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에는 사람치고 회합 하나 둘 정도 참가 안하는 사람 없을것이다. 아마 이것은 인간 본능인 사회성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런데 어떤 회든지 혹은 계든지 간에 회를 운영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 회에 소용되는 운영비가 없을수 없다. 어떤 회에서는 회비를 증수하고 모금이나 사업체를 가진 회도 적지 않다. 또 일정한 금액을 정하지 않고라도 각 회원의 응분의 처지나 찬조나 기타 방법으로 한다. 회의 성질로 봐서 또는 목적에 의거해서 회의 운영비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거출한다. 이와 비슷하게 천주교회에서도 교회법과 법규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그 법규 중 제5규는 교무금에 관한 것이다. 교무금에 관한 법규는 신자들이 자기생활에 비추어 교회 유지비를 부담하라는 것이다. 교무금에 대한 유래는 이러하다 옛날 초세기때의 교회는 신자들이 자기의 것을 전부 사도들에게 바치고 사도들은 그것을 교회 유지에 충당하고 가난한 형제들에게 공평히 나누어 주고 모든 신자가 한 가족의 형태로 생활해왔다. 그것이 차차 시대가 변하고 생활이 복잡하므로 일정한 액수를 정하게 되었다. 각 신자는 자기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에 바치는 11조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11조를 내는사람은 거의 없고 대개가 30분의 1을 바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그마저도 못받치는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자지만 안받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자이기때문에 자기것을 남에게 주고싶지 않고 남의 것은 얻고싶다. 그런 결과로 하느님한테서 복은 받고 싶지만 희생은 바치고 싶지 않다. 참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참으로 교회를 통해 구원받고 싶다면 교회에서 필요한 것을 등한히 생각할수 있겠는가. 또 많이 바치고 적게 받치는 문제는 각자 성의에 맡겨진 것이다. 모두가 성의대로 한다지만 과연 성의를 참뜻의 성의로 인식하는가 의심스럽다. 우리의 정신자세가 문제다. 내 것은 주지않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행복을 어떻게 바랄수 있겠는가. 흔히들 교무금을 많이 바친다 한다. 교무금은 자기생활에 응분한 교회에 받치는 유지비기 때문에 많고 적은 것이 아니라 내가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누구에게나 1백%의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 김영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