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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 진관외동의 북한산 계곡에는 고려 현종 2년(1101)에 창건한 천년 고찰 진관사(津寬寺)가 있다. 백제시대에 부아악(負兒嶽)이라고 불렀던 산을 고려시대에는 3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고 해서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렀으나, 병자호란 후인 숙종 37년(1711) 산성을 수축한 이후 북한산이라고 했다.
신라 말 원효대사가 삼각산 기슭에 삼천사(三川寺)와 함께 신혈사를 창건한 것이 진관사의 기원인데, 현종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하여 신혈사 옆에 큰 사찰을 짓고, 진산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영조 21년(1745) 북한산성 주변을 소개한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진관사는 한양의 동쪽 불암사(남양주시 불암산), 남쪽 삼막사(안양시 삼성산), 북쪽 승가사(종로 북한산 비봉)와 함께 서쪽에 있는 한양의 4대 명찰 중 하나라고 했는데, 6·25때 대부분 소실된 것을 1964년 진관 스님(비구니)이 중창하여 비구니의 수도도량으로 삼았다.
진관내·외동의 지명유래가 되기도 한 진관사는 2009년 5월 칠성각(서울시문화재자료 제33호)을 해체·복원하던 중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쓰인 태극기와 수많은 신문자료가 발견되어 특히 커다란 관심 대상이 되었다. 가로 89cm, 세로 70cm의 대형 일장기의 붉은 원을 태극 문양과 4괘로 고쳐서 만든 태극기는 90여 년 동안 벽속에 숨겨져 있어서 색깔이 많이 변하고 왼쪽 윗부분은 불에 약간 탔지만, 거의 온전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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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 일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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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루 |
또, 태극기와 함께 1919년 6월부터 그 해 12월까지 발행되었던 독립신문 4점, 신대한(新大韓) 3점, 조선독립신문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경고문 2점 등 5종 20점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자유신종보는 그동안 학계에 전혀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유물들은 당시 항일운동을 하다가 청주교도소에서 옥사한 진관사 백초월(1878~1944) 주지스님이 숨겨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서울시 등록문화재 제458호).
진관사는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3, 6호선 연신내역에서 7211번, 701번 시내버스를 타고 진관사 앞에서 내리면 된다. 승용차는 은평 뉴타운 아파트촌 뒤로 난 비포장 길을 약2㎞쯤 들어가면 되는데, 입장료는 무료이다.
조계종 제1교구인 조계사의 말사인 진관사의 일주문을 지나면 계곡 위의 극락교를 건너자마자 해탈문이 있고, 완만한 비탈길을 약100m쯤 올라가면 사천왕문 역할을 하는 홍제루가 있다. 홍제루 밑을 지나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편에 요사채인 나가원(那迦院), 오른편에 명부전과 나한전 등 절집들이 □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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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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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각성 |
경내는 비구승의 절집답게 아담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다.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 건물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와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셨고, 대웅전 앞에는 석탑 대신 석등 2기가 있다. 오른쪽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상, 시왕, 동자상 등이 있고, 명부전 옆의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독성전에는 독성상과 독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셨다. 그 뒤 진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인 칠성각에서 태극기가 발견되었다. 홍제루 앞 남쪽 계곡의 세심교를 건너면 템플스테이 절집들이 있다.
고려 4대 임금 광종의 아들 경종(975~981)에게는 신라 경순왕의 딸인 제1왕비 헌승왕후, 제2왕비 헌숙왕후 이외에 숙부 대종(戴宗)의 장녀인 제3왕비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 작은 딸인 제4비 헌정왕후(獻貞王后; ?~992)가 있었는데, 경종이 27살의 나이로 요절했을 때 유일한 왕자는 제3비가 낳은 송(誦)뿐이었다. 그러나 겨우 2살이어서 광종의 형인 대종의 아들 개령군(開寧君)이 즉위하여 성종(961~977)이 되었다. 즉, 경종과 성종은 사촌간이고, 경종의 제3비, 4비와 성종은 친남매 사이였으나, 오빠 성종이 즉위하자 제3, 4비는 모두 궁 밖에서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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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 사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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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유적비 |
이때 제3비는 겨우 18살이었고, 그 동생 제4비는 숙부 욱(郁: ?~996)과 정을 통해서 임신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욱의 부인이 화가 나서 집에 불을 지르자 성종이 큰 화재를 당한 숙부 욱을 찾아와서 위로할 때 욱의 부인은 성종에게 남편의 불륜사실을 일러바쳤다. 성종은 사촌형 욱을 경상도 사수현(지금의 경남 사천시)으로 귀양 보내버리니, 그 소식을 들은 제4비가 실신하여 그날 밤 아기를 낳았지만 산모는 죽고 말았다.
그 아기가 나중에 현종이 된 대량원군 순(大良院君 詢)인데, 순은 어머니 헌정왕후를 기준하면 태조의 증손자이고, 생부 욱을 기준하면 태조의 손자가 된다. 어느 날 성종이 고아가 된 조카 순을 부르자 순이 성종의 무릎 위를 기어오르며, ‘아빠 아빠’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아기를 귀양 간 욱에게 보냈다. 몇 년 후 욱이 죽자 997년 순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경종의 제3비인 헌애왕후도 왕자 송을 키우며 살다가 성종이 갑자기 병사하니 18세의 송이 즉위하여 목종(穆宗: 997~1009)이 되었다. 헌애왕후는 모후가 되어 천추전에 수렴청정 하니 천추태후라고 불렀으나, 외사촌이자 파계승인 김치양(金致陽: ?~1009)과 정을 통하더니 1003년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친아들 목종을 폐하고 그 아기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동생 헌정왕후가 낳은 12살의 순을 궁중에서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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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 태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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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 가는길 |
처음에는 개경의 숭경사로 보낸 뒤 수차 살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1006년 삼각산 신혈사로 보냈다. 신혈사는 진관 스님 혼자인 작은 암자여서 살해하기 쉬울 것으로 여겼지만, 스님은 순을 보호하려고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두기도 하고 본존불이 있는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 숨겨서 자객의 화를 면하게 했다.
순이 신혈사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김치양이 역모를 꾸미자 목종은 12년(1009) 서북면도순검사 강조(康兆)에게 김치양의 축출을 명했다. 강조는 김치양을 죽이고, 천추태후도 축출한 뒤 목종의 후사가 없자 순을 임금으로 추대했다. 순의 생부 욱이 태조 왕건의 아들이라는 적통을 인정한 것이다.
순이 임금이 되어 개경으로 떠날 때 자신이 숨어 살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도 신혈사로 바꾸도록 했다. 임금이 된 순은 즉위 원년 가을부터 신혈사 옆에 진관 대사를 위하여 사방 10칸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각각 30칸인 동·서 승당 등 큰 절을 짓고,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했다. 1년 후 준공식 대법회를 열면서 진관 대사를 국사로 책봉했다.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호해준 곳이라 하여 역대 고려 임금의 각별한 보호를 받았는데, 태조 이성계도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인 1397년(태조 6) 진관사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춘추로 수륙대재를 올렸다. 수륙재란 나라를 위하여 죽었으나 구천으로 가지 못하고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을 달래는 의식인데, 불교를 배척했던 태종도 13년(1413) 진관사에 토지 100결을 하사하여 매년 정월에 수륙재를 열게 했다.
또, 세종은 숲과 계곡이 아름다운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이 독서하게 했는데, 진관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수륙대제를 올린다.
템풀스테이로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진관사는 내가 서울에서 살던 17년 동안 서오릉(西五陵)과 더불어 가장 자주 찾은 절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