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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 하느님 뜻을 정말 모르겠습니다.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4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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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10 05:31
- 하느님 뜻을 정말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나환자는 이렇게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내가 고쳐주마!”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나환자의 청을 굽어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서간의 말씀 곧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나환자의 청은 주님 뜻에 따라 청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 청원 기도에서 보면
나환자의 청은 주님 뜻에 맞기 때문인지 들어 주신 데 비해
나의 청은 안 들어주시는 것 같아 이런 의문이 들곤 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인지,
들어주시지 않는 것을 보면 내 청이 하느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닌지,
나의 청과 나환자의 청이 다르다면 어떻게 다르기에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인지.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요 몇 년 한 젊은 가장을 위해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느님께서 고쳐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치성을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인가? 하고도 생각하고,
겸손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도 생각하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매우 한국적인 생각이고
인간적인 생각 곧 비신앙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게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생각이 있지요.
지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청을 들어주신다는 생각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하늘을 움직인다는 생각이 아닙니까?
인간의 정성이 냉혹한 하느님도 마음을 바꾼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정성보다 작다는 말이고,
인간의 공로에 따라 자비를 베푸신다는 말이 되니
이는 인간의 공로와 상관없이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 교리에 위배 됩니다.
결국 겸손한 믿음이 제게 필요함을 인정합니다.
우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겸손함이 제게 필요하고,
내가 모르는 더 좋은 하느님의 뜻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제게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 그가 당장 치유되기를 바라지만 하느님의 뜻은
인내의 시간을 더 가지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육신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심이 영적으로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몇십 년 신앙생활을 했어도 아직도 하느님의 뜻을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다만 더 좋은 하느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래서 ‘저는 이것을 바라고 청하지만,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하고 겟세마니의 주님처럼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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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닮아가기
<배움과 비움, 겸손의 여정>
우리 삶의 영원한 롤모델; 세례자 요한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명동성당에서 오전 8시, 안성기 사도요한 형제의 장례미사시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의 강론이 참 품위있고 좋았습니다.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위로와 힘, 희망을 주었으리라 믿습니다. 1985년 명동성당에서 혼인미사를 했고, 이어 큰 아들도 이곳에서 혼인했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시 여기서 미사때는 제1독서도 했고, 마침내 2026년 1월9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으니, 혼인생활 만40년, 참 독실한 신앙인의 삶에서 많이 감동하고 배웠습니다.
요즘 고백성사를 드리다보면 많은 분들이 과도한 시간을 유투브에 쏟는다 고백합니다.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유익한 정보가 차고 넘치는지 정말 분별의 지혜가 절실합니다. 건강에 관한 정보도 참 무궁무진합니다. 새삼 강조했던 노년품위의 우선 순위를 마음에 다시 새기게 됩니다.
첫째 하느님 믿음, 둘째 건강, 셋째 돈의 순서입니다. 무엇보다 특히 강조할 바, 하느님 믿음입니다. 하느님 믿음이 빠지면 즉시 하느님 자리에 건강과 돈이란 우상이 자리함과 동시에 자유를 잃게 되고 인간 품위의 상실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산의 하루 가르침>의 내용도 유익합니다.
“회복이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확실하게 결별하는 것이다.”<다산>
이런 회복은 그대도 회개와 통합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회복이요 회개의 삶이겠습니다.
“군자는 바른 성정을 회복함으로써 뜻을 조화롭게 하고, 좋은 무리를 따라서 그 행실을 이룬다.”<예기>
우리 식으로 말해 좋은 도반들과 함께 하느님 중심의 조화로운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충고이겠습니다.
진리는 늘 반복해도 늘 새롭습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가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존경, 사랑이 가득 담긴 분위기에 저절로 떠오르는, 아주 예전 성탄절에 카타리나 수녀님으로부터 빨간 칸나를 선물받고 감동해 쓴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수없이 반복해 나눴지만 늘 새롭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며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며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그대로 공감이 가는 고백일 것이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 대한 세례자 요한의 사랑도 이러하리라 추측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사랑하여 믿는 모든 이들에게 삶의 영원한 롤모델처럼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가고 싶은 분들에게 세례자 요한이 참 좋은 모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례 소식을 요한에게 알립니다.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혜성같이 출현한 경쟁자이자 라이벌이 된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드니 세례자 요한에게는 비상 사태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위축되는 현실에 긴장감과 더불어 질투심이 불처럼 크게 일어날 듯 한데 요한의 내면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한 뛰어난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겸손한 사람인지 깨달으며 참 크게 배우는 느낌입니다. 한치의 주저함 없이 단숨에 터져 나오는 요한의 고백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무엇보다 요한은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없는 요한은 상상할 수 없으니 예수님은 요한의 존재이유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의 친구로 자기를 소개하는 요한에게서 주님과의 깊은 우정관계를 배웁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얼마나 예수님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샘솟는 순수한 기쁨인지요! 이런 세례자 요한과 같은 순수하고 겸손한 자세로 미사를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요한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주님은 날로 커지시고 나는 날로 비워져 작아질 때,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안에서 참나를 발견하니 비로소 샘솟는 참기쁨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부단히 배우고 비워가는 겸손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예수님을 닮아 참 나의 실현에 이를 것입니다. 그래서 강론 제목은 <예수님 닮아가기; 배움과 비움, 겸손의 여정; 우리 삶의 영원한 롤모델, 세례자 요한>으로 정했습니다.
사랑할 때 닮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할 때 끊임없는 배움과 비움이 뒤를 이을 것이며 자발적 기쁨으로 겸손의 여정을 살아갈 때 예수님을 닮습니다. 예수님의 내적 절친인 세례자 요한이 그러했을 것이고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오늘 제1독서 후반부 사도 요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 하나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절친이요 스승이자 주님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요한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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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통해서, ‘빛이신 예수님’이 선포됩니다. 그가 자신을 증언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언한 것은 그 자신을 비운 까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절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상대에게로 건너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요한으로 하여금 그토록 자신을 비울 수 있게 하였을까요?
자신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지 않고 상대를 향하여 있었던 까닭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는 한은 결코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신랑을 향하여 있을 때라야 신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가 친구입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었습니다.”(요한 3,29)
그렇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친구를 향한 까닭입니다. 친구인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할 때 우리는 비워집니다. 자신의 소리가 아니라 친구의 소리를 들으려 할 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떠나와 우리를 ‘친구’(요한 15,15)라 부르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그분을 향하여 나아갈 때라야 그분을 ‘친구’라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는 바람에 자신에게서 빠져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누구를 ‘향하여’ 희망을 두고 있는가? 오늘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신랑’과 ‘신부’의 성경적 표상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표상합니다(예레미아, 에제키엘, 호세아). 그리고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또한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자의 영혼과의 사랑을 아름답게 비유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냅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합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지만,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요한 3,29)
주님!
당신만이 저의 신랑입니다.
당신 마음을 듣게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 빛 안에 머물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제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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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2월 구역장 회의 때입니다. 복음 나누기에서 있었던 한 구역장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자매님은 20년 전에 LA에 살았습니다. 당시 웨딩숍을 하던 친구가 사업을 그만두면서 남는 드레스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드레스를 버리기에는 아깝고, 가지고 있자니 짐이 되었습니다. 구역장은 뉴욕에 있는 친구가 새롭게 웨딩숍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구의 웨딩숍은 드레스가 없어서 허전했습니다. 구역장은 LA의 친구에게 드레스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서 뉴욕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 주었답니다. 뉴욕에 있는 친구는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면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20년이 지난 후에 뉴욕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덕분에 사업을 잘했고, 이제 사업을 그만두려고 하는데 그때 드레스를 보내 준 일이 생각나서 전화했습니다. 이제 드레스를 정리하려는데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구역장은 마침 멕시코에서 선교하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멕시코에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부부가 많은데 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사진을 보여주니 여자들이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레스는 모두 멕시코에서 선교하는 부부에게로 보냈다고 합니다. 어쩌면 쓰레기로 버려질 수 있던 드레스가 새롭게 사업하는 친구에게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쓰레기로 버려질 수 있던 드레스가 새롭게 출발하는 부부의 축복하는 선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구역장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구역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빛에는 두 가지 성질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물질의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파동의 형태입니다. 물질의 형태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만, 파동의 형태는 쌍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리, 전파는 파동의 형태입니다. 우리가 주파수만 맞추면 소리와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쩌면 파동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어쩌면 파동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하늘의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하는 것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을 때입니다. 여인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고, 예수님의 힘과 기운이 여인에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물질의 영역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기도와 신앙은 결코 물질의 영역에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주셨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생각에서는 걱정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면 세례자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쌓았던 명성과 명예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갈등과 분쟁은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됩니다. 물질적인 영역에서 소유하려고 하기에 시작됩니다. 겸손과 온유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파동과 존재의 삶을 살아가면 주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잘못한 사람들이 그 죄의 대가를 치르기 전에 그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도 소중하게 여기시지만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길을 찾기를 더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2026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미운 사람이 있다면,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몸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곳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용서와 화해의 마음으로,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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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기쁜 소식에 대한 갈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있느냐?’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산산히 쪼개진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복음)
기쁜 소식에 대한 갈증!
2026년 1월 9일 금요일
“우물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으면 물을 길어 올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생명의 물을 받기 위해 그 자리에 나아가, 자신을 내어 맡기고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우물로 가야 합니다.”
— 바바라 해리스(Barbara Harris), 마지막 말씀(Parting Words)
성공회 주교 바바라 해리스(1930–2020)는,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우리 각자에게 지혜를 선택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열어 준다고 말합니다: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는 낯설게 들릴지라도,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은총을 거스르는 헛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각자 그리고 공동체로서 인생의 갈림길에 서서 선택을 묵상합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나라의 새 사람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우물가의 여인처럼, 아직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감사하게도 과거의 우리 모습은 이미 벗어났음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만져 주셨기에 달라졌습니다. 달라진 것은, 우리가 모든 하느님의 백성에게서 배울 수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이들로부터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만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갈망합니다. 돈과 권력, 명예와 지위를 목마르듯 추구하며, 그것들에 의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들을 위해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처럼, 교회와 사회의 갈림길에 서 있는 우리는 여전히 선택할 자유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목마르게 갈망하고 있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물질적 가치, 올바른 인맥, 적절한 자격증명, 사회가 중시하는 것들—결코 너희 메마른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없는 덧없는 것들—에 만족하겠느냐? 아니면 너희는 의로움과 평화, 정의, 그리고 모든 하느님의 백성의 해방을 목마르게 갈망하느냐?"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처럼 정의로운 사회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신앙을 증언한다면, 시편 저자와 함께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도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시편 42,1)라고 노래하겠습니까? 아니면 원로들과 함께 ‘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네. 보라, 내가 생명의 물을 거저 주노라. 목마른 이여, 몸을 굽혀 마시고 살아라! 나는 예수님께 나아가 그 생명의 샘물을 마셨네. 내 갈증은 사라지고, 내 영혼은 새로워졌으며, 이제 나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네’라고 노래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참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는 그 생명의 물을 목마르게 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목마르게 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여 지금의 우리보다 더 충실한 신앙인으로 나아가기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각자는 스스로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목마르게 갈망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대답을 인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브라이언 맥라렌의 매일 묵상 "In All Circumstances"(모든 상황 안에서)는 제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이 숨결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눈물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한때 누렸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기억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빼앗긴 것에 분노하기보다, 한때 주어졌던 것을 기뻐하며 감사드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즉시 한 줄을 더하고 싶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영원히 저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Art D.
References
[1] From the hymn, “I Heard the Voice of Jesus Say” by Horatio Bonar.
Barbara Clementine Harris, Parting Words: A Farewell Discourse (Cowley Publications, 2003), 39–40, 44–4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ul Macallan,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밝은 꽃처럼, 관상과 실천의 은총은 고통스러운 현실 한가운데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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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요한 3,22–30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며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초대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말씀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빛이 사라짐을 슬퍼하지 않았다.
참된 기쁨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을 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요한의 돌봄은
사람을 자신에게 묶어 두는 돌봄이 아니라,
사람이 하느님께 자유롭게 나아가도록 길을 비워 주는 돌봄이었습니다.
그는 사라지는 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 사명이 완성되었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관계 속에서
존재감을 키우려 애쓰는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주님을 더 잘 만나도록
기꺼이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인가?
참된 돌봄은
붙잡는 능력이 아니라
기쁨으로 내어주는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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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요한이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주님께 몰려가기 시작했을 때 한 말입니다. 요한의 역할은 이제 끝난 것입니다. 하늘의 능력과 하늘의 뜻을 지니신 분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역할이 무엇이었습니까?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맞이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회개 하십시오.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세례로써 준비 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통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았습니다. 구세주가 오실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하늘나라가 열렸습니다.
요한과 같은 사명은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요한이 시작했다면 우리는 끝을 맺어야 합니다. 요한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라고 외쳤다면 우리는 ‘하늘나라가 열렸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고는 온 세상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제 목표를 가졌으니 힘들더라도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가끔은 넘어지고 아프더라도, 어쩌면 힘겨워 일어설 수 없을지라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요한처럼 말하십시오.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안아 주실 것이며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실 것입니다.
⭐지지자(adherent)
정당의 이념이나 개인의 사상에 대해 지지하는 사람을 ‘지지자’라고 합니다.
조금 더 친근하고 가벼운 지지자라는 의미로 ‘서포터’가 있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서포터이시면서 동시에 지지자이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면서 동시에 지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지한다는 말은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동의하고 힘을 보탠다.
2. 응원하고 편을 든다.
3. 뒷받침하고 보호한다.
주님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지지자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외로운 사람, 소외당하는 사람,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
그들에게 우리가 받은 주님의 따스함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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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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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지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하느님 용서의 범위는 무한합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어떤 죄를 말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성령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성령께 바치는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일까요?
모두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희망을 버리는 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에 대해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유다는 죄를 지은 뒤에 절망에 빠져 스스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배신이라는 큰 죄를 지었지만, 끝내 예수님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죄에서 벗어나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에 관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진짜 불만은 논쟁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몰려가는 현상’에 대한 위기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공을 보며 인간적인 시기심과 박탈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스승인 요한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며, 세례받는 사람의 수로 영적 권위를 판단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요한은 흔들리는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요한은 자신의 인기도, 예수님의 높아지는 위상도 모두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보다 앞서 파견된 ‘선구자’임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이 구절은 단순히 겸양을 떠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 구원 역사 안에서 꼭 필요한 말입니다. 태양(예수님)이 떠오르면 샛별(요한)은 빛을 잃고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에게 ‘작아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완성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지움으로써, 역설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높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 안에 머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서로의 얼룩을 애틋하게 여길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기 시작한다(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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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의 것(?)입니다!!!
"사람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밖에는 받을 수 없다." 다른 번역에서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만을 차지할 수 있다."라고 보통은 생각합니다. 이는 며칠, 아니 평생 묵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 혹은 어떤 이유로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내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 외의 것은 '운'이나 '우연', 혹은 '섭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가장 고유하게 소유하는 것조차도 하느님의 가장 순수한 선물임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우리 것일수록 더욱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의 것일수록 더욱 우리의 것입니다.
이것은 소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미니코회 신비주의자 중 한 사람인 요한 타울러(1300–1361)는 "하느님은 우리가 소유한다고 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우리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레이먼드 블랙니(Raymand Blackney: 1941)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면, 사람도 하느님이 되었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서 빌려올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곧 여러분의 것이며, 따라서 여러분이 얻는 것은 곧 여러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내면에서 나오지 않은 일은 죽은 것입니다… 인간의 일이 살아 있으려면, 그것은 외부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에서 솟아나야 합니다."
얼마나 심오한 말씀입니까?!
그러니 "나는 있는 나다!"라는 정체성은 곧 우리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자만할 필요가 절대 없습니다. 우리가 "나는 있는 나다"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말은, 즉 하느님 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하느님처럼 자기 자신을 비우고 남을 채워주는, 즉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너와 나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희생적 사랑을 살아야 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성탄 시기의 마지막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번 성탄에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성탄이 얼마나 위대했든지, 주님께서는 아마도 마지막에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셨을 것입니다(요한 2,10 참조). 주님께서는 성탄을 영광스럽게 완성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 사랑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청해야 합니다(마태 7,7 참조).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확신은 이렇습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무엇을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가 청한 것은 이미 우리 것임을 압니다."(1요한 5,14-15).
그래서 조셉 머피 박사는 기도는 청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우리 존재 안에 이미 하느님이 살아계시다면, 아니 하느님과 나의 정체성이 같은 것이라면 그분의 것이 이미 '나'의 것이고 그분의 뜻은 '나' 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는 희망의 확신을 갖고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부께는 우리 가족과 친구들 은인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회개와 구원을 청하도록 합시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는 '내'가 작아지고 그분이 내 안에서 커지도록 청하도록 합시다. (요한 3,30).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기뻐할 수 있도록 청하도록 합시다. (요한 3,29). 권위 있는 이들을 위해 전구하며,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살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기도하도록 합시다. (1티모 2,1-2). 예수님과 함께 모든 이가 하나 되어,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신 것처럼 하나 되기를 기도하도록 합시다. (요한 17,21). 무엇보다도 모든 이가 '구원을 얻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기도하도록 합시다. (1티모 2,4). 우리는 아직 가장 좋은 성탄 선물을 열지 않았습니다. 청하고 열어 봅시다!
그러면 거기에 온 우주의 주님이요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참 사랑으로 고요히 머물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과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어버이 하느님,
당신께 우리 모두의 회개와 구원을 청하오니, 당신의 자비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님, 제가 작아지고 당신이 제 안에서 커지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제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기뻐하며,
권위 있는 이들이 당신 뜻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살도록 저희의 전구를 받아 주소서.
예수님과 함께 모든 이가 하나 되어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신 것처럼 교회와 세상과 우리 가족과 공동체가 하나 되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모든 이가 구원을 얻고 진리를 깨닫게 하소서.
아직 열지 않은 가장 좋은 성탄 선물을 저희가 청하고 열어,
온 우주의 주님이요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참 사랑으로 저희 안에 고요히 머무심을 발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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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X X X X X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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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3,22-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시자,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열릴 참된 기쁨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신랑’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만 어제까지와는 달리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증언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던 요한의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 다르지요.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들과는 달리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신 게 아니라,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던 바로 그 때,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요한의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자기들 스승의 아성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에는 자기 스승인 요한이 세례 운동을 이끄는 ‘대표주자’로써, 군중들 사이에서 두터운 신임과 존경을 받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제자인 자신들에게는 크나큰 명예이자 영광이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자 많은 이들이 그분께 세례를 받으려고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요한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까봐 그에 따라 자기들이 요한 덕분에 누리던 명예와 영광이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한 것이지요.
그래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스승인 요한에게 하소연하자, 그는 너무나 덤덤한 태도로 이렇게 답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인기를 누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이라는 점을, 그러니 그 은총을 받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남들보다 그 은총을 적게 받을까봐 걱정할 게 아니라, 나에게 그런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따라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은 구원자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일꾼’일 뿐임을, 자신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써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도록 이끌어야 함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지요.
세례자 요한의 말처럼, ‘주님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하면서 겪는 실망, 좌절, 원망,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들은 모두,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할 내가 그분보다 앞에 서려고 드는 교만 때문에,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명해야 할 내가 그분의 뜻보다 내 뜻을 먼저 추구하려고 드는 탐욕 때문에 발생합니다. 하지만 부족하고 약한 내가, 허물과 죄로 가득한 내가 주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겠다고 억지를 부려봐야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될 뿐이지요. 그러니 겸손한 자세로 주님께 순명하며, 그분께서 밟고 지나가시는 ‘길’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작고 하찮아 보이겠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워 보일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마음을 참된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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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즘 매일 미사를 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많이 힘들 때 찾아가는 곳이 성당입니다. 저는 모든 힘든 일이 생기면 무조건 성당으로 미사 참례를 합니다. 그것도 규칙적으로 찾아가는 곳이 성당입니다. 어제는 미사 참례를 마치고 나서 집으로 복귀하던 중에 예전에 같이 레지오 같이 하던 단원들을 만났습니다. 참 한결 같은 분들입니다. 신앙은 한결같은 것이라는 것을 그분들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이라 귀담아 들을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분들 중에 의사 선생님도 계신데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난 성당에서 조용히 살려고 해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이 다 알아서 잘 할 것이니 난 ..조용히 있으려고 해.. 그런데 이 시점에서 그분의 Spec.은 서울대 의과대학교를 나온 분입니다. 그런데 목소리를 높이 거나 그런 적은 없으신 분입니다. 항상 조용한 분입니다. 우리 성당 사람들이 그분에게 모두 가는데 병도 잘 고치지만 의료비는 공짜로 해주시는 분이라 모두 그분에게로 갑니다. 가난한 사람들 소리 없이 도우세요. 남들 모르게. 어제 제가 고민하던 것 중에 하나가 성당에 가면 왜 그리 똑똑한 사람들..?? 그런데 그분을 만나서 다시금 깨닭은 것은 신앙은 덕을 쌓는 것이다. 조용히 묵묵히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고자질 합니다. 아니 선생님에게 세례를 받은 분이 세례를 줍니다. 그 순간 요한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 져야 한다. 그 말은 그는 영적으로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참 영적으로 산다는 것이 정도입니다. 세상에 성당 안에서 영적으로 자신을 안다는 것? 100명 중에 한 명 정도 나올까? 세례자 요한의 삶이 참 대단한 인물입니다. 앞서 서울대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똑똑한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이 하라고 하고 나는 조용히 살아갈 것이다.. 영적으로 조용히 하느님 뜻 찾아가겠다. 신앙의 정도는 덕을 쌓는 것입니다. 그분이 보여준 것이 그것입니다. 신앙의 3가지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삶, 겸손, 하느님 사랑인데 그것이 집약체로 보여지는 것이 덕입니다. 어제 아침에 마음 고생하였던 것이 부질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주님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신앙은 똑똑함이 아니라 덕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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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세례자 요한의 존재와 사명
요한 복음저자가 전하는 오늘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살림이나 애논 등 이 이야기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들이 정확하게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를 알 수 없으나, 본문도 언급하고 있듯이,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감옥에 갇히기 전의 일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은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주님 오심과, 나아가 주님이 세우실 하느님 나라 건설 준비에 끝까지 최선을 다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문제는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예수님의 세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데서 비롯됩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분위기로 보아, 요한이 제자들에게 당신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한 어조로 정리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로의 쏠림 현상에 대하여 제자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요한의 제자들의 이러한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사명 수행 초기부터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스승으로 등장하는(요한 1,35)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가 아닌지 자문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루카 3,15). 제자들에게 단식과 기도를 가르쳤으며(마르 2,18; 루카 5,33; 11,1), 그의 힘찬 목소리는 전 유다 지방을, 특별히 당대의 지배 세력을 뒤흔들었습니다(마태 14,5; 마르 6,20; 루카 3,19).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며, 회개의 표시로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라고 독려합니다(마르 1,4-5). 사람이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랑도 헛된 것이라고 소리 높이기까지 합니다(마태 3,8-9).
스승 요한의 권위에 찬 말씀과 몸짓에 탄복한 제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오심과 성령의 세례에 대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사도 18,25; 19,2 참조), 이들과 초대교회 공동체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마르 2,18).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었습니다. 앞서 여러 증언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오늘, 예수님의 명성과 쏠림에 이의를 제기한 제자들에게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소개하며,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하는 존재’로 천명함과 아울러,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하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이 한 마디의 고백 속에 요한은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다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정의와 겸손의 인물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내일 주님 세례 축일), 본격적인 복음전파 사명에 뛰어드십니다. 요한이 예고했던 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죄인들을 멸망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구원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 하루, 요한하면 떠오르는 정의의 목소리와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겸손의 자세로, 이웃에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이끄는 가운데, 가톨릭 신앙인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드러내는, 귀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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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생활묵상 : 고통과 시련이 축복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면...... 2
모든 사람은 한평생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행복할 것 같은 사람 같지만 그 사람 속속 내막을 들여다보면 자기만의 고통이 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그런 사람의 고통은 보지 않고 자기에겐 없고 그 사람에게만 있는 행복만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럴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단한 갑부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활 자체가 일반인이 보기엔 모두가 다 행복한 삶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근데 실제 그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소박한 일반 시민이 누릴 수 있는 삶을 동경할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아주 맛있는 냄비우동이 있습니다. 일반 서민도 먹을 수 있고 또 갑부도 먹을 수 있습니다. 가난해서 냄비우동을 먹을 수도 있지만 충분히 아주 비싼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옛날 추억이나 또 옛날 잊을 수 없는 맛 때문에 냄비우동이 생각나 먹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돈이 없어서 냄비우동을 먹어야 한다면 약간 비참한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그냥 추억 때문에 먹는다면 그때도 과연 비참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도 이런 관점에서 한번 달리 바라보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힘든 고통의 시간 속에서 묵상한 게 있습니다. 지금의 고통의 시간이 그냥 고통의 시간만으로 흘러간다면 너무나도 애썩한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의 고통의 시간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시간이 되기 위한 게 있다면 그게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묵상을 많이 해봤습니다. 나름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신 것은 아니지만 만약 하느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셨다면 그 사람에게 말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라면 경우가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고통을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과 겸손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건 저의 작은 체험이라기보다는 어느날 막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실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직감으로 얻은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도 다양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이기에 신앙인의 관점에서 고통을 재해석해보고자 합니다. 고통이 있게 되면 그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자신에게서 실제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후자보다는 전자가 더 많습니다. 외부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은 고통은 그저 고통으로 끝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을 때 자신 내부에서 그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찾아서 해결책을 강구하려고 애써는 사람은 그 고통의 시간이 자신을 성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고통을 바라보는 마음 자세입니다. 그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자신을 단련시키고 성화시키기 위한 거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는 것입니다. 그걸 알게 됐을 땐 그땐 그게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놀랍게도 고통스럽지만 그게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인식을 하게 되면 그때 느끼는 그 고통은 인식을 하기 전에 느낀 고통과 인식 후에 느낀 고통과는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걸 체험하게 되면 이 말씀이 확실히 와 닿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축복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면 그건 고통을 바라보며 그 고통이 나를 단련시키는 단련제처럼 단순히 고통을 고통으로만 해석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일어나는 고통도 쉽지만은 않지만 이렇게만 해석을 한다면 우리가 가는 신앙의 길에서 고통을 만난다고 해도 쉽게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면역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하려고 노력을 하게 되면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자신을 성화시키는 데 필요한 하느님의 축복이 서려 있는 시간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위인에게도 이와 같은 시간이 있었다는 건 성경이 또한 증명을 해 주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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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고 안성기 배우의 마지막 삶을 보며........
유튜브로 고 사도요한 안성기 배우님의 마지막 영결식과 여러 미담을 보며 느낀 단상입니다. 각계 각층에서 이어진 조문 행렬을 보며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한다면 그 사람의 마지막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으면 같은 직종의 배우들로 보통 보면 많은데 안성기 배우는 보통의 경우와는 사뭇 많이 달랐습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인간으로서의 삶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도 사람은 우리는 신앙인이기에 또 달리 표현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부여받고 신앙인이 되었다면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한 가지 아주 강력한 인상을 준 부분이 있습니다.
막대한 자산의 대부분을 보통 보면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보통인데 거의 대부분 사회에 기부로 환원한다는 사실입니다. 돈의 규모를 떠나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환원도 환원이지만 그렇게 하는 동기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아들의 생각이 역시 훌륭한 아빠의 그 아들과 같았습니다. 아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분명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그 재산은 아빠의 재능에 대한 반대급부로 관객이 보내 주신 성원이었기에 다시 원래의 주인으로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마인드, 이런 마인드는 나이 여부를 떠나 정말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소중한 생각입니다.
단순히 재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함께 생각한 게 있습니다. 꼭 재산만 많이 있는 사람만 이런 것을 할 수 있을까요?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건 재산만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재산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재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과연 그게 무엇일까 하는 진지한 묵상을 해봤습니다. 묵상 끝에 내린 결론은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표현을 거창하게 해서 그렇지 단순하게 표현하면 한 번뿐인 인생, 삶을 살면서 자신의 일생 삶 자체가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신앙인으로서 이보다 더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는 게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도 천주교를 떠나 타 종교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그보다 금상첨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아주 고상하고 위대한 족적을 세상에 남겨야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원래 위대함은 소박한 평범함 속에서도 빛을 발할 때가 있기 때문에 일상의 일에서도 감사와 그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을 한다면 비록 그 삶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삶을 하느님만 인정해 주시면 그 삶이 더 위대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박수갈채를 받아야만 훌륭한 삶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보다 더 훌륭한 게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입니다.
설령 세상에서는 박수갈채를 받는다고 해도 하느님으로부터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런 삶은 비참한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도 중요하지만 천상의 삶을 염원하는 신앙인이기에 영원한 천상의 삶을 살기 위해 지금 이 땅에서 어떻게 그 삶을 준비해야 할지 한번 묵상해 보시는 시간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긴 시간처럼 남아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마지막 시간이 도래했을 때 다시 역으로 시간을 되돌려 보면 인간의 한 생애는 참으로 화살이 날라가는 시간과도 같을 정도로 아주 짧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이 짧은 시간을 자신의 영혼을 위해 쓰겠지만 아둔한 사람은 이 세상이 모든 것인 것처럼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보낼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냐 아니면 아둔한 사람이 될 것이냐는 지금 나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걸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둔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불행한 영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선택을 하는 불행한 사람은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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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0.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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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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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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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465
1월10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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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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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구본용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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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품격있고 아름다운 퇴장!>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원조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사실 맛이든 특정 분야의 기술이든 최초 제안자나 개발자에 대한 권한이나 특혜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지나칠 때도 꼴불견입니다.
한 음식단지에 갔다가 요란스러운 간판들을 보고 좀 웃었습니다. 그야말로 ‘원조 논쟁’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한집 간판이 50년 전통의 원조라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조금 더 가니 원조도 모자라 ‘진짜 원조’라고 강조점을 뒀더군요. 좀 더 지나니 그것도 모자라 ‘진짜 오리지널 원조’라고 떡하니 붙여놓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원조’에 대한 집착은 각별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요르단강에서의 세례 역시 한 때 원조 논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세례 하면 당연히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이었습니다. 이름도 세례자 요한이지 않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한때 전국민적 세례 갱신 운동을 전개하며 전국구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물로 세례를 받았고 그의 거침없는 외침에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에게 인품에 매료된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으며 ‘세례자 요한 당(黨)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한때 그렇게 잘 나가던 스승 세례자 요한이었는데... 요즘은 파리만 날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최근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훨씬 강력한 빛과 존재감으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이었기에 순식간에 전세는 기울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또 한편으로 억울했으면 이런 표현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보다 늦게 개업해놓고 세례 베푸는 일에 있어 더 큰 성공을 보이는 예수님에게 일종의 반감까지 지니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상황이 그런데도 스승은 별 위기감이나 전세를 뒤집을만한 묘안도 내놓지 않으니 더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이 보인 태도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쇄락과 반비례해서 급격히 떠오르는 예수님의 존재감 앞에 세례자 요한은 전혀 동요되지 않습니다. 억울함이나 적개심도 품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 사이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 원조 논쟁 앞에서 조금도 망설이거나 그 무엇 하나도 감추지 않고 명백하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27-30)
요한은 이제 자신이 무대에서 내려올 순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했습니다.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세례자 요한의 뇌리 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참으로 위대한 인물인 것은 분노하고 억울해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경축하면서 무대에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을 향한 한없는 존경심과 깊은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구세주를 위한 자신의 퇴장 앞에서 그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행복해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물러섬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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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www.youtube.com/channel/UCkiWu8_ctudLqP81Yng1v_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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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향하는 길이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함께 주고 있을 때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고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로 가기 위한 준비단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두 세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요한이 질투를 할 것 같아서 그리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요한은 신부가 신랑에게로 향하는 ‘길’과 같은 존재란 뜻입니다. 길은 두 갈라진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고 싶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길은 그래서 돋보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길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되고 목적지로 빨리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신랑의 친구,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려면 바로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가기 위해 밟고 지나가는 그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록 지금은 작아질지언정 영원한 분으로부터 영원히 사랑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들을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검은 돌들이 사는 산동네가 있었습니다. 이 돌들은 로마 시대에 길을 만드는 데 쓰였습니다. 두 친구 돌들도 서로 미래에 어느 길이 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멋지게 생긴 돌이 친구 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황제가 다니는 길이 될 거야. 비록 돌에 불과하지만, 황제가 다니는 길은 인간들도 부러워한다고. 너는?” “나는 잘 모르겠어. 뭐 필요한 데 쓰이겠지. 너야 평평하고 단단하니까 임금이 다니는 길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울퉁불퉁 못 생겨서 황제의 마차가 다니기에 적합하지 않거든.”
드디어 인부들이 와서 두 돌을 파냈습니다. 역시 황제가 다니는 길에 친구 돌이 먼저 박혔습니다. 서로 헤어지며 둘은 슬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황제를 ‘네로’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마차가 자신의 머리 위로 지나갈 때는 조금 고생스럽기는 해도 사람들의 함성과 꽃이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차가 지나갈 땐 머리가 좀 아팠지만 그래도 영광을 받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울퉁불퉁한 돌은 사람이 밟고 지나다니는 시골길에 박혔습니다. 그런데 그 길 위로는 죄수들이 피를 흘리며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처형되는 사람들이 끌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돌이 평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족쇄를 찬 사람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지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바오로라고 부르는 죄수가 또 그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돌에 그 사람의 피가 떨어졌습니다. 돌은 고개를 들어 바오로라는 죄수의 목이 세 번 튕긴 자리에서 샘이 솟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황제의 길로 사용되었던 친구 돌은 마차 바퀴에 갈려져서 더는 쓸 수 없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위에 흙을 덮고 새로운 돌들로 새로운 길을 만들었습니다. 잠깐 황제의 길이 되었던 친구는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형장의 길이 되었던 돌은 사형 집행이 더는 이뤄지지 않았기에 시골에 가난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로 아직도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둘레에 줄을 쳐서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에서 기도하고 찬미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자신에게 뿌려졌던 바오로의 피가 성인의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 박힌 돌은 2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보면 어떤 길들은 ‘비아 아우렐리아’처럼 그 길을 만든 황제의 이름으로 여전히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비아 그리스도’입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죽었지만 여전히 그 황제가 기억되는 곳에서는 그 황제가 만든 길이 그 황제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로부터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향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밟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그 길을 간 그분의 신부가 영원히 그 길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아 영원히 사는 방식입니다.
나를 거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세속-육신-마귀의 자신을 죽이고 샘이 솟게 하는 바오로의 삶을 살게 됩니까, 아니면 세속-육신-마귀를 쫓는 네로 황제의 삶을 살게 됩니까? 우리가 세례자 요한과 같아지려면 어떠한 길이 되어야 하는지 명명백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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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2월 구역장 회의 때입니다. 복음 나누기에서 있었던 한 구역장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자매님은 20년 전에 LA에 살았습니다. 당시 웨딩숍을 하던 친구가 사업을 그만두면서 남는 드레스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드레스를 버리기에는 아깝고, 가지고 있자니 짐이 되었습니다. 구역장은 뉴욕에 있는 친구가 새롭게 웨딩숍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구의 웨딩숍은 드레스가 없어서 허전했습니다. 구역장은 LA의 친구에게 드레스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서 뉴욕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 주었답니다. 뉴욕에 있는 친구는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면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20년이 지난 후에 뉴욕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덕분에 사업을 잘했고, 이제 사업을 그만두려고 하는데 그때 드레스를 보내 준 일이 생각나서 전화했습니다. 이제 드레스를 정리하려는데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구역장은 마침 멕시코에서 선교하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멕시코에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부부가 많은데 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사진을 보여주니 여자들이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레스는 모두 멕시코에서 선교하는 부부에게로 보냈다고 합니다. 어쩌면 쓰레기로 버려질 수 있던 드레스가 새롭게 사업하는 친구에게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쓰레기로 버려질 수 있던 드레스가 새롭게 출발하는 부부의 축복하는 선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구역장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구역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빛에는 두 가지 성질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물질의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파동의 형태입니다. 물질의 형태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만, 파동의 형태는 쌍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리, 전파는 파동의 형태입니다. 우리가 주파수만 맞추면 소리와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쩌면 파동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어쩌면 파동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하늘의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하는 것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을 때입니다. 여인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고, 예수님의 힘과 기운이 여인에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물질의 영역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기도와 신앙은 결코 물질의 영역에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주셨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생각에서는 걱정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면 세례자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쌓았던 명성과 명예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갈등과 분쟁은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됩니다. 물질적인 영역에서 소유하려고 하기에 시작됩니다. 겸손과 온유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파동과 존재의 삶을 살아가면 주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잘못한 사람들이 그 죄의 대가를 치르기 전에 그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도 소중하게 여기시지만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길을 찾기를 더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2026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미운 사람이 있다면,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몸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곳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용서와 화해의 마음으로,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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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같은 장소라도 마음이 편할 때가 있고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또 칭찬을 들으면 보통은 감사한 마음이 들지만, 때로는 그마저 불편하기도 합니다.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할 때 마음은 어떻습니까? 편안하십니까? 불편하십니까?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불편한 마음을 느끼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3,25). 그들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러 가는 것에 불편한 마음을 드러냅니다(3,26 참조).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3,28)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 예수님께서 중심이심을 확실히 밝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몰라서 이해가 되지 않거나, 어색하고 불편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 신앙의 중심이심을 마음에 새기고, 꾸준히 미사에 참례하며 전례를 따르다 보면 어느덧 편안해지고 충만해지는 마음을 느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앙이 생활이고 생활이 신앙이 되어 갈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이 어렵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뜻을 찾으며, 기도와 인내로 이겨 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불안해서 주님을 더 찾고 무엇이든 주님과 나누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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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22-30: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고백을 중심으로 한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때,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요한은 자신이 단순한 전달자, 선구자, 준비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다.”(28절) 그는 자기 자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자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은 자신을 빛이 아니라고 고백하며, 오히려 빛을 증거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참된 겸손이야말로 인간이 설 자리를 지켜 준다.”(Tractatus in Ioannem, 14,5)
요한은 “사람은 하늘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27절) 한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도, 제자들이 따르는 것도,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결과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을 해설하며 “요한은 인간의 질투심을 초월했다. 그는 자신에게서 무언가 빼앗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이 드러나고 있음을 본 것이다.”(Homilia in Ioannem, 30,1)라고 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소개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이제 자신은 기뻐하며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과 교회를 ‘신부’로 바라보았다. 오리게네스는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친구다.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는 영혼마다 그 기쁨에 참여한다.”(Commentarium in Ioannem, VI,29) 교회는 이 이미지를 발전시켜,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와 교회(신부)의 일치를 ‘구원의 신비’로 해석했습니다.(에페 5,25-32)
요한의 마지막 고백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사명을 다한 기쁨,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참된 겸손의 표현이다. 성 베다 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커져 갈수록 인간의 그림자는 작아진다. 그러나 그 빛 안에서 작아지는 것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다.”(In Evangelium Ioannis Expositio, III,30)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겸손을 가르친다. 우리가 사람들을 우리에게 묶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빛이 아니라 빛을 증거하는 자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사명은 다할 때 물러날 줄 아는 기쁨의 겸손이라는 것을 세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0절) 이 말은 우리 삶의 지침이다. 나의 자리, 나의 명예, 나의 성공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시도록 내어드리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이다. 요한 세례자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도 언제나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낳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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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아니라 우리 님일세>
요한 3,22-30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내가 아니라 우리 님일세>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 3,28)
벗이여
나에게서
그대에게
나를 보내신
우리 님이
느껴지시는가
고마우이
그대가
만나야 할 분은
나 너머 우리 님이니 말일세
벗이여
나에게서
그대에게
나를 보내신
우리 님이
느껴지지 않으시는가
미안하이
그대가
만나야 할 우리 님을
내가 가리고 있으니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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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구원’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2-30)
1)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구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2ㄴ-23)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6-27)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열성적인 선교활동의 일차 목표는 ‘나 자신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또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실격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깨달음과 고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주님께서 구원해 주지 않으시면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께 자비를 간청해야 합니다.
2) 바오로 사도의 말은, 세례자 요한에게도 적용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구원받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을까? 아닙니다. “나도 주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라는 말은, 원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라는 뜻인데, “인간이란,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셔야만 하는 존재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도 포함시켜서 한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임무 수행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직자든지 수도자든지 누구든지 간에, 구원받기로 확정되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직자들의 직무 수행의 일차 목표는 ‘자신의 구원’입니다. 남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직무를 수행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과 자만심은 누구에게나 큰 걸림돌이 됩니다.>
3)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라는 말에서, 신부’는 ‘모든 신앙인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고, 그리고 ‘신랑 친구’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요한이 자신은 ‘신부’가 아닌 것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이 표현은 자신의 임무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주님의 구원 사업에서는 세례자 요한도 ‘신부’에 포함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2코린 11,2) 이 말은, 자신의 직무를 설명한 말이고, 순결한 처녀’ 라는 말에는 바오로 사도 자신도 포함됩니다.
4)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는 말은, “이제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실 때가 되었다. 그러니 나는 물러나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주인공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그 주인공이 등장하면 퇴장하게 됩니다. 이 말을,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나타내는 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론 요한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은 맞지만, 이 말은 ‘겸손’이 아니라, 자신의 임무 완수를 나타낸 말이고, “나를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아라.” 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더 드러내고 예수님을 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명강사’ 라고 소문난 사람들이 사람들의 인기에 취해서 그렇게 변해갑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마태 10,24-25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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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고,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자리에 있든지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내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는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받았을 것 같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주인공이 아니라 보조하는 역할이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이다.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당연하지 않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한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다. 물러설 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 보다. 어떤 이는 정치인이 되려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 ‘소신도 없어야 하고,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 고 말한다. 오늘날 정치판이 가관이다. 참 안타깝다.
‘요한의 세례는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다.
우리가 헌신과 희생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우리는 변덕쟁이가 아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이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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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정용 크리스토퍼 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세례와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는데, 세례자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시는 것을 본 요한의 제자가 요한에게 찾아가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사실 세례는 예수님보다 요한이 먼저 주었습니다. 일찍이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광야에서 나타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사람들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마태 3,1-6 참고)
또한 백성들은 기대에 차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루카 3,15) 그랬기에 요한의 제자들은 나중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시고 또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불편했나 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세례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서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과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밝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세례자 요한이 뛰어난 것은 그가 광야에서 고행을 했다거나, 권력자인 헤로데에게 직언을 했다거나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힘에 대해 믿었고, 또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해서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마태 11,11 참고) 이라고 불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혼인 잔치에서 자신은 한낱 신랑의 친구일 뿐임을 깨달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 예수님을 드러내었습니다.
우리는 요한처럼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이들에 비교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기보다 하느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을 때, 우리는 요한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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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창환 다니엘 신부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다 땅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가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기 위해서 몰리는 것을 이야기 하며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반응에 요한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라는 대답을 하며 자신의 사명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이제 자신의 시대는 끝이 났으며 드디어 오셔야 할 분이 오셔서 하늘의 일을 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그 다음은 사라지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단순히 자기를 ‘신랑의 친구’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하는 신랑의 들러리입니다. 들러리의 임무는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에 맞아들일 때 그의 임무는 끝이 납니다. 즉 세례자 요한의 임무도 신부인 인류가 신랑이신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도록 잘 준비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다 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덧붙여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하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이 말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의 자세가 얼마나 예수님을 증언함에 있어서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칫 그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칭송과 따름을 통해서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우쭐 될 수도 있었지만, 본인의 임무에 충실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세례자 요한의 이러한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자세!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하는 자세!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의 강론’을 마치면서 저 또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본받아 사제의 직분에 충실하며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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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지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하느님 용서의 범위는 무한합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어떤 죄를 말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성령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성령께 바치는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일까요?
모두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희망을 버리는 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에 대해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유다는 죄를 지은 뒤에 절망에 빠져 스스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배신이라는 큰 죄를 지었지만, 끝내 예수님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죄에서 벗어나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에 관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진짜 불만은 논쟁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몰려가는 현상’에 대한 위기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공을 보며 인간적인 시기심과 박탈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스승인 요한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며, 세례받는 사람의 수로 영적 권위를 판단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요한은 흔들리는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요한은 자신의 인기도, 예수님의 높아지는 위상도 모두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보다 앞서 파견된 ‘선구자’임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이 구절은 단순히 겸양을 떠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 구원 역사 안에서 꼭 필요한 말입니다. 태양(예수님)이 떠오르면 샛별(요한)은 빛을 잃고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에게 ‘작아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완성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지움으로써, 역설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높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 안에 머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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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도 ‘주님 공현’은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2열왕기>(5,1-27)에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을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게 하여 나병을 낫게 함으로써 야훼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을 직접 치유하심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민수기>에 따르면, 건강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고(민수 5,2-4),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엎드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깨끗하게 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레위 13,45-46), 나병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면 그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물며 부정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만져서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성모님께서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게 하신 것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자신은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당신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요, 사랑이신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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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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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세주, 그리스도 예수님>
-우리를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먹이시는 분-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며 의로우시다.”(시편112,4)
2026.1.9.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미사중 시편 입당송도 우리를 올곧게 살도록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이어지는 본기도 역시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북돋우는 아름다운 내용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별의 인도로 구세주의 탄생을 알려 주셨으니, 저희가 언제나 구세주를 믿고, 구원의 신비를 깨닫게 하소서.”
구세주 그리스도 예수님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2026년 병오년 연초에 참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운 선물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1월5일 국민배우 안성기 사도요한의 선종입니다. 선종의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그의 선물같은 아름다운 생애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온화한 인품인지 정말 공부하는 마음으로 많이 배웠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2008년 선종한 선우경식 요셉 원장, 작년 2025년 선종한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입니다.
안성기 사도 요한을 <선배이자 스승이요 아버지처럼> 섬겼던 유명배우 이정재와 정우성은 가족처럼 상복을 입고 시종일관 빈소에 머물며 조문객을 맞이함으로 깊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오늘 1월9일 명동대성당에서는 오전 8시 장례미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가톨릭교회는 물론 대한민국 온 국민에게 주신 <참 아름다운 선물> 국민배우 안성기 사도요한이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주님 안에, 또 많은 이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참삶을 위한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습니다.
“도리를 지키고 사명을 충실히 했을 때, 하늘의 도움을 구할 자격이 생긴다.”<다산>
“군자는 평이한 곳에 머물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요행을 바라고 위험한 짓을 한다.”<중용>
어제는 수녀원에서 피정지도중이지만, 선물로 받은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만 인생이다>라는 메시지가 참 유익하다 싶어 많은 시간을 내어 참 많은 분들과 나눴습니다.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는 물론 두 다리로 서있을 수 있을 때, 바로 직립인간 두발로 서서 양팔을 벌려 하늘 보고 만세 기도를 바칠 때 진짜 살아 있는 인생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제가 2023년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부터 기상전,후 만세칠창 바치기 올해로 4년째가 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이보다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는 없습니다. 간절하고 절실히 주님께 청할 때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우리 가난하고 병든 불쌍한 보편적 인간실존을 상징합니다. 양상이나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영육으로 병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걸린 병자는 구세주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하니 그대로 가난과 겸손의 절정이요 저절로 터져나오는 간청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병자의 간청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십니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연민의 마음, 따뜻한 스킨쉽, 권능의 말씀이 하나된 삼박자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겸손하신 주님은 불필요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해 치유된 그에게 조용히 당부하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율법에 따라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당부하십니다. 기존의 율법을 존중하시며 절차에 충실하신,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친절하고 섬세하고 주님의 면모가 감동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우려하신대로 소문이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 모여들자 잠시 멈추고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십니다.
주님의 “외딴곳에서의 기도!”
반드시 보고 배워야 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먹이시는>, 바로 <교사로서, 의사로서, 영양사로서> 우리를 살리는 모든 활동의 원천이 바로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의 기도에 있음을 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이런 예수님과 믿음의 일치를 간곡히 권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여 늘 모시고 일치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지닌 진짜 삶임을 깨닫습니다. 호흡에 맞추어 끊임없이 예수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과의 일치를 깊이하는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의 수행도 참 생명의 삶에 좋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모시고 주님과 하나되어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의 참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먹이심으로> 우리를 전인적으로 살리십니다. 다음 아름다운 영성체송이 이를 요약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네. 하느님이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네.”(1요한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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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하늘이 먼저 열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조용히 받는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졌음을
아는 사람은
얻음 앞에서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건강한 신앙은
자기에게 맡겨진
몫에 충실해지는
길입니다.
얼마나 온전히
맡길 수 있는가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참된 깊이입니다.
모든 은총은
우리의 교만을
중심에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필요한 때에
주십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은총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위치를
진실하게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삶으로 드러나는
겸손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감사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받았음을
아는 이는
교만하지 않고,
잃음 앞에서도
믿음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얻기 위해 애쓰는
인생이 아니라,
이미 주어지는
은총의 흐름에
맡기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늘에서 왔음을
우리가 알면
가졌다고 할 것도,
잃었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뜻 안에서
허락하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기에,
소유가 아니라
감사로 살아가는
감사의 오늘입니다.
은총은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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