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적 대법원 판결에도 ‘장애판정기준’ 요지부동
엄격한 장애정도판정기준에 한국 장애 출현율 5% 불과
‘장애인등록’ 행정청에 재량 여지 부여 등 법 개선 시급
유튜버 A씨는 30여 년 동안 투렛증후군으로 고통받아 오다가, 2021년 4월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개정으로 투렛장애가 장애의 한 유형으로 규정되자, 장애인등록을 신청했다. 하지만 투렛증후군으로 장애를 인정받으려면 2년 이상 지속적인 치료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장애정도판정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등록을 하지 못했다. A씨는 오랫동안 투렛증후군으로 고통받아왔지만 치료로 효과를 보지 못해 최근에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았을 뿐인데, 아무런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이 억울하다.
B씨는 CRPS(복합부위통증증후군)를 앓고 있는데 발목의 심각한 통증으로 5분 이상 걷지 못하며 대중교통은 전혀 이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 다리 발목 관절이 90% 이상 감소돼야 한다는 장애정도판정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한장애로 인정받지 못해 장애인으로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B씨는 행정소송을 제기해 다투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사례처럼 장애가 있으나 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해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계인들이 많이 있다.
엄격한 장애정도판정기준은 지난 2019년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을 오로지 그 조항에 규정된 장애에 한해 법적 보호를 부여하겠다는 취지로 보아 그 보호의 대상인 장애인을 한정적으로 열거한 것으로 새길 수 없다’는 전향적인 대법원 판결에도 현장에서는 변화가 없는 실정이다.
최근 한국장애인개발원 KoDDISSUE에 게재된 ‘장애인복지법상 장애인 정의의 한계 및 개선방안’에서는 엄격한 장애정도판정기준에 대한 사례와 장애인복지법 등의 개선방안을 담고 있다.
2022년 OECD 국가의 장애출현율 비교. ⓒ한국장애인개발원
한국 장애 출현율 5%‥“까다롭고 비합리적인 장애판정기준 탓”
한국의 장애 출현율(전체 인구 중 장애인 비율)은 5% 남짓으로 OECD 평균인 18%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정말 한국은 장애인이 다른 나라의 3분의 1밖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일까?"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한국의 장애출현율이 지나치게 낮은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복지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장애인복지법의 규정에 따라 장애인으로 등록을 해야 하는데, 그 등록의 기준이 지나치게 까다롭고 때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라는 것.
장애인복지법에서는 장애인에 대해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로 정의한다. 또한 장애인복지법의 위임을 받은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은 장애인의 종류의 기준을 15가지 유형으로 제한하고 있다.
시행령의 위임을 받아 제정된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 제2조 제1항 별표1 장애인의 장애정도는 9페이지에 걸쳐 장애의 정도에 대해 상세한 기준을 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의 위임을 받아 제정된 보건복지부고시 장애정도판정기준은 117페이지에 걸쳐 상세한 기준을 정하고 있다.
실무적으로는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장애인등록을 신청하면 지자체는 시행령 별표1에 따른 장애인의 종류 및 기준에 부합하는지, 동법 시행규칙 별표1의 장애인의 장애정도 및 보건복지부 고시 장애정도판정기준에서 상세하게 규정된 구체적 요건에 부합하는지를 하나하나 따지게 되며 장애당사자가 이러한 상세한 요건에서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는 경우 장애등록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대법원, ‘장애인등록에 대해 적극적인 법 해석·적용’ 판시
2019년 10월 31일 대법원은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제2조 제1항 별표1을 오로지 그 조항에 규정된 장애에 한하여 법적 보호를 부여하겠다는 취지로 보아 그 보호의 대상인 장애인을 한정적으로 열거한 것으로 새길 수 없다”고 판시하며, 그 당시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에 규정되지 않았던 뚜렛증후군 환자의 장애인등록을 거부한 행정청의 처분이 위법하다고 한 바 있다.
이는 시행령에 명시적으로 규정돼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장애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장애인에 해당함이 분명한 경우에는 행정청이 그 장애가 시행령에 규정돼 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 등록신청을 거부할 수 없고 가장 유사한 규정을 찾아 유추적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판결은 장애인복지법, 동법 시행령, 동법 시행규칙 및 고시의 형식적 문구에 얽매여 제한적으로 장애인등록을 받아온 행정청의 경직된 운영을 뛰어 넘으며, 행정청의 적극적인 법 해석과 적용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판결이다.
하지만 이처럼 전향적인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행정청의 실무처리 방식은 전혀 개선이 되지 않고 있으며, 장애인등록 실무는 여전히 경직되고 제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10월 15일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센터 앞 기자회견에서 ‘복합통증증후군 장애등록 기준 마련하라’ 손피켓을 들고 있는 참가자.ⓒ에이블뉴스DB
‘장애인등록’ 행정청에 재량의 여지 명시적 부여 필요
헌법과 장애인복지법은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보장을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장애인의 복지와 사회활동 참여 증진을 통한 사회통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장애인등록 절차 또한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보장을 위한 법의 목적에 부합하게 운영돼야 한다.
이에 행정청의 장애인등록 심사 실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입법적으로 장애인등록에 관해 행정청에 재량의 여지를 부여하는 규정을 두는 방안도 고려해봐야 한다는 제언이다.
구체적으로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별표1에 열거되지 않아도 장애인등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의 취지를 반영해 등록의 대상이 되는 장애인의 정의를 ‘대통령령이 정하는 장애의 종류 및 기준에 해당하는 자 또는 이에 준하는 장애로 상당한 기간 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라고 개정해 행정청에게 재량의 여지를 명시적으로 부여하는 방안이다.
또한 장애등록절차에서 장애인이 겪는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의 장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복지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하고 장애당사자의 의견진술 및 이의제기 절차를 활성화해 적극적인 법 집행을 촉구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