혀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남녀 불문하고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는 부분일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남자보다 이게 더 강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사우나를 오랫동안 해봐서 압니다. 여탕은 가보지 않아서 모르는데 남자들 같은 경우에는 만약 파우더룸 같은 경우에 주변이 엉망이 되거나 하면 자기가 할 필요도 없는데도 정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여자분들도 그런 분도 있을 수는 있는데 제가 실제 경험을 하지 않아서 단정을 할 수는 없지만 주인 아주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대개 여자분들은 자기 집은 모르겠는데 공중시설은 특히 수건 같은 것은 남이 사용한 것을 만지고 싶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말하지 않아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이런 사실만 가지고도 여자 목욕탕이 지저분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앙에도 정리정돈을 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마치 우리의 신앙도 여자 목욕탕이 조금 청결하지 못한 모습처럼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에서 정리정돈이라는 게 과연 어떤 걸 말하는지는 단순한 예 하나만을 들어보겠습니다. 인간은 나약합니다. 신앙에서 정리정돈은 마치 나무를 분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쓸데없는 가지가 있으면 짤라내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를 어느 정도 자라면 커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자는 좀 괜찮은데 남자는 대개 특이한 스타일이 아니면 머리를 이발하지 않으면 아주 지저분하게 보이게 됩니다.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때 하지 않고 계속 방치를 하게 되면 노숙자의 모습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유투브에서 어떤 나이든 남자 노숙자를 사회복지사인지는 모르지만 이발과 옷 헤어스타일 이런 걸 다 도움을 주고 나중에 변화된 모습을 보니 완전 이 사람이 노숙자였는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사람으로 변신이 된 것을 봤습니다.
우리는 육신 겉모양은 노숙자가 아닐지 모르지만 영혼도 이렇게 관리를 하지 않으면 불을 보듯 뻔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치 노숙자의 모습과도 같은 모습의 영혼으로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정리정돈을 하는 것도 한꺼번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 하나 하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리정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노숙자의 영혼처럼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260108.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 은혜로운 희년에 참 기쁜 소식을
오리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한가롭게 물 위를 떠다닌다.
몸무게에도 불구하고 그게 가능한 것은 꼬리 부분에서 나온 기름이 털 사이를 메워
몸 전체에 물의 침투를 막아 주기에 그렇단다.
이렇게 오리가 물 위를 유유히 떠 있는 게 기름 때문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 세상에 오셨다.
세상에 빠져 있지 않으면서, 그저 은총을 전해 주는 역할을 하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내려주시니, 그분의 영이 내 머리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첫 시작으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희년’이 온 세상 만천하에 성취되었음을 엄중히 선포하신다.
소위 공인으로서의 출사표를 던지신 거다.
사실 듣는 이에게 이미 현실로 된 것이 선포다.
가난하고 눈멀고 억압받는 이들께 미래 언젠가 주어질 소식이 아닌,
듣는 그곳에서 막 이루어 진 것이리라.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 받은 이’로,
믿는 우리 역시 기름부음 받으신 그분 본받아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빛을 주시려는 그분 사명을 분명히 되새겨야만 하고,
그리고 또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할 게다.
이렇게 그분으로 은혜로움이 도래했기에 기쁨으로 한 해 한 해를 지내라는 거다.
매일 매일이 희년이기에 기쁘게 살라는 거다.
당신을 보고 말씀을 ‘들으라.’라는 당부이다.
도울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거다.
그런데도 확신이 없다.
두려움을 놓아야만 할 텐데, 그분 이끄심을 감히 느끼지 못한다.
그분께 의지하면 사라질 그 모든 두려움을 맡겨야만 하는데 그러질 못한다.
사실 신앙인은 ‘복음 선포하는 이’임을 명심해야 할 게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오셨다.
그분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우리이기에
그분의 헌신적인 사랑을 늘 이웃에게 베풀어야만 할 게다.
그러기에 어떻게 살아야 할 가를 자세히 살피며,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이답게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주어지는 이들을 되새겨 보자.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 받는 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들께 질문해 보자.
‘나는 가난한가? 나는 잡혀갔는가?
나는 눈이 멀었는가? 나는 억압받는가?’
우리가 외면한 이들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은총을
정말 진하고 강하게 체험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 덩그러니 홀로 있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토닥여 준다면, 참 고마울 게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한 은총은, 삶에 지친 이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이다.
매사에 어울려 함께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기쁘고 외롭지는 않을 게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믿음의 사람인 우리 모두의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매일이 작은 희년의 시작이리라.
그러기에 매번 성체를 모실 때마다
희년의 은혜로움을 늘 기억하면서 주님을 겸손으로 받아 모시자.
자신이 바뀌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분명 바뀌리라.
정성으로 성체를 내 안에 다소곳이 모시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맞이하며, 그분 은혜로움을 담담히 전하자.
+++++++++++++++++++++++
■ 묵은 것을 쳐내다 / 따뜻한 하루[504]
포도나무는 매년 가지의 마디마다 새순이 돋아나고 다음 해에 새 가지가 자라며,
이렇게 잘 관리하면 포도나무는 그 새 가지에서 매년 첫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새순 열매들이 더 잘 자라도록 묵은 가지를 쳐내는 것입니다.
만약 묵은 것 쳐내지 않으면 새순이 잘 자라지 못해 과실의 맛도 떨어집니다.
묵은 가지를 쳐내야 새순이 돋아나고 새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과 생각도 늘 새롭게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농부가 묵은 가지를 쳐내어 맛있는 열매를 맺게 하듯이,
우리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도약해야 될 것입니다.
거친 진흙으로 된 로마를 물려받아 정돈된 대리석의 로마를 물려준,
로마의 초대황제가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언삼아 말합니다.
“새로운 시간 속에서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 한다.”
예수님도 논쟁 중에 ‘새것과 헌것’에 비유를 드십니다(루카 5,33-39).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들을 찢어 내어, 헌 옷에다 대고는 꿰매지 않는다.
그러면 새 옷을 찢을 뿐, 새 옷에서 찢어 낸 것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또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으면 새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이렇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부대도 터뜨려지지 않고 포도주도 쏟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포도나무는 가지치기를 잘하면 다음 해에 새 순이 나와 자라며,
그 새 가지에서 나온 순에서 맛좋고 탐스런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농부는 새순 나기 전 묵은 가지를 정성을 쳐줍니다.
이처럼 우리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도약하고자 늘 새 마음 가집시다.
감사합니다. ^^+
----------------------------------------------------
================================================
================================================
“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63
1월8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구본용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설교 말씀은 말씀 선포자로 사는 제게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군더더기가 하나 없습니다. 주저리 주저리 사설을 길게 늘어놓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꼭 필요한 말씀, 지극히 절제되고 요약된 말씀, 시의적절한 말씀만 골라서 하시는데, 청중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그 자리에서 회개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강단에 서시자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가 그분 손에 전해졌습니다. 수많은 말씀들 가운데, 한 부분을 꼭 집어 낭독하시는데, 그 짧은 내용 안에 공생활기간 동안 메시아로서 당신께서 수행하셔야 할 사명이 정확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한 구절, 한 마디가 모두 은혜롭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다시 보게 하고, 속박에서 풀어 주고...
성경 봉독이 끝난 후 더 놀라운 모습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 성경 본문을 읽고 나서 주저리주저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10분, 20분 설명을 계속 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딱 한 마디만 덧붙이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본질적으로 차별화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생각과 의중이 담긴 말씀이므로 권위가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분의 말씀은 생명력으로 충만하므로, 듣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 너무나 감지덕지한 일입니다. 그분은 늘 가짜 뉴스, 안 좋은 소식에 익숙해 있는 우리를 위해 기쁜 소식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오셨습니다. 그 소식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이런저런 속박에, 죄의 사슬에 얽매어 살아가는 우리를 해방시키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 이기심, 교만함으로 완전히 멀어 버린 우리 눈을 뜨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
<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을 듣지 못할까?>
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의 신비 안에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얼굴을 세상에 보여주고 계십니까? 오늘 저는 조금 엉뚱한 상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어느 날, 한 미식가가 소문난 맛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집어 들고는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와, 이 메뉴판의 폰트 좀 봐. 고딕체와 명조체의 조화가 절묘하군. 음식 설명은 또 얼마나 문학적인가! '새벽이슬을 머금은 유기농 양상추'라니... 재료의 원산지 표시도 아주 훌륭해."
그는 무려 1시간 동안 메뉴판을 정독하고, 분석하고, 심지어 감명 깊은 구절을 노트에 필사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배를 두드립니다. "아, 배부르다. 정말 훌륭한 식사였어." 하고는 식당을 나가버립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정상으로 보이십니까?
그는 정작 음식은 시키지도 않았고, 한 숟가락도 먹지 않았습니다. 메뉴판은 종이일 뿐, 음식이 아닙니다. 종이를 아무리 씹어 먹어도 배가 부를 리 없지요. 메뉴판을 봤으면 주문을 하고, 음식을 입에 넣고 씹어서 내 피와 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꼭 이 '메뉴판을 먹는 미식가'와 같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천국 잔치의 메뉴판입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 시간에 모여 앉아 감탄합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어원이 참 오묘하네요." "바오로 사도의 문체는 정말 논리적이야." 그렇게 연구하고 밑줄 긋고 필사하지만, 정작 그 말씀이 지시하는 '사랑'과 '용서'라는 음식은 주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혼은 늘 굶주려 있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저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닮지 않았을까?"
한때 우리 가톨릭교회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계시던 시절,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 가톨릭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우리 평신도들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만 할 뿐,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순간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묻지 않고, 내 본능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순이 계속되면 제2의 간디 같은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유학 시절 겪은 일화는 우리에게 뼈아픈 일침을 줍니다.
간디는 성경의 산상수훈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마음까지 먹었습니다. 어느 주일,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 교회에 들어서려 했습니다. 하지만 입구의 안내원이 그를 막아섰습니다. "여기는 당신 같은 유색인종이 들어올 곳이 아니오. 딴 데로 가시오." 그 안내원과 교회 안의 백인들은 매주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훌륭한 '대본'이었지만, 그들은 그 대본대로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엉뚱한 연기를 펼친 것입니다. 간디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예수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당신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조금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본(예수님)은 완벽한데, 배우(신자)가 연기를 엉망으로 하니 관객(세상)이 실망하고 극장을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시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 성경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당신의 삶으로 성취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씀 그 자체이셨기에, 말씀대로 사셨고 말씀대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연기 대본'이 아니라 '연구 논문'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머리는 커졌는데 손발은 움직이지 않는 기형적인 신앙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로데 궁전의 율법 학자들을 보십시오.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유다인의 왕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미카 예언서를 인용하며 정답을 맞혔습니다. "베들레헴입니다!"
그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실 장소를 정확히 연구해 냈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인간 내비게이션'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온 이방인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경배하러 떠났지만, 정답을 알고 있던 박사들은 편안한 궁전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정보'였지, 따라야 할 '지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가장 섬뜩한 사례입니다.
성경은 '구원 교본'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수영에 관한 책을 분석할 시간이 없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육화입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 안에 육화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예수님과 한 몸인 분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거창한 신학적 지식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화를 기억합시다. 당시 중세 신학자들은 성경에 수많은 주석과 해설을 달며 지식을 뽐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한 형제가 성인에게 와서 "저도 시편 주석서를 갖고 싶습니다"라고 청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우리는 복음을 '주석 없이(Sine Glossa)',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한다." 성인에게 성경은 연구해서 지식을 쌓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로 살아내야 할 '삶 그 자체'였습니다.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성당에 들어갔다가 마태오 복음의 한 구절을 듣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는 그 구절을 노트에 적거나, 집에 가서 묵상하거나, 신학적 의미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당 문을 나서자마자 '즉시' 자기 밭을 팔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수백 번 읽고, 수십 번 강론을 듣고, 성경 공부 시간에 붉은색 펜으로 밑줄을
긋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오처럼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구절의 대본을 완벽하게 연기하여
성인이 되었고, 우리는 성경 전체를 달달 외우면서도 관객석에 앉아 팝콘만 먹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경은 소설책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대본(Script)'입니다. 하느님 감독님은 이미 "레디, 액션!"을 외치셨습니다. 카메라 불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배우인 우리가 무대 위에서 대사만 분석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신년 하례식 미사에서 수원교구장 주교님은 올 해의 말씀으로 “원수를 사랑하여라.”를 뽑았다고
하셨습니다. 당신도 놀랐지만, 그 말씀을 한 해 동안 실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매년 새로운 말씀을 내 안에서 육화시킨다면 시간인 지날수록 그리스도를 닮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올 한 해, 성경 전체를 다 알려고 욕심내지 맙시다. 안토니오 성인처럼, 딱 '한 구절'이라도 좋으니
정해봅시다. "화가 나더라도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이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내밀라"는 말씀이든, 하나를 정해서 그것을 내 삶으로 '성취'시켜 봅시다.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아낼 때, 메뉴판을 먹던 미식가에서 진짜 음식을 먹는 건강한 신앙인으로,
수영 교본을 덮고 물살을 가르는 구조자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우리를 보고 다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용기"아, 저 사람들을 보니 정말 예수가 살아있구나." 아멘!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하느님께서는 공평하게 하루에 24시간을 주셨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의미 있는 일, 소중한 일을 먼저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의미 없는 일, 필요 없는 일을 먼저 합니다. 하루는 큰 차이가 없지만,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지나면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소방관에게 소중한 일은 ‘화재’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소방관이 불이 났는데도 다른 일을 한다면 소방관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환경미화원에게 소중한 일은 쓰레기를 치우는 일입니다. 환경미화원이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역시 환경미화원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오후 1시 30분에 ‘운동치료’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성체’ 부탁이 있었습니다. 제게 소중한 일은 건강을 위해서 운동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소중한 일은 지금 몸이 불편한 분에게 ‘성체’를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이 하루나 일주일이면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한 달이나 일 년을 넘게 되면 표시가 나게 됩니다.
주변을 보면 돈이 삶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의 정책도 예산이 중요합니다. 본당에서도 재정이 중요합니다. 매달 재정평의회가 있습니다. 수입과 지출을 보면서 수입이 지출보다 많으면 기분이 좋다가도 지출이 수입보다 많으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가정에서도 돈은 꼭 필요합니다. 저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원망한 적도 있습니다. 29년 전에 한국에는 IMF가 있었고, 저와 저의 가정에도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가족들은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양원으로 미사를 가거나, 가정으로 봉성체를 가면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주님을 모시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100세 되신 어르신이 주님을 모시는데 마치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은 결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 얼마나 기도했는지가 중요합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있다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아닐 것입니다. 가정에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성사의 열정이 식어가기 때문에, 복음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멀리 떨어진 가족들에게 안부 전화하는 것, 어려운 이웃의 짐을 들어 주는 것, 처음 사제서품을 받은 그 열정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파도가 밀려온다고, 사나운 파도가 친다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쩌면 그 파도를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2026년 우리의 삶에도 많은 파도가 밀려올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고, 때로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웃과 헤어지기도 하고, 사업이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던 남편이 별 이유 없이 성당에 나가지 않을 때도 있고, 성당에는 가지 않으면서 결혼은 성당에서 하고 싶다는 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파도는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물속에서 파도를 즐기는 물고기처럼 이왕 피할 수 없다면, 우리들 또한 삶의 파도를 받아들이고, 그 파도 속에 녹아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제 단순히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만이 형제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묶인 이, 감옥에 갇힌 이, 억울한 이, 절망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형제요 자매라고 말합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복음은 먼 미래에 이루어질 무엇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삶 안에서 실현되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도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합니]다.”(4,22)
그런데 마치 복음 선포처럼 보이지만 조심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의 선동이 한 예입니다. 주님의 복음 선포는 우리의 삶을 바꾸고 회심에 이르게 합니다. 또한 복음은,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그것을 실천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거짓 선동은 이해관계에 놓인 경우가 많고, 모든 사람을 위한 주장인 듯 보이지만 대부분 소수의 이익을 위한 주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빌려 과장된 목적을 주장하거나, 그것이 마치 주님의 뜻인 것처럼 복음을 이용합니다.
우리는 참된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힘과 위로를 얻고 그 말씀 안에서 사랑을 전하는 참된 선포자로 살아갑시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14-22: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구절을 낭독하신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이것은 메시아에 관한 모든 약속과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드러내는 선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물리치신 뒤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오셨다. 성 치프리아노는 “성령이 머무르시지 않으면 누구도 그리스도를 충만히 따를 수 없다.”(De Oratione Dominica, 9)고 했다. 곧, 예수님의 사명은 단순한 인간적 노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우리도 말씀을 살고 실천하려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물질적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자신을 가리킨다.”(Enarrationes in Psalmos 70,1)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바로 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죄와 악의 사슬에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며, 눈먼 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가 “잡혀 있는 자들”이고 “눈먼 자들”임을 깨닫게 한다. 예수님 없이는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고, 참된 시야를 가질 수 없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님의 이 말씀을 주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먼 미래를 말하지 않으셨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오늘 이루어졌다고 하셨다. 말씀은 단순히 약속이 아니라 현실이며, 우리 눈앞에서 성취된 것이다.”(Homilia in Matthaeum 15) 하느님의 말씀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현실이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할 때 “오늘” 성경은 완성된다.
오리게네스는 “복음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펼치셨듯이, 교회는 세상 안에서 복음을 펼친다”(Commentarii in Lucam, fr. 32)라고 했다. 오늘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읽고 ‘오늘 이루어졌다.’ 선포하신 것처럼, 교회는 매 순간 성경이 지금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읽으시고 “오늘 이루어졌다.” 하셨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고, 묶여 있는 이들을 해방시키며,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빛으로 인도할 때, 말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오늘 이 말씀이 너희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이제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완성해 나가야 할 차례인 것이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오늘>
루카 4,14-22ㄱ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늘 오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ㄴ)
임께서 늘 오늘이시니
나도 따라 늘 오늘입니다
임의 믿음 늘 오늘이니
나의 믿음 늘 오늘입니다
임의 희망 늘 오늘이니
나의 희망 늘 오늘입니다
임의 사랑 늘 오늘이니
나의 사랑 늘 오늘입니다
임의 기쁨 늘 오늘이니
나의 기쁨 늘 오늘입니다
임의 해방 늘 오늘이니
나의 해방 늘 오늘입니다
임의 자유 늘 오늘이니
나의 자유 늘 오늘입니다
임의 평화 늘 오늘이니
나의 평화 늘 오늘입니다
임의 살림 늘 오늘이니
나의 살림 늘 오늘입니다
임께서 늘 오늘이시니
나도 따라 늘 오늘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든다. 향기가 아니라 냄새가 나면 다 떠나게 된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만한 향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힘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자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사실 갈릴래아 지역은 유다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이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자리가 되었다. 빛나는 존재, 한 사람이 중요하다.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느헤미야와 에즈라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일대 종교 부흥을 일으키며 율법의 왕국을 건설하였고, 모든 종교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정해졌다. 유다인들은 적어도 일 년에 세 번 제사에 참여해야 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성전이었으나 일상생활에서의 중심은 회당이었다.
회당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말씀의 전례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전통대로 회당에 가시어 성경을 읽으시고 설명하셨다. 오늘 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빌려 묘사하고 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2).
이사야 예언자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사명을 받았다. 그가 전하는 구세주는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성취한다. 그는 구원자이며 승리를 알리는 심부름꾼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구절을 읽으신 후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유다인들의 거룩한 관습과 약속을 담은 성경 말씀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선언이다.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고, 구세주가 나타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된다.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고 이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믿음은 말씀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보다 날카롭습니다”(히브4,12). 그러므로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오늘 여기”에서 실현된다. 그리고는 그 말씀은 영원하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1베드 1,24-25)
구원의 말씀은 듣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새롭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듣고 행하는 가운데 구원을 이루고 기뻐하길 희망한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사랑합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 없는 복음 실천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카 4,14-22ㄱ)
1) 여기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희년 선포’와 같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희년’을 선포하신 것은,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희년’에 대해서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레위 25,8-10)
‘희년’은 모든 것이 원상 복구되는 ‘은총의 해’입니다. 모든 빚이 탕감되고, 남에게 넘어간 소유지를 되찾게 됩니다. 규정만 보면 참으로 ‘기쁨의 해’인데,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희년이 가까워질수록 이자율이 높아지다가 희년 직전에는 돈을 꿀 수가 없었습니다. 희년이 되면 다 탕감해 주어야 하니까, 아예 돈을 꾸어 주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명기에는, 일곱 해마다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는 율법이 있습니다.(신명 15,1).>
그러니 급하게 돈을 빌려야 할 사정이 생긴 사람들에게는, 특히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희년이 오히려 ‘고통의 해’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대로, 희년이 되면 빚이 모두 탕감될 것이기 때문에, 빚을 갚지 않고 희년 때까지 버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부작용들 때문에 희년 제도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다가 결국 유명무실한 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가끔 선포하는 희년의 모습을 보면, ‘실질적인 기쁨’은 없고, 구호로만 그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2) 희년의 그런 부작용은, 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이기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는데, 인간들은 사랑보다 돈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 이기심과 탐욕을 없애는 방법은 ‘회개’뿐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시대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 시대’가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은총의 시대’가 되려면,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 없는 복음 실천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메시아 시대’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시대’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메시아 시대를 맞이할 자격이 없습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3) 예수님은 인간들을 ‘죄와 죽음’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일은 감방의 ‘자물쇠를 열어 주는 것까지만’이고, 감방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죄와 죽음’의 지배와 억압 아래에서 그냥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예수님도 그를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감방에서 강제로 끌어내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라자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신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라자로를 데리고 나오신 것이 아니라, 무덤 밖에 계시면서, 라자로에게 나오라는 명령만 하셨습니다.(요한 11,43) 죽은 라자로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셨지만,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간 것은 라자로 자신이 했습니다. 살기를 원하면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회개’는 살기 위한 노력입니다. ‘죄와 죽음의 억압’은 ‘나의 내부’에도 있습니다. 이기심, 탐욕, 집착, 헛된 욕망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한 번 하고 끝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죄를 뉘우치는 것만 회개인 것은 아니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따라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란 원래 없습니다.
=====================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 선포는 그 자체로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고유한 사명이고, 그 나라의 백성들은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1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모든 이에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 선포에 따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이기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려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힘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이 믿음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얻게 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
[부산교구 김창환 다니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활동>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성령의 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홀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늘 하느님과 함께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장차 예수님께서 어떤 활동을 하실 것인지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어른이 된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회당에 다니셨습니다. 회당에서는 기도를 바치고, 일반적으로 율법과 예언서들을 읽고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명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육을 받은 공동체 구성원들이나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방문객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받아들고, 이사야서 61장 1,2절과 35장 5절과 58장 6절을 섞어서 읽고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대목은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양살이에서 돌아왔어도 가련한 처지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어려운 생활을 개선하고 복원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왕들이나 사제들처럼 올리브유로 기름 부음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기름 부음을 받으시면서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루카가 복음을 선포하는 대상자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통치자들의 야욕으로 궁핍해지고 허약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처지는 한마디로 소외입니다. 즉 그런 사람들은 자유를 상실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안팎으로 끊임없이 짓눌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명은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가져다 주고, 사람들을 소외의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구출해 내고 자유롭게 하는 활동을 펼치시는 데 있습니다.
‘은총의 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50년 마다 경축한 희년을 말합니다. 희년이 제정된 목적은, 어떤 이유로든 빚을 지게 되어 가족의 소유와 자유까지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떳떳한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희년에는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권리를 무상으로 되찾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을 읽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제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활동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룩하신 일들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주시는 그분의 모습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 또한 이웃을 사랑하며 특히 소외되고 가난하며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참된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
[부산교구 최정훈 스테파노 신부님]
새로운 한해가 시작된지 벌써 몇일이 지나버렸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신 결심들이 모두 잘 이루어지고 있으신지요. 혹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벌써 그 약속들을 깨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우리자신에게 한 약속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 약속들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면 합니다.
어떤 사람이 겪었던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릴까합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그는 사업에 실패한 후, 57세나 된 나이에 일거리를 찾아 타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시내의 빌딩 건축현장에서 일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동료들과 뒷골목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빌딩 거리에 있는 작지만 고급스런 식당이었습니다. 식당에 들어선 순간, 그들은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담한 식당은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그들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홀에 자리가 없어서 방 안으로 들어갔는데, 종업원은 재빨리 흙투성이인 그들의 신발을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 버렸습니다.
기가 죽어 마치 죄지은 사람들처럼 고개를 떨구고 머뭇거리고 있던 그들 앞으로 주문한 식사가 나왔습니다. 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회사원 차림의 여성이 일어서더니 식탁 위 물주전자의 물을 따라 그들 자리에 놓아주며, 살짝 수줍은 듯 미소 지으며 “물 드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매일같이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오던 그의 마음을 얼마나 따스하게 어루만져준 친절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1963년 6월에 ‘가능한 친절이라면 모두 함께’라는 표어로 시작한 “작은 친절 운동”의 이야기 중의 한 글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선 고향인 나자렛에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모습을 들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적혀 있는 말씀을 읽으시고 그 말씀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 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2000년 전 주님께서 선포하신 이 은총의 말씀이 우리들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아마 그렇지 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선 우리들에게 은총을 주셨는데, 우리들의 삶은 아직까지 은총보다는 미움과 절망이 가득한 듯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세상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에서처럼 작은 친절 하나 하나가 모여서 주님께서 선포하신 은총과 사랑이 충만해 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작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작은 사랑이 모여 주님께선 선포하신 은총의 해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을 만나면서 배웁니다. 선생님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나의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스승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울 것이 없다면서 부정적으로만 보게 됩니다.
학창 시절, 성적이 좋았던 과목을 보면 “잘 가르치신다.”라고 내가 인정한 분의 과목이었습니다. “진짜 못 가르치신다.”라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과목은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도움이 될까요? 전혀 될 수 없습니다.
배울 것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텔레비전, 라디오, 책 등 어디에나 스승님이 계십니다.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제일 많이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사람’에서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수도 생활 장소(‘라 베르다’)로 늘 사람이 있는 마을이 보이는 곳을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고 또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만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실패해서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실패한 것입니다. ‘인생은 넘어졌을 때가 아니라, 일어서는 것을 포기했을 때 실패하는 것이다.’(박용후)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패는 만남을 포기했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이 만남만큼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율법(모세오경)과 예언서를 봉독했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건네진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펼쳐 읽으십니다. 바로 당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리고 자리에 앉으신 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오늘’은 단순히 시간적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때가 지금 예수님을 통해 왔다는 ‘종말론적인 지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으로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바로 ‘오늘’ 여기에서 하느님의 은혜로운 해가 시작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사랑 안에서 생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만남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경 말씀이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사실>
우리는 여전히 주님 공현 후 주간 안에서 주님의 현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지난 월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에서의 공생활의 시작은 그 '하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주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가 선포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마치, 창조 때 하느님께서 “~ (라고 말씀)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9.11.15.24.30)라고 하시며 말씀을 이루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말씀을 이루시는 구원자’로 당신을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 말씀이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곧 ‘듣는 행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듣는 행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이 사실은 ‘들을 때 듣는 자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곧 말씀을 영접하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이루는 길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진리를 행하지 않으면서는 진리에 나아갈 수 없는 까닭입니다. 곧 진리를 이루지 않고는 진리에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길은 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랑을 실행하지 않고는 사랑의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가능한 까닭은 이미 그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9-21) 그래서 우리는 예물기도를 이렇게 바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침으로써 저희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게 됩니다. 그러기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 받은 것’, 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이미 받은 말씀’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이미 받은 사랑’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바로 그 안에서 현현하실 것입니다. 아멘.
----------------
<오늘의 말 · 샘 기도>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
제가 들은 말씀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말씀이 저를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말씀을 이루소서.
굳게 닫힌 제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와 굳은 심장을 녹이소서.
이기심과 자애심에 묶인 저를 해방하소서.
제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들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은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이것이 요즘 요한의 서간을 읽으며 내내 성찰하게 되는 주제인데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느님 사랑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면 하느님을 사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물론 사랑받는지도 모르고 부모의 사랑을 늘 받았고 우리도 사랑한다는 생각 없이 늘 부모를 사랑했지만 우리가 부모를 언제 사랑하기 시작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부모를 사랑해야겠다고 처음 마음먹게 된 것은 처음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깨닫게 된 다음부터지요.
저의 경우는 중학교 때입니다. 가난했기에 20리 넘는 길을 가능한 한 걸어서 통학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 너무 더워 버스를 타고 하교했습니다. 그런데 오는 길에 창밖을 보니 어머니가 그 더위에 호박이니 오이 같은 것이 담긴 광주리를 이고 걸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제가 버스를 타고 다닌 것이지요.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어머니는 그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그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 길을 걸어서 가시네, 결국 어머니가 나를 머리에 이고서 통학시키시는 것이네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어머니를 사랑해드려야지, 적어도 나 때문에 힘 드시는 일이 더 이상 없게 해야지 하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깨닫는 것, 사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 그리고 받은 사랑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 이것이 사랑을 실제로 살아갈 때 거치는 단계요 순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를 사랑하면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하듯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한다고 얘기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자녀인 형제들이 생겼기에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어쨌거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하느님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오늘 우리는 서간에서 가르침 받고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려는 오늘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희년의 삶을 살자!>
오늘 복음(루카 4,14-22ㄱ)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말씀'과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분명한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61,1-2)를 펴시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것이 바로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며,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참기쁨과 참자유와 참해방을 주시기 위해, 육(사람)이 되셨고, 땀을 흘리셨고, 수난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매일 드리는 미사를 통해 이 사랑을 확인하고 있고, 이 사랑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뻐해야 하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고,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참기쁨과 참자유와 참해방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19-20)
예수님 방식대로 서로 사랑합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선물이 되어주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됩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은총이 머무는
시간은 오늘이며,
말씀은 오늘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경청은 말씀이
머무를 공간이고,
성취는 말씀이
삶이 되었음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오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일상이 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참된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이 자리에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과 만난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말씀은 오늘을 떠나면
단순한 지식이 되고,
오늘은 말씀 없이
참된 방향을 잃습니다.
말씀은 오늘을 통해
현실이 되고,
우리의 오늘은
말씀을 통해
구원이 됩니다.
말씀을 만난 오늘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이 하루는
비교와 평가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가
존중받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은 소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은총으로 더욱
충만해지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한번 이루어진
말씀은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며
다른 오늘을 향해
끊임없이
열려 나갑니다.
오늘을
이끌어가는
말씀을 진실로
믿습니다.
말씀은 오늘,
우리가 듣고
살아내는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믿음은
삶이 되고,
오늘은 은총이
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