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5: 1-5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1. 본문 1절은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입니다.
1) 이 장에서 모세는 간략하게 세상의 창조와 홍수와의 사이에 게재되어 있는 시간적인 간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의 역사에 관해서 몇 가지 부분을 약간씩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비록 우리가 기록되지 않은 위대하고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사건들을 남기고 있는 성령의 계획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전혀 무관심하고 조용하게 지나쳐 버리고 있는 많은 일들에 대하여 다시 돌이켜 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얄팍한 공상에서 제멋대로 조작하여 만든 망상들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자들도 이런 제목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 힘을 몰두시키는 계기로 삼는 데에 절대로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주석이 없고 겉으로 보기에 무미건조한 해설에서 그 시대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그것들을 앞에 게재된 순서에 따라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어에 의하면 ‘계보’라는 말은 ‘목록’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 ‘자손’이라는 말은 인종의 계속적인 계승이나 지속적인 후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2) 더 나아가서 이 계보가 작성된 의도는 무수한, 아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비록 수적으로 적기는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만을 섬기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적은 수효의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보호를 받으면서 놀라웁게 보존되어 하나님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고, 또한 교회의 씨가 완전히 말살되지 않게 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모세는 여기서 이 자손들을 창조의 일에만 국한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작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과 후손인 나머지 인류들과의 사이에서 차이점을 동시에 구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조상들을 특이한 방법으로 생명을 부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이전에 있던 그루터기에서 솟아 나온 것이며 부모들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모세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을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곧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되풀이하여 기록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그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의 탁월성과 숭고성이 이 한번으로는 충분하게 기억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위치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굉장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치 아들에게는 자기 아버지의 형상이 있는 것과 같이 아담이 창조주를 닮은 모양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존경해야 할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더 차원 높은 숭고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인간에게 인(印)을 치심으로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공의의 살아있는 형상(形象)이 되게 하신 것보다 더 인간들을 관대하게 대해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한 악한 자들의 중상을 배격하는 데에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악한 잘못에 대한 책임을 모두 그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전가시키는 행동을 즐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이탈되는 잘못을 범함으로 지금 그들이 지니고 있는 상태보다는 달리 원래는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선포되지 않았다면 그런 중상을 그치지 않고 계속할 그들입니다.
2. 본문 2절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입니다.
이 구절은 결혼의 신성한 결속에 대하여 찬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불가분의 연합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오직 하나를 언급하였을 때는 즉시 그 뒤에 한 이름 아래에 두 사람을 포함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전혀 차별 없이 공통된 이름을 두 사람에게 주어서 후손들이 자기들의 최초의 조상들이 한 사람으로 불리어졌다는 것을 보고 서로간의 관계를 아끼는 것을 보다 은밀하게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오직 아담 또는 남자라고 불리어지고 있다는 유대인들의 근거 없는 추리는 창조의 역사로서는 배척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결혼이 설정된 후에 성경이 남편과 아내가 마치 한 사람과 같았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가 그들 두 사람에게 내려지는 복을 기록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런 복을 내려주신 하나님의 계속적인 놀라운 은총을 관찰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성과 사악성으로 인하여 어느 면에서는 방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본문 3절은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입니다.
앞에서 모세가 오직 셋의 계열을 통하여 아담의 자손을 따라 내려가며 살펴봄으로써 교회의 계승을 우리가 생각해 보도록 제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셋이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가운데서 그는 부분적으로 우리 성품의 최초의 기원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성품이 부패하고 오염된 것을 여기서 주목해 볼 만합니다. 아담의 타락함으로 위축된 그 성품이 계속하여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정직성을 그대로 지탱하고 있다면 자기의 모든 자녀들에게 자기가 받은 것을 그대로 물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읽게 되는 사실은 나머지와 똑같이 셋도 부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한 자로서 다른 자녀를 낳을 수가 없고 오직 자기 자신과 똑 같은 자녀만을 낳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누가 셋이 자기의 가족과 함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선택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사실을 반대하고 나선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아주 쉽고 분명합니다.
이를테면 초자연적인 치료는 육신적인 세대가 죄로 부패하게 되는 데에 참여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의하여 씻은 죄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성령의 은혜로 새로워졌던 것입니다. 거룩한 족장의 이런 슬픈 예가 우리에게 우리의 비참상을 통탄하도록 큰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4. 본문 4절은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 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입니다.
여기서 기록되고 있는 많은 연대들 가운데서 우리는 특별히 족장들이 함께 살았던 기간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연속되는 6세대를 통하여 셋의 가족이 큰 백성이 되었을 때에 아담의 소리가 날마다 다시 울려서 창조와 타락과 인간의 형벌에 대하여 새롭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징계를 받은 후에도 남아있는 구원의 소망을 증거하며 모든 사람이 교훈을 받도록 하나님의 심판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 후에는 그의 아들들이 마치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기는 것처럼 그들이 배운 것을 후손들에게 전달해 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교훈이 훨씬 더 큰 효과를 지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만이 이 모든 일들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고집이 너무도 엄청나고 심지어는 괴물스러웠기 때문에 인류의 조그만한 일부라도 하나님을 순종하고 경외하는 것을 그대로 지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5. 본문 5절은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입니다.
각 족장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이 구절은 절대로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우리에게 죽음이란 인간에게 헛되게 선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면에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인간에게 숙명지어진 그 저주에 우리는 지금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경고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비참한 상태를 상고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아니 적어도 우리 안에서 그 형상이 지워졌으니 우리는 이제 간신히 일말의 생명의 그림자만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나마도 가냘프게 남아있는 생명에서도 떨어져 죽음에로 줄달음치고 있다는 사실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세대를 묘사하고 있는 표현에서 얼핏으로나마 계속적이며 면면히 흘러내리고 있는 하나님의 복수의 과정을 보아두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면에서는 건망증이 있으신 분으로 상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빈번하게 우리의 목전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불멸성에 대한 꿈(환상)에만 치우쳐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