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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빛은 무 루익은 봄 빛이었다. 성숙으로 가기 위한 단초는 생명을 피어내는 일이다. 늘 그렇지만 조합을 하기까지 진통이 따른다. 목적을 세우면 헝클어지고 다시 수습하여 세우면 다시 헝클어지고 그래도 겨우내 움을 만들어 봄이 오면 꽃을 피우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독이며 실행을 목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2019년 3월도 마찬가지 답답함을 씻어내고 수습하며 붙들고 놓지 않았더니 끝에 가서 인원을 채워 주셨다. 순례 길과 걸음 여행 곳곳에 심어 놓은 선 약속들, 지키게 되어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발 하기 전날 오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세베리노입니다. 신부님, 사무장님, 시설장님, 사장님 등.. 존함 보다 사회적 신분으로 불리는 사람들과 연이어 통화하여 남행에 변동이 없다는 사실을 알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4시 48분에 도착한 커다란 버스에 준비한 생수, 각종 과일 보따리와 개인적 짐과 카메라를 싣고 앉은 후 가자하고 기도를 드렸다. 제가 하고자 하는 순례와 걸음 여행 솔선자로서 50%는 저에 노력으로 완수하려 하오니 나머지 반은 당신의 사랑으로 재워 주시옵소서, 그 이상 바랄 것은 없나이다. 아멘. 그런 후 약속한 정확한 시간 버스를 정차시켰다. 겨우 99 관문 중, 일 관문을 마친 것이다. 그러나 시작은 분명 반이다. 반의 약효는 분명하게 3월 순례와 걸음 여행을 아름답게 맺어 주셨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협조를 아끼지 않으시는 데레사 체칠리아 자매님과 참여하신 여러 자매님들 덕분인 것이다. 그리고 현지에서 내일처럼 도와주신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사무장님, 그리고 이해 당사자 여러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고백하면서 3월 순례와 걸음 여행 속으로 걸음을 옮기겠습니다
을사추적적발사건 당사자인 김범우, 그는 중인에 속하는 역관이었으며 의원이였다. 이벽은 천주교 윤곽을 세운 후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도록 한다. 예수회의 적응주의( 공자, 맹자 사상등)와 관련하여 된 서리를 맞은 예수회는 중국에서 철수명령과 더불어 해산 명령이 교황청으로부터 떨어진다. 그러나 10 여년이 지나도록 남아 전례와 성사를 돕고 있던 그라몽 신부가 있어 이승훈은 세례성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받는 과정 순조롭지 않았다. 1. 조선에 선교사가 없어 세례를 받지만 곧 냉담자가 된다. 2. 조선 양반들은 축첩관련이 흔해 혼인성사에 장애가 따른다 등 이유로 반대하는 성직자가 많았으나 그라몽 신부의 독단으로 이승훈은 성사를 받고 약 4개월간 전례와 교회법에 대하여 교육을 받고 귀국 한다. 귀국 후 이벽에게 세례성사를 주고 권철신에게도 준다.
이벽은 자신의 집에서 계속 집회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알고 지내던 김범우를 만나 1784년 입교를 시킨다. 그리고 이승훈을 통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준다.김범우의 집은 명례방으로 김범우의 직업상 많은 사람들과 왕래가 있어 자연스럽게 집회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집이었다. 8형제 중 맏이인 김범우는 입교 후 열성적이었다. 부유한 집안 이끌던 김범우는 천주교 입교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맹렬 신자가 되는 것이다. 신해박해(진산사건) 후 많은 양반들이 천주교를 떠나 관망하게 되는데 그 자리를 중인과 상반들이 채우고 지도자들도 중인으로 확대되어 간다. 그중 한 사람이 김범우이고 선량으로 불리던 내포지방 이존창이 이 경우에 속한다.
성모 동굴 성당 앞에서 촬영 후, 새로운 길을 열었다. 명례는 다음 날로 미루고 언양으로 가 도착 후, 묵상, 박물관 참관, 그리고 김성삼 신부님 찾아 한국 교구 설립 후 최초 사제 서품을 받으신 강성삼 신부님 비를 참아 기도를 드렸다.
#. 참고로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 세 신학생은 한국 교구 설립 최초로 용산신학교 졸업 후 뮈텔 주교로부터 약현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로 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경당을 신축하고 성지를 만들어 나가며 인근 지역 사목에 힘쓰고, 정규하 신부께서는 강원도 힁성 풍수원으로 가 강원도 전교와 함께 성당을 건립 봉헌한다. 강성삼 신부는 경남 명례로 가 최양업 신부의 유업을 받아 전교에 힘을 기울이다, 37살 나이에 선종하신다)
언양성당 참례
경상도 남부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언양 지역은 그보다 훨씬 더 늦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는 경남 최초의 공소인 내간월 불당골 공소가 있었는데, 불당골은 김재권(프란치스코)이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던 곳입니다. 불당골은 선교사들을 맞이할 무렵 공소로 변모했으며,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주교가 방문하던 1850년대 말에는 언양 일대가 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변모되어 간월, 죽림(대재, 죽령), 탑곡, 예씨네골, 진목정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지만 박해가 끝난 뒤 재건되면서 1882년 대구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로베르 신부가 1883년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에는 언양읍 공소도 설립하였다. 언양 지역의 신자들은 이미 1888년부터 본당 설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1926년 12월 5일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보드뱅 신부가 부임한다. 보드뱅 신부는 즉시 성당 신축을 계획했고, 1929년 공사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여 드망즈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되었다.
보드뱅 신부가 직접 설계를 맡고, 명동 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과 6년에 걸친 신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언양 성당(사제관 포함)은 고딕식 형태로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 건물이다.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하고 1986년 죽림굴을 찾아냈고, 1989년 새 사제관을 완공한 뒤 이듬해 12월 옛 사제관 자리에 ‘신앙유물 전시관’을 개관했다. 2004년 근대문화유산 제103호로 지정된 성당과 신앙유물 전시관은 7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성당 마당에서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뒷산으로 올라가면 병인박해 순교자 오상선의 묘가 있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산 정상에 오르면 언양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성모동굴이 있다.
강성삼 신부님에 대한 예를 갖추며 기도를 드렸다. 강성삼 신부님은 한국교구 설정 후 최초로 용산신학교를 졸업한 강도명, 정규하와 함께 약현 성당에서 뮈텔 주교로부터 서품을 받은 신부로서 명례로 첫 부임하여 1898년 네칸짜리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사목을 하다 명례에서 짧은 생으로 선종하신 신부님이시다.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은 조선말기 한국 순교자들의 교회유물 500여점, 민속품 1,200여점과 성화, 지본 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수녀들에 의해 수집, 전시 보존되고 있다.
한국 순교 복자수녀회는 '복음 선포와 순교자 현양'을 목적으로 한국의 첫 가톨릭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선종 100주년 해에 설립된 수녀회다. 교회의 문화 유산들을 보다 체계적이고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마펠 윤병현(안드레아) 수녀와 쁘로마뗄 홍은순(라우렌시오) 수녀가 한국순교자기념관 건립을 계획하던 중, 서울에 절두산순교기념관이 건립되어, 지방 교유들을 위해 제2의 도시 부산에 건립 계획을 세웠으며, 이때 당시 가톨릭 부산교구 교구장인 최재선(요한)주교의 협조로 이곳에 오륜대 수도원을 1969년 6월 13일 설립하게 되었고, 이 후 1982년 9월 25일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을 개관하고 2009년 3월 2일 한국순교자박물관으로 등록되었다. 박물관 경내에는 한국순교성인들의 유해를 모신 순교자성당과 1868년 수영 장대에서 순교한 부산 동래 출신의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어 오륜대 성지라 불리기도 한다.
학예사의 설명을 들은 후 바로 옆 성당으로 자를 옮겨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부산 오륜대 순교 성당을 참례하며 26위 순교 성인 유해 앞에 앉아 장시간 묵상을 통해 조선천주교를 이끄시다. 순교하신 거룩한 뜻을 기렸다. 그리고 비가 오는 중에 순교자들이 묻히신 오륜대 묘역으로 가 예를 갖추었다.
두 째날.
여명의 기운을 느끼며 새벽 4시 30분에 리조트를 빠져 나왔다. 바닷 바람이 거셌다. 천천히 걸어 해변을 향해 걸었다. 크게 심호홉을 하려고 가슴을 열자 찬 기운이 서늘하게 만든다. 망망대해 사이로 보이는 점들 배가 신분을 밝히는 불 점이었다. 기류에 영향을 받으며 깜박거렸다. 통이 트는 중심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 살림에 대한 기도를 드려 보았다. 어제와 같이 오늘도 순례자들에게 평안을주시옵소서... 기도의 음성이 멈추기도 전에 파도소리가 휩쓸고 가벼렸다. 돌아 서 들어와 창가에 서서 명례로 가는 동선을 챙겨 보았다. 김해 부근 하남, 낙동강변,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가 있던 곳이다. 소금장수 신석복.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마라!. 풀어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다. 지독한 입심이다. 그 지독함이 멸(滅)을 이기고 한국 천주교를 생하고 흥하게 이끌어 낸다. 그러나 그것은 순교의 마음을 사랑하신 하느님이 사랑으로 안아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들의 고귀한 생명을 받아들이신 하느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시간은 7시... 조식을 챙길 시간이다. 2층으로 가기 위하여 로비 장의자에 앉아 순례자들을 기다렸다. 잘 주무셨어요? 하는 인사가 있어 보니 데레사 자매외 여러분이 내려 오셨다. 함께 식당으로 가 식사를 끝내고 명례로 향하였다.
명례 성지.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었던 명례는 낙동강을 따라 박해를 피해 피난 와 정착한 교우들이 많았던 곳으로 1897년 영남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경상남도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이며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가 있는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이다.
복자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1828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209 번지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였다. 밀양과 김해를 연결하는 명례 나루터에는 사람들로 붐볐고, 낙동강을 따라 박해를 피해 온 정착한 교우들도 많았기에 신석복 마르코도 그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형제들은 그가 순교할 당시 신자가 아니었지만 훗날 모두 입교했다.
1866년 병인년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자 신석복과 동료 신자들을 잡으러 대구에서 포졸들이 내려와 그의 집을 덮쳤다. 그가 진해 웅천(창원 마포라고도 함)에 장사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 강 건너에서 기다리다가 행상에서 돌아오는 그를 체포하여 밀양을 거쳐 대구로 압송했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마르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지 10여 년쯤 되는 때였다.
그의 체포 소식을 들은 형제들이 돈을 마련하여 대구로 압송되어 가는 그를 뒤쫓아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며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는 형제들에게 "일 푼전(分錢)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로 인해 그는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포졸들에게 무수한 형벌을 받았고 대구까지 끌려가는 동안 더한 능욕을 당해야만 했다. 대구서 처형되기 전에도 회유하는 관장에게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에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며칠 감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했다.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로 성토요일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후 그의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진영 본당 신자들이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했다. 순교자의 이름이 한동안 신 이냐시오로 알려졌었는데, 이는 1895년 "치명일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와 혼동한 까닭이다. 1925년 발간된 "병인치명사적"에서 마르코로 정정되었고, 교회사가들의 연구에 의해 이름 또한 신석복임을 확인했다.
순교 후 그의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진영 본당 신자들이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했다. 순교자의 이름이 한동안 신 이냐시오로 알려졌었는데, 이는 1895년 "치명일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와 혼동한 까닭이다. 1925년 발간된 "병인치명사적"에서 마르코로 정정되었고, 교회사가들의 연구에 의해 이름 또한 신석복임을 확인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에게는 아내와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순교할 때 큰 아들은 16살이었다. 순교자의 부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에서 살았다. 큰아들 이냐시오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막내인 신순균 바오로는 후에 사제가 되었다(1935년 수품, 1948년 선종 대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시성시복 기도를 바치는 동안 교회의 무심 속에 그의 생가 터는 낯선 이에게 팔려나가 축사로 변했고 대부분의 순교자 가족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4대와 5대 후손 몇 명이 지금 명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가 순교하던 해 강성삼 라우렌시오가 충청도 홍산에서 태어났다.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의 세 번째 사제이자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은(1896년 서울 약현 중림동 성당)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는 1897년 현재 부지에 네 칸짜리 집을 매입하여 부임하고 사목을 시작하였다. 안타깝게도 1903년 37살의 나이로 이곳에서 지병으로 선종하였다.(1866-1903년) 1926년 부임한 권영조 신부는 이곳에 ‘기와로 된 성당’을 새로 짓고 1928년에 축복식을 가졌으나 이 성당은 1936년 태풍으로 전파하였다. 1938년 신자들이 부서진 조각을 모아 현재의 모습으로 축소 복원하였다.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돼 있는 성당 내부는 초기 신자들의 신앙 모습과 영성을 느끼게 해 준다. 감실 위 십자가 위에 모셔진 원죄 없이 잉태된 마리아상은 1936년 태풍으로 성당이 무너졌을 때도 하나도 다치지 않고 여전한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명례성당 만의 귀한 성모상이다. 강성삼 신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명례 성당은 차례로 마산, 삼랑진, 진영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가 1996년 수산 본당이 설립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을 맞았지만 성당 바로 옆 축사가 복자 신석복의 생가 터임을 알게 되면서 성지로 조성되었다.
마산교구는 2008년,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와 명례 성당(1897년) 주변을 성역화하기로 하고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를 허가하여 이듬해 위원회(위원장 이제민 신부)를 구성하였다. 그에 앞서 2007년 4월 성지 입구의 한옥을 매입하고 보수하여 강성삼 신부의 세례명을 따라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명명하였다. 2009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다가 2011년 1월 7일부터 명례성지 담당신부가 상주하게 되면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011년 낯선 이에게 팔려나가 축사로 변했던 복자의 생가 터를 매입하고 야외 돌제대를 설치했다. 현재 성당의 규모로는 순례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6월 안명옥 주교 주례로 사제관과 생가 터를 축복하였고 명례 성당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등록되었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에 아담하고 단순한 기념 성당(이로재 대표 건축가 승효상 설계)을 지어 봉헌되었다. 명례 성지는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기념성당을 건립한 후 명례를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려고 복음화 학교를 열었으며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정신을 따라 ‘녹는 소금 운동’을 펼치고 있다.
“당신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당신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녹는 소금이 되겠습니다.”
최문성 마르코 주임 신부님과 기념촬영, 인자하신 최마르코 주임신부님은 전임 이제문 신부님(은퇴사제) 열정 어린 성지개발에 대하여 흠모하시며 자신에 소임에 대하여 많은 염려를 부임 첫 강론에서 고백하시며 계속 이제문 신부님의 관여에 대하여 희망하셨다. 최문성 신부님과 함께 아직도 부족한 성지 곳곳에 하느님의 은총과 열성적인 신자들과 은혜로운 도움을 주는 은혜자들의 영향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려 보았다.
이주 오래된 마을에서 성당으로 가는 골목길을 이용하여 내려 왔다. 작은 텃밭과 흙과 돌로 쌓은 담이 인상적인 길이었다.
진영성당 참례
옛적 영보님, 조기영 안드레아 신부님과 사전, 순례 여행중 뵙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진주 수도원 수호자로서의 사목과 마산 형제회 사목에 분주하시지만 긴요하게 시간을 내주셔서 우정 진영까지 오셔서 진영성당에서 뵙게 되었다. 이 지면을 통해 감사드립니다.
복자 신석호 마르코 순교자님께서는 진례성당 위 진영성당 공원 묘지에 묻히셨으나 일년 전 진례성당과 진영성당에 유해가 나누어 져 있게 되어 공원묘지 방문을 포기하고 진영성당으로 오게 된 것이다. 조기영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
신부님의 기도를 시작으로 참례 예절을 마친 후 마르코 순교자님 유해를 친견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든 예절을 마친 후 전임지가 지세포 성당 주임을 지내시며 복자 윤봉문 요셉 순교자 성지를 개발하신 진영성당 주임 허철수 미카엘 신부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가졌다. 호쾌하시고 친절하신 주임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거제도 복자 윤봉문 요한 성지참례
윤봉문 순교자
윤봉문 요셉은 경상북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후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요셉의 부친 윤사우는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는데, 우연한 기회에 옥포에 있던 진진부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키게 된다.이러한 인연으로 윤봉문 요셉은 장성한 뒤 진요한의 사위가 되어 옥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1888년 거제도에서 박해가 일어나 윤봉문은 다른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
다. 그러나 그는 모진 형벌에도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상부의 지시로 진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도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지만,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순교자는 1888년 4월 1일 진주 감옥에서 교살絞殺당해 당시 3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순교자의 유해는 진주 장재리 공소의 교우들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가맹장하였다가 10년 뒤 인 1898년경 거제도 옥포 앞산의 족박골에 안장하였다.
윤봉문 요셉 순교자 묘지 이장의 의미와 우리의 자세
신앙의 자유를 찾아 헤매던 여정처럼 순교자의 인생도 죽어서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다. 순교자의 유해가 남의 땅에 모셔져 접근이 어렵던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거제 교우들이 순교자의 희생과 신앙을 기리고 하느님 백성이 순교자의 신심에 더욱더 잘 접근할 수 있게 하려고 2013년 4월 20일 그가 거제에 처음으로 발을 내려놓은 지세포 인근 산자락에 순교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이장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자의 유골이 너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였다. 아울러 다른 유골에 비해 우측 골반뼈와 꼬리뼈가 많이 상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과 발목 밑으로 뼈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은 순교자의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짐작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낸 순교자는 어쩌면 이곳 지세포로 다시 돌아오고 싶으셨는지 모른다. 그 순수하고 맑게 신앙하던 처음처럼 돌아가고 싶어서 그렇게 백골이 되어 기다리고 계셨던 건 아닐까.
최근 시복시성 움직임으로 마산교구 신앙의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각 지구에서 일어난다. 성지聖址 개발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성지聖址는 개발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신앙 선조들이 죽으면서까지 증언하셨던 그 신앙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 삶의 자리에서 다시 찾는 것이 진정한 시복시성을 준비하는 자세일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마산교구 담당사제 이성현 요한 신부
첫댓글 수고에감사드립니다~~
2박3일여정에많은힘을쏟으셨음에다시감사드립니다
수정하실부분인지확인해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윗글에강성삼신부님아니신가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