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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수필에서 생각하는 세상
이정희의 수필집『행복 엑스와이』의 경우
‘착하다’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다닌다. 텔레비전 드라마 제목은 물론 ‘착한 치킨’, ‘착한 통닭’ 심지어 소설 제목에도 ‘착한 여자’가 등장한다. 어디 이뿐인가. 곡물 셋트에도 ‘착한 잡곡’이란 이름이 붙어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만큼 우리들의 곁에는 거짓이 진실을 내몰고 주인공 행사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다운 면모를 제대로 갖춘 인물을 보고 싶다. 눈앞의 이익에만 사로잡혀 양심의 거울은 던져버리고, 의리와 정을 헌신짝 여기듯 하는 주변의 인심이 무섭다. 어디, 불신풍조의 풍토가 어제 오늘의 일이던가. 도덕과 양심이 땅에 떨어지고 신의와 진실이 실종된 세태이고 보니 ‘착하다’라는 말이 신선하게 들린다. 신뢰와 친절과 고마움과 사랑의 속성을 포괄하는 ‘착함’. 이 착함이 있기에 그래도 우리는 살맛이 난다. 이정희의 수필집『행복 엑스와이』에는 ‘착함’의 의미가 담겨 있다. 마음씨 고운 선비도 운전대를 잡으면 포악한 사냥꾼으로 변하듯이, 수필가는 세상이 미워 저주의 고함을 지르다가도 붓을 잡고 앉으면 천사의 마음이 되어 이야기를 꾸린다. 문학 작품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정희의 문학도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이정희 문학의 ‘착함’ 속엔 특성이 있다. 애써 꾸미거나 치장하지 않은 문장의 매력부터가 그렇다. 향리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소재로 삼은 이정희의 글 속엔 행간 행간마다 깊은 울림이 짙게 배어 있어 독자로 하여금 깊은 감명을 준다.
1) 맑고 향기로운 내면의 향연
수필은 일상에서 얻은 소재를 나름의 관점으로 조명하고 해석하여 의미화 한 글이다. 하나, 아무리 훌륭한 글감이라고 하여도 작가의 시각이 경직되어 있거나 사유가 얕으면 그 글감은 제구실을 못하는 법이다. 수필은 지적 작업이오, 애정의 무늬로 옷을 입혀야 하기 때문이다.
깊은 고뇌와 곰삭은 사유로 심금을 울리는 알찬 수필집은 머리맡에 두고 싶은 법이다. 물론 그런 수필집을 대하기가 쉽지는 않다. 작가의 진정성 있는 고민과 사물을 통찰하는 혜안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정희의『행복 엑스와이』는 돋보인다.
고아하다 못해 오묘한 빛을 뿜고 비색을 발하는 언어의 선택, 일상의 소소함에서 주워 올린 삶의 체험, 그리고 탄탄한 구성, 이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한 편 한 편이 가작(佳作)이다.
「자투리를 잡다가 놓친 꼬투리」를 보자. 이 작품에서, ‘꼬투리’와 ‘자투리’가 갖는 상징적 어미를 쉽게 융합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적 역량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꼬투리’는 물상이 지닌 근원이며, ‘자투리’는 원형을 잃은 허상이다. 작품 속의 ‘자투리’를 상징적 존재에서 실존적 존재로 부각시켰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평소에 바지런하다는 이정희 작가의 어머니는 강낭콩 꼬투리나 녹두 꼬투리를 말려서 하나하나 까는 일을 즐기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바쁘다는 구실을 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은 잔손 가는 것은 무조건 성가시게 여긴다.
작가의 어머니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당신의 손을 거쳐 애써 지은 농작물을 알뜰살뜰 갈무리 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꼬투리 까기만 즐기는 게 아니라 자투리 까지도 좋아하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작가 이정희는 어느덧 시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환경보호와 자원 절약 차원에서도 좋은 작품이라 여겨진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은 자투리다. 갓 시집와서 보니 바느질을 하고 남은 천 조각으로 상보를 자주 꾸미셨다. 앞치마는 물론 보자기를 만들기도 했다. 다락에 올라가면 종이로 만든 물건이 많다. 빗이니 거울이니 하는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그릇으로 꽃무늬가 찍혀있어 제법 예쁘다.’ -앞글 중에서-
아파트 쓰레기장엔 늘 멀쩡한 물건들이 버려지고 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로선 개인의 낭비요, 국가적 낭비다. 어머니의 금약 정신이 돋보이는 것은 낭비벽이 심한 신세대들에게 교훈적이기 때문이다.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지 못하고, 재활용하시는 시어머니의 삶의 모습에서 한 인간의 자세를 곰씹어 보는 작가 이정희의 겸허하고 소박한 시선이 너무나 곱고 어여쁘다. 어머니는 자투리만 활용하는 게 아니라, 매사 꼬투리를 잡아 옳고 그름을 가리는 사리에 밝은 심성을 지녔다고 하니, 이는 어찌 보면 며느리 입장으론 까탈스럽게 보일 법도한데 작가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는다.
‘자투리 활용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어머니는 꼬투리도 잘 잡는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꼬투리 잡는 식으로 무엇이든 세심히 따지고 살핀다는 의미다. 바느질 등의 의식범절이 남달리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분이다. 천 조각 하나도 그냥 버리지 않고 활용하는 기질이,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는 습관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앉은 자리에 싹이 나도록 꼼꼼하게 다듬고 손질하는 것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분이다.’ -앞글 중에서-
어머니의 꼼꼼함과 깐깐함을 불평 없이 수용하는 작가는 세련된 문장과 문학적 안목으로 이를 잘 조화시키고 있어 더더욱 호감이 간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설정을 수필이라는 문학 장르에 잘 용해시킨 작품으로 평가를 받아도 좋을 듯하다.
‘나도 자투리 나무로 홍두깨를 만든 적이 있다. 가볍고 쓰기 좋은 걸 생각하다가 미루나무 토막을 다듬어 사포로 문질렀다. 거스러미가 나오지 않게 들기름으로 광택을 냈다. 원통이 굵고 길이가 짧아서 암반 대신 도마에 밀기도 편했다. 만들어 쓰는 재미를 처음 느껴본 거지만 나또한 자투리 체질임을 알았다.’ -앞글 중에서-
요즘은 건물 인테리어를 할 때 버려지는 건축 폐기물, 생활 쓰레기로 건물 내부를 꾸미는 게 유행이란다. 환경과 인간을 배려하는 작업이어서 권장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수필작품은 사회계도의 역할책임도 있는 것이다. 돈이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작가 이정희는 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소유자다. 손수 만든 홍두깨를 앞에 놓고 흐뭇해하는 심경, 이를 밀도 있게 묘사한 필력을 높이 산다. 이정희 홍두깨엔 돈의 때가 아닌 인간의 정이 묻어 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정과 혼이 묻어 있는 것이다.
‘폐허 속의 꽃은 고왔다. 누가 돌보지 않아도 혼자 피는 모습은 눈물겨웠다. 중학교 때 뒷산을 끼고 돌다 본, 무성한 덤불일수록 그리고 까까비알일수록 고왔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폐허 속의 꽃처럼, 진흙속 연꽃처럼」중에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름 모를 들꽃, 그 꽃들은 누구로부터도 관심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홀로 피어 자태를 뽐낼 뿐이다. 이것이 그들의 생태적 본능이다. 꽃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의 원천도 이 생태적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다. 미를 추구하는 여성에게 성형은 일상의 화장이 되고 있다. 부모로부터 물러 받은 몸이기에 머리카락도 훼손 않는다는 성현의 말이 무색해 진다. 겉모습을 닮아 속 모양도 예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사가 의술로 DNA까지 변형 시킬 수 있는 날이 올까?
꽃이 치장술을 몰라 더 예쁘게 보이듯, 꾸미지 않은 여인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꽃을 바라보면 마치 화장하지 않는 여인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듯하여 괜스레 즐겁다. ‘무성한 덤불일수록, 까까비알일수록 고왔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라 했듯,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자세를 보일 때 인간의 미는 배가 되는 법이다.
‘시궁창의 꽃을 본 게 십년 전 일이다. 연립주택 단지를 지나다보면 오수와 폐수가 흘러나오는 시궁창이 있는데 그 물받이에서 꽃 한 송이가 피었다. 옆에 있는 손바닥 만 한 땅에서는 아욱 등이 자라고 있었으나 그보다 훨씬 더러운 곳에서 피었으니 놀랍다.’ -앞글 중에서-
꽃나무는 시궁창이든 진흙탕이든 가리지 않고 씨앗만 뿌려지면 싹을 틔우고 꽃을 만들어 낸다. 꽃나무는 꽃을 피우는 일에만 열중할 뿐 토양이나 환경은 탓하지 않는다. 시궁창에서 자랐다고 시궁창 냄새가 나고, 진흙탕에서 자랐다고 진흙탕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꽃의 교훈이다.
남 탓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없는 법이다.
2)연민, 그리고 현실 꿰뚫기
연민은 따뜻한 가슴 속에서 자란다. 정이 마른 가슴 속에서는 잉태되지 않는 법이다. 작가 이정희는 한 편의 수필 속에 ‘바람기’라는 모순의 주제를 연민이란 도색으로 치장 시켜 작품화 했다.
‘오래 전 큰아버님께 애인이 있었다. 방탕해서가 아니고 아들이 없었다. 당시 드문 여고 출신에 얼마든지 뽐낼 만할 여자는 큰어머니도 동생처럼 여길 만큼 조신했다. 큰아버지가 인쇄소를 했고 두 분이 거기 사는 바람에 공장 큰엄마라 부르며 좋아했지만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다.’ -「역마살에 겹친 도화살」중에서-
시앗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한다고 했다. 더구나 조강지처가 대를 이을 아들을 못 낳을 경우엔 더욱 그 시새움이 도를 넘는 법이다. 조강지처인 큰엄마가 친동생처럼 시앗을 아꼈다니 시앗의 평소 행실이 짐작된다. 여자가 질투에 눈멀어 물불을 못 가리는 경우를 많이 본다. 큰엄마의 질투심도 잠재울 만큼 예의범절이 바르고 인품이 뛰어난 시앗이 생산을 못한다. 독자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앗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한 그녀의 감출 수 없었던 바람기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얼마 후 공장 큰엄마는 집을 나가버렸고, 오빠가 대신 양자로 들어갔다. 그게 벌써 40년 전 일인데 언니가,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서 나갔을 거라는 말을 꺼냈다. 인쇄소에서 나오는 파지 속에 공장 큰엄마의 편지가 들어있었다고 했다. -앞글 중에서-
한 남자의 시앗으로 들어갔으나 그곳에서 시앗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여인은 또 다른 남자의 사랑을 찾아 떠났다. 이것이 여인의 운명이라면 너무나 잔인하다. 도대체 남아가 무엇인가. 또한 아들을 얻기 위해 여인을 택했지만 정작 그 여인의 마음까지는 얻을 수 없었던 큰아버지의 일생이 꼭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 씁쓸하다. 이 글 내용처럼 서울깍쟁이인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 부채를 청산해준다는 조건으로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그 여인은 현대판 심청이가 되는 것이다.
물욕에 눈이 어두워 부모에게 칼을 들이대는 폐륜을 이야기 하면서 세상 망조라며 자탄하는 현실 속에서 이정희의 글「잘나도 못난 사람 못나도 잘난 사람」을 읽노라면 세상을 달관한 듯, 초연한 자세를 발견할 수 있어 한편 카타리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흥부전에 나오는 이 대목은 참으로 해학적이다. 너무 가난해서 궁상맞아 보일 텐데 의외다. 돈 짝만 해진 하늘을 향해 자 돈 봐라, 돈. 돈이다. 잘나도 못난 돈 못나도 잘난 돈. 이 돈을 눈에 대면 삼강오륜이 보이고 없으면 들어오질 않으니 돈 밖에 더 있느냐”고 호기를 부릴 때는 읽는 이의 속을 후련하게 한다. 좁쌀 한 섬을 두고 흉년을 기다린 가난뱅이처럼 비지찌개 하나에 막걸리 한 사발 먹으면서 그처럼 의기양양했으니, 돈푼이나 있는 사람이 눈꼴사납게 구는 것도 당연하구나 싶다.’ -앞글 중에서-
작가는 물질보다 마음의 양식이 더 풍족한 자신의 내면을 어떤 가치로도 바꿀 수 없노라며 자부심을 느낀다.
‘되지 못하게 부자라고 뻐기는 배경은 뭘까. 여느 때도 그렇지만 도서관에 갈 때 더 호기를 부린다. 책만 읽을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바쁘거나 집중이 되지 않는 날은 내키는 대로 책을 뽑아든다. 무심코 넘기면서 한 구절만 읽기도 한다.’-앞글 중에서-
물질이 아무리 풍족해도 마음이 가난하면 한낱 부귀와 영화도 뜬구름에 불과 한 것, 독서가 안겨주는 즐거움은 돈 몇 푼의 가치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가슴이 얼어있고 머릿속은 빈 채 돈만 많다는 것은 배부른 돼지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것이 작가 이정희가 졸부들에게 보내는 경고다. 아름다움은 안으로 숨겨 있을 때 더 아름다운 것이 된다.
도움의 진리는 드러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숨겨짐에 있다는 것이 이정희 의 작가정신이다.「불쏘시개」는 그런 바탕위에 빚어진 작품이다. 재래식 부엌의 장작불도 한줌의 불쏘시개로 시작된다. 한 줌의 솔잎이나 한줌의 검불로는 밥이 지어지지 않는다. 한 줌의 검불과 한 줌의 솔잎이 자기 몸을 온전히 불살랐기에 장작을 태울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이란 단어에 매료되어 사는 약한 동물이다. 천년을 두고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있다면 그게 바로 영원이다. 영원의 반대어는 찰나다. 아궁이 속의 검불이 찰나의 시한으로 살았다. 그러나 값진 삶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장작에 불을 붙이고는 한갓지게 빨래와 청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불을 달리기가 힘든 대신 붙고 나면 한나절 이상 타는 장작불이 으뜸이라고 했다. 삭정이와 검불 같은 사람은 무시해왔다 재티만 날리고 툭하면 꺼지는 게 듬직하지 못하고 가벼워서 도대체 믿음성이 없는 사람과 비슷했다. 검불이 거의 쏘시개로 쓰이고 쏘시개라는 뜻이 말질이나 하고 수군거리는 것과 연관 되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글 중에서-
쏘시개는 사건의 원인이 되는 말로도 비유 된다. 원인 없는 결과는 부재한다. 작품에서의 쏘시개는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오, 출발점인 것이다.
‘장작이 되는 통나무가 기둥 아니면 대들보감이어도 창문이나 방문 살을 짜 맞출 때는 가는 나뭇가지가 필요하다. 땔감 축에 들지도 못하는 검불과 삭정이도 장작과 어울리면 뜻하지 않는 존재가치가 나오듯 세상 모든 하모니는 어울림에 따른 문제다.’-앞글 중에서-
무용, 유용의 진리는 단순하지 않다. 저마다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썩은 동아줄도 두고 보면 쓸모 있다.’라는 말이 그래 생겨난 말이다.
주변의 모든 물상이 수필의 소재가 된다. 이정희는 소재를 캐는 안목이 넓은 작가다.
‘남편은 술만 마시면 음식 투정을 하는 습관이 있다. 먹지도 않으면서 그러는 줄 뻔히 알기 때문에 모른 체 해도 소용이 없다. 성화에 못이겨 국이나 찌개를 끓여놓으면 십중팔구는 그 새 곯아떨어진다. 별다른 주사는 없기 때문에 군말 없이 해주는 편인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고 그게 빌미가 되었는지 그릇을 집어 던지며 소란을 피웠다. 홧김에 밖으로 나왔다. 코트를 뒤집어썼지만 손발이 금방 얼어붙는다. 들어가려고 했더니 그 새 문이 걸렸고 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눈물 속에 투영되는 삶」중에서-
이정희는 남편의 취중 행동이 부부 싸움으로 발단되어 홧김에 밖으로 나왔으나 집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양심의 유혹을 버리지 못하고 고민한다. 이것이 한국여인의 참모습인지 모른다. 반대로 남편은 아내가 밖으로 나가자 방문을 걸어 잠근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한 번쯤은 겪어봄직한 일이라 여겨지지만 자칫 긴 갈등으로 이어질 위험을 지닌 사건이라 여겨진다. 결혼은 객체와 또 다른 객체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결혼은 하나의 몸이기도 하고, 둘의 몸이기도 한 것이다.
남편과 다툰 후 밖으로 나온 작가는 짚북데기를 꺼내와 그것을 병풍처럼 세운 후 널빤지를 깔고 그 위에 몸을 뉘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남편에 대한 야속함과 서운함, 그리고 버거운 시골생활, 천근보다 무거운 설움이 가슴을 짓눌렀을 것이다. 가부장의 권위를 버리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남편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정경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땅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지금도 밤하늘의 별을 보노라면 그날의 환상이 슬픔으로 번져올 것이다.
3) 가벼움의 미학
한국인의 소유 개념이 변한다고 한다. 작은 것, 가벼운 것, 여기에 생활용품까지도 실용성 위주로 구입을 한다니 다행이다. 큰 것, 비싼 것에서 작은 것, 저렴한 것으로 눈을 돌린다니 이제야 철들었나보다. 심플한 핸드백, 고가의 모피보다 착용감이 좋고 행동하기 쉬운 덧옷이 잘 팔린단다. 배기량이 큰 대형의 승용차보다 주차하기 간편하고, 운영비가 덜 드는 소형차가 인기란다.
우리는 ‘사랑 한다’는 말을 참으로 많이 주고받는다. 그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무겁다’는 말도 사랑 한다. 는 말 못지않게 쓰인다. 무겁다는 원래 물건의 무게를 나타내는 말이나, 여기에 더하여 인간의 행동, 가치, 모습 등으로 확대되어 사용된다.
수필「무겁지 않은 진짜」는 제목부터 마음이 끌리는 작품이다.
‘들깨는 잘 익은 것일수록 물에 뜬다. 조리로 건져내고 돌을 버리면 간단하다. 잘 익은 곡식이 가라앉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콩을 씻을 때도 쭉정이는 내려가고 알곡만 가라앉는다. 속에 든 것 없이 날뛰는 사람 또한 쭉정이처럼 생각했는데 잘 익은 들깨가 유난히 더 뜨는 걸 보니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무겁지 않은 진짜」중에서-
들깨를 물에 담가 씻으면서 그것이 물 위에 뜨는 것을 보고, 한편의 글을 꾸려낸 솜씨가 놀랍다. 글을 읽다가 문득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시지프의 신화』의 부조리가 떠오른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문득 왜? 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작가는 깨를 씻으며, 반복되는 시골 삶의 권태로움에서 카뮈가 말한 ‘위대한 의식의 순간’을 발견한다. 알곡은 왜 물에 가라앉을까. 알곡은 알곡인데, 들깨는 왜 물위로 떠오를까? 이는 분명 부조리한 현상이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경우를 볼 때가 많다. 작가는 이 글에서 독자에게 무거움의 진리와 가벼움의 진리를 동시에 일깨워 준다. 인생은 들깨처럼 가벼울 수도 콩알처럼 무겁게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가벼움 속에서 버림의 미학을 발견하는 것이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몇 편의 작품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어리석다. 하나 독자에게 깊은 감명을 줄 수 있는 작품 속엔 작가의 혼이 녹아 있어 이를 작가의 역량으로 가늠 해 볼 수는 있다. ‘글을 쓰기 전 먼저 인간이 되어라’라는 경구가 생각난다. 한 편의 수필 속엔 작가의 뜨거운 열정과 양심적 고뇌가 숨어 있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쓴다.
이정희 작가의 내면이 들어다 보이는 이상의 7편의 작품은 문학적 상상력과 통찰력이 돋보여 텍스트로 삼았다. 현학적이지 않아 수필 장르의 생명인 진솔성이 더욱 돋보였다. 독자들에게 매력 있는 작가적 양심이라 박수를 보내고 싶다. 건필을 빈다.
(문예지 투고작품)
김혜식 약력:
1995년 『순수문학』 수필 발등거리 등불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청주문인협회 회원
현, 독서신문, 충청타임즈 고정 필진, 『월간 문학』 수필 평론 집필.
제11회 청주문학상, 아시아 작가상 수필 부문 대상, 청주예총 예술 공로상 수상.
저서: 수필집 『내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조강지처 그 존재의 서글픔』, 독서에세이『예술의 옷을 입다』, 칼럼 집 『굼벵이에게 보내는 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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