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이종원 대장님의 페이스북 글을 옮겨 왔습니다.
위령비의 글씨가 쪼이고 쓰러져 있는 이유는?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들어보았나?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단 3일 동안 국군이 무고한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1950년 11월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공세에 밀리자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했고, 후방의 빨치산들은 활발히 활동하며 신원면 지서를 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전방과 후방에서 협공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국군 11사단은 빨치산에 협조한 통비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대대적으로 양민을 학살했다.
거창 신원면 청연골에서 84명, 탄량골에서 100명, 박산골에서 517명 등 14세 이하 어린이가 359명으로 절반을 차지했고, 61세 노인이 74명이니 공비 협력자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가장 많이 학살된 박산골은 골짜기에 몰아 총살한 뒤 나무를 덮고 기름을 뿌려 태워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3년이 지난 1954년, 박산 계곡에 방치되어 있던 시신들을 수습하려 하니 살은 이미 녹아내렸고, 유골은 신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 큰 유골은 남자, 중간 유골은 여자, 작은 유골은 소아로 분류해 3기의 합동 묘역을 조성했다. 그리고 1960년, 유족들과 각계의 지원을 받아 위령비를 제막하였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쿠데타군은 유족회 간부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해 잡아가두고, 경남도지사는 개장 명령을 내려 개인 묘나 공동묘지로 이장하라고 명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이니 어쩔 수 없이 유족들은 묘역을 파헤쳐 뼈가루가 섞인 흙 한 줌씩을 분배받아 공동묘지에 이장했다.
그들은 위령비를 철거해 정으로 쪼아내고 땅속에 파묻는 만행까지 자행했다. 공포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신원면 사람들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다가, 1988년 2월 15일 드디어 땅속에 묻혀 있던 위령비를 파내어 빛을 보게 했다.
유족들은 위령비 글자가 지워지고 쓰러진 채로 놓았다. 이는 후대에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함이다. 온전히 해결되지 못한 거창 양민 학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학살 현장에 가보니 바위에 총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현대사의 커다란 상처처럼 보였다.
건너편 감악산 별바람 언덕에는 아스타 국화꽃밭이 멋지게 조성되어 관광객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을 잘못 만나 비명에 간 어린이, 노인, 아녀자들은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듯하다.
외신 보도로 위기를 느낀 이승만 대통령은 학살 책임자 처벌 재판을 열었는데, 연대장 이익경은 무기형, 대대장 한동석은 징역 10년, 계엄사 김종원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다음 해 모두 특사로 풀려났고, 현역 복귀 및 경찰 고위 간부로 임명되었다.
제일 어처구니 없는 것이 당시 11사단장이자 작전명 '견벽청야'를 휘하부대에 지시한 최덕신은 1976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1986년 북한으로 월북해 최고인민회의대의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과연 과거로 끝날 일일까?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희생양은 우리 어머니, 아내, 내 자녀가 될 수도 있다.
역사를 단죄 하지 않는다면
이런 비극은 다시 반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