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칼린 감독님
'뮤지컬 음악감독 1호' 박칼린(41). 그녀를 들여다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뮤지컬의 흐름이 대충 손에 잡힌다. 1996년 '명성황후'를 시작으로 '페임',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시카고', '노틀담의 곱추', '아이다' 등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손을 거쳐간 작품만 50여편에 이른다. 또 있다. 연극배우, 가수, 영화음악 작·편곡, 음반 녹음감독 및 프로듀서, 극작가, 뮤지컬아카데미 강사, 방송진행자, 대학교수까지 열거하기도 숨이 찰 지경이다. 순혈주의와 서열주의가 판치는 대한민국에서 '혼혈', '여성', '나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이만큼 달려왔다는 자체만으로도 놀랄 일이다. 박칼린을 14일 오전 서울 청담동 '킥 뮤지컬' 사무실에서 만났다.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본 건 약속 시간보다 1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녀는 "스케줄이 갑자기 꼬였다"며 연거푸 사과를 했다. 그녀의 말투는 부산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인지 가끔 경상도 억양이 섞여 나왔다. 노래를 잘하는 게 소원인 기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노래실력은 타고 나는 건가요?" "그런 면이 있어요. 기술을 배울 수 있지만 뛰어난 표현력을 갖추려면 본능적으로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돼요. 그건 가르칠 수 없죠." 이런! 포기하는 게 낫겠다.
◆나의 악기는 목소리
"저는 '삘'이 오면 꽂히는 스타일이에요. 퍼즐을 맞추듯이 한 가지 숙제가 풀리면 다른 숙제로 넘어가요. 새로운 도전을 늘 갈망하고. 잘하는 것보다는 못 하는 것을 더 해내고 싶어하죠." 왜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 욕심을 내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만큼 해내야 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제 머릿속에 그려진 완벽한 그림을 쫓아가는 거예요. 욕심을 앞세워서 목표를 세우고 움직이지는 않아요."
그녀는 단순한 논리로 복잡하게 사는 사람이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는 얘기다. 단골식당만 10년씩 다니지만 늘 새로운 맛집을 찾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다. 스포츠와 여행, 심지어 낚시까지 좋아하면서도 요리와 빨래도 취미다. 그녀의 집에는 흔한 CD플레이어조차 없고, 라디오도 듣지않는다. 텔레비전도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데만 쓴다. 대신 차 안이 떠나가라 '메탈리카'를 틀어대는 사람이기도 하다.
성격은 정확하지만 급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수록 차분해진다. "지난번 뮤지컬 ‘시카고’ 공연에서는 갑자기 남자배우가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배역이 남자가 여자 노래를 부르는 역이라서 누군가 대역할 수 있는 배역이 아니었거든요. 난리가 난 거죠. 고민 끝에 제가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노래를 대신 불렀어요. 립싱크를 한 거예요." 뮤지컬에 립싱크라니. 놀랍게도 그녀에게는 두 번째 경험이었다. "1996년 창작뮤지컬 ‘겨울나그네’를 할 때는 한 배역에 3명이 섭외(트리플)이 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공연 3일 전인데 3명 다 공연을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배우가 무대에 서고, 제가 그 배역의 노래 전체를 불렀어요. 지구상에 그런 공연을 한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피아노와 첼로, 가야금과 대금, 장구까지 연주하는 그녀가 꼽는 자신만의 악기는 '노래'다. "사실 제가 유일하게 공부를 안 한 게 성악이에요. 하지만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가장 근접한 게 목소리인 것 같아요. 제가 노래를 가르친지 벌써 20년이 됐잖아요. 가장 잘 되고, 머리를 많이 굴렸고, 자연스러운 게 목소리인 것 같아요."
그녀는 '워커홀릭이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NO'라고 했다. "저는 평생 하루도 일해본 날이 없습니다.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일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든지 다른 목적을 위해 자기가 해야만 하는 무엇이잖아요. 저한테 맞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일이 아니죠. 만약 제가 파티를 즐겼고, 평생 파티만 다녔다면 그걸 워커홀릭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음악감독은 만능엔터테이너
대한민국에서 뮤지컬 음악감독은 피곤한 직업이다. 곡 창작은 물론이고 선곡과 편곡, 번역과 개사, 오케스트라 지휘, 배우들의 오디션과 캐스팅, 보컬 코치, 안무와 동선, 심지어 조명까지 신경 써야한다. 제작사와 견해 차이부터 연출가와 안무가, 음악감독 간의 의견 조율까지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녀는 오케스트라 밴드를 구성할 때 몇 가지 원칙을 고수한다. 가장 먼저 따지는 게 '인격'이다. 또 연주자가 그 작품에 적합한 지를 두 번째로 살피고, 연주자들이 캐스팅한 배우들과 잘 어울리는지도 고려한다.
"뮤지컬에서 무대 위 배우들과 연주자와의 교감이 정말 중요해요. 둘이 진짜 사랑하지 않으면 따로 놀아요. 만약 실력이 부족한 배우가 무대에서 객기를 부리기 시작하면 연주자들은 '음도 틀리는 걸 내가 왜 반주하고 있지'라면서 그냥 음악대로 갑니다. 반대로 배우들이 엄청나게 연습해서 앙상블이 쫙쫙 빠지는데 연주자 하나가 매일 틀리고 음이 안 맞으면 감정이 흐트러져서 같이 움직이지를 못 해요."
브로드웨이의 꿈, 그녀에겐 없었을까. "가고 싶단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브로드웨이는 공장이에요. 실제 창작을 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 한번 공연을 올리면 10년씩 전세계에 다니며 똑같은 걸 해요. 매일 3, 4시간 동안 밥벌이를 하기 위해 연주를 하거든요. 그래서 한국 배우들처럼 에너지도 없고, 살아있지가 않아요. 전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아요."
10개월 동안 계속됐던 뮤지컬 '아이다'는 자신이 만든 또 다른 '퍼즐'이었다. "내가 6개월은 갈 수 있을까하고 시도했는데요. 결론은 '나는 아니다'였어요."
그녀는 요즘 첫 뮤지컬 연출작인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를 맡아 맹연습 중이다. 그가 2003년 국내 초연 때 음악감독을 맡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유태인 소설가 제이미와 가톨릭 집안 출신의 배우 캐서린이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결국 이별하게 되는 5년간의 이야기. "솔직담백하고 가식 없이 보여줄 거예요. 원작에 굉장히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노래로 끌고 가는 작품이라 배우들이 그 말들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어요."
◆한국 뮤지컬, 소프트웨어가 없다
-최근 아이돌 스타나 연예인들의 뮤지컬 진출이 눈에 많이 띄는데요. 자질보다는 무분별한 스타마케팅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뮤지컬 전체 발전에는 도움이 안 되죠. 더 엄격하게 선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타를 데리고 오는 건 좋아요. 스타가 왜 스타이겠어요. 매우 예쁘다든지, 춤을 잘 춘다든지 뭐가 하나 있을 거라고요. 그 점이 작품과 맞아떨어지면 완벽한 조화겠죠. 하지만 함량미달인 스타를 무조건 끼워넣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돼요."
-국내 창작뮤지컬의 발전이 더딘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소프트웨어가 없어요. 대본하고 음악이 미비하고 그걸 엮어갈 수 있는 연출가가 부족해요. 뮤지컬이 너무 빨리 밀려들어 오면서 형태만 잡혔지 아직 차근차근 교육을 받은 이들이 없거든요. 창작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이제 겨우 공부하러 외국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대구가 뮤지컬 시장은 상당히 컸지만, 창작 활동의 기반은 약한 편입니다. 무대에 오르는 작품들도 대부분 라이선스 작품이고요. 대구가 뮤지컬 도시가 되려면 가장 필요한 게 뭘까요?
"교육이죠. 뮤지컬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돼요. 뮤지컬학과는 다른 전공보다 비용이 3배가 더 들어요. 춤, 노래, 연기 등을 다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무용학과에 들어가 있고, 음악학과에 들어가 있고 중구난방이에요. 뮤지컬 노래를 제대로 가르치는 보컬 코치도 없어요. 배우 양성뿐만 아니라 창작 과정의 양성도 함께 돼야 하거든요. 특히 대기업에서 작품성 떨어지는 라이선스 작품을 들여와서 대단한 것처럼 홍보만 잔뜩해 표를 파는 짓은 해선 안 돼요. 예술은 퀄리티만 살아남아요. 꾸준히 밑바탕을 가꿔나가는 사람들이 10년, 20년 후에도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삶은 즐겁고 행복한 것
인터뷰 도중, 잠시 전화 통화를 한 그녀가 말했다. "저, 병자예요. 곧 죽어요". 편안한 '웃음'과 '죽음'이라는 단어의 묘한 이질감. 농에는 농으로 맞서는 법이다. "언제 죽습니까?" 대답이 심상찮다. "4, 5년?" 설마하며 다시 물었다. "큰 병은 아니죠?" 아니다. 큰 병이다. 신장 두 쪽이 거의 기능을 잃었단다. 기자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도무지 웃으며 할 얘기는 아닌 듯 싶었다.
"괜찮아요. 열심히 행복하게 살았는데. 신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투석도 해야된대요. 그런데 안 할 거예요. 아휴, 차라리 그냥. 잘 살았으니까. 뭐." 웃지도, 찡그리지도 못하는 기자에게 그녀는 말을 이었다. "잠도 못자고 피로에 억눌려 산 지 25년이 넘었으니 그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할 일을 못했으면 억울할텐데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다 쏟은 대가로 이 병을 치르는 거잖아요."
그녀가 자신의 병을 안 지는 6년 전. 늘 두통을 달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이 안 보였다.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안 보이고 주변만 보이고. 검사를 해보니 신장 이상으로 혈압이 200까지 올라서 그렇게 됐대요. 가족들은 신장을 내주겠다고 하는데 뭘 그런 걸 꼭 해야되나 싶고."
잔인할지도 모를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만약 5분 뒤에 죽는다고 해도 후회가 없겠어요?" "후회 없어요. 진짜 저는 후회 없이 살았어요. 남들이 나만큼만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쟁이 없을 것 같아." 득도?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하하."
이 짧은 5분간의 대화만큼 박칼린에 대해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듯싶다. 그녀는 "삶의 목표로 세웠던 건 다했다"고 했다. 아홉살 때 만들었다는 5가지 꿈. '삽살개 키우기', '샹그릴라 찾아가기', '우주여행', '비행기 조종'. 그녀는 청계산 기슭에서 삽살개와 둘이 산다. 미국에서 아홉살때부터 시작한 첼로 공부를 중단하고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며 우주공학을 전공하는 학교로 옮기기도 했다. 백인들로 가득 찬 답답한 캠퍼스가 싫어 여성 비행학교에서 1년간 조종 연수를 받으며 단독비행까지 통과했다. '명성황후' 음악감독 제의로 한국에 들어오면서 규정 비행시간을 채우지 못해 조종 자격증을 따지 못한 게 아쉽다고.
그녀는 자신만의 '샹그릴라'를 찾았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무엇을 하느냐는 상관이 없어요. 요리를 하든, 무용을 하든, 사업을 하든간에 노는 것도 '실컷' 놀고, 일할 때도 '실컷' 하고. 다 쏟아붓고나면 마음 속에 남는 게 없잖아요. 밤마다 바보처럼 행복해하며 자는 거죠. 내 모든 걸 다 쏟아부었다는 흐뭇함과 만족. 남들이 부럽지 않고, 비교도 하지않고. 모든 잣대가 내 자신이구나. 내 중심이 거기에 있구나 하는 게 있더라고요. 그게 제 샹그릴라예요. 그래서 전 삶이 되게 즐거워요." 살아있다면 10년 후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글을 쓰고 있을 것 같아요. 워낙 글쓰는 걸 좋아해요. 적막하고 바람소리만 나는 고요한 숲속 어딘가에서 개, 고양이 기르면서 살고 있겠죠. 글이나 작품처럼 오래 시간이 걸리는 것들을 하고 싶어요."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 박칼린은?=1967년생. 뮤지컬 음악감독, 킥 뮤지컬 대표, 동아방송대 공연예술계열 뮤지컬전공 전임교수.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성장 궤적은 종횡무진 그 자체다. 아홉살부터 첼로를 시작했지만 무용과 연기도 했고, 한국으로 건너와 경남여고 2학년 때인 1984년 청소년연극제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전공하던 첼로를 그만두고 우주공학과 경비행기 조종을 익혔고,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다 명창 박동진 선생으로부터 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예술대에서 첼로 전공으로 학사과정을 마친 뒤 다시 한국으로 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악작곡 석사과정을 밟았다. 부산시립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대학로로 자리를 옮긴 뒤, 1987년 연극 '불의 가면'으로 음악감독의 첫발을 디뎠다. 1995년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를 통해 뮤지컬 음악감독 1호가 됐다. 이후 50여편의 뮤지컬 음악 작업을 했으며 연기, 연극 연출, 영화 음악 편곡, 프로듀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