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져 있다. 신라와 고려 이래로 해적의 침략을 여러 번 받았다. 해안의 백성들은 생장하면서 물에 익숙하고 배를 부림에 능숙하여 역대로 수군(水軍.舟師)에 써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신라(新羅)에는 ‘백선장군(百船將軍)’이란 칭호가 있었고, 고려(高麗)에는 ‘전함도감(戰艦都監)’이란 명칭이 있었다. 수군의 제도가 정해지기는 고려 말기에 와서 비로소 갖추어졌다. 본조 태조(太祖) 6년에 왕이 용산강(龍山江)에 거둥하여 병선(兵船)을 사열하였고, 세종 원년(1419년)에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삼남(三南)의 병선 200여 척과 수군 17,000여 명을 동원하여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해서 큰 전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세조(世祖) 11년(1465)에 비로소 병조선(兵漕船)을 설치하였는데, 신숙주(申叔舟)로 전함사제조(典艦司提調)를 삼고 당(唐)ㆍ왜(倭)ㆍ유구(琉球.오키나와) 등 여러 나라의 선박 제도를 널리 조사하여 이를 절충해서 배를 만들고 ‘병조선(兵漕船)’이라고 이름하였다. 대ㆍ중ㆍ소의 체제로 나누어 제조하여 사용에 편리케 하였다. 대선은 배 위에 장치를 하여서 전투시에 사용하며, 장치를 철거하여 운수(運輸)에 사용하도록 하여, 배 한 척이 두 가지 용도에 쓰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각 섬의 배들이 일정하지 않을까를 염려하여 수면에서의 높이와 깊이, 배 안의 넓고 좁음을 각 포(浦)에 보내었으므로 만들어진 배들은 서로 비교하지 않아도 똑 같게 되었다. 각 도의 병조선이 양화도(楊花渡.양화나루)에 이르면 신 숙주는 좌ㆍ우 양대로 나누어 모의 수전(水戰)을 실시해서, 배의 운행이 편리한가 못한가를 관찰하였으며, 왕이 친히 이를 관람하였다. 선조(宣祖) 26년(1593)에 이순신을 3도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 의 통제사로 삼고, 통제영(統制營)을 고성(固城.지금은 통영)에 두었는데, 이는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영이었다. 인조(仁祖) 11년(1633)에 삼도(三道)경기도ㆍ충청도ㆍ황해도 통어영(統禦營)을 교동(喬桐)에 설치했는데, 이곳은 경기ㆍ황해도ㆍ충청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영이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모두 감사(監使)가 수군 절도사를 겸임하였다.
선조(宣祖) 25년 임진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가 되어 수군을 거느리고 왜병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이에 앞서 왜란(倭亂)의 징조가 이미 있었는데 순신(舜臣)은 창을 만들고 쇠사슬[鎖]을 만들어서 뜻밖의 사변에 대비했고, 창의[創智]로 큰 배를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거북선[龜船]이라 하였다. 그 만듦새는, 배의 상부를 큰 널빤지로 덮고 그 위엔 十자 모양의 좁다란 통로를 만들어 사람이 다닐 만큼 되게 하고 송곳[錐]과 칼끝을 꽂아서 사방으로 발붙일 곳을 없게 하였다. 뱃머리는 용의 모양, 꼬리는 거북 꼬리[尾]처럼 만들었고, 앞뒤와 양 옆으로 총구멍을 6개씩 내어서 큰 탄환을 쏘도록 하였고, 배 밑엔 병기를 저장하였다. 적을 만나면 띠풀로 엮어 위를 덮어서 송곳과 칼날을 가리워서 선봉에 나선다. 적이 배에 오르려고 하면 송곳과 칼에 죽고, 엄습하려고 하면 한꺼번에 총을 쏘기 때문에 이것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숙종(肅宗) 41년(1715)에 명하여 각 진(鎭)의 선창(船滄)이 잘 되어 있는지를 조사하고 전함의 각종 제도를 고치었다. 이때 전선이 점차로 옛날 제도를 잃어서 운용하기가 어려웠고, 연해의 선창은 밀물 때가 아니면 배를 이동할 수가 없었다. 각 도에 물으니, 경상 좌수사는 수영의 선박 제도를 고치어 그 길이와 넓이를 줄여야 한다고 하였고, 전라 좌수사는 보성(寶城)과 낙안(樂安)의 두 읍은 선창이 불편하다 하였으며, 전라 우수사는 각 진에 군병이 없으니 방선(防船) 11척은 줄여야 한다고 하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는 서천(舒川)ㆍ한산(韓山)ㆍ임천(林川)ㆍ평신(平薪)은 선창이 불편하니 전선(戰船)을 방선(防船)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하였고, 경기 수사(京畿水使)는 수영(水營)의 전선(戰船) 1척 및 주문(注文)ㆍ화량(花梁)의 전선(戰船)을 방선(防船)으로 개조하자 하였고, 황해도는 뱃길[海路]이 남방과 같지 아니하고, 또한 선재(船材)가 없기 때문에 번번이 다른 도의 퇴선(退船)을 옮겨 보급하는 관계로 불편한 점이 많아서 각 읍(邑)의 전선(戰船)을 이미 다 방선(防船)으로 개조하였으며, 오의(吾義)ㆍ허사(許沙) 두 진의 전선과 등산(登山)의 맹선(猛船)을 모두 방선(防船)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말했으므로 왕은 이를 좇았다.
영종(英宗) 16년 경신(1740년)에 해골선(海鶻船)을 창조하여 전라 좌수영에 두었다. 그 만듦새는 머리는 낮고 꼬리가 높으며, 앞이 크고 뒤가 작아서 마치 매[鶻]의 모양과 같고 뱃전의 양쪽엔 부판(浮板)을 두어서 양 날개를 모방하였다. 바람을 타지 않으며 매우 가볍고 빠르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엿보지 못한다. 노젓는 병정과 사수(射手)가 다 몸을 숨겨서 노를 젓고 쏘게 되어 있다.
임진란 이후에 각 도의 대선(大船)ㆍ중선(中船)ㆍ소선(小船)ㆍ맹선(猛船) 등 여러 배의 이름을 지금의 전선(戰船)ㆍ방선(防船)ㆍ병선(兵船) 등으로 바꾸었고, 함경도ㆍ강원도의 배들은 모두 수를 줄이었다. 출전: 고전번역원 역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