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情念)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시집 『정념의 기』, 1960)
[작품해설]
모윤숙, 노천명의 뒤를 이어 여류 시인 계보를 이은 대표적인 시인인 김남조의 시 정신은 ‘사랑’이다. 김남조의 사랑은 초기 시의 인간적 · 지상적(地上的) 사랑에서 후기 시에 이르면 근원적 · 초월적인 방향으로 심화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마음속의 갈등과 번민을 극복하고 순결한 영혼과 평화로운 안식을 갈구하는 자신의 소망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그리워하는 대상은 단순한 연가(戀歌) 속에 등장하는 애정의 임이 아닌, ‘햐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과 같은 임으로 인간 존재의 ‘무거운 비애’를 초월한 분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깃발이라는 구체적 사물에 마음을 비유하여 모든 욕망과 번뇌, 갈등을 극복하며 그와 같은 임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소망을 가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제목 「정념의 기」에서 ‘정’은 곧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념’은 신(神)에 대한 염원으로, ‘기’는 자신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소개]
김남조(金南祚)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숙(星宿)」, 「잔상」을 발표하여 등단
1953년 시집 『목숨』을 발간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1954년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1958년 자유문학가협회상 수상
1963년 오월문학상 수상
1975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서울시문화상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 『목숨』(1953), 『나아드의 향유』(1955), 『나무와 바람』(1958), 『수정과 장미』(1959), 『정념의 기』(1960), 『풍림(楓林)의 음악』(1963),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5), 『겨울 바다』(1967), 『설일』(1971), 『영혼과 빵』(1973), 『동행』(1976), 『김남조시집』(1981), 『빛과 고요』(1982), 『김남조전집』(1983), 『너를 위하여』(1985), 『저무는 날에』(1985), 『고독보다 깊은 사랑』(1986), 『둘의 마음에 산울림이』(1986), 『문앞에 계신 손님』(1986), 『말하지 않은 말』(1986), 『겨울나무』(1987), 『문앞에 계신 손님』(1987), 『둘의 마음에 산울림이』(1987), 『바람세례』(1988), 『마음 안의 마음』(1988), 『깨어나소서 주여』(1989), 『그리움처럼 빛처럼』(1989), 『겨울꽃』(1990), 『믿음을 위하여』(1991), 『평안을 위하여』(1995), 『요람의 노래』(1996), 『외롭거든 나의 사랑이소서』(1997), 『너를 위하여』(1998), 『희망학습』(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