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산
포항-경주 시루봉(502m)
오어사 잇는 원점회귀 산행
시루는 떡이나 쌀을 찌거나 콩나물을 기르는, 아레로 구멍이 뚫린 둥근 형태의 질그릇이다. 그 시루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 겨레의 삶과 불가분의 인연을 맺어온 까닭에 무려 80개를 헤아리는 시루봉(몇몇의 시루산 포함)이 방방곡곡에 자리한다.
오늘 소개하는 시루봉은 포항시 대송면과 경주시 천북면의 경계에 자리한 해발 502m의 산이다. 낙동정맥의 백운산(892m)에서 동쪽으로 갈라진 호미지맥이 치술령(603m)을 지나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유명한 토함산(745m)에 이른다. 이 산줄기는 추령과 함월산(584m)을 지나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원줄기는 포항시 구룡포읍 대보면의 호미곶에 이른다. 함월산 북쪽의 610봉에서 서쪽으로 갈라진 다른 한줄기는 시루봉을 지나 옥녀봉(225m)과 형산(257m)을 솟구치고 형산강에 내려앉는다.
시루봉은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의 산이다. 우리 가족은 1950년 여름 한국전쟁 당시 시루봉의 서녘 자락 화산리에 피난살이로 잠시 머물렀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논에서 메뚜기를 잡다가 사마귀의 분비물이 눈에 들어가 일주일을 소경으로 지냈던 충격적인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시루봉 동북녘에는 운제산(482m)이 솟구치고 그 산자락에 천년고찰 오어사가 자리한다.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오어사는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참으로 유서깊은 절이다. 나는 <사람과산>의 독자들을 위해서 운제산에서 오어사에 얽힌 역사와 전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창건 당시 항사사(항사는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무수한 수를 뜻함)였던 오어사는 신라시대에 자장, 혜공, 원효, 고려시대에는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이 머문 아득한 불향의 고찰이다.
항사사를 창건한 자장율사(590~658)의 자취는 오어사 뒤의 자장암에 남아 있다. '오녕일일지계사(吾寧一日持戒死, 내 차라리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불원백년파계이생(不願百年破戒而生, 계를 깨뜨리고 백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자장율사는 선덕여왕 5년(636) 당나라에 가서 종남산 운계사에서 수도한 후 선덕여왕 12년에 귀국했다. 자장암이 자리한 운제산이 된 것도 이에서 연유하였다고 짐작된다.
혜공의 생몰 연대는 알려지지 않으나 신라 십성의 한사람이다. 술과 춤을 좋아하고 삼태기를 등에 지고 다녀 부궤화상이라 불리던 그는 많은 이적을 남겼으며 불경에 통달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불경에 통달한 혜공을 승조(중국승려, 384~414. 구마라집의 제자로 불경의 중국어 번역에 공이 지대함)의 후신이라고 여겼다. 혜공이 항사사에 머물고 있을 때, 원효암에 머물며 경소를 편찬하던 원효가 의심나는 것을 그에게 와서 물었다고 전한다. 항사사이던 절 이름이 원효가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돌 위에서 똥을 누고는, 혜공이 희홍하며말하기를 "네 똥, 내 고기(吾魚也)"라 하여 오어사가 되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원효대사(617~686)는 너무도 유명한지라 단순한 설명은 사족에 불과하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이 나면 여러가지 법이 나고) 心滅則種種法滅(심멸즉종종법멸, 마음을 비우면 모든 법이 소멸된다)' 라고 말한 그는 화엄경소 10권, 열반경소 5권, 금강반야경소 3권, 대승기신론소 2권을 비롯한 엄청난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상당한 저서가 이곳 원효암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감회가 남다르다.
일연(1206~1289)은 저 유명한 <삼국유사>를 지었다. <삼국사기>(1145년, 저자 김부식)와 비교하기를 '정녕 우리 역사를 지식인의 약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꿔놓은 책'으로 평가받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1264년 오어사에 머물며 불경을 강론하니 학인이 운집하였다고 전한다. 600년 전의 자장, 혜공와 원효의 자취를 찾아 기꺼이 이곳에 머물며 설화를 조사한 일연의 은덕으로 지금 우리는 위대한 겨레의 스승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곳 들머리 포항시 오천면 문충리는 포은 정몽주(1337~1392)의 고향이기도 하다.
오어사에서 시작해 자장암~운제산~시루봉을 지나 원효봉~원효암~오어사에 내리는 산행길은 위험한 곳이 없는 오밀조밀한 산길이 이어진다.
오어사 경내에 자리한 보물 제1280호 동종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8호 대웅전을 둘러보고 산길을 이어가다가 '만남의 삼거리'에서 발길을 멈춘다. 예서 왼쪽으로 능선을 이어가면 운제산 정상석이 자리한 봉우리와 헬기장봉, 대왕암이 자리한다. 일정이 빠듯하면 몰라도 어지간만하면 다녀와야 한다(40분 소요). 만남의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바로 오르면 전망대 정자와 정상석이 자리한 지도상의 진짜 정수리를 만난다. 전망대에 올라 굽어보는 오천읍과 호미곶, 동해바다의 풍광이 참으로 빼어나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능선을 왼쪽에 둔 솔숲길이다. '시루봉 3.8km, (대각)주차장 3km'라 적힌 이정표에서 왼쪽으로 꺾어가자니 포항시와 경주시의 시계능선을 따른다. 홍계리 삼거리를 지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걸어가니 왼쪽으로 지나온 운제산이 손을 흔들며 다가든다.
시루봉의 정수리는 쓸쓸하다. 주말이면 많은 산꾼들이 다녀가는 운제산과는 달리 낡은 삼각점이 외롭다. 그러나 시루봉이야 말로 운제산과 토함산을 이어주는, 오어사와 불국사를 연결하는, 천사백년 전의 아득한 불향이 아직도 흥건히 살아남은, 겨레의 삶과 불가분의 인연을 가진 떡시루의 산이었으니...
*산행길잡이
오어사주차장-(20분)-자장암-(50분)-운제산-(20분)-대왕암-(20분)-되돌아 운제산-(10분)-시루봉(대각리 이정표)-1시간20분)-시루봉-(30분)-안부-(40분)-원효봉-(30분)-원효암-(15분)-오어사
오어사~자장암~운제산~시루봉~원효봉~원효암~오어사를 잇는 원점회귀산행의 들머리는 오어사 입구에 자리한 주차장이다. 등산안내도를 살펴보고 북쪽으로 지그재그 산길을 따라가면 자장암에 이른다. 시멘트길을 조금 이어가면 삼거리를 만나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산불감시초소(입산신고소)다. 시멘트길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솔숲길을 이어가면 깔딱재와 바윗재, 대각삼거리를 지나 '운제산 0.12km, 대왕암 0.7km'로 표시된 이정표가 자리하는 '만남의 길 삼거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왼쪽은 정상석이 자리한 옛정수리와 헬기장봉을 이어 대왕암에 이른다.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오르면 전망대정자가 자리한 지도상의 운제산 정수리다. 예서 서북쪽으로 산길을 이어가면 '시루봉 3.8km, 대각리주차장 3km'라 표시된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시루봉 방향으로 길게 이어가면 서어고목 두 그루와 표지기가 많이 달린 삼거리를 만난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시루봉 2.75km, 운제산 2.35km, 홍계리'라 적힌 이정표가 나오고, 시루봉 방향으로 너른 길을 따라 10분이면 만나는 허리길 삼거리다. 시루봉은 왼쪽 방향이다.
하산은 올라간 길을 100m 되돌아내려 '산여 1.8km, 시루봉 0.1km, 운제산 5.17km'이 표시된 삼거리에 이른다. 산여 방향으로 길게 내리면 심벤트포장길(북동쪽의 자장암으로 연결)이 나온다. 포장길을 건너 능선에 올라 북북동 능선길을 이어가면 헬기장이 자리한 원효봉이다. 이곳에서 북북동 능선을 따르면 해발 320m 지점에서 왼쪽으로 산길이 굽어지고, 7분 후 만나는 '산불조심' 작은 현수막에서 왼쪽으로 길이 이어지다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가면 원효암이다. 오어사는 원효암에서 10분쯤 걸린다.
오어사에서 시루봉까지는 이정표가 잘 세워져 있다. 시루봉에서 원효암까지는 이정푝 없으니 등고선지도와 나침반을 잘 살펴야 한다. 대왕암 왕복코스를 생략하거나 준족이면 5시간이면 가능하다. 취재산행은 6시간 걸렸다.
*교통
서울고속버스터미널(경부선)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시로 다니는 고속버스로 포항으로 가서, 포항시내를 거치는 100번, 102번 시내버스를 이용해 오천읍까지 간다. 오천읍에서 오어사행 버스가 1일 10화 다닌다. 오천발-07:20, 09:30, 10:40, 12:10, 12:50, 14:20, 16:00, 17:00, 18:20, 19:30. 오어사발-07:35, 09:50, 11:00, 12:30, 13:20, 14:55, 16:40, 17:15, 18:45, 19:45.
오천읍에서 오어사까지 택시로 갈 경우 버스종점까지는 8천원, 오어사까지 들어갈 경우 추가요금을 내야 한다. 포항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오어사까지 택시로는 15,000~20,000원쯤 요금이 나온다.
*잘 데와 먹을 데
오어사 입구 오어지 아래의 버스종점에 강촌가든(054-291-8616), 포항식당 등 식당과 민박집이 여럿 있다. 포항고속버스터미널에 인접한 죽도시장은 어마어마한 수산물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회와 과메기, 미역 등 싱싱한 각종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글쓴이:김은남
참조:운제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