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은 조선왕조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정도전 일파에 의해 제거될 운명에 놓이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적들을 일소하고 정종을 옹립했다. 그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형 이방간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자 세자에 책봉되었고, 정종의 양위를 받아 꿈꾸던 보위에 오른다. 이처럼 이방원이 대군에서 국왕이 되기까지에는 부인이었던 원경왕후 민씨의 조력이 절대적이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의 소외와 이방석의 세자책봉, 정도전의 사병혁파를 빌미로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의 배후에는 원경왕후가 도사리고 있었다. 정치적 식견이 뛰어났던 그녀는 정도전의 음모를 사전에 감지하여 이방원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을 통해 병사와 무기를 조달해 주었다.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그녀는 재차 친정의 힘을 동원하여 이방원의 승리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태종은 보위에 오른 뒤 왕권확립이라는 대의를 추구하면서 원경왕후 민씨와 마찰을 빚었다. 원경왕후가 친정인 여흥 민씨 일문에 일정한 권력 지분을 요구했지만 조선을 강력한 왕권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태종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녀의 여종 출신이었던 효빈 김씨의 처소만 들락거려 갈등을 고조시켰다.
이런 상황에 태종의 심한 여성편력이 기름을 부었다. 어느 날 태종은 원경왕후가 자신과 관계한 궁인을 꾸짖자 대노하여 시녀, 환관 20여 명을 내쳤다. 그러더니 제후는 9명의 부인을 둔다는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가례색을 설치한 다음 9명의 후궁까지 들이도록 법제화하여 원경왕후의 화를 부추겼다.
당시 태종의 여성편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궐내에 직첩을 받은 후궁이 6명, 직첩을 받지 못한 후궁이 5명이었는데 이 중에 한 명은 성씨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태종은 수많은 자식들을 얻었다. 효빈 김씨는 경녕군을 낳았고, 신빈 신씨는 성녕군을 포함하여 3남 6녀를 낳았다. 11명의 후궁을 통해 8남 13녀를 낳은 것이다. 이는 역대 어떤 국왕들보다 많은 숫자였다.
그런 태종의 바람기 때문에 한때 살가운 부부이자 동지였던 부부의 갈등은 깊어졌고, 급기야 외척에 대한 경계심으로까지 이어졌다. 태종은 외척이 궁중에 들어와 일하는 것은 궁중에서 소소한 일을 담당하는 궁인들 때문이라 하여 궁궐 내의 청소를 담당하는 남자인 파자(巴只)를 환관으로 대체하고 궂은일을 도맡은 무수리를 궐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궁중의 일이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 무렵 태종은 자신의 등극 과정에 크게 기여했던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세자 이제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세자는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으므로 외삼촌들과의 관계가 각별했다. 1406년(태종 6년) 태종은 돌연 양위를 선언했다. 과연 그 과정에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몹시 기뻐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대노한 태종은 두 사람을 제주도에 귀양 보낸 다음 1408년(태종 8년)에 이르러 그들을 사사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장인 민제는 자식들을 걱정하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렇듯 졸지에 집안이 쑥대밭이 되자 원경왕후 민씨는 피눈물을 흘리며 무정한 남편을 원망했다.
1415년(태종 15년) 4월, 민씨의 남아있던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또 다시 태종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당시 민무회는 다른 사람의 노비소송에 관여한 죄로 하옥되었다. 그 일로 조정이 시끄러웠는데 때마침 부왕의 눈총을 받고 있던 세자 이제가 엉겁결에 ‘두 외숙이 자신에게 외가를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토로했던 것이다. 이는 세자가 장차 보위에 오르면 앞서 억울하게 죽은 두 형을 신원시켜 달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가뜩이나 날이 서있던 태종은 대간의 고발이 들어오자마자 그들의 직첩을 거두고 유배형에 처했다.
그해 12월 15일, 태종은 갑자기 의정부참찬 황희, 이조판서 박은, 지신사 유사눌을 대전으로 불러들이더니 중전과 그녀의 동생들이 과거 자신의 핏줄을 잉태한 효빈 김씨를 죽이려 했다면서 분개했다. 그는 교하에서 온 경녕군 이비의 유모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서, 경녕군이 아무리 비천한 몸에서 태어났어도 임금의 피를 이어받은 왕자인데 민씨 일가에서 여러 가지 잔꾀를 써서 죽이려 했으니 참으로 극악하고 음흉한 일이므로 마땅히 그 처분을 역사에 남겨 외척들에게 경고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틀 뒤인 12월 17일부터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앞 다투어 민씨 일문을 척결하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12월 21일 태종은 의정부참찬 최이, 우부대언 서선을 위관으로 삼아 민무휼과 민무회가 원윤 이비 모자를 죽이고자 한 죄와 세자에게 불경한 죄를 밝히라고 명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면 관에 있는 자가 죽여서 용서하지 않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면 관에 있는 자가 죽여서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민무회 등의 죄는 비록 이것과 같지는 않으나 그 꾀에 참여한 민씨 집안의 노비를 잡아들여 국문하라.”
추상같은 어명이 떨어지자 위관들은 민씨 집안의 노비 삼덕과 화상, 상좌 세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한 다음 의금부에 가두었다. 이어서 유배지에 있던 민씨 형제를 재차 압송하여 국문했다. 한데 국문 과정에서 그들은 앞서 죽은 민무질, 민무구가 무고하다고 항변함으로써 태종의 심사를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혹형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원주와 청주로 재차 유배되었다. 그렇듯 자신의 과거 행적 때문에 남은 두 동생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태종의 폭거에 저항했다. 본가의 어머니 송씨도 충격을 받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태종은 요지부동이었다.
1416년(태종 16년) 1월 12일, 의정부·공신·육조·대간이 연명으로 두 사람을 극형에 처하고 아울러 그들 형제의 처자까지 벌하여 앞으로의 후환을 없애자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자 태종은 의금부도사 이맹진을 원주로, 송인산을 청주로 보내 두 사람의 처결을 명했다. 이튿날 도성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민무휼과 민무회가 자결했다고 보고했다.
그 충격으로 병석에 누운 어머니 송씨까지 세상을 떠나자 여흥 민씨는 완전히 패가망신한 꼴이 되었다. 태종은 그 참에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원경왕후 민씨까지 폐출하려 했다. 하지만 세자와 왕자들의 생모인지라 중신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으므로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1418년(태종 18년) 세자 이제가 폐위되어 양녕대군에 책봉되고 충녕대군 이도가 세자에 책봉되자 원경왕후는 이를 형제간의 분란으로 보고 끝까지 반대했다. 그 해에 태종이 세자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민씨도 왕대비가 되어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존호가 올려졌다.
세종은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에게 효성을 다했다. 충녕대군 시절 자신이 책을 너무 많이 읽다가 건강을 해칠까봐 몇 권만 남겨두고 중궁전에 가져다놓을 정도로 사랑을 베풀었던 어머니, 동생 성녕대군이 죽은 뒤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던 분, 젊은 날에는 태종을 위해 군사를 기르고 갑주와 보검을 챙겨주던 여장부였건만 나이 들어 남편과의 불화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숱하게 마음고생을 했던 그 어머니였다.
1420년(세종 2년) 5월, 세종은 어머니가 학질에 걸리자 ‘학질은 여러 곳을 자주 옮겨 다녀야 병이 떨어진다.’는 속설에 따라 5월 27일부터 43일간 무려 12곳을 전전했다. 그 동안 끼니를 잇는 둥 마는 둥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기도했다. 당시 세종은 말 한 필에 내시 두 사람만을 대동한 채 이리저리 옮겨 다녔는데, 한밤중에 길을 잃어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했다. 또 탕약과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보고 드시게 했다. 이런 아들의 정성에 냉혈한 태종도 감명을 받았는지 위독한 민씨의 손을 꼭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1420년(세종 2년) 7월 10일, 한 많은 세월을 보냈던 원경왕후 민씨는 수강궁 별전에서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해 나이 56세였다. 세종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다음 맨발로 거적 위에 엎드려 통곡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가슴을 저몄다. 당시 날씨가 무더워 바닥에서 습기가 올라오자 신하들이 몰래 기름먹인 종이를 거적 밑에 깔았다. 세종이 이를 알고 몹시 노여워했다.
세종은 1422년(세종 4년) 5월 태종이 깊은 병에 걸리자 탕약과 음식을 손수 받들어 드렸다. 하지만 병환이 심해 새로 지은 궁궐로 옮겨야 했는데 세종은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가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결국 숨을 거둔 태종은 원경왕후가 먼저 묻힌 헌릉에 합장되었다. 평생 뜨겁고 곡절 많은 세월을 보냈던 원경왕후 민씨와 태종 이방원은 죽어서야 그렇듯 한 자리에 누워 고단한 몸을 쉴 수 있었다.
원경왕후 민씨는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태어났다. 18세 때인 1382년(우왕 8년)에 두 살 어린 이방원과 혼인했다. 남편 이방원은 혼인한 이듬해 과거에 급제하여 이성계를 감격시켰다. 당시 여덟 명의 아들 가운에 유일한 문과 급제자가 나오자 이성계는 눈물을 흘리며 임명장을 두세 번 읽게 했다고 한다.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는 19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예의판서·상의밀직에 이르렀고 창왕과 공양왕 대에 개성윤에 임명되면서 왕도에서 가세를 번성시키는 데 일조했다. 경사(經史)에 통달했던 그는 성리학을 신봉하면서 이단과 음사를 배척함으로써 조선 건국을 선도한 신진사대부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
여흥 민씨와 전주 이씨의 결합은 민선의 딸이 이성계의 넷째아들 이방간과 혼인하고, 민제의 딸 원경왕후가 이성계의 다섯째아들 이방원과 혼인하면서 이루어졌다. 여흥 민씨는 원나라 간섭기에 권문세가가 되었지만 부귀를 탐하지 않고 지조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고려의 변방인 동북면 출신으로 중앙에서 소외받았던 이성계 가문은 이런 여흥 민씨 가문과 인연을 맺으면서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