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하다 일본 웹사이트에서 찾은 판갑입니다.
장폭비가 작고 찰갑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사각형갑편들을 가죽끈으로 엮은 갑옷입니다.
사용된 시기는 4중반~5세기초 무렵으로 추정합니다.
현재 잔존유물은 모두 일본에 있고, 국내 출토 사례는 제가 가진 지식으론 없습니다.
다른일로 논문 뒤지다 확인해 보니 1996년에 복천동 고분군 64호 무덤에서 4세기대 방형판갑 한 개체가 출토된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다만 아직 복원이 이뤄지지 않아 형태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출토 지역은 국내에는 부산복천동 64호, 일본에서는 나라, 오사카, 후쿠오카, 시가, 교토, 이시카와 등 이라고 합니다.
일본내에서는 기원에 대해 확실한 결론(외부에서 유입?, 외부영향을 받아 개발? 스스로개발?)은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결국 그냥 이런 갑옷도 있었구나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지판의 형태가 다른 점을 제외하면 제작방식이나 전체적인 형태는 종장판갑과(종장혁결판갑-가죽끈으로 엮은종장판갑) 비슷한 유물이고 만들어진 시기도 비슷하여 종장판갑과 같은 계통이 아닐까 추정할 뿐 입니다.
그런데 3D 복원 사이트를 운영하는 나카타씨는 중국지역 영향으로 백제에서 개발되어 일본으로 건너왔을 것 이라 이야기 하네요 -_-;
그렇다고 근거로 내놓는 고분들은 다른 판갑이나 찰갑이 나온 지역이고 그나마 비슷하게 생긴 갑주유물은게 미사리 유적이나 죽막동 유적에서 나온 찰갑편인데 이 유적들은 모르는 것 같고, 게다가 이 유물들은 무산 호곡유적 찰갑이나, 시베리아의 찰갑이나 외중식 스케일아머와 비슷한데...;;
아무래도 아마추어인걸 감안해서 그냥 개인 의견이려니 하고 넘어가렵니다.
오히려 제 생각에는 신라와 싸우면서 종장판갑에 영향을 받거나 아니면 가야의 종장판갑을 보고 철과 기술을 들여와서 종장판갑을 바탕으로 일본내에서 만든 것 같습니다.
2005년 제1회 부산광역시립복천박물관 학술발표대회에서 '동래 복천동고분군의 갑주와 마구'를 발표한 신경철 선생의 주장이
"(중략)이와 같이 소찰주․방형판혁철단갑은 그 원류가 중국에 있으며, 복천동 64호분의 단갑도 이러한 구도에서 이해할 것일 것이다. 따라서 4세기부터 한반도남부에는 북방―가야 동부(경주를 포함한다)와 중국―백제(가야 서부포함?) 계보의 갑주 문화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 한편 4세기대의 일본갑주는 아직 미성숙단계이기는 하나 한반도 남부의 이러한 2계보의 갑주들이 혼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소찰투구 등 중국 갑주문화의 영향으로 생긴 판갑이라니..
위의 나카타씨가 홈피에 쓴 내용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네요;;; 어디서 이 발표 자료를 구했는지 아니면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요 -0-
따라서 나카타씨의 백제갑주 복원 형태는 어느정도 인정되는 형태라 봐야되네요;;; 이 밀덕 아저씨 뭐야 무서워(근데 왜 고구려 최근작은 뿔투구로 재현했는지 모르겠음-_- 대조영 팬이라 팬심으로 그렇게 한건가..);;;
3D 복원
ps. 복천동 64호 고분 출토품 관련 내용을 추가합니다. 2012-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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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경대 박물관
邑南 마을 향토 박물관 전시회 (고대 ~ 중세)
제1회 부산광역시립복천박물관 학술발표대회자료
-福泉洞古墳群의 甲冑와 馬具 / 申敬澈 /부산대학교 (복천동고분군의 갑주와 마구/ 신경철 / 부산대학교)
첫댓글 가야 판금갑옷을 베끼다가 제철기술이 딸려서 어쩔 수 없이 작은 철판들을 가죽끈으로 조악하게 엮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당시 일본에는 제철시설이 없어 가야에서 철광석을 녹여 만든 철정(덩이쇠)을 수입해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제철기술 문제라 보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철 자체야 어차피 가야나,백제, 신라 에서 수입해 오는 것이니;;
철정이라는 농기구나 도끼만들기 편한 형태와 크기로 수입되었으니,철정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든거군요...
가야나 신라의 종장판갑이나 투구들도 이런 철정을 열을 가한 상태에서 단조로 늘여 판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즉 철정과 함께 제작기술도 같이 수입해 만들어진 종장판갑의 변형으로 봐야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5~6세기 무렵 도래인 출신 기술자들이 일본내에서 사철을 사용한 타타라 제철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 철정을 계속 수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가 가야와 백제와의 관계를 중시한 것 같습니다. 그게 끊어지면 철기를 제작하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아마 사철을 이용한 제철기술도 금관가야멸망~삼국통일 사이에서 신라와 적대 관계인 상황에 철을 구할 수 없게 된 도래인 출신들이 고육지책으로 만든게 아닌가 싶습니다
친절한 답변 고맙습니다.덕분에 잘 배웠습니다.
긍뎅 이런건 밀덕당보단 역사자료실이나 동양사게시판에 올리는것이 좋지 않나염..?
그나저나 종장판갑..? 뭐가 뭔지 모르겠다능... 혹 고수님들중에 한번 날 잡아서 각 갑옷 종류들 형태를 설명하고 샘플들을 올려주실수 있으신지....;;;
이 곳을 보시면 됩니다. 비사인님 게시물 http://blog.ohmynews.com/greenyds/253345
백제군사박물관 http://www.nonsan.go.kr/museum.do?mno=sub03_02_02_04
쩐닭!!!
감사염~ ^^
이것은 좋은 글이다
확실히 뭔가.. 조악해 보이는 느낌.. 어깨는 따로 방어구를 두지 않았나보군요.
어깨는 큰 방어력이 필요치 않아 없었을 수도 있지만, 가볍게 가죽이나 나무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물론, 종장 판갑은 4세기 제작된 유물중에도 철제 어깨방어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본래 판갑의 기원을 나무나 가죽이나 뼈 등의 유기물로 만든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