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문학도의 삶을 꿈꾸던 나는 한 친구의 글을 보고, 그 꿈을 접었다. 그 친구의 글은, 진정한 문재란 타고나는 것이라고 외치는 듯 했다. 그처럼 뛰어난 문재를 내게 주지 않은 신을 원망하며 나는 곧 문학도의 꿈을 버렸다. 이과로 전공을 바꾼 나는 공대로 진학한 후, 영업사원으로, 다시 방송사 PD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그 뛰어난 글재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 같던 그 친구의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작년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하 ‘슈퍼스타즈’)을 내놓았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국가 대표급 스타플레이어들로 프로야구 팀이 꾸려지던 시절, 삼미 특수강에서 관리직 사원으로 일하며 취미로 야구를 즐기던 한 사람이 있었다. 직장 야구 대회 우승을 이끌어낸 공으로 그는 ‘삼미 슈퍼스타즈’에 프로 선수로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이 아마추어 출신 투수는 곧 프로무대에서 1승 15패 1세이브라는 참담한 성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 비운의 투수가 바로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주인공이다.
‘삼미 슈퍼스타즈’, 프로야구 원년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추억속의 이름일 것이다. 파란 쫄쫄이 바지에 빨간 팬티를 입은 슈퍼맨을 로고로 내세운 ‘삼미 슈퍼스타즈’의 시즌 승률은, 그 로고가 부끄럽게도 1.25였다. 승률 1할 2푼5리라... 우리네 인생에서 확률로만 보면 승률은 5할 정도 된다. 이기거나 지거나 경우의 수는 둘 중 하나니까. 좀 안 풀린다 싶어도 승률 3할은 하겠지. 그런데 1.25라... 이건 지려고 작정하고 게임을 하지 않고서야 나오기 힘든 승률 아닌가. 소설 ‘슈퍼스타즈’는 그 경이로운 승률에 대해 고민한다. ‘어떻게 평균적인 확률에도 훨씬 못 미치는 그런 성적이 가능한 걸까?’
영화는 ‘슈퍼스타 감사용’의 모습을 비추지만 당시 프로야구의 진정한 슈퍼스타는 OB 박철순 투수였다. 미국 야구에서 체득한 프로정신으로 22연승을 기록하며 팀의 원년 우승을 이끌어낸 주역. 모든 야구팬들이 그의 연승행진에 환호를 보내는 그때... 영화는 그 박철순의 20연승 달성 경기에 상대로 나선 패전처리 전문 투수 감사용의 모습을 잡아낸다. 모든 야구팬들이 역사적인 박철순의 20연승을 연호하는 가운데, 10연패를 기록 중인 투수 감사용은 생애 첫 승을 목표로 필사적인 승부를 시작한다.
소설 ‘슈퍼스타즈’가 분석하는 삼미의 패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삼미가 ‘칠 수 없는 공은 치지 않고, 잡을 수 없는 공은 잡지 않는’ 상식적인 야구를 했기 때문이다. 82년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한국에는 프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대충 대충 편하게 사는 아마추어의 삶은 버려라. 이기기 위해 목숨 거는 프로의 모습을 보라. 칠 수 없는 공도 기를 쓰고 치려 들고, 잡을 수 없는 공을 잡기 위해 몸을 날리는 프로의 야구, 본받아야하지 않을까! 군사 독재 정권이 프로야구를 통해 온 국민에게 프로의 정신을 설파하고 있을 때, 삼미는 정작 ‘이기는 데 목숨 걸지 않고 야구 그 자체를 즐기는’ 아마추어의 야구를 선보인다. 어찌보면 패자의 자기변명일 수 있는 내용인데, 오히려 모두가 비정한 프로 정신에 매몰되어가는 세상에서 한 호흡 느리게 여유를 갖고 삶을 즐기자는 아마추어의 철학을 설파한다. 인생의 승률은 중요하지 않다. 승률보다는 게임 그 자체, 인생 그 자체를 즐겨라.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클라이맥스는 박철순의 20연승 고지 달성 앞에 놓인 감사용과의 대결이다. 당시 우리는 박철순이라는 진정한 ‘슈퍼스타’에 열광했고, 패전 처리 전문 투수 감사용과의 대결을 보며, 감사용을 단순히 박철순의 연승 기록에 바쳐진 제물로 보았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 20년이 지난 오늘, 영화는 우리를 다시 그 경기의 현장으로 인도한다. 모든 관객들이 박철순의 20연승을 연호할 때, 홀로 마운드에서 첫 승을 꿈꾸던 감사용...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우리는 이제 감사용의 1승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만년 꼴찌 구단의 모습을 통해 1등 지상주의에 빠진 우리 자신에게 때론 여유롭게 질 줄 아는 미덕을 이야기한다. 경제 성장을 주도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한번의 좌절에 무릎을 꺾고 허무하게 삶을 버리는 요즘, 승률에 연연하는 프로의 철학보다 게임 그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아마추어의 미덕도 되새겨보자고 말한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역시 꿈을 이룬 이의 모습이 빛나긴 하지만, 꿈을 쫓아가는 이의 모습 역시 아름다운 법이라고 말해준다. 승자만이 살아남고 성공만이 행복의 요건인 요즘, 패자의 철학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훈훈한 감동을 전해주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것 또한 꿈꾸는 이들을 곁에 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다. 무규칙 이종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뒤늦게 세상에 이름을 알린 친구 박민규의 선전과, 스포츠 영화는 절대 안 된다는 한국 영화계의 징크스를 깬 ‘슈퍼스타 감사용’의 분발에 박수를 보낸다.
tip.
한국 영화계에서 절대 성공하지 못하는 두 장르가 있다. 하나는 동물 영화, 또 하나는 스포츠 영화. ‘친구’의 대박 이후 바로 곽경택 감독에게 좌절을 안겨준 ‘챔피언’이나, 히트메이커 송강호를 주연으로 기용하고도 실패한 ‘YMCA 야구단’ 등등.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제작진은 120프레임 고속 촬영 기법, 도기 캠 보디마운트 (카메라를 배우의 몸에 부착하는 장비) 수입, 등의 다양한 노력을 통해 이러한 징크스의 정면 돌파를 노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오른손잡이 배우로서 왼손잡이 투수 역을 훌륭히 소화해낸 이범수의 연기. 왼손으로는 숟가락 잡기도 자세가 안나오는데 투수 연기를 멋지게 해내다니... 역시 좋은 배우는 노력으로 평가받는 법이다.
오랜만에 접하는 김피디님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 역시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직 '감사용'은 보지 못했습니다. 보고 싶던 영화인데 피디님의 글을 보니 더욱 보고 싶어지는 군요. P/S 그런데 아바타가 상당히 럭셔리 해지셨네요? ^.^
첫댓글 일명 서민적인 배우로 통하는 이범수가 그역할을 했기에 사람들이 쉽게 공감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피디님 의견에 동감 한표...^^
오랜만에 접하는 김피디님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 역시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직 '감사용'은 보지 못했습니다. 보고 싶던 영화인데 피디님의 글을 보니 더욱 보고 싶어지는 군요. P/S 그런데 아바타가 상당히 럭셔리 해지셨네요? ^.^
짠돌이 성격 어디 가나요. 누가 공짜로 탄 거라기에 맘 편히 받아썼답니다. 궁상맞은 제 캐릭하고는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