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00, 전00 그리고 김중신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 말고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해 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 그의 팬이라고 합니다. 10대나 20대 때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좋아해 팬클럽에 가입하고 그가 하는 공연이나 운동 경기를 빠짐없이 쫓아 다니는 것 늘 상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런 것들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 더 이상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김중신 교수는 몇 년 전부터 어느 남성 록 그룹에 필이 꽂혀 그들을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당연히 팬클럽 모임에도 가고 멤버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연을 맺으려 노력하고 얼마 전 드러머가 돌아가자 상가에도 다녀왔습니다. 공연은 당연히 광적으로 참석하지요. 친구들에게도 그 그룹의 CD를 사서 돌립니다. 가족들도 서서히 그 대열에 합류한 모양입니다. 물론 노래방 가면 그 그룹의 노래를 부릅니다. 몇몇 친구들은 김 교수의 성화에 못 이기어 작년 이맘 때 공연도 보러 갔었습니다. 자신이 사준 밴드의 CD를 듣고 촌평이라도 하면 좋은 친구가 되고 무관심하면 한마디 듣습니다. ‘내가 준 CD 좀 들어라.’ 심지어는 언론사 간부로 있는 친구를 들 볶아 그 그룹 보컬리스트의 인터뷰 기사를 싣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나이에 그리도 좋을까? 도대체 그 그룹에 무슨 매력이 있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던 중 한달 전 쯤 그 그룹 보컬리스트가 단독 콘서트를 연다며 친구들 중에 같이 갈 사람을 모았습니다. 저는 김교수에 대한 우정으로 손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부부간에 같이 갈께요.’ 순전히 우정으로 말입니다. 왠지 이번 에도 안 가면 김 교수와의 우정에 흠집이라도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김 교수는 광적이었습니다.
지난 토요일이 바로 그 콘서트 날이었습니다. 김 교수가 광적으로 좋아하는 록 그룹은 들국화입니다. 특히 리드 보컬리스트 전인권을 거의 교주처럼 모십니다. 공연시작은 7시. 친구들은 1시간 전부터 근처 곱창집에서 앞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6시반경 그곳에 합류하였습니다. 일행은 모두 11명. 김교수네 가족은 4명이 전원 출동하였습니다. 다 큰 딸 아이들도 세뇌 시킨 모양입니다. 적지 않은 저녁 값도 김 교수가 흔쾌히 쏩니다. ‘저리 좋을까?’
공연히 시작되었습니다.
전인권은 역시 전인권이었습니다. 무대 막이 열리고 아무런 멘트없이 시작된 그의 노래, 그가 내지르는 묵직하고도 폭발적인 그러면서도 어딘가 갈라지는 듯하지만 머리를 맑게 하는 청아함을 깊숙이 감추고 있는 그의 목소리에서 왜 전인권을 전설의 보컬리스트라고 하는지, 왜 그토록 김 교수가 그를 열열히 사랑하게 되었는지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이 육십. 헝클어진 허연 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약간은 구부정한 모습으로 높은 의자에 앉아 오른 손으로 박자에 맞춰 무릎을 쳐가며 눈을 감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에 빠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풍기며 노래하는 그의 모습에서 전설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가 부른 노래들이 제 머리 속에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들어와 그가 어떤 순서로 불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몇몇 대목은 느낌으로 제 가슴에 흉터처럼 아로 새겨졌습니다.
그 자신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산 사람 답게 이제는 인생의 의미를 어느 정도 깨달은 현자처럼 인생에 대해 노래합니다. ‘걱정 말아요. 그대’입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의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의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후회 없이/ 사랑 했노라 말해요’
지나간 것은 좋았건 나빴건, 내 마음에 들 건 들지 않건,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은 지나가는 것이지요. 젊은 날은 그 인생을 자신이 어찌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고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노래가 끝나자 갑자기 객석에서 하이톤의 여성 목소리가 공연장을 꽉 채웠습니다. ‘사.랑.해.요. 전.인.권.’ 전인권은 특유의 묵직한 음색을 버리고 장난기 어린 순진한 목소리로 왼 손바닥에 오른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쓰는 제스처를 하면서 ‘우리 카톡 할까요?’하며 재치 있게 받아 넘겼습니다.
몇 곡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전인권의 매력에 푹빠진 채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습니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곡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985년 들국화 1집 타이틀 곡 ‘행진’입니다. 이 곡을 부를 때 만큼은 전인권은 의자에서 일어났습니다. 객석의 절반 쯤은 같이 일어났습니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꺼야/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노래 한 곡 쯤은 가사를 알아야 합니다. 2007년 어느 언론사와 음악 잡지사가 대대적으로 52명의 심사위원단의 심사를 거쳐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선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1위를 한 음반이 바로 이 곡 ‘행진’이 수록되어 있는 들국화의 데뷔 앨범이고 그 타이틀 곡이 바로 이 ‘행진’입니다. 그러니 알아 두실 만 하지 않을까요.
인생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고 노래한 전인권은 세상을 향해 과거와 미래를 껴안고 행진 하자고 외칩니다. 그가 부르는 후렴구 ‘행~진’ ‘행~~진’ ‘행~~~진’을 전 관객이 따라 부르는 순간, 저는 어느 종교집회에 참석한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이 순간만은 그는 전인권 교의 교주입니다.
전인권이 이날 공연에서 두 번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이번 공연의 타이틀 곡이기도 한 ‘걷고 걷고’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 모두 어쩌면 축복일지 몰라/ 걷고 걷고 또 걷는다’
그는 이제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는 듯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축복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를 주저합니다. ‘어쩌면’이라는 표현을 넣어 결론을 유보합니다. 아직 더 살아보아야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걷고 걷고’를 포함하여 4곡의 앵콜 곡이 끝나고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고했습니다. 무대를 빠져나오자 김 교수가 모두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는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방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전인권의 관계자’임이 분명하였습니다. 잠시 후 그가 나타나 우리 모두를 인솔하였습니다. 많은 팬들의 부러운 눈초리를 뒤로 하고 관계자를 따라 백스테이지로 갔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전인권은 훨씬 장난끼 어린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진짜 관계자들을 젖히고 우리 일행은 가족 별로 전인권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순간만큼 김 교수가 힘 있게 보인 적이 없습니다. 전인권과도 무척 친하였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전인권 팀 모든 사람들과 친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일행들은 모두 김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팬클럽 회장 된 거야.’ 그는 나즈막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니, 그저 팬클럽 멘토 정도.’ 아마도 자칭 멘토인 듯합니다. 그러나 저희들 눈에는 팬클럽 왕 회장에 다름 없었습니다.
오십 중반에 누군가에게 이렇게 빠질 수 있다는 것. 아직 청춘이 가슴속에 살아 꿈틀거린다는 표식 아닐까요. 공연장을 빠져 나오는데 같이 갔던 친구 양상훈 조선일보 논설 주간이 총평을 하였습니다. “오늘 공연의 압권은 ‘그것만이 내 세상’이야.”
김중신 교수에게는 ‘들국화, 그리고 전인권만이 내 세상’입니다.
조근호에게는 무엇만이 내 세상일까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만이 여러분의 세상이십니까?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4.3.10 . 조근호 드림
(방송 안내)
작년 4월15일부터 매주 월요일 10시부터 11시까지 방송되는 극동방송(AM 1188 또는 FM 106.9) ‘사랑의 뜰안’ 프로그램에 조근호 변호사의 월요편지 코너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월요편지 중에서 일부를 골라 청취자 분들에게 제 육성으로 전달해 드리고 있습니다. 시간은 대략 10:20경입니다. 시간이 나시면 들어 주세요. 새로운 감흥이 있으실 것입니다. 라디오 듣기가 불편하신 분은 스마트 폰에 극동방송 앱을 다운 받으시면 그 시간에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