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공의 손 / 맹문재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우리 마을 구둣방
수선공은 길가 구석에 쌓인 쓰레기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구두를 받자마자
오랜 병마에서 살아난 사람처럼
이내 이리저리 뒤집으며 실을 뽑고
찬찬히 가위질을 해댔다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듯
망치로 톡톡 두들기고 볼을 감싸기도 했다
나의 구두는 어느새
수선공의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끄무레한 세밑 하늘이 어둡지 않았고
라디오를 타는 외환 위기 뉴스가 불안하지 않았고
수없이 다가오는 겨울바람도 시리지 않았다
잘 가라는 듯
수선공은 한번 더 구두를 매만지고 내게 건넸다
감쪽같이 변신한 의치(義齒)와 다르게
기운 자국을 당당히 가진 구두
수선공의 손은 어느새 구둣방의 문틈으로
먼 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과를 내밀다 / 맹문재
1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담장 가에 달려 있는 사과들이 불길처럼
나의 걸음을 붙잡았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행동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가난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한번 어기고 싶었다
손 닿을 수 있는 사과나무의 키며
담장 안의 앙증한 꽃들도 유혹했다
2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을 나오는데
주인집 방문이 열리지 않는가
나는 깜짝 놀라 사과를 허리 뒤로 감추었다
마루에 선 아가씨는 다 보았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3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다시 놀랐다
젖을 빠는 새끼를 내려다보는 어미 소 같은 눈길로
할머니는 사과를 깎고 있었다
나는 감추었던 사과를 내밀었다, 선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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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실(시)
수선공의 손, 사과를 내밀다(마인드프리즘, 재수록)
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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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11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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