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척교 은행교 대전역 추억담 이야기
어린시절의 추억 가슴속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추억 도시한복판에서 살았지만 농촌 어촌 산촌에서 살았던 추억을 가진 사람들 못지않게 나에게도 많은 추억이 남아있다. 내가 살았던 동네 매우 가까운 곳 대전천 위로 세워진 다리 목척교와 은행교 그리고 대전역 중심으로 하여 추억담을 적어본다
목척교 대전의 명물 우리의 목척교 안다성 가수가 불렀던 못일을 대전의 밤 노래 가사로 나왔던 목척교 대천천 사이로 두고서 동구 중동과 음행동을 연결해주는 다리 나에게 있어선 소중한 추억이 간직한 곳이기도 한다.
일제는 1912년 경부선 철도를 만들었고 대전역 앞에 시가지가 발달하자 1912년에 일제가 대전부에 주둔중인 군대의 병기 수송을 목적으로 폭 5m, 길이 70m 크기로 가설했다. 이 당시에는 목재로 건설되었으며 역사가 깊은 다리이다. 1929년 경에 개조를 통해 콘크리트 교량이 되었고, 중간 중간에도 교통량을 고려하여 확장 공사가 반복되었다.
어린시절부터 목척교와 은행교 중간 근처에서 자라오면서 목척교와 은행교를 바라보았다.
자연히 목척교와 은행교를 접하게 되었고 활동 주무대(?)가 되었다. 동네 아이들과 다리를 오고가며 열심히 뛰놀았다. 때론 미꾸라지를 잡는다시고 둑을 따라 내려가 잡으려고 했지만 한마리도 잡지 못했다. 목척교의 경우 1968년 가장 기억나는 것은 목척교 보수공사 였다. 공사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건너편 대우당 약국 역사를 간직한 오래돤 약국이며 위에는 미원 선전 하는 커다란 네온싸인탑이 있어 가운데 미원봉지를 도안하고 중심으로 하여 카다란 검은띠 3개를 돌리고 작은 검은띠를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은행교는 중앙시장 입구 앞에 있으며 건너면 은행동이 나오고 계속 옆으로 걸어가면 대전극장 쭉 걸으면 성심당 도로를 건너면 대흥동성당이 나온다. 그때 성심단 본점 앞엔 목재소가 있었서 목재를 다루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은행교 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단속반원들과도 엄청 실랑이를 벌였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원동초등학교( 폐교. 지금 청소년 위캔센터 자리)였다. 가는 길이 대전천 따라 위로 올라간다. 그런데 중교 앞 신작로를 건녀면 둑방 앞에서 닭을 팔았다. 냄새가 너무 고약하여 어린 나로서는 걸어가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원동 도매시장 방향으로 해서 다녔다. 1970년 3학년 시절 없어졌으며 그 길로 다니기 시작하였다.
목척교 기준으로 은행교 지나 중교까지 이어지는 뚝방엔 잡화류를 파는 가계가 쭉 있었다. 물건 파는 상인들은 집을 겸하여 힘들게 살았다. 1968년에 불이 나서 보러 나가보았다. 그러나 가계들은 1971년 이후 없어졌으며. 과거 대전 풍경 사진전을 보면 나온다. 바라보면 추억이 살아난다.
목척교 기준으로 중앙로에는 금융기관이 많았다 제일은행 본점 건너 상업은행(현 우리은행)이 있었고 목척교 건너 쭉 올라가면 대흥동 선화동 갈라지는 사거리가 나오는데 대흥동쪽에 한국은행이 있었다. 대전역쪽으로는 한국산업은행이 있었고 은행동쪽에는 서울신탁은행 충청은행 이 있었다. 대전역 근처 큰도로와 접한 중앙시장 앞엔 조흥은행 안으로 들어가면 국민은행 중소기업은행이 있었다. 역 근처 있었던 한일은행은 한국은행이 서대전역 근처로 이사가고 나서 그 자리에 들어왔다.
은행동 건너자마자 기준으로 하여 오른쪽 방향은 중교방앗간이 있어 국수 심부름을 많이 하였다. 왼쪽으로는 강이비인후과 광명안과 한내과 병원이 있었고 몸이 아프면 치료 받았다.
살얐던 집 주변 풍경을 적어본다, 제일은행 뒤쪽에는 중고 서점가가 즐비하였으며 여러개의 나이트 클럽 까지 있었다. 서점과 나이트클럽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시절 크게 문제 되질 않했다. 조금 더가면 중앙극장이 있었다. 저녁 풍경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사람들은 신나게 술럭고 놀았으며, 거리에는 담배타기라는 도박인데 목재로 만든 둥근 원판위에 가운데 중심으로 해서 약 50개 등분 나누어 숫자를 적었고 돌리게 하여 찍어 맞히면 번호에 해당하는 담배를 가져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상술을 이용하여 한 개의 담배를 못가지게 하였으며 경찰은 그들을 단속하였으며 어떤 경찰은 원판을 뺏어 발로 밟아 뽀개었다.
주변에 극장들이 많았다. 중앙극장 신도극장 대전극장 저멀리 동화극장 중도극장 자유극장 등등 당시 극장은 상영하는 영화를 알리기 위하여 사람을 시켜 포스터를 이집 저집 전봇대 담벽 등에다 붙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았다. 그 덕분인가 난 일찍이 영화에 눈이떴고 많은 배우들을 알게 되었고 극장 주변에서 잘 놀았다. 그때 나왔던 영화제목 기억 하기도 한다 기족들은 가끔가서 영화를 보았다.
점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활동 무대도 넓혀졌다. 목척교 은행교에서 벗어나 학교옆 대흥교 중심으로 인동쪽으로 더 올라 가보았으며 반대로 선화동 영교 삼선교 까지 올라갔고 중학교땐 자전거 터고 호남선 철교까지 가본적이 있었다. 그땐 완전 허허벌판 이었고 그때 어느 아주머니가 오길래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았더니 모정지변이라고 대답하였다 여름철에는 대전천은 아이들의 수영 장소였다. 그런데 물은 더러웠다. 지금은즉 대전대부속 한방병원과 아파트로 변한자리가 예전에는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 (충남대학교 병원) 대전간호전문대학 자리였다. 병원에서 나온 의료 폐기물이 대전천으로 흘렀으니 얼마나 더러웠을까 물론 다른 폐수도 있었지만 학교에선 선생님들이 단속하였고 걸렸다하면 뒤지게 혼이 나야했다. 나는 한번도 하질 않했다.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하여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탔으며 아이들을 위하여 썰매를 대여했다 그러나 나는 집안이 가난하여 구경만 하였다.
대전역 주변을 적어본다. 대전역 주변에서 잘 놀았으며 지금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때 역 앞에서는 나그네가 쉴 수 있는 지붕이 있는 커다란 쉼터와 분수대가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언제인가 없어졌다. 선거때가 되면 후보들이 유세를 벌였고 궐기대회와 데모하는것도 보았다. 가장 잊지못할 궐기대회는 70년대 북한의 도발로 인한 김일성 규탄 궐기였는데 모형 김일성 만들고 석유를 붓고 화형식 하는 궐기대회였다. 78년 고등학교땐 북한이 땅굴판것에 대한 궐기대회에 학생들이 참가 하였다. 대전역 안 대합실에도 자주 들어가보았지만 옆에도 자주 들어 가보았다. 그땐 화물이 많았기에 취급하는 장소였고 3개의 철로가 놓여져 있었고. 커다란 굴뚝도 있었다. 1968년 1월 김신조 간첩사건 발생후 높은 굴뚝 위에다 간첩을 잡아내자 글씨를 보았다. 대전역에서는 대전에서 출발하여 목적지 몇군데로로 가는 완행열차가 있었다. 광주 송정리 군산 천안 대구 동대구 김천 이었다. 다른 열차들은 디젤열차였는데 천안의 경우 증기기관차가 운행하였다. 군산은 오후 3시 이후에 출발하였고 저녁 9시 넘으면 송정리에서 오는 열차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그땐 기차표를 직접 철도원에게 주어야 했다. 철도원은 표 하나하나 보는데 어떤 승객에게는 서대전역까지 끊었다고 30원 더 달라고 하였다. 지금이야 대합실에는 TV가 있다지만 그땐 없었다. 김일이 하는 레슬링 보려고 가보았는데 나가라고 뭐라고 하였으며 나중 틀어주어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대전역 중신으로 오른쪽에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고 터미널이 없어지고 난 후 땅에서는 옥수수가 심어져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와서 약장수 불쑈 바늘먹기 혐오스러운 파충류를 보여주었고 뱀장수도 있었다. 왼쪽에는 파출소와 헌병대가 있었는데 토요일 오후 되면 헌병들이 군인들을 잡아갔다. 1970년 고속버스가 생기고 나서 역 주변 여러 곳에서 고속버스 터미널도 생겨났다.
여기 적은 추억담은 전체 추억의 반도 되질 않으며. 좋지 않았던 추억도 많이 있다. 아름다웠던 추억이건 않좋았던 추억이건 지울 수 없으며 함께 품어 나갈 수 밖에 없다. 그때 같이 놀았던 아이들 어디에서 사는지도 모른다. 설령 만난다해도 의미가 없으며 그들이 나를 보고서 기억을 한다면 그때의 모습을 떠오를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에 추억 격언을 찾아보니 많이 나왔다. 신은 우리에게 좋은 추억을 주셨기에, 우리는 한 겨울에 장미를 품을 수 있다 (J.M베리) 우리는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의 가치를 그것들의 추억이 될 때까지 깨닫지 못한다 추억은 일종의 만님이다 (칼릴 지브란)등 먾이있다. 돈으로 주고도 살 수 없는 나만의 추억 간직하며 남은 인생 힘차게 살아가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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