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을 내밀고
립스틱을 바른다
바를수록 지워지는
립스틱의 은밀함은
스스로 지워지는 것인가
다른 입술로 옮겨가는 것인가
따지고 보면
이것은 순전히 너의 일이고
나의 일이 아닐 테지만
빨강 위에 빨강을 덧바르는 일
내가 아침이면 너도 아침이다
아침을 네 입술에 올려놓으면
밑줄 친 아침이 길어진다
아무리 덧발라도 우린 멀어지겠지
따지고 보면
이것도 순전히 너의 일이고
나의 일이 아닐 테지만
여자들이
빨강을 물고 지나간다
오렌지, 망고, 보테니칼, 워터 프루프,
물렁거리는 빨강, 걸어 다니는 빨강,
입술이 몰려다닌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순전히 너의 취향일 테지만
달력 속 타히티 여인들이
두꺼운 입술을 내민다
원색의 질감 위로
빨강이 녹아 흐른다
늙지도 않는 빨강
도톰한 빨강 위에서 춤추는 숫자들
여인들 머리에 꽂은
꽃이 빨강으로 흔들린다
해변에 선 석상들은
한 줄로 서서 서쪽만 바라보는데
바위 속 얼굴 위로 번지는
석양의 립스틱은 생각만큼 달콤할까
여자가 거울 속에 앉아 립스틱을 지우는 동안
돌아선 네 등은 석상처럼 단단해졌다
지금쯤
석상은 그림자까지 지웠을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순전히 거울 속에서
지워져 가는 여자들의 입술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