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더없이 높으신 분은 손으로 만든 거처에 자리 잡고 살지 않으십니다. 예언자가 말한 대로입니다. ‘하늘은 내 임금자리이며 땅은 내 발받침대이다. 그런데 너희가 나를 위해 무슨 집을 짓겠다는 것이냐? ― 주님이 말씀하신다. ― 내가 푹 쉴 곳이 어디 있느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않았느냐?’”(행 7:48-50).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라는 걸까.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 죄목으로 공회에 기소된 스데반이 돌 맞아 죽기 직전이다. 변론을 멈추고, 스데반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릎 꿇고 기도한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금세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을까. 무릎 꿇고 앉아 손을 펴 하늘을 바라보는 스데반의 얼굴이 환하다.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마저 빛에 덮여 있다. 잿빛 하늘 아래, 난데없는 빛이 처형장에 들어와 스데반의 무죄를 선고하건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갇히실 수 없다는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닌 찬양이다. 게다가 모세는 움직이지 않는 성전을 지은 적이 없다. 모세는 구름 기둥이 이동하면 함께 움직이는 성막을 디자인했을 뿐이다. 모세는 성막을 이고 지며 길을 가는 ‘광야 교회’를 세웠지, 한 걸음도 떠메어 갈 수 없는 성전을 지은 적이 없다. 성막에 모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사람들을 광야 교회라고 칭한 것으로 모세를 모독했다고 기소하는 건 억지다. 제사장들과 투석 현장을 지휘하는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당함을 마땅”하게 여긴다(행 8:1) 그런데 스데반의 죽음을 직관하던 사울은 빛의 습격을 받아 말에서 떨어진 후 바울이 된다(행 9:3-4). 심지어 바울은 스데반의 반(反) 성전론을 뛰어넘어 새로운 성전을 건축한다.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가운데 자리 잡고 살고 계시다는 것을요?」 (고전 3:16).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건물로서 성전은 AD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Titus, 39-81)에 의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파괴됐다. 그 뒤 예루살렘 성전은 복구되지 않았고, 2천 년 전 함락과 전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통곡의 벽’이 남아 있을 뿐 건물로서 성전은 현존하지 않는다.
스데반에게 돌 던지는 사람 중엔 그림을 그린 렘브란트도 있다. 그는 자화상을 그림 속에 삽입하곤 했는데, 두 손에 돌을 맞잡아 하늘 높이 쳐든 사람의 겨드랑이 뒤로 렘브란트 얼굴이 보인다. 렘브란트 자신 또한 스데반을 죽인 공범이라 여긴 걸까. 어쩌면 내 얼굴도 건물을 성전이라 집착하며 스데반에게 돌 던지는 사람들 속에 있진 않을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스데반뿐만 아니라
돌 던지는 사람들마저 비추는 빛이 내게도 비추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