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시내에서 한 오리 더 들어가서 괴상한 데 집이 있었다…. 집만 하나 크게 있었다. 여자들이 한 이십 명 있었을 거다. 위층, 아래층이 있었다. 우리가 큰 데 있다가 다른 데로 옮긴 거였다. 집도 아주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오는 데로 옮겼다. 말하자면 일선지 같은 데로 더 들어갔다…. 거기에 밤에 땅을 파 놓고 들어가는 방공호를 만들었다. 비행기가 웅-웅 하면서 다니면 그 안에 들어갔다. 물이 허리춤까지 올라오면서 막 벌거지들이 기어 올라오고 그랬다. 우리가 있던 곳을 신마찌라고 그랬다. 신마찌가 여러 개가 있는 게 아니고 우리 뿐이었다.
싱가포르가 괜찮기는 했다. 거기서는 사람이 많이 오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명 아니면 세 명, 네 명 나왔다. 나는 부엌에서 일이나 하면서 내가 안 나온다고 다른 여자들이 뭐라고 하면 “밥 해, 나 못 나가.”그랬다. 그러면 저희들끼리 손님 받고 그랬다.
밥도 못 얻어먹어서 매일 가지를 기름에 볶은 것하고 먹었다. 쌀은 안남미 같은 것이었다. 때로 군인들이 쌀을 갖다 주면 벌거지 있는 쌀밥을 먹었다. 벌거지가 둥둥 떠 다녔다. 옷은 입을 게 없고, 돈이 없으니까 못 사 입었다. 거기서 몇 해 있다가 나와도 옷 한 벌 입고 나왔으니 말 다했다.
군인들이 와도 돈을 주지 않는다. 안 준다, 일본놈들. 어쩌다 좋은 사람 만나면 조금 주고 한국 사람이 좀 봐주고 그랬지 없었다. 돈을 주고 받고 그런 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화장품을 사도 나는 죽어도 안 샀다. 화장해서 뭐 하나? 그것들한테 예쁘게 보여서 뭐하나? 머리도 평범하게 하고 낯도 안 씻고 그냥 나가 있으면 군인이 이렇게 보고 그냥 가고, 다른 사람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꾀가 많았다.
그 새끼들 오면 어서 옵쇼, 일본말로 이라샤이마세, 이렇게 얘기하고, 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 일본말 안 썼다. 한국말로 썼다. 춘자, 일본말로 요시꼬, 이렇게 이름을 지어 주는데 그냥 이름 춘자면 춘자, 화자면 화자, 영자면 영자 이렇게 불렀다. 절대 일본말로 안 불렀다.
일본 여자들도 거기에 몸 팔러 온 여자들이 있었다. 돈 받고 몸 팔러 온 여자들이 있었다…. 나랑 같이 있던 계집애가 아주 작은앤데, 일본말을 잘했다. 걔는 일본 계집애들 잘못하면 막 두드려 팼다. 그리고 우리가 목욕 가서 일본 여자들 있으면 비누칠 해 가지고 물로 헹구지도 않고 그냥 들어갔다. 일본 여자들이 조센징 키다나이라고, 조센징 더럽다고 다 도망가버렸다. 그럼 우리끼리 목욕하고 왔다. 그렇게 모두들 못 되게 놀았다.
군인들이 오면 조선말로 “저 씨팔놈의 새끼들이 왜 끄대(자꾸) 오나.”했다. 앉아서 저 씨팔놈들 뭐 하러 자꾸 오냐고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모른다. 한국말 아는 놈이 어디 있나? 우리한테 욕도 많이 먹었다. 저 개새끼 소새끼 총에 맞아 디져라 하고.
잘 해준 남자들
일본 사람 한 명이 나보고 같이 살자고 먹을 것을 갖다 주면서 참 잘해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싫다고 했다. 일본놈하고 왜 내가 사냐고 안한다고 했다. 늘 몸 아껴주고, 함께 안 자고 먹을 것만 갖다 주곤 했다. 그때 일본 사람들 과자, 참 맛있는 거 다 갖다 주었다. 같이 살자고 하면서 집에 편지 보내고 옷도 해서 보내고 결혼도 하자고 했지만 그때 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사람 얼굴은 기억이 확실히 난다. 지금 봐도 알아볼 수 있다. 어찌나 따라다녔는지..
우리 아버지가 참 무서운 분이다. 영동에서 사람들이 싸움을 하다가도 아버지 기침 소리만 나면 다 도망가곤 했다. 그리고 일본 사람이라면 아주 싫어했다. 일본사람들이 하얀 옷 입고 다니면 물들여서 입으라고 하면서 물감으로 막 뿌려댔다. 그러면 아버지가 일본놈을 두드려 패곤 했다. 그렇게 무서운 분이셨다. 그런데 일본놈한테 시집을 보내겠나?
한국 사람은 배타는 사람, 포로 감독하는 사람, 군소꾸로 들어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이따금 두 명, 세 명씩 왔다. 양○○라는 포항 사는 한국 사람이었는데 그도 군인, 군소꾸였다. 그 남자가 나를 잘 봐주었다. 손님 받지 말고 자기가 올 때까지, 오거든 시간 마칠 때까지 손님을 받지 말라고 하고 그냥 있다 가곤 했다. 해방이 되면 자기집에 가서 같이 살자고 그랬다. 그래서 나도 같이 살겠다고 했다. 그동안 잘 해주었고, 안 살망정 함께 살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양심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매독
소독약을 주었다. 그걸로 소독을 하면 가느다랗고 대가리는 새까만 벌레들이 물에 나와서 바글바글했다. 삿쿠(콘돔)를 안 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소독약으로 씻었는데도 아이가 또 들어섰다. 그래서 그냥 낳으면 죽고, 낳으면 죽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독약으로 많이 씻고, 주사도 맞고 그래서 아이가 죽은 것 같다.
매독, 임질에 걸려서 죽을 뻔했다. 만주에서는 검사를 하러 갈 사이가 없어서 그때 걸린 것 같았다. 일 년 동안 있었는데 검사한 적이 없었다. 그때는 병에 걸렸는지 몰랐다. 나중에 낙지발 같은 게 돋아서 무척 간지러웠다. 지금도 간질간질하다.
싱가포르에서 검사를 하면 606호 주사를 놔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꼭 갔다. 병이 있으면 문 앞에 써 붙여서 손님이 못 들어가게 했다. 그러면 자꾸 검사를 받으러 다녀야 했다. 아픈 것은 어떻게 됐든 내 마음 속으로는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본놈이 들어오면 문 앞에 붙인 것 못 봤냐구 내몰았다. 삿쿠 끼면 되지 않느냐고 해서 지금은 아파서 안 된다고 하면 욕을 하며 나갔다. 주사를 맞고 병이 나으면 문 앞에 붙인 걸 떼어 내고 또 손님을 받아야 했다.
죽은 친구
함께 있었던 전라도 친구는 나이가 많았는데 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런 데 있다가 집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써 놓고서 죽었다. 아침 먹으라고 들어가 보니까 뻣뻣하게 죽어 있었다. 손가락을 잘라 자기 피를 빨아먹고 아편을 먹으면 자면서 죽는다. 그렇게 해서 죽어버렸다. 얌전하고 인정 많고 참 좋은 여자였는데 안타까웠다. 그 여자가 죽고서 우리는 모두 간호원들이 입는 하얀 옷을 맞춰서 입었다. 모두 앉아서 꽃을 달고 일본군인이 와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한 장씩 다 가지고 있었는데 난리 때 불에 타서 없어졌다.
한국군인들이 해방이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일본놈들은 우리보다도 나중에 알았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큰 마루에 다 모여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한국사람들이 어떻게 하나 싶어 가만히 보고 가곤 했다. 내가 한국에 가서 무슨 환영을 받겠냐고 생각하여 한국에 안 나온 여자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한 이십 명 내지 삼십 명 정도가 있었다. 군소꾸로 들어간 남자들 몇 명이 끼어 있었다. 해방되고 바로 안 왔다. 그 곳에서 서로 독립한다고 총으로 싸우고 있어서 금방 나올 수가 없었다. 여럿이서 몇 달 동안 거지같이 지냈다.
고향으로
그 곳에서 아이를 셋을 낳았는데 다 죽고, 마지막에 낳은 딸을 해방되고 데리고 나왔다. 아이를 낳아서 온 사람은 아들 하나 낳은 사람하고 나하고 둘 뿐이었다. 딸은 거기서 돌떡도 해 먹었다. 떡 해 먹고 얼마 있다가 부산으로 나왔다. 밤에 도착해서 차가 없었다. 모두들 돈이 없어서 길에서 잤다. 자고 나니 아침에 손에다 도장을 찍어줬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고향집으로 왔다.
차를 타고 가는 데도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고 창피했다. 아이들은 몰라도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끌려갔다 왔는지 다 알 것 아닌가. 고향으로 오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없었다. 작은집으로 가서 어디 갔냐고 물어보니까 나를 무척 찾으시다가 내가 오거든 어떻게든 잘 좀 봐 달라고 부탁을 하고 떠났다고 한다. 가족들이 없다는 소식에 엉엉 울었다. 오빠가 식구들을 다 데리고 만주로 가서 고생하면서 살았다고 나중에 얘기를 들었다. 사촌집에 이럭저럭 한 반 년 있었다. 몇 달 있으니까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언니들 집에 가서 있었다. 자기들도 못 먹고 사는데 아이를 업고 가니까 좋아할 사람이 없었다.
소문
그 곳에서 잘 해주었던 양○○가 편지를 써 줬었다. 눈뜨고 봉사인 나는 알아볼 수가 없어서 그냥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갔다. 포항 구룡포였는데 편지를 갖다 주니까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편지까지 가져다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 남자가 편지에 뭐라고 썼는지 가야 한다고 하는데도 아들이 올 때가지 있으라고 붙잡았다. 친정 없으면 가 봐야 고생하니까 여기서 살라고 했다. 방도 하나 주어서 거기 있게 되었다.
일 년 있다가 양○○이 돌아와서 만났는데 반가운지도 몰랐다. 그냥 왔나보다 하고 나는 나물 뜯으러 갔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산 속 절에 들어가 있었는데 어머니한테 가서 내 이야기를 하면서 왔는데 반가워하지도 않는다고 얘기를 한 것 같았다. 내 얘기나 좀 들어보자고 절에 한번 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나는 들을 얘기도 없고 안 갔다. 그랬더니 양○○가 동네에 내가 무슨 데 있었다고 흉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도 나쁜 놈이다. 그걸 끝까지 얘기 안 했으면 안 했지 동네에 소문을 낸 것이다. 자기하고 안 산다고 그런 얘기를 해서 되겠는가. 그래서 에이 이놈아, 너도 나쁜놈이다 하고 그곳을 나왔다. 지금도 그 동네에 가면 내가 이런 데 있다 왔다는 거 다 알기 때문에 창피해서 누굴 찾고 싶어도 못 간다. 나는 이렇게 자존심이 강하다.
밥장사
내가 고생하고 다닐 필요 없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딸만 없으면 남의 집에라도 들어가겠는데, 남의 집에도 못 들어가고 경상도 시골로 갔다. 거기서 집을 하나 얻어서 밥장사를 시작했다. 딸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호적이 없었다. 그래서 교장한테 얘기를 해서 입학을 시켰다. 딸이 국민학교를 다니는데 시골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나와서 장사를 하려고 집을 팔았는데 시골이라 몇 푼 안되지만 그때는 큰 돈이었다. 딸을 데리고 밥장사를 대전에서도 하다가, 영등포에서도 하다가, 경북 청송 보호원으로 들어가서 식당을 했는데 장사가 너무 잘 되었다. 그렇게 조금 돈을 벌다가 딸이 병이 나서 죽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다.
후유증
결혼해서 뭐하나 하고 생각했다. 밑에도 너무 가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피가 나도록 긁어도 가려웠다. 길을 가다가도 골목에 들어가서 긁어야 했다. 그런 얘기를 어디 가서 할 수도 없었다. 긁고 나서 오줌을 누면 따가웠다. 약 한 첩을 못 먹었다. 창피스러워서 병원에 가서 얘기도 못 하고 약도 못 사먹었다. 목욕을 자주 가서 남 모르게 소금물로 씻곤 했다. 꼭 가을, 봄이면 더욱 가려웠다. 대개 보면 매독이 가을, 봄에 걸린다. 그래도 병원엔 창피해서 못 간다.
싱가포르에 있을 때는 주사를 맞고, 소독을 하고 그래서 덜 했는데 여기에 와서는 미치게 가려웠다. 뜨거운 물에다 지져야 조금 잠을 잤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 병이 완전히 낫지 못해서 자식을 낳으면 해롭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시집을 안 갔다.
딸도 그것 때문에 건강이 나쁘고 심장병이 걸렸을 것이다. 걸음도 얼마 못 걸었다. 클 때는 괜찮았는데 나이 조금 먹어서 열아홉인가 스무 살부터 그랬다. 옛날에는 미국에 가야 고치지 여기서는 못 고치는 병이었다. 딸이 여기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으니까 미국에 보내서 고쳐 달라고 했다.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해주겠다고 하고는 장사를 하고, 식당도 하고, 남의 집에도 살고 해서 벌은 돈 천삼백인가 천오백인가를 주었다. 돈이 적어서 혜화동 부잣집에서 현찰로 오십만 원을 빌려서 보태 주었다. 그때가 돈을 많이 받아야 이만 원, 만팔천 원 받을 때였다. 그리고 나는 그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딸은 미국에 들어가서 병이 있으니까 돈은 못 벌고 내가 버는 것으로 혼자 살다가 그만 죽었다. 가서 일 년도 못 살고 죽었다. 미국에서 살림 살던 것을 다 부쳐준다고 했다. 부쳐봐야 세금이 많이 나와서 싫다고 했다.
머슴아
경북 상주에서 군인들 취급하는 원호청에서 밥을 해주고 있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죽고 갈 곳이 없는 머슴아가 하나 있었다. 나는 자식이 없으니까 남 좋은 일이나 해 보자고 데려다 키웠다. 고등학교을 보냈는데 자꾸 술집에서 술 먹고, 깡패짓을 했다. 학교에서는 몇 달 안나오니까 퇴학을 시켜 버렸다. 그래서 내가 사정을 해서 겨우 다시 다니기 시작해서 졸업을 하고 항공대학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비행기 일을 하는 사람은 무전을 배우면 금방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수원에 있는 직장에 들어갔다. 무전을 하는 일을 했는데 돈을 엄청 벌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미국으로 간 딸에게 돈을 다 주고 돈이 없었다. 아들에게 돈 십오만 원만 주면 변두리에 전셋집을 얻을 수가 있으니 빌려주면 벌어서 갚아준다고 했다. 그런데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한 달 일해서 받은 월급으로 변두리에 방을 얻었다.
아들 여편네가 계집애 둘을 낳아 놓고 재산을 다 가지고 도망을 갔다고 했다. 빈털터리가 된 아들이 아이가 둘이나 있으니까 직장을 못 다녔다. 그러니까 나한테 아이를 맡기러 왔다. 넌 사람 새끼, 개 만도 못하다. 나 돈 없을 때 전세 하나 얻어 줬으면 아이도 키워주고 했을 텐데, 그렇게 집이 몇 채 있으면서도 돈 십오만 원 빌려달라는데도 안 주지 않았냐. 난 너 같은 인간 취급 안 한다고 필요없다고 했다. 그래도 두 번인가 또 와서 좀 봐달라고 사정했다. 나는 술장사, 식당 하면서 얼마나 설움 받고 살았는데 그것도 모르면서, 자식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 자식 손 붙잡고 다니는 거 보니까 부러워서 너를 갖다가 인간 만들어 주니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했다. 돈을 그렇게 두고서도 안 주고 꼴도 보기 싫으니까 가라고 쫓아 버렸다. 그 후로 다시는 안 왔다. 아주 꼴도 보기 싫었다.
신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애는 사촌 동생의 딸이다. 세 살인가 네 살인가부터 키웠다. 그 애 부모가 지금은 암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뭔지도 모르고 머리가 다 빠져서 죽었다. 딸이 호적이 없어서 혼인신고를 못해서 내 앞으로 해 주었다. 그랬더니 호적에 딸과 사위가 있다고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원되던 돈 30만원이 8만원으로 줄었다. 그래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위안부 신고를 하게 되었다. 돈이 없을 때는 친구들한테 설움도 많이 받았다. 날 괄세해서 서러운 게 아니라 친구들이 옷도 사 주고, 저고리도 사 주고 해서 자존심에 서러웠다. 그래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이제 늙었는데 창피스러운 거 숨겨서 뭐 하겠나 싶어서 신고하게 되었다.
눈물
나는 울어본 적이 없다. 울음이 나오지 않는다. 내 평생 눈물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안 나오는지…. 그것도 야속했다. 우리 작은 아버지 돌아가셔도 눈물이 안 나니까 사람들이 안 운다고 뭐라고 했다. 또 형부가 죽었는데 쟤는 울지도 않는다고 그렇게 흉을 보았다. 눈물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울겠는가.
텔레비전에서 자식 두고 시집을 가면 계모가 들어와서 패고 때리고 하는 장면을 보면 눈물이 그렇게 쏟아진다. 그것 밖에 눈물이 나는 게 없다. 내 평생 저런 짓은 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그런데 누가 죽었다고 하면 눈물이 안 나온다. 오죽하면 침을 갖다 바르기도 했다. 지금도 누구 죽었다고 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마음은 아프지만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던가 엉엉 우는 일은 없다. 친구에게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너는 지독하게 살고 설움도 많이 받아서 그런가보다고 했다. 그만큼 내가 지독하고 무섭게 컸다는 건지 나오지 않는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다른 사람 같으면 까무라쳤을 것이다.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 내가 까무라칠까 봐 소식을 안 줬었다고 했다. 나는 까무라칠 게 뭐 있냐고 죽은 사람은 할 수 없다고 그러고 말았다. 눈물은커녕 콧물도 나오지 않았다. 위안소에서 친구가 죽었을 때도 다른 사람은 잉--하고 울었지만 나는 그냥 ‘너 잘 갔다, 언니 잘 갔어. 복장 편하게 잘 갔어.’ 그러고 말았다. 싱가포르에서 같이 있던 사람들 만나서 우리 살던 때, 나 아이 낳아서 고생하던 일, 그 찬물을 먹어서 이가 다 빠져버린 얘기하면 눈물이 나려는지 몰라도….
증언 6집 발췌 -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서울: 여성과 인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