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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About The REBOUND"
챔피언십 9연패와 함께 통산 11번의 NBA 우승을 거머쥔 빌 러셀(208cm)이 보스턴 셀틱스에 합류했을 때, 레드 아워백 감독이 그에게 내린 첫 지시는 단 하나다.
“리바운드 한 개를 한 골처럼 생각하라.”
상대가 놓친 볼은 반드시 잡아서 동료에게 패스하라는 것이었다. 1950년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료들과 식사조차 함께 하지 못했던 러셀은 그 임무에 사활을 걸었다고 한다. 아워백 감독도 셀틱스 선수들에게 “러셀이 잡은 리바운드를 존중하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셀틱스는 NBA에서 가장 강력한 속공 팀이자 수비 팀이 되었고, 러셀은 여전히 원로 기자들 사이에서 역대 최고의 센터로 평가받고 있다.
통산 최다득점(38,387점)을 기록한 카림 압둘-자바는 언젠가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간단하다. 리바운드를 제압하면 된다.”
농구 역사상 리바운드는 훌륭한 득점원들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고, 수많은 승자를 배출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리바운드는 언제부터 강조되었고, 어떻게 해서 등장하게 되었을까?
리바운드의 시작
리바운드를 얘기하려면 농구 룰의 변천사를 살펴봐야 한다. 농구는 축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이 많다. 최초의 농구 경기에서 사용된 공은 다름 아닌 축구공이었고, 드리블을 치지 않고 토스를 통해 볼을 옮겼다. 그리고 골을 넣으면 두 팀은 다시 가운데로 돌아와 점프볼로 공·수를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네이스미스 박사가 축구의 킥-오프처럼, 동등하고 공정하게 두 팀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창기 농구에서 장신자들의 역할은 점프볼을 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골을 넣으면 아웃-오브-바운즈 상황에서 공격을 시작한 것은 1936년부터였다. 보다 빠른 진행을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농구팀들은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찾아갔고 그 과정에서 리바운드가 탄생했다. 그러나 리바운드는 장신자의 몫인 것은 한동안 변함이 없었다.
리바운드가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이다. 미 프로농구에서부터 인정되기 시작한 리바운드는 철저히 장신자의 역할이었다. 리바운드가 수치로 기록된 첫 시즌이었던 50-51시즌, 시라큐스의 돌프 쉐이즈(203cm, 센터)는 평균 16.4개를 잡으며 탑에 올랐는데, 그가 잡은 리바운드 숫자가 팀 리바운드의 90% 이상을 차지한 적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NBA 한 경기 최다 리바운드 기록은 55개(60년 윌트 채임벌린), 51개(60년 러셀)이다. 이는 한 팀이 아니라, 개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그 외에도 대다수 리바운드 기록은 50~60년대에 만들어졌다.
그 배경에는 54-55시즌에 도입된 24초 제도가 있었다. 장신자를 보유한 팀은 때때로 지역방어 형태의 수비로 골문을 철저히 봉쇄했다고 전해진다. 이러면 상대는 당연히 공격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잔머리(?)도 굴리는 법. 상대팀이 지역방어를 쓰거나 장신자를 활용하면, 공격팀은 아예 패스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상대가 답답해서 쫓아 나오거나 수비를 바꾸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나온 점수가 1950년의 19-18(포트웨인-미니애폴리스)이었다.
NBA는 공격 템포를 빠르게 하기 위해 24초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렇다보니 많은 팀들이 적응하는데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고 한다. 공격 횟수는 늘고, 슛 시도는 잦았는데 성공률은 극도로 떨어졌던 것이다. 실제로 센터인 쉐이즈만 해도 야투성공률이 35~39%에 불과했다. 또, 오늘날과 비교해봐도 50~60년대에는 슛 시도가 더 많았다. 이렇게 많은 슛이 실패하니 리바운드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채임벌린은 60-61시즌에 평균 27.2개의 리바운드를 잡았고, 러셀은 현역 통산 리바운드가 평균 22.5개였다.
이후 리바운드는 발전을 거듭했다. 공격 리바운드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휴비 브라운과 같은 감독들은 리바운드를 위한 전술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채임벌린-러셀 시대에 이어 70년대에는 모지스 말론과 데이브 코웬스, 카림 압둘-자바가 최고의 리바운더로 등극했고, 80년대에는 벅 윌리엄스, 빌 레임비어, 찰스 바클리, 마이클 케이지 등이 명성을 떨쳤다. 특히 LA 클리퍼스에서 뛰던 케이지는 87-88시즌에 찰스 오클리(시카고 불스)와 치열한 경합 끝에 평균 0.03개 차이로 리바운드 타이틀을 따내는 등 공방전도 치열했다.
90년대에는 데니스 로드맨의 시대였다. 다른 훌륭한 리바운더들도 많았지만, 테크닉이나 운동능력, 기본기, 집념 등을 종합해서 볼 때 90년대에만 일곱 번이나 리바운드 1위에 오르고, 세 번이나 우승(통산 5회 우승)을 거머쥔 로드맨의 아성은 따라올 자가 없었다. 최근에는 벤 월라스, 케빈 가넷 등 포워드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리바운드는 승리자를 만들어낸다
“공격 리바운드를 강조하는 것은 당신의 팀이 다른 팀으로부터 존경받을 이유를 하나 더 갖는 것과도 같다”는 명구가 있다. “리바운드를 많이 잡는 팀이 경기에서 승리한다”는 말도 유명한 격언이다. 모두 리바운드에서 승리하며 경기를 따낸 감독, 코치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리바운드는 공격 리바운드와 수비 리바운드, 팀 리바운드로 나눌 수 있다. 공격 리바운드는 말 그대로 우리가 공격하면서 미스한 슛을 다시 잡아내는 것이다. 이 경우 공격 기회가 한 번 더 생기므로 우리 팀에게는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세컨 찬스 득점이 성공할 경우에는 4점의 효과가 있다”는 말도 있다.
수비 리바운드는 상대가 미스한 것을 잡아내는 것이다. 이때 공수전환이 빠른 팀들은 속공을 노려볼 수 있다. 프로농구에서 전주 KCC가 그런 팀이다. 과거 조니 맥도웰이나 재키 존스, 레지 바셋이 잡아낸 수비 리바운드에서 이어지는 아웃렛 패스와 속공은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팀 리바운드는 개인이 잡아냈다기보다는 탭-아웃과 같은 상황에서 만들어진 리바운드이다. 운이 잘 따라줬다고도 볼 수 있고, 팀-워크가 잘 맞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봤을 때 리바운드는 동료 의식을 고취시켜주고, 믿음을 주는 효과가 있다. 외곽이 약한 팀은 십중팔구 리바운드가 약한 팀이다. “내가 미스해도 반드시 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리바운더가 없으면 슛에도 자신이 없어진다. 이런 이들은 ‘블루 칼라 워커’라 불리며 동료들로부터 무한한 신뢰와 인정을 받는다.
LA 레이커스에서 많은 영광을 써내려 갔던 매직 존슨도 리바운드 신봉자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리바운드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역설한 바 있다. “어렸을 때 나는 리바운드를 등한시했다. 득점과 패스에서 돋보이면 어느 정도 용서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선수들이 갈수록 커지고, 거칠어지면서 나는 리바운드를 너무나 귀찮게 여기기 시작했다.” 매직의 말이다. 그러나 프로에 데뷔한 후에도 매직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리바운드였다. 81년 플레이오프에서 레이커스는 ‘트윈타워’ 하킴 올라주원과 랄프 샘슨이 이끄는 휴스턴 로케츠에 무너졌고, 83년 결승에서도 그 해 리바운드 왕, 모지스 말론이 골밑을 휘저은 필라델피아 76ers에 패했다. 그때 이후로 매직은 결코 리바운드를 등한시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KBL 우승팀들의 지난 기록을 돌아봐도 리바운드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모두가 리바운드에서도 좋은 성적을 기록했던 팀이었기 때문이다. 박제영(수원대학교) KBS 해설위원이 매 시즌 발표했던 논문 「한국 프로농구 경기의 승·패 요인 분석」에서도 승·패에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리바운드라는 통계가 있었다.
KBL 원년 챔프, 부산 기아는 공격 리바운드 1위(235개)였고, 98년 대전 현대도 2위였다. 신선우 감독의 현대는 수비 리바운드에 이은 강력한 속공이 일품이었는데, 그 저력은 99년(1위)에도 계속되었다. 2000년에는 서장훈-재키 존스-로데릭 하니발의 서울 SK가 리바운드 타이틀과 우승을 거머쥐었다. 올해는 어땠나? 조직력이 좋은 울산 모비스는 센터 제이슨 클락이 서울 삼성의 올루미데 오예데지-서장훈 라인을 당하지 못하면서 4-0으로 무너졌다. 중요한 순간에 리바운드를 계속 헌납했던 것이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 외에도 챔피언들은 늘 리바운드에 있어 상위를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왜 지도자들이 그토록 리바운드를 강조하는지, 또 KBL 감독들이 왜 골밑 플레이에 충실한 외국인 선수를 선호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NBA에서도 2006년 파이널에 오른 마이애미(1위)와 댈러스(6위)가 결정적인 리바운드에서 재능을 보였다. 특히, 내외곽에 빠른 선수들이 포진해있는 두 팀은 골밑 리바운드 뿐 아니라 림을 맞고 멀리 나가는 볼조차도 낚아채면서 제2, 제3의 찬스를 노렸다.
심지어 수비보다는 더 빠른 공격을 선호하는 피닉스조차도 리바운드에서는 10위에 랭크되는 발군의 기동력을 과시했다. 센터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가 없기에 그들은 전원이 리바운드에 가담했고, 누구라도 볼을 잡으면 재빨리 하프코트를 넘어가 2~3번 패스만에 공격을 성공시키는 기민함을 보였다. 덕분에 110점, 120점을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리바운드를 잘 하려면?
많은 농구인들은 리바운드를 잘 하기 위한 조건으로 크게 네 가지를 꼽는다.
첫 번째는 포지션. 리바운드에 유리한 자리를 예측하고,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몸싸움과 박스-아웃이 요구된다. 두 번째는 스탠스(stance, 자세). 다리, 무릎, 엘보우, 눈, 손과 같은 신체의 밸런스가 중요하다. 세 번째는 어프로치(approach). 선수들이 플로어에서 발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최초의 모션은 빠르고, 공격적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리커버리(recovery)로, 리바운드 후 볼을 지키고, 다음 동작으로의 연계가 빨라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의지’이다. 반드시 잡아내겠다는 볼에 대한 열망 없이는 결코 좋은 리바운더가 될 수 없다. 농구 교본을 살펴봐도, 리바운드 기술보다도 먼저 언급되는 것이 바로 정신적인 측면이다.
지도자들은 “농구선수라면, 의지만 있다면 리바운드는 언제든 습득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92년 미 대학농구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조지 레블링 코치는 “용기와 자긍심, 지지 않겠다는 신념만 있다면 리바운드는 반드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신장과 점프력은 부가적인 것일 뿐이다”라 강조하며, “이제 더 이상 리바운드는 누군가의 특별한 임무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요즘의 피닉스 농구를 보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고, 과거 센터들이 독식했던 리바운드 순위에 가드나 포워드들의 이름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1975년에 201cm의 키로 리바운드 타이틀을 차지했던 웨스 언셀드(전 워싱턴)는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는 좋은 슈터가 많았다. 키가 작은 나로서는 리바운드를 많이 잡는 것이 팀에 공헌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며 자신이 리바운더로서 인식되게 된 계기를 설명했는데, 딱 벌어진 어깨와 파워가 인상적이었던 그는 “공중에 있는 볼은 다 내 것”이라 생각하고 뛰어오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인상과 MVP를 같은 시즌(69)에 수상한 역대 두 번째 선수다.
한편 공격 리바운드를 잘 잡는 선수가 최고의 리바운더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재미있게도, 미 농구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공격 리바운더들은 장신 센터가 아닌, 신장이 다소 작은 선수들이다. 모지스 말론은 센터였지만 208cm로 작은 편이었고, 데니스 로드맨과 찰스 바클리도 결코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 선수 모두 자신의 핸디캡을 노력으로 극복했고, 말론과 바클리는 공격 리바운드에 있어 가장 기분 좋은 세컨 찬스 득점을 끌어내는데도 유능함을 과시했다.
말론은 자타가 공인하는 노력파이다. 그는 요즘 선수들처럼 팔이 길다거나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지만, 큰 몸과 파워로 상대를 제압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이 흔치 않았던 시절에도 몸 만들기에 충실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그는 박스-아웃에서부터 상대를 압도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혹자는 “농구 역사상 가장 영리한 리바운더 중 한 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로드맨도 마찬가지. 정신력이 뛰어났다. 그의 의지는 ‘집념’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 전에 상대의 슈팅 습관을 파악하고 나왔다는 그는 귀신같이 볼이 떨어지는 지점으로 달려가 이를 낚아챘다. 때로는 플레이가 지저분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동료들에게는 복덩이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물론, 가끔 나오는 돌출행동에 마음을 졸여야 했지만 말이다. 최근에는 네 번이나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한 벤 월라스(206cm)가 최고의 리바운더로 각광 받고 있다.
통산 3,829개의 리바운드로 역대 기록을 남긴 KBL의 ‘탱크’ 조니 맥도웰도 타 리그에서는 빅 맨으로 뛰기에는 턱없이 작은 키였지만,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비롯된 파워와 영리함을 바탕으로 골밑을 장악했다.
요즘에는 가드들이 포워드나 센터 못지 않은 리바운드 능력을 과시해 눈길을 끌기도 한다. NBA 뉴욕 닉스에서 뛰고 있는 포인트가드, 스티브 프랜시스는 191cm로 작은 편이지만 통산 리바운드가 6개에 육박한다. 01-02시즌에는 7.0개를 잡아내면서 웬만한 센터보다도 나은 기량을 과시했다. 뉴저지 네츠의 ‘트리플-더블 제조기’ 제이슨 키드(193cm)도 최근 두 시즌동안 7.35개를 잡아냈다. 놀랍게도 이는 팀 1위에 해당한다. 이들은 지능형 리바운더로 꼽힌다. 재빠른 움직임으로 센터나 포워드가 커버할 수 없는 공간으로 낙하하는 리바운드를 낚아채고, 속공에 돌입한다. (센터-포워드들이 하이-포스트에서 플레이하는 팀 전술적 특성도 한 몫하고 있다) KBL에서도 이상민(183cm, KCC)과 김승현(178cm, 오리온스)이 데뷔 후 줄곧 4개의 리바운드를 유지해왔다. 이상민의 경우 뛰어난 탄력이, 김승현은 순간적인 움직임이 두 선수의 감각과 영리함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리바운드 능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리바운더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프로 구단에서도 리바운더들을 위한 드릴(drill)을 준비해 그들을 단련시키고 있고, NBA에서는 많은 빅 맨들이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해 박스-아웃과 리바운드 후 볼 키핑 동작 등을 연마하고 있다. 대단히 페이스가 빨라진 오늘날 NBA 경기에서 리바운드야말로 빅 맨들이 빛날 수 있는 유일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순한 일 같지만, 여간해서는 빛나지 않는 작업이 바로 리바운드이다. 블루 칼라 워크 중 하나인 이 리바운드 하나에 수많은 팀의 명암이 엇갈려왔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힘든 몸싸움 속에서도 동료들에게 한 번의 찬스를 더 주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리바운더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NBA 최악의 리바운더는?
기록을 보면 리바운드 기록은 좋지만, 상대 선수들에게는 결코 좋은 평을 못 듣는 리바운더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최악’, 혹은 ‘더티 플레이어(dirty player)’라는 표현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대표적인 선수가 빌 레임비어(210cm)이다. 디트로이트 ‘배드보이스’의 주축 중 한 명으로서, 85-86시즌에 13.1개로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던 그는 상대 옷을 잡아당기고 밀치는 등의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그가 뛰던 시절 피스톤스는 테크니컬 파울에서 리그 선두를 달렸을 정도이다. 카림 압둘-자바조차도 그의 거친 플레이에 혀를 내둘렀을 정도이며, 로드맨은 그에 비하면 애교다. 그러나 이는 신장에 비해 운동능력이 좋지도 않고, 팔도 길지 않았던 그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동료들의 슛에 도움이 되면 OK라는 철학이었던 것. 실제로 그런 더티 플레이 속에서도 퇴장을 당하거나, 파울 트러블에 걸린 적은 거의 없었으니 레임비어가 얼마나 영리(?)했는지는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 중·장거리 슛이 좋아 픽-앤-팝 전술에서도 능력을 발휘, 상대 수비를 곤욕스럽게 하기도 했다.
반대로 오늘날의 레지 에반스(203cm)나 대니 폿슨(203cm)등은 말 그대로 ‘최악’으로 꼽힌다. 요령도 없이 거칠기만 하기 때문이다. 에반스는 플레이오프 기간 중에도 상대 선수의 사타구니를 가격하는 등 고의적인 행동을 너무 잘 띄게 범하는 탓에 팀의 마이너스 요소가 되어야 했다. 폿슨도 마찬가지. 늘 테크니컬 파울 부문 선두를 달리는 그는 05-06시즌에는 거의 출전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역대 리바운드 기록 (모든 기록은 정규시즌 기준)
NBA 역대 통산 최다 리바운드 : 윌트 채임벌린 23,924개
NBA 한 경기 최다 리바운드 : 윌트 채임벌린 55개(필라델피아, 1960년 11월 24일 보스턴 전)
NBA 한 경기 최다 공격 리바운드 : 모지스 말론 21개(휴스턴, 1982년 2월 11일 시애틀 전)
NBA 한 경기 최다 수비 리바운드 : 카림 압둘-자바 29개(레이커스, 1975년 12월 14일 디트로이트전)
KBL 역대 통산 최다 리바운드 : 조니 맥도웰 3,829개
KBL 한 경기 최다 리바운드 : 라이언 페리맨 30개(오리온스, 2001년 12월 1일 LG전)
KBL 한 경기 최다 공격 리바운드 : 루크 화이트헤드 16개(오리온스, 2005년 2월 23일 LG전)
KBL 한 경기 최다 수비 리바운드 : 나이젤 딕슨 24개(KTF, 2006년 2월 18일 전자랜드전)
-점프볼 손대범-
첫댓글 어릴때 슬램덩크에서 채치수가 강백호에게 한 말..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경기를 지배한다." 명언이죠.. 저도 농구하면 포지션이 센터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덩치크고 힘만 좋아서.. 잘 할 수 있는 것도 리바, 그리고 리바 잡으면 젤 기분이 좋다는.. ㅋ
이해가 안가는게 모제스 말론의 21과 카림의 29를 합치면 50이 나오는데, 챔벌린의 55를 반으로 나두더라도 공수 리바운드에서 각각 27개씩(하나 남네요...)기록하게 되는데, 챔벌린이 공격 리바운드나 수비리바운드 둘중 하나의 기록은 더 가지고 있어야 산술적으로 맞다고 생각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 왜 체임벌린의 기록이 없는지 궁굼하네요... 그대당시는 공격 수비 리바운드를 따로 세지 않아서 그런가?? 암튼 궁금..
역시 대범씨 짱!! 농구기사다운 농구기사를 읽었네요 역시. ^^b
근데 말론의 공격리바와 자바의 수비 리바를 다 합쳐도 채임벌린의 55개보다 적은데... 어떻게 된일이죠?
제 기억으론 당시에는 수비/공격 리바운드라는 개념없이 통틀어서 집계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엔 3점슛 또한 없었듯이
화이트헤드가 한 경기 최대 공격리바라니 말도안돼..
화이트헤드 기억나네요.. 노마크 레이업 실수 해서 공격리바운드 잡고 다시 넣고 그것도 한두번이 아닌 여러번.. 어쩔때는 재차 슛도 안들어가서 다시 리바운드.. 어이없었던 용병..
대체용병이 기록을 남기고 떠날 줄이야....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