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경질된 것은 청와대의 인사
청탁을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사 청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조사까지 받았다. 나는 청와대에서 청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호가호위(狐假虎威)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에게 ‘그러지 마라. 그런 식의 인사는 좋은 것이 아니다’란 식으로 이야기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최근 ‘지
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장과 체육정책과장을 교체하라고 지시한 것은 사실’이었다고 폭로한 유진룡(劉震龍ㆍ58)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다. 누가 봐도 이번 조선일보 인터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인사 개입이 사실이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비판한 말로 보일 것이다.
그
런데 아니다. 맨 위에 제시한 내용은 사실 8년 전인 2006년 8월 1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인터뷰 내용이다. 당시 그는 노무현
정부 문화부의 차관이었다. 8년이라는 시차(時差)가 있고, 노무현 정부와 박근혜 정부, 문화부 차관과 장관이라는 점만 다를 뿐
놀랍게도 똑같은 내용이다. 두 번 다 청와대가 ‘무리한’ 인사를 요구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부했고, 이것이 본인의 경질로 이어진 것이다. 실로 ‘8년 만의 데자뷰(기시감)’라 할 만하다.
서
울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제22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1979년 문화공보부 행정사무관으로 공무원을 시작해
국립중앙박물관 문화교육과장, 문화부 국제교류과장ㆍ문화정책과장ㆍ종무관 등을 지냈다. 그야말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차관과 장관까지
오른 인물이다. 문화부의 대표적인 ‘엘리트 공무원’으로 꼽힌 그는 줄곧 내부 조직에서 후배들의 신망도 두터운 공무원이었다. 2008년 차관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문화부 내부 통신망에는 ‘우상(偶像)이 떠나간다’는 글이 올라왔다. “유 차관은 항상 외풍을 막아주고 내부에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것이다.
그는 고위 공무원으로선 보기 드물게 ‘성품이 올곧고 할 말은 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수시로 상부에 직언(直言)을 올릴 뿐 아니라 때론 격한 말도 서슴지 않는 그의 태도에 대해 사람들의 평가는 양쪽으로 갈렸다. “영혼이 있는 공무원도 있었구나!”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정무적 감각이 좀 부족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지
난해부터 문화체육관광부를 출입한 기자가 지켜보니, 그는 바닥부터 차곡차곡 올라온 사람답게 부처 전반의 업무에 대해 전체와 세밀한
부분을 모두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국정감사 같은 자리에서 의원들의 세세한 질문에 당황해 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다른 신임
장관들과는 달리, 유 전 장관은 어떤 질문이 나와도 막히는 일이 없었다. 전체적인 큰 그림 속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까지도 자세하게 설명했고, 그 태도 또한 당당했다.
사석에서의 그는 호쾌하면서도 명석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도 술을 많이 마시는 일이 없었지만, 조직과 인사에 부당한 일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 참지 못하고 “뭐 그런 일이 있느냐”며 답답함을 숨기지 않았다. “요즘 문화재청 직원 중에서 A(작년 문화재청장의 측근이었던 외부 인사)한테 줄을 서는 놈들이 있다면서? 나 참, 기가 막혀서”라며 짙은 눈썹을 부라리기도 했다. 그를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이 사람이 누구한테 머리를 조아리며 구차하게 굴거나 외부에 청탁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8년 8월, 그는 문화부 차관 취임 6개월 만에 경질됐다. 이때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는 인사 청탁을 거절당한 청와대 관계자가 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배 째 달라는 말씀이죠? 째 드리지요.” 이 말을 했다는 청와대 비서관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훗날 장관이 된 뒤 그 일에 대해 기자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문화부 간부 중에 청와대 비서관과 나 사이의 ‘전령’ 역할을 맡은 자가 있었다. 인사 청탁도 그를 통해서 내게 들어왔다. ‘배 째 달라는 말이냐’고 했다는 말도 그가 내게 전한 것이다.”
어쨌든, 유 전 장관은 지난해 3월 박근혜 정부의 초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취임 이후 ‘배째라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장관 후보 발표를 TV로 지켜보던 문화부 직원들은 ‘유진룡’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박수를 쳤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2008년의 그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다.
2013년 3월 14일자 조선일보 A23 면에는 <그는 이번에도 ‘배 째라’며 버틸까>란 제목의 기자 칼럼 ‘시각’이 실렸다. 이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이모저모로 도왔다는 문화예술계 인사들 가운데, 문화부 산하 기관 자리만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청와대에서도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나설 수도 있다. …그렇기에 유 장관이 ‘국정철학 공유’를 제시한 대통령의 인사 기준과 청와대의 민원에 어떻게 대응할지 관심이 쏠린다. 청와대의 부당한 인사 요구에 항의하다 옷을 벗은 것으로 알려진 유 장관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로부터 그가 장관 자리에서 경질된 1년 4개월 동안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벌어진 일은 그 우려의 ‘현실화’로 보기에 충분했다. 지난 5일자 조선일보 인터뷰 이후 그는 다시 ‘잠수’를 택했다. 이번 그의 발언에 대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전직 장관이 현직 대통령을 비판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는 비판과 “꿋꿋하게 할 말을 잘 했다”는 칭찬이 교차한다. 하지만 문체부 측의 한 공무원은 “문체부 내에선 여전히 유진룡이 그들의 영웅이자 멘토이며, 이번 일에 대해서도 ‘과연 유진룡’ ‘속시원하다’는 반응이 있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