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용수보살약찬게
용수보살은 누구인가?
용수보살약찬게龍樹菩薩略纂偈의 약찬略纂이라는 말은 <화엄경> 내용이 너무나 방대하므로 그것을 요약해서 찬술했다는 말이고, 게偈는 게송, 시나 노래를 말합니다. 그래서 화엄경 약찬게란 <화엄경>의 내용을 가장 적당하게 요약하고 찬술한 게송이란 뜻으로, 용수보살이 이렇게 약찬 했다는 설도 있고 용수보살의 증명으로 간략히 편찬한 게송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용수보살(150~250)은 용수 스님의 격상된 호칭입니다. 그 시대 대승불교를 일으킨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의 큰 서원을 세우고 궁극에 부처를 이루겠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용수 스님은 브라만 출신의 남인도 사람으로서 스승 가비마라존자의 문하에서 부처님의 14대 법맥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대선지식입니다.
그 당시 인도는 소승불교가 성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불교, 그리고 그로부터 100년까지의 불교를 근본불교라 하는데 그 이후 300~400년이 지난 기간 동안 불교는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소승적인 종교관을 갖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바로 그때, 불교에 대한 심오한 각성, 근본불교에 대한 그리움으로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혁명의 주체가 바로 용수보살입니다. 용수보살은 불교를 중흥시킨 최고의 논사論師요, 대혁명가입니다. 용수보살은 소승불교를 다시 대승불교로 끌어올려 체계적으로 완성했기에 ‘대승의 아버지’로, 모든 종파에서 다투어 용수보살을 조사라고 추앙함으로써 ‘팔종八宗의 조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초기 근본불교를 이 사바세계에 펼친 장본인이며 근본불교를 이 땅에 흥왕시킨 큰 일꾼이며 대혁명가이었기에 신성시하여 ‘제2의 석가모니’라는 극존極尊의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용수보살은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다음과 같이 설합니다.
假使頂戴經塵劫 가사정대경진겁
身爲床座遍三千 신위상좌편삼천
若不傳法度衆生 약부전법도중생
畢竟無能報恩者 필경무능보은자
가사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수없는 세월 지내며
몸이 의자가 되어 삼천세계를 두루하여도
만약 법을 전하여 이웃을 제도하지 못하면
끝내 부처님의 은혜는 갚을 길 없네.
가사라는 말은 가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라고 했지요. 옛날에는 어떤 물건을 머리에 얹을 때 충격을 줄여주고 균형도 잡아주는 동그란 모양의 ‘따배이’를 사용했습니다. 표준말로는 ‘똬리’라고 하지요. 이 따배이 위에 부처님을 이고 다니고, 부처님을 지게에 지고 다닌다 하더라도 만약 법을 전하여 이웃을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 포교하지 못하면 끝내 부처님 은혜는 갚을 길 없다고 했습니다. 아주 대단한 말씀입니다.
포교는 자비의 실천이며 보살행이며 게다가 부처님 은혜를 갚는 일입니다. 모두 사명의식을 갖고 포교를 하여 부처님 세계를 장엄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승보살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대승과 소승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대승은 큰 흐름을 타는 것, 나도 좋고 모두가 좋은, 범위가 큰 것을 말합니다. 큰 대大자 아닙니까! 그래서 보다 크게 생각하고 크게 행동하는 스케일이 큰 보살을 대승보살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말하는 그대로입니다. 반면에 소승은 비가 오면 자기 신발만 쏙 들여놓듯 자기 것만 챙기고 나 혼자만의 수행을 추구하는, 대승의 상대적 개념입니다. 우리 한국불교의 많은 불자가 아직도 소승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아주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승보살이 되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 원을 크게 세워야 합니다.
두 번째, 마음을 넓게 써야 합니다.
세 번째, 여여如如해야 합니다.
네 번째,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 포교해야 합니다.
이것이 대승보살의 다섯 가지 마음가짐입니다.
첫 번째, 원을 크게 세우라고 했습니다. 사실, 원이 작은 사람은 기도할 것도 없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원이 큰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왕 낳은 자식, 좀 더 훌륭하고 큰 그릇으로 키워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도 원입니다. 원을 크게, 희망을 크게 품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마음을 넓게 쓰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자비의 실천입니다. 웬만한 것은 용서하고 그냥 지나가는 걸 말합니다.
氣山心海 기산심해
원을 세우기는 산과 같이 높이 하고, 중생을 보살피는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게 하라.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아,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생각해주고 새벽 두 시에 들어오더라도 ‘날 밤을 안 새우니 다행이야.’라고 이해해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마음씀씀이를 크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여여如如하라고 했습니다. 늘 한결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촐랑대고 까불거리고 이랬다저랬다 변덕 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여여해라. 여여하다.’라는 말을 많이 쓰긴 합니다만 대부분 바깥 경계에 가차 없이 흔들리다 보니 대승보살이 못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도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음이 웬만해서는 안 움직이는 것, 그것이 여여부동이지요. 대승보살은 좀 진득한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萬里風來山不動 만리풍래산부동
千年水積海無量 천년수적해무량
만 리의 바람이 불어와도 산은 끄떡하지 않고
천년 동안 물이 쌓여도 바다는 항상 그대로다.
‘만 리 밖의 바람이 불어와도 산은 끄떡하지 않고’, 절대 가벼이 움직이지 않고, 절대 낙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천 년 동안 물이 쌓여도 바다는 항상 그대로다.’ 더러운 물이 얼마나 많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겠습니까? 그렇지만 바다는 늘 그대로입니다. 더럽고 깨끗한 경지를 벗어나 모든 것을 수용하여 자연적으로 정화해 버립니다. 그처럼 여여한 불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다음, 네 번째는 현실에 충실하라고 했습니다. 현실을 떠나서 다른 세상을 구한다는 것은 빈말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숙제, 주어진 일들에 대해 절대 회피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게 자신이 지어서 자신이 받는 것이므로 그것을 직시하고 현실적으로 타개하고, 슬기롭게 잘 헤쳐 나가는 것이 대승보살이 해야 할 일입니다. 절대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절대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충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因地而倒 인지이도 因地而起 인지이기
땅으로 인해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하나니.
내가 지금 땅에 드러눕게 되었어요. 땅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땅 때문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현실이 고통스럽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떠나서 뭘 구하려고 하는 것은 공중누각空中樓閣이고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땅 때문에 넘어졌다면 땅을 짚고 일어날 일, 절대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공연한 망상이나 요행수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섯 번째, 포교해야 합니다. 성도成道 후 부처님의 생애는 전법傳法, 포교布敎와 교화敎化로 순일純一하게 일관됩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을 닮아야 합니다. 중생구제를 서원誓願한 대승보살이라면 부처님의 철저한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해야 합니다. 반드시 포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수보살이 <대지도론>에서 ‘포교는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설파說破한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포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일이 포교라하니 이보다 더 간곡한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던 용수보살이었으므로 대승불교의 체계적인 기틀을 마련하는 업적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대승보살의 다섯 가지 생활 자세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원을 크게 세워라.
두 번째, 마음을 넓게 쓰라.
세 번째, 여여如如하라.
네 번째, 현실에 충실하라.
다섯 번째, 포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