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난해, 수업시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
아오리와 쌍둥이
모 임 득
햇볕 따사로운 봄날 과수원은 온통 꽃밭이었다. 연분홍빛 꽃봉오리가 꽃잎을 활짝 열면 사과 꽃은 하얀빛이 된다. 하얗게 만발한 사과나무. 눈꽃송이 되어 떨어진 꽃과 꽃다지, 냉이 꽃이 지천으로 깔려있는 과수원에서 함박웃음 날리며 뛰어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영화의 한 장면인 듯 황홀했었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을 때, 아이들과 과수원까지 걸어서 가보면 대여섯 개 달린 열매 중에 제일 좋은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잘라내고 있었다. 고품질 사과를 만들기 위해 적과를 하는 것인데, 크고 튼실한 사과를 위해서 가위에 잘려 땅으로 떨어진 열매가 내 눈에는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긴 세월 산신할머니에게 자식을 점지 봤지 못했던 내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 뱃속에 잠시 둥지를 틀었다가 인연이 되지 못하고 가 버린 태아들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지 가슴까지 시렸었다.
꽃으로 가득하던 과수원에서 꽃을 따주고 열매를 솎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사과는 탱자만큼 크고 우리 아이들 주먹만하게 커지더니 어느새 수확이다.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사과처럼 우리 집의 행복도 그만큼 많아졌으면 싶고, 크고 튼실한 이 사과처럼 쌍둥이도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주기를 바구니에 사과를 담으며 소망해 본다.
서리가 내려야 따는 빨간 부사에 비해 여름에 결실을 맺는 연둣빛 사과 아오리. 우리 아이들의 상큼한 미소 마냥 싱그러운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 새콤달콤한 즙이 입안 가득 고인다.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속살도 연둣빛이어서 겉과 속이 변함없는 진국 같은 사람을 보는 듯한 아오리는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비가 많이 내려도 나무에서 잘 떨어진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사과를 딸 때에도 갓난아기 다루듯 살짝 쥐어야지 조금만 세게 잡으면 손자국이 나서 상품성이 떨어지고 저온창고에 오랫동안 보관도 못하는 사과이다.
쌍둥이가 태어나던 날은 언니네 아오리 사과를 따려던 날이었다. 그러나 그 날 쌍둥이 때문에 사과를 따지 못하자 내리는 비에 다 떨어져 버렸었다. 이른 새벽 양수가 터져서 병원으로 갈 때 언니도 같이 가 주었다. 이번에 또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안절부절 하는 남편. 몇 년 전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다. 그때도 쌍둥이를 임신한 나는 엄청나게 부른 배를 부둥켜안고 아프다고 하는데도 하혈해서 피가 묻어 있는 옷을 갈아입어야 병원에 간다고 버티었다. 조산인데다가 너무 늦어서 가망 없다는 의사에게 쌍둥이니까 한 아이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소리치던 그때도 새벽이었다. 힘들게 가진 아기를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죽음까지 생각했던 나를 보아 온 남편은 그 일을 생각하고 조바심 태웠는지 모른다.
우리 부부의 애간장을 태우고 쌍둥이가 무사히 세상을 나왔을 때는 내 설움인양 비가 추적추적 내렸었다. 십년만에 자식을 얻었을 때의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리. 태어난 아이들이 정상이고 건강하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벅찬 감동의 기쁨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지고 내 얼굴은 늘 일그러져 있다. 자식을 갖기 위한 일념 하나로 시골로 이사까지 했는데 소망이 이루어지고 보니 촌에서 쌍둥이한테 시달리며 사는 내 처지가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타지라서 친구들 만나는 건 꿈도 못 꾸고 외출한번 못한 것은 물론 화장실조차 마음 편하게 가 본적이 몇 번이었던가.
사과나무 속에 파묻혀 아오리를 따니 힘은 들지만 마음이 한껏 커졌다. 그동안 쌍둥이를 키우느라 집안이라는 울타리에 내 마음까지 가두어놓고 힘들어했다. 친구들은 자녀들 대학입시를 걱정하는데 내 아이들은 유치원에도 못 들어갔으니 언제 키우나 조바심을 태웠다. 생각했던 대로 아이들이 따라주지 않을 때 마음을 칼날처럼 세우고 소리 질렀으며 자로 잰 듯 자르고 나눈 틀 밖으로 아이들이 나갈 때면 매도 들었다.
회초리는 하나여야 된다는 예전의 지론은 어디로 가 버리고 눈에 띄는 모든 것이 회초리가 되어있을 때, 내 마음은 쓰라렸다. 그럴 때의 내 모습은 참으로 불안하고 초라하고 가난하기까지 하였다.
동그란 사과는 마음에 여백을 두어 넉넉해지라고 일러준다. 어떤 것이 이득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 따지지 말고 내 것 네 것을 고집하지 말고, 이것은 꼭 이렇게 해야 된다는 틀을 깨버리고 자유롭게 살라고 한다.
사과 한 개가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봄부터 겨울까지 사과밭에 많은 정성을 들인다. 땀과 정성 뿐 아니라 비와 햇살과 흙의 자양분이 모여 숱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얻어진다. 한낱 과일인 사과도 그럴 진데 우리 인간이야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할까. 서둘러 꽃을 피우려고 꽃눈을 터트려본들 꽃은 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때로는 배우며 지내다보면 어느 날 엄마 품을 떠나려 하고 있을 텐데. 그동안 왜 아옹다옹했는지 모르겠다.
사과 묘목이 어느 정도 성장을 해야 꽃이 피어나듯 열 달 동안 자궁에서 있다가 탯줄을 끊고 태어난 쌍둥이를 사과의 일생에 비유하면 꽃봉오리에 해당될까. 쌍둥이가 꽃봉오리라면 난 아직은 설익은 사과여서 풋내 나는 어설픈 엄마이리라. 아오리 사과나무 옆에서 자라고 있는 부사는 지금은 풋내 나지만 가을볕과 소슬한 바람을 안고 초겨울 서리를 맞아야 맛좋고 때깔 좋은 튼실한 사과가 된다. 그만큼 심성 바른 건강한 아이로 키우려면 많은 시련을 견디고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리라.
사과가 익기까지는 한해면 되지만 난 얼마만큼 시간이 지나야 성숙한 어머니가 될는지. 내 인생이 다하는 날까지는 익기나 할까. 바구니 가득 담긴 아오리가 한낱 사과로 보이지 않는다.
첫댓글 쌍둥이 잘 크고 있죠? 귀한 자녀 잘 키워야지요. 아오리에 비길바 아니죠.
새삼스레 엄마가 된 것을 축하드리며 자녀들 또한 튼실한 사과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기원합니다.
어머니의 기도, 고통, 애태우는 사랑..... 가장 위대한 사람! 그 사람은 분명히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일 것입니다. 어머니 사랑이 녹아 있는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작품을 올릴때는 꼭 좋은 작품만 발표 할수는 없습니다. 외출시 자신이 단정한 화장을 하고 난후 외출복을 갈아입고 거울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거와 같다고 생각하십시요. 읽고 또 읽어 보면 어색한 부분이 새롭게 보여 질것입니다. 이는 작가이건 아니건 수필가로서의 자세입니다. 남의 글을 읽더라도
항상 좋은 작품만을 골라서 읽으십시요. 그리고 그 작품에서, 서두와 결론을 어떻게 썼는가. 또 구성은 어떻게 하였는지 읽고난후 무엇을 얻었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요. 오전반회원은 이와 같은 소재를 찾아 글을 써 보십시요. 그리고 비평의 눈도 키우십시요.
작품은 발표하면 이미 자기의 손에서 떠난것이기에 누구던지 평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공부입니다. 잘된점, 어색한점을 가려낼줄 알면 자신도 좋은 글을 쓸수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선생님, 동지가 되었네요. 저도 쌍둥이 엄마입니다. 우리 쌍둥이는 스물여덟살인데 아직도 공부중이예요. 힘은 배로 들지만 기쁨도 두배가 되니 사랑스럽게 키우세요. 잔잔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렇게 고대하고 기원하던 끝에 얻은 쌍둥이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기쁨이 배로되는 훌륭한 쌍둥이로 키워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써 놓고도 새삼 다시 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흠이 보이네요. 많은 가르침 부탁들여요
예술은 세월이 가면서 생각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지난해는 잘쓴글이라 생각했을거요. 그러나 지금보면 어색하다는 부분도 눈에 보이게 될거요. 이것은 누구나 다 그렀습니다. 그래서 화가들도 자기 그림이 걸려 있는걸보면 다시그려다 붙이고 싶답니다. 우리 글도 그럴겁니다. 특히 미성숙될때가 더 그럴겁니다.
때로는 새롭게 보여지기도 하겠지요. 언제고 자신의 글은 자신이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술은 누구나 자만해서는 발전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작가라면 항상, 더 고민하고 아퍼야 좋은 글이 써지게 될겁니다.
헤라님 어제께 수고 하셨습니다.쌍둥이 엄마가 누군지 잘 몰랐는데, 어제께 끝까지 동행 하면서 알고, 이제야 늦게 나마 축하드립니다. 조까들은 잘 크지요.
일요일날 본 아이들이 해맑고 예뻤습니다.소중한 아이들 인데도 불구하고 화내고 나면 마음 아프고 후회되고 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조금 더 성장한 아이들을 보면서 그래도 그때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던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