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3일 월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마태오 5,38-42)
Offer no resistance to one who is evil.
When someone strike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one to him as well.
If anyone wants to go to law with you over your tunic,
hand him your cloak as well.
말씀의 초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슬프고 가난해 보이지만 그들은 진리와 말씀의 힘으로 마음은 늘 기쁘고 풍요롭다. 매질과 모욕, 옥살이를 당해도 그들은 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진실한 사랑을 전한다. 초대 교회의 예수님 제자들의 선교 모습이다(제1독서). 이스라엘의 복수 동태법은 무자비하게 복수를 하는 것에서 가해자를 보호하고 형평성에 따른 동등한 형태의 벌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마저도 거부하시면서 오히려 더욱더 적극적인 사랑을 바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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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살면서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하고,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소외를 당하고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벌이나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기도 하고, 누명을 쓰거나 이유 없이 해를 입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도 합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에게 고통을 안겨 준 사람에게 그만큼 하느님께서 갚아 주시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내가 받은 슬픔과 고통을 그들도 똑같이 받아 보아야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정의가 바로 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4)는 ‘복수 동태법’이라는 법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와는 반대로 더 억울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하고 싶어집니다.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은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만 갚을 때 그 악의 세력은 더욱 번창해 갑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대 주는 누군가의 ‘바보 같은 사랑’과 희생이 있을 때라야 악은 그 힘을 잃고 맙니다. 사회에 질서와 정의를 세우는 것은 인간이 만든 법과 힘일 것 같지만, 사실은 더 깊은 곳에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입니다. 전능하신 힘을 가지신 주님께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보 같은 사랑을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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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또 때려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웬만해서는 속옷과 겉옷을 벗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오히려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의도는 ‘어디까지 참고’ ‘어디까지 자선을 베풀어야 할지’를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무고하게 뺨을 맞았더라도 다른 뺨을 대 줄 만큼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속옷을 달라는 어이없는 청일지라도 겉옷까지 줄 수 있는 자세로 임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내의 ‘한계점’을 제시하신 겁니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자선의 ‘최정상’을 꺼내 보이신 것입니다. 등산하는 이들은 ‘높은 산’을 오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려고 그들은 자주 훈련합니다. 누구라도 단박에 ‘지리산 정상’으로 올라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갈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노력하고 훈련해서 ‘황새’가 되어야 합니다. 일류 선수는 정상을 지키고자 끊임없이 연습합니다. ‘피나는 연습’ 말고는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노력해야 합니다. 먼저 ‘나를 잘 대해 주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내와 자선의 첫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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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14처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어디입니까? 저에게는 12처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한때는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는 장면과 ‘용감한 여인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리는 장면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1처’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죄한 분께서 죄인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의롭고 선량하신 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모습이 마음을 눌렀습니다. 그분께서는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담담히 판결을 받아들이십니다.
‘삶의 억울함’을 인정하시는 모습입니다. ‘인생의 불공평함’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제1처의 예수님’께서는 억울함과 불공평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살면서 억울함을 당합니다. 때로는 모함도 받고 때로는 이용도 당합니다. 오해 때문에 멍들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처신하였습니까?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였습니까? 아니면 악쓰며 반항하였습니까? 결과야 어떻든 남은 것은 상처입니다.
이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억울함의 상처’가 십자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가슴 떨리고 증오가 솟더라도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러면 은총이 함께합니다. 누군가 ‘오른뺨을 치더라도’ 눈은 흘길지언정 참아 내게 하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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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태 복수법으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 그 이상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입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주며 보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이유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상대편은 자기가 준 상처보다 더 큰 보복을 당했다고 여겨 또 보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시고자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친절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지름길이지만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결책입니다. 이성으로는 알아들을 수 있지만 감정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