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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권력자의 아내 (대하 21:1-7)
21:1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1:2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우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21:3 그 부친이 저희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었고 여호람은 장자인고로 왕위를 주었더니
21:4 여호람이 그 부친의 위에 올라 세력을 얻은 후에 그 모든 아우와 이스라엘 방백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21:5 여호람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삼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치리하니라
21:6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21:7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이 따로 있다는 거죠. 우리가 살면서 내가 사는 데 얼마나 껄끄러우냐, 만족스럽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생각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평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것이 악한 일이며 그리고 그렇게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속성과 본성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다고 해도 나만 편하고 좋으면 되지 그게 무슨 대수냐고 버틴다면, 글쎄요 마지막 심판 때도 과연 그렇게 버틸 수 있는지 정신이 아찔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고 했을 때는 우리가 바짝 긴장을 하고 악한 쪽으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아무리 형편이 어렵고, 경제가 어렵고, 인생살이 자체가 힘들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쪽으로 머리를 돌려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것을 명심을 해줘야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악한 왕이 한사람 등장합니다. 지난 시간에 여호사밧이라는, 유다나라에서 조금은 괜찮게 통치했다는 여호사밧의 여러 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 명단이 2절에 보면 7명 나오죠. 그런데 거기에 제일 맏이가 여호람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악한 것이냐, 여호람이 장자가 되어 왕위를 계승해서 왕이 되고 난 뒤에 그 동생을 다 죽였습니다. 가만히 있는 동생들을 왜 죽입니까? 거참, 이상하지요. 자, 여기 동생을 죽이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마는 그런 악한 일을 하는 동기가 나와 있습니다. 6절에 보니까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낯선 사람 이름이라든지 명단이 자주 나올 때는 우리가 성경 보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제가 그 배경을 대충 설명하면, 이스라엘 나라는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나 북쪽 나라는 제대로의 나라가 아닙니다. 비정상 이예요. 북쪽은,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살고 있지만 그 정신은 이미 이방민족과 동일한 정신으로 기울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남쪽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의 맹세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지켜주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남쪽에 있는 여호람이라는 이 왕마저 북쪽의 영향을 입어 가지고 완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도발적인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아들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줬는데, 3절 말씀을 보면 "그 부친이 저희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었고 여호람은 장자인 고로 왕위를 주었더니" 라고, 이렇게 되어있으니까 여기서 보면 동생들도 빈털터리 된 것이 아니고 그 나라에서 요직과 막강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왕이 되어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되면 욕심이라는 것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사람은 이상하게 절제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절제시켜 주지 않으면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본인의 힘으로는 절제가 안됩니다. 동생들이 요직과 막강한 재산을 갖게되니까 왕이 된 맏형의 입장에서도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와 이스라엘 방백 중 몇 사람을 죽였습니다.
자, 이것이 누구로부터 사주를 받았느냐하는 것이 오늘 설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북쪽 나라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한창 하나님의 대적하는 권력층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북쪽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는 행세를 남쪽 왕인 여호람이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 남쪽 나라에서는 큰 문제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간주하십니다. 그것은 그의 아내가 배후에서 여호람을 조종했던 것입니다. 그 여자는 아합의 딸이었는데 아합은 북쪽의 왕입니다. 그러니까 아합이 장인어른이고, 장모님은 이세벨이며 자기 아내 이름은 아달랴입니다. 아합, 이세벨, 아달랴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쪽이 아니고 최고의 자리는 힘이 최고로 세야 권위가 선다는 그 철칙에 의해서 힘으로 모든 것을 자기 수하에 두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쪽 계통입니다. 특히 이세벨과 아달랴는 바알 신을 믿었습니다. 힘을 모으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고, 많은 힘을 가져야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그러한 기복적인 이방종교의 신봉자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똑 같잖아요.
자, 이방여자의 이러한 정신사고가 왜 하나님이 계시는 이 남쪽나라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할 수밖에 없고 허락할 수 없는가? 그 내막이 좀 어렵습니다만, 역대하 8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솔로몬 왕의 말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솔로몬 왕이라고 하는 자가 일천번제를 드려서 하나님께 응답 받아 이스라엘을 최강의 나라로 만든 축복 받은 왕의 대명사 아닙니까. 인류역사상 솔로몬 왕만큼 축복 받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 축복이 솔로몬의 마음가짐을 변화시켰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많은 소유와 많은 축복이 결코 솔로몬의 마음까지 완전하게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지 가진 재산을 보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재산 내놓았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천국에 가 있느냐, 지옥에 가 있느냐, 어디로 향하느냐가 결정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세상에 가 있다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 할지라도 지옥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와서 우리가 추구해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새사람 가는 데에 주력해야지, 남들 가진 만큼 나도 끌어 모아야 되겠다든지, 남들 힘쓴 만큼 나도 힘을 발휘해서 기죽지 않게 한 번 살아 보겠다든지 하는, 이러한 야심 가지고 교회에 나온다면 그것은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고 절간에 나온 것입니다.
역대하 8장 끝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저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르러 가로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궁에 거하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솔로몬이 바로의 딸, 그러니까 이방종교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러나 그 왕비가 살 장소가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 안의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하기 때문에 이방여자, 다른 나라에서 시집 온 여자는 거룩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여자는 거룩한 곳에 함께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사랑하고 많은 여자들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여자가 몇 명이냐 하면 후비가 700명이고 빈장이 300명이라, 합해서 1000명이죠. 왕비까지 1001명 아닙니까. 그 많은 여자들마다 자기 친정에서 믿던 신들을 총집합을 한 거예요. 그래서 솔로몬의 마음이 여호와로부터 자기 아내들이 믿던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됩니다. 이쪽 신을 믿어 볼까, 저쪽 신을 믿어 이렇게 복 받았나, 복 받는데는 여호와 아니어도 다른 신을 믿어도 된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거예요. 이 땅에 살아가는 데 한해서 꼭 여호와께만 매달린다든지 그분에게만 의지한다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거죠. 쉽게 말하면 생각의 폭을 넓힌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역대하 8장에 보면 솔로몬이 그래도 하나 지킨 게 있는데, 신명기에 보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총회, 즉 하늘나라 총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어떤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간에 하나님 앞에 이미 잘린 인간입니다. 지옥의 자식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수요 설교시간에 산당과 그 당시 예루살렘의 성전과의 차이점이 뭐냐고 했습니까? 산당과 같은 갓바위처럼 산에서 복을 비는 기복적인 그러한 종교시설 단체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건물과 차이점이 뭐냐하면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차이가 난다고 했습니다. 산당에는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신을 달래기 위한 우상만 있는 반면에 성전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그 언약궤와 거룩한 피의 만남이죠. 7월 10일날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대로 하면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아야만 마땅하지만, 그러나 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에다가 일년에 한 차례씩 거룩한 하나님의 자기희생, 하나님의 피가 묻힐 때, 그 피를 믿는 자는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관점은 왕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우냐, 얼마나 키가 크냐,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네 부인이 진정 하나님의 약속을 쳐다보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네 여자가, 또는 네 자신이 하나님이 언약궤를 통해서 내려준 하나님의 약속을 쳐다보면서 이 약속에 의해서 용서받고 사죄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네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느냐의 여부를 하나님께서 늘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외부에서 수입한 자기 아내들이, 그러니까 북쪽에 있는 아내들이죠, 남쪽 남편과 북쪽에서 온 아내들이 관심 있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 나라가 유지된다는 이 자체를 자신들은 믿지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왕은 하나님의 허수아비가 되니까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니까 아마 그런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할 리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믿음도 있어야되고 행함도 있어야 된다고 많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내가 행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찾는 재미에 살고 싶지, 내가 행하지도 않은데 다른 예수란 분의 행함으로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난다고 하는 이것이 나 자존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에 나는 못 믿겠다고 나오게 되거든요. 바로 이것이 바알 종교며 일반들의 보통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든, 교회든, 선교단체든, 선교사가 되었든, 목사가 되었든 관계없습니다. 하여튼 간에 "나는 죄인중의 괴수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이 소리가 듣기 싫다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이것 또한 이방종교의 특색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앉아 있어도, 혹은 솔로몬이 많은 축복을 받더라도 그것을 자기의 힘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언제고 마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매순간 순간마다 우리에게 유혹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요? 눈만 뜨면 유혹입니다. 무슨 힘으로 저것을 가지지? 내가 얼마나 돈을 벌어야 저 모피를 살 수 있지, 저 아파트를 살 수 있지, 우리는 늘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내 노력에 의해서 내 힘으로 저 것들을 축적할 수 있느냐는 것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유혹거리 입니다. 힘이 없어서 저것을 못 가지지, 힘만 키운다면 저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하고, 나는 아파트를 가지든, 무엇을 가지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나는 죽어야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지 내 공로와 내 노력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고 받아드리는 것하고 어느 것이 우리들의 심성에 자연스럽게 다가옵니까. 우리가 이 아달랴를 비난하고 여호람을 비난하기 이전에 우리자신이 우리 자신을 한 번 비난해 봅시다.
드라마 "왕과 비"에 보면 이방원이 동생들 다 죽이는 것 나오지요. 왜 죽이는 겁니까? 여러분, 권력이라는 것이 도박이고 노름과 같은 것인데, 어디 권력의 정치 세계만 그러합니까? 우리가 사는 것은 노름이 아닙니까?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더 많이 차지해야 속이 차고 만족스러운 우리의 탐욕, 이것을 지금 여호람이라는 자가 우리를 대신해서 다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란 것은 이런 놈이라고 말입니다. 분명히 아버지가 정치를 잘했고 신앙생활 잘 했으면 아들도 본 받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유다 나라에 최고의 선정을 베풀고 믿음으로 생활했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하는 것을 다 지켜본 그 맏이가 유다 나라 최악의 나쁜 놈으로 이렇게 전락했다는 말은, 둘 중에 나쁜 쪽이 우리의 본성이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면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이고,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거룩한 곳에 어떻게 감히 이렇게 여호람과 같은 나쁜 놈들이 천국에 갑니까.
저는 신앙생활 하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더러운 나 자신이 천사들이 살고있는 깨끗한 천국, 거룩한 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내가 설교하고 헌금하고 전도한다고 그것이 성사됩니까?
찬양한다고 그것이 거룩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언약의 피, 그 피로 씻음 받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에 봅시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 말은 지금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듯이 유다 나라도 같이 망해야 마땅한데, 하지만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 하셨음이더라" 이 등불이 뭐냐하면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기 때문에 봐줘서 멸하지 않는 거예요. 다윗과 언약을 맺었단 말이죠.
그러면 지금은 누구와 언약을 맺었습니까.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이 새 언약인데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하고 맺은 자기 피와 자기 살을 대가로 맺은 그 약속에 의해서, 그 예수님이 택한 자와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사죄의 은총을 지금도 베풀어 주셔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꺼지지 않는 등불입니다. 제가 분명히 장담합니다마는 마지막 심판 받을 때에 네 속에 꺼지지 않는 예수님의 등불이 있는가? 그것을 살피십니다. 네가 얼마나 잘났고 훌륭하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얼마나 성화가 되고 착한 인간이 되야 한다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용서의 등불, 따뜻한 등불, 사랑의 등불이 우리가 잘나서 꺼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맺어진 그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거룩한 곳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을 통해서 다른 사람 욕할게 아니라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멈추지 않는 탐욕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어떻게 거룩한 천사들과 합류가 됩니까, 안되지요. 그런데 되게 하시는 것은, 꺼지지 않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이 더러운 죄인 중의 괴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로서 우리를 구원의 능력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자든, 여자든 인간의 욕심은 한결같고 젊은 아이든 나이가 많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탐욕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죽을 때까지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저희들의 모습을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다시 한번 살핍니다. 정말 죄인 중에 괴수 이지만 놀랍게도 그것을 용서해 주시는 거룩한 피, 주님의 피를 사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5. 거룩의 상실 (대하 21:8-10)
21:8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운고로
21:9 여호람이 장관들과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더니 밤에 일어나서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쳤더라
21:10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날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여 여호람의 수하에서 벗어났으니 이는 저가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더라
『이 시간도 주시는 말씀이 저희들이 잘못을 알고, 그리고 그 잘못까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아는, 그런 기회가 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성경에 있는 이 내용을 보면 오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안 맞다고나 할까요, 좀 엉뚱한 면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 믿는다는 그 유다 나라의 여호람이라는 왕이 하나님을 버리고 배반하니깐 그 유다 나라의 지배를 받던 립나와 에돔이라는 나라도 유다 나라에 대해 배반해서 그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버리기는 유다 나라가 버렸는데 왜 가만히 복종 잘하던 이웃 나라들이 갑자기 유다 나라로부터 벗어납니까? 좀 이상하지요. 내가 하나님을 버렸는데 우리 집 강아지가 나를 물려고 덤비는 식입니다. .
자, 이러한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 사이이기에 하나님 안 믿는 사람마저 감히 하나님 믿는 우리를 모독하고 떠나버리는가, 하는 점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떤 식으로 징벌을 내리시느냐 하면, 저 개 같은, 하나님을 모르는 저 민족도 너를 얕잡아 보고 너를 쉽게 떠나듯이 이 하나님이 지금 너의 상태에 대해서 이처럼 참 심각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사는 유다 나라가 저 하나님 안 믿는 족속과는 확실히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이런 식으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웃 나라조차 유다 나라를 시시하게 볼 정도이면 현재 유다 나라를 신앙 상태가 얼마나 형편없이 되어 버렸느냐에 대해 깊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인이라고 해서 외형적으로 표시 나는 게 아니지요. 행색이 다른 이들 보다 특별날 게 없습니다. 하지만 행색과 상관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특별히 크게 애착을 가지고 사랑을 퍼부어 주는 대상이 바로 유다 나라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어떤 엄청난 사랑의 혜택을 잊고 있고 그걸 무시하게 되면 바로 하나님 안 믿는 자들이 오히려 우리들을 모독하고 짓밟고 우습게 보는 그런 이상스러운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평소에 유대 나라 사람들은 자기 주위에 있는 여러 민족을 향해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을 안 섬긴다고 철저하게 무시했던 자들이 이방 민족들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톡톡히 무시당했던 그 이방 민족들로 하여금 도리어 어설픈 신앙을 가진 채 하나님을 안다고 거짓말하고 유다 나라에 대항하여 가볍게 무시하는 경우를 당하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안일하게 하나님을 대했던 모든 자들에게 마음의 혼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이방 민족의 종류가 많다 할지라도 참된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방 민족이 아니라 우리 유다 편이라고 그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하나님은 유다 나라 앞에서 이방 민족의 기를 더 세워주는 듯한 활동을 한다고 하니 이러한 하나님은 우리는 어떻게 정립해서 받아드려야 합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이 이방 민족 못지 않고 개별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난 뒤 대단치도 않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계속 그렇게 대단한 관심으로서 돌보아 주실 때 이 사랑의 위대성을 더욱 더, 그러니까 우리를 대단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대단함, 사랑의 그 풍성함을 우리가 특별히 더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본문이 쓰여진 것입니다.
여호람 유다 왕이 하나님을 버리니깐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내리셨는가, 그 동안 군말 않고 유다 나라에 잘 충성하던, 하나님 앞에 겁을 내던 그 민족도, 이렇게 건방을 떨면서 "유다 너희들 뭐야" 하면서 차고 독립해 가버리고, 립나도 배반하고 독립해 가버렸는데, 이러한 현상을 통해서 그 동안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어떤 차원에서, 어떤 큰 특수성과 특별한 은총으로 유다 나라를 이렇게 지탱해 왔던가를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때 유다 나라나 지금의 현대인이나 모두들 아무 것도 아닌 존재고 똑같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은 유다 나라를 특별 관리 대상으로 삼아 주셨다는 이 사실만해도 유다 나라는 절대로 다른 민족의 모임과 같지 않습니다. .
자,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에서의 이 전쟁이라는 것이 어떤 전쟁인가를 먼저 알아야 되겠죠. 구약에는 전쟁이 자주 등장하는데 신과 신들이 붙는 전쟁입니다. 모든 인간은 신을 섬기는데, 그 신들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그런데 그 가짜를 무엇으로 증명 하느냐하면 진짜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비로소 "아하! 저건 가짜고 우리가 믿는 여호와는 진짜 하나님이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여러분, 사람이 제일 기쁜 것은 내가 믿고 있는 그 분이 진짜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를 창조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때, 신앙인들은 가장 기쁩니다. 그것보다 더 든든한 게 없습니다. 비록 수입이 적고 남보다 출세에 뒤떨어진다 할지라도 지금 내가 의지하고 있고, 내가 믿고 있고, 또 나를 알고 계시는 그분이 진짜로 하나님, 정말 우주를 심판하실 그 당사자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면 우리가 그 비빔밥 한 그릇 뚝딱하고 먹은 이상으로 든든하지요. "아 됐구나, 살았구나, 내 인생은 이제는 정돈되었구나, 어떤 풍파라도 흔들릴 필요조차 없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을 발견함으로써 그 안에서 진짜 내가 누구이냐를 동시에 알 때, 그 때 인간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승리란 내가 누군가를 확실하게 잡을 때, 그것이 최고의 경지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거죠.
진짜 신과 가짜 신을 전투를 붙여서 진짜 여호와 하나님이 승리케 함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셨는데 사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홍해 바닷가에서 물을 퍼냈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가진 지팡이의 작용으로 뒤따라오던 애굽인들은 완전히 바닷물에 몰살해버리고 자기들은 가만히 박수를 치면서 찬양하며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혜택은 진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그들이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출애굽기 20장부터도 역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자기들이 들어가야 될 약속의 땅이 코앞에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홍해 강가에서 경험했던 그 참 신을 계속해서 의지하고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그들 국가의 운명과 장래도 결정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 중에 제 일 계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있게 말지니라" 이것이 일 계명으로 나옵니다. 십계명을 어떤 사람은 윤리라고 보는데, 저는 윤리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면 십계명은 뭐냐? 진짜 하나님을 진짜로 의지하고 사랑하느냐는 하나의 신앙에 관한 지침이지, 윤리 도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데, 여기 "나 외에 다른 신"이라고 할 때에 "나"가 누구입니까? 2절에 보니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그러니까 우리가 십계명을 대하면서 아무리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간음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탐내지 않고 살았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에서 있었던 그 일, 우리는 아무 공로도 없었으나, 아무 행한 것도 없었으나 주님의 공로로 덜렁 구원받게 되었고 은총을 입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기적을 계속 마음속에 유지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그것을 만약에 빼버린다면 이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 잡종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싸움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탱크나 비행기나 미사일이나 막강한 무력으로 자기의 영토와 국가를 지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나라가 앞으로 부딪쳐야 할 모든 사항은 옛날 애굽에서 홍해를 갈라지게 했던 그 하나님, 그 분만 마음속으로 의지하는 경우에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답게 유지하고 보존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그것 참 쉽네요. "세상에 천당 가기 굉장히 쉽네요"라고 이야기 할 것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차라리 날 죽여라, 나보고 헌금하라고 하고 전도 하라고 하지, 예배 참석하고 주일성수 지키고 십일조 하라는 것은 하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 의지하라는 것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무슨 수로 합니까? 교회서의 주특기가 하나님 말씀 잘 지키고 선행을 과시하는 것인데, 자기의 종교행위가 옆 사람 보다 더 뛰어나고 놀랍다는 것을 자랑하는 재미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보고 아무 것도 행한 것도 없이 덜렁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 말입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하지 마시고 우리보고 시켜만 주이소, 시키는 건 잘 하겠습니다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만사형통 한다는 허황하고 추상적인 관념적인 그런 이상한 소리만큼은 제발 하지 마세요" 이렇게 저한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십계명은 윤리 도덕이 아닙니다. 인간이 대충 노력만 하면 누구나 해내는 것들이 아닙니다. 영에 속한 자가 아니면 영에 속한 일을 모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자가 아무리 흉내내기로 버틸 수 없는 것이 신앙세계 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자꾸 어떤 강력한 무기나 상대방 국가가 갖고 있던 그냥 두렵고 화려한 것들은 전부 다 없애고 하는 말이 "나만 믿어, 이 여호와만 있으면 되는 거야," 자꾸 이런 쪽으로 나가니까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면서 믿는 자,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믿자고 이야기하고, 믿음이 없는 대다수의 민중들과 왕과 거짓 선지자들은 "타협하자, 고개 숙이자, 뇌물주자, 옆 사람들과 외교적인 마찰은 일으키지 말아야지, 다른 나라들 다 그렇게 사는데 우리만 이렇게 허황하게 살수만은 없지 않는가", 하는 마음으로 안절부절 못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이 전쟁이 개인, 개인의 어떤 자질이라든지 성품이라든지 성격이라든지, 개개인의 어떤 국가적인 실력이라든지, 지위라든지 그 싸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어떤 신이 박혀 있으며 저 쪽 나라에는 어떤 신이 박혀 있는가? 그리고 그 신들 중에 어느 신이 진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냐, 말만 하나님이 아니고 명칭만 신이 아니라, 우주를 진짜로 만드신 그 하나님이 어느 나라에 계시면서 지금도 현실적으로 인도하고 있는가? 그런 것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역사가 바로 이스라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걸 이해의 차원으로 접근하면 이해가 잘 될 리가 없지요. 마음 자세 자체가 틀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명기 7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사람들의 마음을 헷갈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자들에게는 속을 뒤집어버리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큰 것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에 맞서서 하나님은 가장 작은 군사력으로 밀어붙이시는 이유는, 힘으로 하나님을 알겠다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시지 아니시고 오히려 가장 적은 숫자의 군사력을 남기므로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믿는 지 여부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정말 이지 누가 봐도 유다 나라 백성들은 누가 봐도 얕잡아 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집단입니다. 그래서 주위의 힘께나 쓴다는 나라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 찝쩍댑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건방지고 교만한 모습입니다.
강한 이방 나라가 유다 나라의 고관대작들을 많이 사로잡아 갈 때는 그들도 신이 났겠지요. 그러나 그들아 잡았다고 여기는 그들을 핍박했다는 이유로 거대한 제국들은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잘난 체하고 힘 자랑하는 모든 제국들이기에 상대적으로 유다 인을 얕잡아 보게 된 그 태도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감히 유다 나라를 얕보다 자기 수하에 두려고 하다가 거꾸로 유다 나라의 하나님에 의해서 크게 낭패를 당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세계 만방에 보이고자 하나님은 유다 나라를 그 때 그 때마다 징계해 왔습니다.
그래서 외부의 적이 얼마나 막강하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 나라가 이방화 되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이방민족들로 쳐들어오게 해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할 것이고, 또는 이스라엘 수하에 있던 나라도 독립해 나가버리게 하는 거예요. 그것이 신명기 7장 16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식으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시느냐 하면 믿음이 없는 것 같으면 필히 두렵지 않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조항들을 자꾸 유발시킵니다. 믿음만 없다면 자기를 굴복시킬 수밖에 없는 그런 난처한 사항을 만들어 놓고 하는 말이 "두려워 말라 네가 겁내고 있는 저 막강한 민족들보다도 지금 너와 함께 있는 하나님은 그 보다도 몇 십배, 몇 천배 더 능력이 계신 분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식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죠.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막강한 적들, 두렵지 않을 수밖에 없는 그런 적들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더 세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신명기 7장 25절에 보면 그것보다 더 무서운 유혹 같은 게 있습니다.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야!~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적은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데, 내부에서 유혹으로 다가오는 적은 정말 이기기 힘듭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그 신상을 보니까 금과 은으로 조각해 놓았다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이 재물에 대한 탐욕, 돈에 대한 탐심, 뭔가 풍성히 소유한 데서 오는 안락함이라든지 넉넉함으로 동기 유발되어서 빼앗기는 그 유혹, 매력, 집착, 예수는 이왕 믿는 것이고 부자로 한번 살아 보겠다는 돈에 대한 사랑, 그건 정말 우리 내부의 적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바로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유인하려고 하잖아요. 교회 오면 복 받는다는 게, 안 믿는 사람들이 갖고 있던 그 막강한 돈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탐나지요. 그러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기도하면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건 신명기 7장 25절을 정면으로 지금 부딪치는 상황입니다.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굶어 죽는 거지라도 천당을 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지 나사로의 예가 그렇지요. 진짜 하나님만 믿으면, 진짜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이 기쁨과 포만감만 있으면 땟거리가 없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귀하게 보고 특별한 존재로 간주한다는 말입니다. 꼭 돈이 많은 집사, 장로가 되어야 하나님이 더 특별히 봐 주는 게 아니고 그 직분이나 돈 없어도 하나님만 있으면 족하다는 그러한 순수한 신앙만 가진다면 그 신앙보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떠한 인간보다 더 월등한 존재로 간주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 신명기에 나오거든요. 신명기는 나중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말씀을 줄줄이 나열하신 것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이런 유혹, 저런 유혹, 공포의 대상들이 누군지 살면서 마주쳐야 될 그런 문제이기 때문에 사전에 조심하라고 당부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세요. 그렇게 당부했건만 그 이스라엘 왕이라는 사람도 다른 신을 부러워하고, 힘을 부러워하고, 나도 이방나라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하나님만 믿어서 이게 뭐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식으로 넘어가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21장 8절에 보면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라고 했지요. 여기 에돔은 뭐냐하면 에돔 민족의 조상이 있습니다. 그 조상의 이름이 "에서" 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입니다. 야곱의 형 같으면 동생과 친하게 지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형은 동생 야곱(이스라엘)이 평생 저주해야만 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형 "에서" 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야곱의 형 에서는 저주받아야 될 운명으로 태어났으니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 대대로 인류 역사상 끝날 때까지 저주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저주받아야 될 너의 형을 바라보면서"나는 왜 저주 받아야할 운명이 아니라, 그토록 축복만 받아야 될, 축복에 선택된 사랑을 받았는가" 하는 사실을 그 형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절감하고 또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행동 여하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가 바뀔 것 같으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하나는 저주의 사람으로, 하나는 축복 받을 사람으로 결정되어서 태어났습니다. 그 결정된 운명이 지상에 쫙 깔리는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결국은 에돔, 즉, 에서의 저주라는 운명에 있는 자들, 축복 받은 이스라엘이 그걸 한 손에 쥐고 있으므로 말미암아 곧 네가 저들보다 잘나서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저주받을 자를 저렇게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라고 주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자칭 복 받았다는 이스라엘이 자기에게 그런 사랑을 주신 하나님을 버려 버리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저주받을 대상을 지배할 권한이 있는데 본인이 사랑으로부터 이탈되어 버리니까 저주받을 민족과 똑같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는 차이가 없어졌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경고하기 위해서 네가 보기에 차이 있다고 생각하는 에돔 나라가 너를 떠난 걸 보니까 네 본분과 네 위치를 지금 떠난 거야, 정신차려! 그래서 에돔이 독립해 떠나게 함으로 정신 차리게 하는 거예요.
제가 복잡하게 이야기한 것 같지만 복잡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복 줄려고 태어나게 한 사람이 따로 있고 영원히 저주받고 나중에 지옥가야 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먼저 가슴속에 받아들인다면 제가 하는 이야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아, 복 받을 사람은 저주받을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사스럽게 잘 살고 빌딩을 짓고 출세를 하고 무얼 어떻게 해도 그것 보다 참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이 사실에 놀라워하고 감격하고 고마워할 때, 그런 현상이 받아드려질 때만 진정 그 사람이 선택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꾸 더불어 섞이려고 하지 마세요. 세상의 유혹에 이끌리지도 마시고 그들이 가진 권리나 능력이나 권세를 두려워하지도 마시고 하나님께서 너를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부러워하라는 것도 아니고 두려워하라는 것도 아니에요. 금, 은, 보화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금, 은이나 권력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심으로 그 사랑하심이 우리를 에워싸서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이 특별한 존재가 세상의 지푸라기 같은 그런 것들을 갖고 있는 그들을 부러워해서 되겠습니까.
바로 오늘 성경본문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네가 누군지 아느냐"를 우리한테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 시민권을 우습게 보지 않는 우리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통해서 보니,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알게 된 그 자체만 해도 더 이상 우리에게 보화가 필요 없는 큰 줄 압니다. 이 놀라운 신앙의 본문을 받았으니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만 자랑하는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6. 선지자의 예언 (대하 21:11-20)
21:11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케 하였으므로
21:12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가로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21:13 오직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기를 아합의 집과 같이 하며 또 너의 아비집에서 너보다 선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21:14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와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리라
21:15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21:16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21:17 그 무리가 올라와서 유다를 침노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말째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1:18 이 모든 일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람을 치사 능히 고치지 못할 병이 그 창자에 들게 하셨으므로
21:19 여러 날 후 이년만에 그 창자가 그 병으로 인하여 빠져나오매 저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백성이 그 열조에게 분향하던것 같이 저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
21:20 여호람이 삼십 이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치리하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저를 다윗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 아버지! 진리와 비 진리의 길이 우리 앞에 있는데, 어느 쪽이 생명의 길인지 우리가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한 이 나약함을 용서해주시고 정말 사는 길이 어느 것인지에 목숨을 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등장 인물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담겨있고 우리주위에, 우리교회 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 성경에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닙니다. 다같이 우리는 한 아담, 하와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책망 받고, 징벌 받고, 저주받은 이 사람이 타인의 얼굴이 아니고 바로 나의 얼굴입니다. 같은 우리 조상의 핏줄을 타고 아담으로부터 아담의 본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늘 상 우리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겉모습만 보여주는 거울만 들여다보지 마시고 거룩한 거울, 우리의 속내를 파헤치는 이 성경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다시 한번 재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오늘 성경에 보면 길게 읽었습니다마는 내용은 쉬운 내용입니다. 여호람이라는 악하기 짝이 없는 한 인간이 하나님 말씀은 지독하게 듣지 않고 산당을 의도적으로 세워서 음란하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때, 선지자 엘리야가 편지를 보내어서 하나님 말씀을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합니다.
자, 우리는 이 성경을 보면서 왠지 우리 마음속에 "아 참, 답답한 인간, 엘리야가 그렇게 이야기 많이 해 줄 때에 잘 듣지, 그 지독스럽게 말 안 듣네" 라는 생각이 들면서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지요. 선지자를 보냈다는 말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까 자기의 종 선지자를 보낸 게 아니에요? 그러면 선지자가 벌써 이 내막을 알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으면 얻어맞기 전에 알아서 회개 할 것이지 뭐 잘났다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아니하고 심지어 더 악한 길로 나가서 징벌을 받았는가 이 말입니다.
징벌이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16절에 나오는데 가만히 있는 이웃나라 블레셋 사람과 가까이 있는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일부러 작동을 시켜서 여호람이라는 왕을 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자랑하던 왕궁의 모든 재물과 보물을 몽땅 다 빼앗겨 버리고 아들들과 심지어 아내까지 빼앗기지요. 말째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기지 않고 전부 살해되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18절부터 나오는데 자기가 죽을 때에는 고치지 못할 병이 들어 이년만에 창자가 빠져 나오는데 그 병을 우리가 생각만 해도 엽기적 아닙니까? 끔찍하지요. 이렇게 해서 20절 마지막에 보면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속이 후련하게 잘 죽었다고 할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겁나는 하나님의 저주를 미리 앞당겨 알았으면 엘리야가 편지 보내고 메시지 전할 때에 알아서 회개하고 자기를 다스렸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고집이 세어서 하나님 버리고 우상 섬기고 이렇게 말씀을 안 듣고 살아가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이야기 한 것이 사실은 이야기하나마나 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선지자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안 살아 계십니까? 아니, 오늘날 기독교 교인 가운데 선지자의 말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던가요?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무서워하고 회개하며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한 성도를 요즘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호람이 마음이 완악하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교인들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아마 막상막하일 것입니다. 목사들도 얼굴에 철판 깔고 목회 하기에 말씀 연구하는 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말씀을 원하지도 않는 대중들을 상대하다보니 말씀을 깊이 연구한다고 해서 목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은 초신자들, 진짜 지옥이 겁나서 지옥만은 가지 말아야겠다고 목사 붙들고 "성경말씀 어떻게 됩니까?"하고 묻는 그런 사람들이 말씀이 관심이 많습니다. 몇 달 전부터 계속 전화 오는 다른 교회 교인이 있습니다. "목사님 성경 어떻습니까, 이 말씀 어떻게 해석합니까?"라고 오늘도 전화가 왔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관계없이 몇 개월 째 계속 성경을 물어 옵니다. 그런 분들이 주위에 많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것 때문에 살고 있기에 친절하게 이야기 해줍니다. 우리 교인들은 그런 분이 없습니다. 워낙 예배시간에 다 들어버렸으니까. 제가 너무 위로해 드린 겁니까? 예배 시간에 다 들어버렸으니까 전화도 하지 않지요.
서울서도 전화 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니까 교회에 처음 나와서 어떻게 하나님 잘 믿어 볼까해서 "목사님 어떻게 하면 하나님 한 분을 잘 섬길 수 있습니까?"라고 문의해 오는데 여기에 관심을 두는 분은 초 신자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어요. 마음이 하나님에게 모두 다 빼앗겨서 일상적인 일은 별 중요시하지 않고 가사문제, 가정문제도 별로 중요치 않고 하나님 말씀에 마음이 빼앗겨서 말씀과 더불어 거기에 관심을 가집니다.
저는 성도가 예수 처음 믿을 때 성경에 관심 두고, 한 2, 3년 지나면 성경에 관심 없어도 천당 쏙 들어간다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겁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에 이끌려서 계속 사랑하는 대상을 좀 더 많이 알아가고 자기가 사랑하는 그 분을 더 깊이 알고 더 사랑하기 위해서 많은 것에 궁금한 것이 생길 것이고 사랑하는 그 분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싶어서 행동에 조심하는 것이 극히 정상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남편이고 우리는 그 분의 신부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한테 3년 지나고 관심이 없어집니까. 갱년기입니까? 주님하고 살다가 그만 살자고 작정한 것입니까?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신앙을 신앙이라고 저는 간주하기가 곤란합니다.
오늘 본문에 딱 두 가지 노선입니다. 여기 엘리야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하면 12절에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가로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하나님 믿는 나라라고 하지만 그 안에 두 가지의 정반대 되는 길이 놓여있다는 겁니다. 완전히 정반대 방향으로 운명이 결정되는 두 갈래 길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나중에 왕이 된 사람들은 어느 쪽을 갈 것이냐를 날마다 선택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여호사밧과 아사왕의 길이 사는 길이고 나머지 왕들의 길은 멸망 받는 길이고 저주의 길이고 잘못된 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지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또다시 예수님을 죽일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정말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사랑하면 그는 예수와 함께 영생에 들어갈 사람으로 그 중간에 십자가가 딱 놓여 있어서 "십자가를 사랑할래? 세상을 사랑할래?" 양 갈래 중간에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면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 떼는 것은 그냥 수수료 주고 떼면 그만입니다. 면장한테 가서 절하고 아부할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천당 보내주는 증명서 끊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 너는 너고, 나는 나"가 아니에요. 그래서 먼저 천당 갔던 사람, 먼저 영생에 성공했던 사람의 길이 어떤 길인지는 여호사밧과 아사왕이 보여주고 있지를 않습니까.
"목사님 선지자 말도 틀릴 경우가 있잖아요, 선지자 엘리야 말이라고 다 맞습니까?" 이런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나 싶어서 제가 에스라 1장 1절의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는 바사 왕, 하나님 믿는 인간도 아니에요, 하나님 안 믿는 그 고레스 왕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이유가 뭐냐하면 예레미야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성취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명기 18장 끝에 보면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선지자의 말은 자기가 기분 내키는 대로 내뱉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서 누구를 통해서 전달을 해줘야 되는데 그 전달하는 우편배달부 역할을 선지자가 한 거예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있을 때에 천사가 와서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담아 준 것처럼 또 아모스에 보면 성읍에 나팔을 불지 않고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자가 울부짖듯이 선지자의 울부짖음 후에는 반드시 그 성읍에 큰 재앙이 떨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나팔이에요. 나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선지자란 말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아사 왕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구원에 성공한, 하나님께 칭찬 받는 사람이 되었는가, 역대하 15장을 2절을 잠시 보면서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그러니까 구원에 성공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은 사람의 특징이 별거 없지요.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이 특출해서 그런 것이 아니지요. 대학을 나왔다든지 돈이 많다든지 그것도 아니지요. 성질이 부지런하다든지 성실하다든지 한 것도 아니지요. 단지 하나 겸손한 것뿐이예요. 다시 말해서 자기보다 더 어르신이 계시다는 것을 매 순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제가 방금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 앞에 구원에 성공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는 자그맣게, 너무나 덩치 큰,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어떤 분이 자기를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기에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조그마한 일에 대해서 깜짝 깜짝 놀라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걱정 늘어지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씨름선수 강호동이가 뒤에 있는데 앞에 깡패 몇 명 있다고 겁나겠습니까. 그런데 강호동이 보다 더 큰 하나님이 함께 있는데 마주치는 어떤 상황이 벌어진들 그게 무슨 대수냐 이 말입니다. 그게 깜짝깜짝 놀랄 일입니까? 현대 교육의 핵심은 아무도 너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너는 스스로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립정신을 빨리 고취시켜서 스스로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자세가 "이 세상에는 날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내 스스로 살수가 없다"이러한 것이 몸에 딱 베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현대 과학정신에 부합되지요. 그런 사람들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해서 활발하게 활동하니까 선진조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죠. 그런데 이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는 방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면 왜 한없이 초라해지고 부끄럽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건방지기 짝이 없고 거만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잘난 것만 생각하고 남한테 뽐내기만 좋아하고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이런 자존심 뭉치로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속성이고 익혀준 하나의 버릇입니다.
여기 아사 왕의 특징인 마음을 강하게 했다는 말은 자기가 강하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가 태권도 배우고 유도 배운 게 아닙니다. 갑자기 자기 머리가 똑똑해진 것도 아니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이 모든 일은 하나님 소관이다,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나는 자족한다, 범사에 감사한다, 항상 기뻐한다, 쉬지 말고 기도한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나는 거기에서 겸손한다, 이 세상은 내가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이 움직여 간다"는 것이에요. 이게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현실에서 움직이고 있고 그 현실대로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마음을 모를 리가 있습니까. 중심을 보시는 분인데. 여기서 제가 주의할 것을 당부하겠습니다. 여러분, 윤리로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고 하는데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산다는 것이 자기에게 하나의 무기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잘못된 게 아니에요.
믿음이 좋고 기도 많이 하면 된다는 것도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믿음 좋고 기도 많이 하는 것은 기도와 믿음으로 내 것을 만들었다고 되니까 역시 자기도 그 힘으로 스스로 서는 것과 다를 바가 뭐 있겠습니까. 그건 믿음이 아니고 "하면 된다"는 신념이에요. 신념의 반대가 신앙이에요. 그런데 신념을 마치 신앙인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면 큰일날 이야기입니다.
신념이라는 것은 내가 가진 힘을 믿는 것이고, 신앙이라는 것은 아예 나를 안 믿는 것입니다. 엄청난 어르신네가 내 배후에서 어떠한 상황을 계속 만들어 내시고,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범사에 합력하여 네게 유익하도록 하는 그 사랑을 네가 감사하고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다 아시지요. 그것이 바로 생명에 성공한 것이고 구원에 성공한 믿음입니다. 지금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입니까. 이 나라가 여호람의 나라가 아닙니다. 아사의 나라도 아니고 여호사밧의 나라도 아니고 다윗의 나라도 아닙니다.
오늘본문 11, 12절에 나오지요.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존경받는 왕이지만 다윗의 나라가 아니에요, 다윗의 하나님의 나라예요. 하나님이 엄연히 지배하고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스스로 설려고 하고 스스로 힘으로 하나님의 힘과 존재를 얕잡아보고 그걸 무시하고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그 천국이 깨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선지자를 보내서 경고하고 듣지 않으면 실제로 일을 발생시켜서 한없이 그 인간을 낮추고... 낮추고 상상하기조차 너무나 무서운 지경으로 낮추어서 다른 사람에게 경고가 되도록 시범적으로 여호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람의 병으로 빠져 나온 그 창자가 나의 창자라고 좀 간주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창자가 예수님의 창자예요. 우리가 저주받아야 될 것을 예수님의 창으로 찔림 받아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은 바로 우리가 그 현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저주받아야 될 당사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될 그 자리를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신다고 그런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잖아요. 그가 징계를 받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 십자가에서 다시 한번 우리를 거울삼아 비쳐보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호람을 나무랄 게 없잖아요. 여호람이 바로 우리의 자신 아닙니까. 그냥 마음을 겸손하게 낮춘다고 신앙이 아니라, 진실하게 내가 어느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를 여호람과 십자가를 통해서 분명히 자기 자리를 알고 정리해야 됩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이라도 창자가 나와 죽어도 마땅한 인간인데 오늘도 웬 축복이고 웬 은혜인지 이렇게 살았습니다. 여호람은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이며 나는 그보다 더 못한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주시니 이건 주님의 기도 덕분이고 십자가 은혜 덕분입니다."라는 것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우리 신앙을 점검케 하여 주옵소서. 교회에 대해서 좀 안다고, 성경에 대해서 좀 안다고 서서히 자립하면서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신념과 힘으로 살려고 오기로 버티는 저희들의 잘못된 것을 용서해 주시고 진실로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지, 내가 서있는 내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십자가를 통해서 날마다 확인하고 되풀이해서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아멘.』
27. 아하시야의 운명 (대하 22:2-9)
22:2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 사십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달랴라 오므리의 손녀더라
22:3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 모친이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22:4 그 부친이 죽은 후에 저가 패망케 하는 아합의 집 교도를 좇아 여호와 보시기에 아합의 집 같이 악을 행하였더라
22:5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교도를 좇고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로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을 상하게 한지라
22:6 요람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에 라마에서 맞아 상한 것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아합의 아들 요람이 병이 있으므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사랴가 이스르엘에 내려가서 방문하였더라
22:7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받았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하시야가 갔다가 요람과 함께 나가서 임시의 아들 예후를 맞았으니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아합의 집을 멸하게 하신 자더라
22:8 예후가 아합의 집을 징벌할 때에 유다 방백들과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 곧 아하시야를 섬기는 자들을 만나서 죽였고
22:9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 예후가 찾으매 무리가 예후에게로 잡아다가 죽이고 이르기를 저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하고 장사하였더라 이에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
구약 성경에 보면 전쟁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기 전에는 주로 이기는 쪽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면 지는 쪽은 누군가요? 그 나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얕보고 건방지게 달려들던 이방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나라가 안정된 국토를 가지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만들고 난 뒤, 안일에 빠져서 하나님보다도 세상살이에 정신이 없을 때에는 전쟁에서 누가 이기느냐하면, 분명히 우리의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함께 있는 쪽이 이겨야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가 지고 여호와를 섬기기는커녕 여호와를 모독하는 이방나라가 도리어 승리해 버리는 사태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를 이기게 해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방나라가 이스라엘보다 더 착하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이건 뭐냐하면,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맞는데 하나님께서 전쟁이라는 상황을 유발시켜서 하나님 믿는 백성이 하나님 믿는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갖가지 조치를 내리는 것입니다. 갖가지 조치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잘못 생각하면 내 소원대로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인 줄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낸다는 뜻입니다. 내 욕망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얼씨구나"하고 다 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모르는 사람과는 다른 관리체제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다른 인생을 사는 겁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살지만 이제 우리한테는 더 이상 나의 인생이라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준 인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마세요.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했습니다. 사생아가 뭐가 좋습니까. 부모가 있어야 좋잖아요. 그러니까 부모가 계시다는 이 자체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타내시느냐하면 우리 멋대로 살지 못하도록 늘 이렇게 주위에서 상황을 만들어내시고 아직까지 못 깨닫는 것을 어떤 일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뜻을 위함이지 우리 뜻을 위함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주기도문에 보세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 지상에서 말입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저와 여러분, 우리 자신을 통해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주기도문 속에 들어있잖아요. 제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이 우리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있다는 이 말을 강조하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 때 저는 상당히 괴로워합니다. "그러면 이 목사 당신은 하나님이 모두 다 하면 우리는 할 게 아무 것도 없겠네,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다스리면 인간은 가만히 놀고 있으란 말이고 아무 것도 할 게 없다는 말인가" 이런 투로 제 강의나 설교에 대해서 반발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뭐냐하면 "아니 기도도 안 하는데 하나님께서 다 들어준다면 기도할 게 뭐 있느냐"라는 생각을 갖는다는 이것이 제가 보기에는 어쨌든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포부나 뜻을 이루자는 꿍꿍이속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에요. 욕심이 가득 찬 사람이란 말이죠.
거기에 대해 제가 지적을 하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여러분의 뜻을 이루지 않습니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삐쳐 가지고 "그러면 하나님 뜻대로 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 전도도 하지 말고 가만히 놀까, 좋다 그러면 교회 잘 돌아가겠다"라고 반발을 하는 거예요.
제가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꿈과 우리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를 꿈을 뭉개고 뺏어 버립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실현하고자 하시는 취지이며 우리는 그 뜻을 위해 하나의 도구로 부름 받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서의 승리자냐, 실패자냐 하는 것은 이방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사람들의 태도가 어떠냐 에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승리가 오느냐 아니면 이스라엘에게 패배가 오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저 이방나라는 숫자 많은 것을 자랑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도 같이 숫자 많은 것을 자랑해 버리면 그건 패배자가 되는 겁니다.
진짜 전쟁은 누가 많은 힘을 확보 했느냐의 양적인 싸움이 아니고 누가 하나님 앞에 순수하냐의 싸움을 해야됩니다. 교회도 교인 몇 명이냐의 숫자 싸움 하지 말고 어느 교회가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복음 적이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냐가 중요한 거예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순수하냐 말입니다. 숫자는 아파트촌에 가면 숫자가 많아지고 저 촌 골짜기에 가면 교인이 텅텅 비어 숫자가 없지요. 한국 최고의 부흥사가 봉화 골짜기에 가 보세요. 숫자 몇 명 모이는지.
교회를 볼 때 숫자를 본다든지 교인을 볼 때 재산의 증가를 본다든지 하는 이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순수하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시고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러한 사고방식은 이제 좀 벗어나라는 거예요. 가진 것 자랑하고, 양적인 것 자랑하고, 권력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잖아요. 내 중심의 대부분이 어디에 쏠려있고 어디를 향하며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느냐, 우리는 이 싸움을 해야되고 역시 하나님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5절에 보면 "아하시아가 아합의 집 교도를 좇고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로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을 상하게 한지라". 아람은 여호와 안 믿는 이방나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아하시야는 유다 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믿는 나라가 하나님 믿지 않는 나라한테 지더라는 말입니다. 이방나라가 착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네 사고방식이 하나님백성답지 못하다는 것을 경고하는 거예요. 그래서 징벌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징벌의 내막이 7절부터 나오는데 이게 좀 재미있습니다. 7절에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받았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것을 설명을 하면 남쪽에 있는 왕의 이름이 아하시야이고 북쪽에 있는 하나님 믿는 나라 왕의 이름이 요람입니다. 그러니까 요람하고 아하시야하고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거예요. 그런데 친구처럼 지내는 이것이 하나님 보기에 싫다는 겁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외롭잖아요. 사람이 외로우니까 친구 사귈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를 사귈 때에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네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관련시켜 친구를 사귀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고 친구를 사귀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되어서 친구를 사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은 뒷전에 버려버리고 친구위주로 친구를 사귀느냐 그걸 우리한테 성경을 통해서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인생을 사는데 재미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제가 한번 살아보니까(?) 사람이 가장 즐거울 때가 죄지을 때가 제일 재미있어요. 그런데 죄지을 때 재미있는데 만약에 죄를 안 짓겠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살맛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혹시 이것도 죄가 아닐까? 저것도 죄가 아닐까? 이거 너무 걸거적거리는 게 아닐까? 이렇게 되면 사는 맛이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사귀는 심리는 죄는 짓고 싶고 또 죄를 지어야 인생에 짜릿한 맛이 나는데 혼자 죄 지으면 그 책임이 전부 자기한테 돌아오니까 친구를 사귀면 같이 동조가 되어서 용기가 나고 재미도 나고 또 죄 짓고 난 뒤에 책임도 자기 혼자 다 덮어쓰는 게 아니어서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의 심적이 스트레스가 적게 쌓이게 되죠. 제가 너무 찔렀습니까? 맞지요?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하는 그 순간, 자기가 생생하고 탱탱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됩니다. 이건 제가 누구를 나무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순간부터 아담과 하와 머릿속에는 선악과 따먹고 싶다는 것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 마라는 것까지 정복을 해야 사는 만족을 얻겠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자리인 신이 위치까지 올라서고자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습니다.
지금 7절에 보면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받았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여기에서 제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영화에 보면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서 저쪽 건물 뒤에서 아주 성능 좋은 총으로 대통령의 심장을 겨누면서 쏴 죽이는 영화가 많거든요, 여기서는 저격수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죄 짓고 도망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천사는 우리를 범인으로 여겨서 죽이려고 총을 들고 다가오는 거예요. 이것을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로 말입니다.
사귀지 말아야 될 친구를 사귀어서 북쪽 왕하고 하나님 버리고 "얼씨구나" 까불다가 드디어 아람나라와 붙었는데 완전히 큰 파탄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게 모두 배후에 하나님께서 유다왕 아하시야를 벌하기 위해서 꾸민 것입니다. 일부러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 넣으신 것입니다. 네가 친구 잘못 사귀어서 한번 혼나 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지 않는 모든 것은, 사실은 하나님보다 나의 인생에 즐거움이 우선이 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로" 했는데 구체적으로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7절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놓고는 아하시야가 갔다가 요람과 함께 나가서 임시의 아들 예후를 맞았으니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아합의 집을 멸하게 하신 자더라"
아합의 집이라는 것은 북쪽 이스라엘 나라를 말하죠.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시고 예후라는 사람을 동원했는데 이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께 선택받아서 아합의 집을 아주 몰살하게 하기 위한 저격수와 같은 역할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별난 사람이 등장해서 나를 괴롭힐 때에 "하나님 저 별난 놈이 왜 등장했습니까?"한번 생각을 좀 해봐야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인물을 등장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그 시점에서 가장 괴로운 상황을 엮습니다. "이건 양보 못할 내 소유의 행복이야"하고 간직하고 싶은 것들을 무참하게 짓밟히고 깨뜨리는 그런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좌절하고 자기 자신에게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이 자꾸 일으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일으키는 일들입니다.
엉뚱한 놈이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힌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한번 돌아봐야 됩니다. 남의 티눈을 보지 말고 자신의 들보가 있는지 한번 들여다봐야 되요. 내가 하나님을 버렸으니까 하나님은 엉뚱한 사람을 등장시켜서 나의 가는 모든 길을 다 부숴 버리고 진짜 저격수처럼 나를 잡아서 나의 죄에 대해서 쏘아대는 저격수 역할을 누군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여기 예후라는 사람은 원래 북쪽나라 요람 왕을 치기 위한 사람인데 남쪽 왕이 그것도 모르고 짝짝꿍이 되어 친구가 되어 있으니까 9절에 보면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 예후가 찾으매 무리가 예후에게로 잡아다가 죽이고 이르기를 저는 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하고 장사하였더라". 예후라는 저격수가 북쪽 왕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남쪽 왕도 죽여버리는 거예요. 남쪽 왕은 들러리로 죽여 버리는 거죠. 죽이면서 이런 소리를 합니다. "아이고 자기 아버지 여호사밧은 하나님 잘 믿던 사람인데 아이고~ 이 인간아 네가 어떻게 이렇게 악한 일을 해 가지고 내 손에 다 죽느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누가 패배했습니까? 유다 나라이죠. 군사력이 모자라서 패배했습니까? 아니지요. 정신만 제 정신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우리한테 다 맡기시고 홀로 낮잠 주무시고 그냥 팔짱끼고 계시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인사관리 하시고 조절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조절하시는가? 우리의 소원은 몰래 죄짓고 신나게 사는 것인데 그때 그때마다 엉뚱한 데서 일이 터지고, 엉뚱하게 나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계획에 차질을 일으키면서 "네가 지금 하나님 생각하고 일했느냐 아니면 하나님은 뒷전이고 네 욕심만 챙겼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그런 일을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인생의 패배를 느끼고 실패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아! 이게 복이다, 이게 바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구나"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좀 좋겠습니까. 이것이 신앙의 진정한 승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관리하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할 때에 그 부족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재벌이 될 때에 만족합니까? 과연 예수 믿는다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까? 집에 쌀이 떨어질 수도 있고 직장을 그만둘 수도 있는데 부족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무엇에 부족함이 없습니까. 한시라도 회초리를 들지 않을 때가 없는 것이 우리가 부족하고 그 때마다 그 부족을 채우시는 그 회초리로 인하여 우리가 부족함이 없는 거예요. .
우리는 세상사람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그들이 좋아하는 것, 우리도 좋아하고 그들이 잘되면 "하나님 뭐하고 계시지, 저런 것도 안 주고"하면서 같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상사람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심성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말씀처럼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친아들이 아니에요.
여호와가 우리한테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어디서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죄며, 무엇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각으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의 구세주는 하나님밖에 없구나, 나를 살릴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친히 인도하시고 살리시는구나"라면서 자기 죄를 알고 깊~은 감사를 우리는 하나님께 평생토록 드려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사람과 우리가 뭐가 다를 게 있습니까. 똑같은 심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똑같은 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 입장에서 부러운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 같은 욕심쟁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쉬지 않고 우리를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함께 하심인 줄 압니다. 이것을 복으로 여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아멘』
28. 악마의 속셈과 대비책 (역대하 22:10-12)
22:10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22:11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한고로 아달랴가 저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더라
22:12 요아스가 저희와 함께 하나님의 전에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여기 성경에 나와 있는 유다나라 이야기가 꽤 복잡하게 보입니다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유다 나라에 아하시야라는 왕이 있었는데, 철없게도 하나님을 안 믿는 그러한 북쪽 나라 왕을 친구로 삼다가 하나님의 기름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킬러에게 사정없이 처단을 당해서,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자~ 이렇게 되니깐 아하시야에게 아달랴라는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여인은 지독스럽게 여호와를 싫어하고 아주 독하게 바알의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달랴는 자기 아들이 죽게 된 그 분함을 참지 못해서 여호와를 신봉하는 이 유다 나라 왕의 그 형제들, 왕의 친척들 모두 다 죽이고 최고 권력층을 장악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아들 죽인 것에 대해 종교적인 앙금과 더불어 복수를 한 거죠.
그런데 유다 나라의 왕가는 세상의 그 어떤 나라의 왕가와는 다릅니다. 하늘이 내려주신 언약에 의하면 이 유다 나라의 왕가를 통해서 장차 구세주 메시야가 태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게 성경에서는 "다윗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되풀이해서 언급해 놓은 이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그냥 심심풀이로 기분 따라 슬쩍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앉아있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미 창세 전부터, 그리고 수 천년 전부터 유다 나라에 다윗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삼아서 그 왕가의 혈통을 따라서 메시야가 오셔서 그분이 고난받으시고 부활까지 하셔서, 하늘에 승천되어서, 성령이 와서 이 박사동네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로 한 겁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를 다 소비한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류의, 혹은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통째로 사용하시어 택한 자기 백성을 건져내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 전체의 움직임을 관리하고 조종한 결과이지요. 여기에는 철저한 계획이 있고 또한 악마로부터 공격받을 시를 대비하여 철저한 방비책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든지 사전에 준비된 자만 건지는데 무사히 성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지루하기까지 느껴지겠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의 위력은 빛납니다. 이로서 다윗의 왕가가 이처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약성경 제일 처음이 무엇으로 시작되는지 아실 거예요.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 오신다고 하는 것은 구약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고대한 바요,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도 사모했던 바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에 밤에 양을 치고 있는 목자에게 천사들이 와서 찬양하기를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 자체에서도 영광스러운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지상에서는 시시하게 생각하고 잠자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실지로 하늘나라, 땅의 나라 전체를 통째로 볼 때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사항보다 더 중요한 사항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사실을 악마, 마귀들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에 보면 어떤 무덤 가에 마귀 들린 자가 있었는데 그 청년에게 예수님이 접근해 가니까 그 청년 속에 있는 마귀가 먼저 예수님에게 말을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직 멸망할 때도 아닌데 왜 미리 와서 멸망시키려고 하느냐는 거죠. 이 말에 대해 다른 인간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었을까요? 예수님 본인 혼자 알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마귀도 알고 있는 거예요. 고수는 고수끼리 알아본다고 예수님과 마귀는 자기들끼리 통하는 게 있었던 겁니다. 아직 멸할 때가 아닌데 왜 미리 왔느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마지막 재림하시고 모든 것을 심판할 때까지 이 세상은 누구 통치 안에 놓이게 되느냐하면 바로 악마의 손에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용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짐승에 의해서 악의 영역이 통치되고 다스리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만 악마의 손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봐도 세상의 악한 신이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그냥 윤리적으로 보지 마세요. 윤리적으로 보게되면 그것 자체가 악마의 시험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예를 들면 "아~ 성경보고서 착하게 살라는 말이구나, 그러면 착하게 살면 되지 뭐"라고 거기에 머문다면 그 사람은 악마의 꾐에 넘어간 거예요.
성경은 마귀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전투의 기록입니다.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누구의 혈통이 아니라도 재주가 특출 나면 그 사람을 추천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듯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서 세워진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중 속에 이미 계획 잡힌 바, 약속된 바가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악마이기 때문에 악마가 신경 쓰고, 악마가 집중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계열과 거기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악마가 항시 노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기 이전에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면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희망을 주면서 내쫓았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그 약속이 3장 15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마귀보고 한 이야기입니다.
사탄의 후손과 사탄이 꾀어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그 여자의 후손에서 놀랍게도 악마를 쳐부수는 후손이 태어나는데 그 후손마저 잡아채기 위해 마귀는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고 그 때 그 여자의 후손은 결정타로 악마의 머리를 쳐서 악마의 기능을 없애버리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를 끝까지 이어가는 하나님의 약속, 복음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부부는, 비록 남편은 흙이 되어 죽지만 그 때부터 여자의 이름에 새겨진 것, 즉 하와,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을 고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주목하는 것은 마귀밖에 없습니다.
사실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인류들은 그저 매일같이 마귀한테 주눅들어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는가 라는 생존 문제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인 문제에서는 관심에서 떨어지게 되어 있지요. 어떻게 하면 남보란 듯이 잘 살아볼까, 여기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면 메시야, 그 여자의 후손을 계속해서 유혹하고 공격하고 고난을 주어서 핍박을 하든지 여자의 후손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느냐에 여기에 집중적으로 노리게 됩니다. 그게 마태복음2장에 나옵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의 출생지점을 알아내려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에 헤롯왕이 "왜 왔느냐"고 묻습니다. 동방박사는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가 분명히 태어났다, 우리는 그 별을 보고 따라왔다, 그런데 그 별이 예루살렘에서 사라져버리더라, 메시야가 어디에서 태어났느냐"고 묻게 됩니다. 그 때 그 당시의 유대 박사들은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어있다"고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루살렘에서 없어졌던 그 별이 다시 떠서 베들레헴의 한 짐승의 우리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안에 들어가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롯왕에게 메시야의 탄생을 알린다고 약조를 해놓았지만 밤에 천사가 나타나서 동방박사에게 왔던 길, 예루살렘으로 가지 마라고 말립니다. 만약에 약속대로 헤롯을 찾아가면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때로는 약속대로 지키지 말아야 될 때가 신자에게는 많습니다. 약속했다고 사나이답게, 사나이답게 찾다가는 지옥 가는 수가 있습니다.
결국 그냥 돌아가 버리니까 동방 박사들을 기다렸다가 잡아죽이려고 했던 헤롯왕은 화를 내지요. 뿐만 아니고 아기 예수와 함께 있던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에게 천사가 와서 애굽으로 온 가족을 피신시키고 난 뒤에 헤롯왕은 동방 박사에게 정보를 취하다가 실패하니까 그 베들레헴에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왜 마귀가 그 아기 예수에게 그렇게 신경을 씁니까? 그 아기 예수의 탄생이 곧 자신들의 멸망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매일같이 먹고살기 바빠서 이 중요하고 엄청난 사실을 일상 생활에서 놓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달랴는 그 시대에 자기 아들이 죽은 복수를 대대로 내려오는 그 왕가를 조사해 가지고 유다 왕가의 씨를 말려 버렸습니다. 여러분, 악마나 예수님 보시기에 이 땅에 가장 큰 보물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짜 보물이 있는 곳이 진짜 교회입니다. 사람 많은 곳이 교회가 아니에요. 우리를 정작 구원시킬 수 있는 복음이 전해져야 교회예요. 교회가 복음 전하는 게 아니고 복음이 있는 곳, 사람이 몇이 모이든 그곳이 교회가 되지 다른 곳은 교회가 안 되는 거예요. 정작 중요한 게 뭔가를 교인들도 이제는 눈치채고 알아채야 됩니다. 복음이 중요하지 교회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건 마귀도 알고 천사도 알고 주님도 알고 있는데 정작 모르고 있는 것은 오늘날 한국 교인들입니다.
여러분 집에 불이 났을 때 무엇을 들고 나가겠습니까? 잠자고 있는 아들을 제일 먼저 데리고 나갈 것입니다. 집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아이가 중요하지요. 우리의 상식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지 안 전하는지도 모르고 교회가 그냥 눈앞에 보이니까 등록하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다니 까요. 그것은 그 사람에게 교회도 보물이 아니고 복음도 보물이 아니고 정작 보물은 자기 집, 가문 가족이 보물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 교인에게는 교회 다니는 것이 하찮은 하나의 취미생활이 되어 버렸다 이 말입니다. 이게 마귀가 한국 교회에 노리는 바입니다. 큰 예배당으로 유인하겠다는 것입니다. 복음 몰라도 천국에 간다는 스토리를 퍼뜨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정작 노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오늘날 교인들이 노리는 것은 예수 이용해서 돈버는 것, 그것만 생각하지 예수님 자체가 나의 제일 큰 보물인 것을 우리는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예수님보다 더 보물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말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겠습니까? 예수님이 진짜 하늘의 진리와 보물을 갖고 계신 분인지 확인하려고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그런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해야됩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아달랴가 완전히 다윗의 왕가, 메시야의 고리를 끊어 버리려고 다 죽이려 했을 때에 여기 같은 여자, 아하시아의 여형제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몰래 도적질해서 유모의 침실에 숨겨서 일단 아달랴를 피하게 하고 난 뒤에 6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성전에서 숨어서 키웠습니다. 이로써 악마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마치 동방박사 잡아 가지고 동방박사도 죽이고 동방 박사가 발견했다는 아기 예수도 죽이려는 그 악마의 계략도 밤중에 천사가 와서 부모에게 알려줄 때에 애굽으로 피신해서 살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세계는 숨바꼭질하고 있습니다. 잡아죽이려는 악마의 집단과 오직 복음만 들고 그걸 복으로 여기고 기쁨으로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그러한 숨어있는 신자들의 싸움, 그 싸움에서 우리가 배제되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악마는 아무나 건드리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아무나 갑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악마가 말하기를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는데 마귀가 사람 볼 줄 압니다. 아무나 건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이 복음을 위하여 사는지 아니면 다른 것을 소망하며 사는지 다 압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떤 목사는 "이 목사 그런 얘기하지 마라, 우리 교회도 복음만 전하지, 그것 때문에 교회 지키지 교회 때문에 교회 지키는 줄 아느냐"고 이렇게 핑계를 늘어 놓습니다마는, 그렇다면 목사가 되었으면 목숨을 교회에 바치지 말고 복음에 바쳐야 될 게 아닙니까. 말만 그렇게 번질 나게 하게 하지 말고 정작 복음만 전한다면 교회 생각하지 말고 복음만 외쳐야지, 왜 자기 교회에 복음을 아는 자는 복음 전하는 자가 오면 결사적으로 내쫓으려고 온갖 방도를 다 취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죽기살기로 자신의 그 목사라는 권위만 내세우고 목사라는 직분만 돈 된다고 붙들고 있느냐 말입니다. 완전히 거짓말 아닙니까? 정작 복음이 보물이라면 복음 때문에 쫓겨나도 감사해야 됩니다. 그래야 앞뒤가 맞잖아요.
마귀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중요한 인물로 보는데 왜 우리들은 예수님을 집에 있는 개보다 중요하지 않게 여기느냐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뭔가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그런 거예요. 세상의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이고, 세상의 유혹 때문에 헤엄친다고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면서 이 유모가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까?
결국은 아달랴가 권력의 자리에서 6년만에 물러가고 그 뒤에 요아스가 왕이 되어서 요즈음 말하면 신앙적인 대 부흥회를 엽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사브앗이라는 이 여자가 바로 세상 권력의 무서움을 과감하게 돌파했기 때문입니다. 들키면 자기 목숨 날라 가죠, 하지만 자기목숨 보다 더 귀한 보물이 뭔가를 알고 있었기에 죽어도 좋다는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의 다윗의 계통의 씨를 하나 남겨 두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었지만 그 남겨둔 씨로 말미암아 다시 이스라엘, 다윗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 다윗의 등불, 메시야의 등불이 아직도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그 보물 하나 건져서 간수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만 신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그냥 돈과 권력과 눈에 보이는 물질로서 사람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우리가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안 이상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보물로, 나의 생명으로, 목숨과도 바꾸지 않는 귀한 영생의 보물로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9. 언약대로 (역대하 23:1-7)
23:1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세력을 내어 백부장 곧 여로함의 아들 아사랴와 여호하난의 아들 이스마엘과 오벳의 아들 아사랴와 아다야의 아들 마아세야와 시그리의 아들 엘리사밧 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매
23:2 저희가 유다로 두루 다니며 유다 모든 고을로서 레위사람과 이스라엘 족장들을 모아 예루살렘에 이른지라
23:3 온 회중이 하나님의 전에서 왕과 언약을 세우매 여호야다가 무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왕자가 즉위하여야 할찌니23:4 이제 너희는 이와 같이 행하라 너희 제사장과 레위 사람 곧 안식일에 입번한 자의 삼분 일은 문을 지키고
23:5 삼분 일은 왕궁에 있고 삼분 일은 기초 문에 있고 백성들은 여호와의 전 뜰에 있을찌라
23:6 제사장과 수종드는 레위 사람은 거룩한즉 여호와의 전에 들어오려니와 그 외의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모든 백성은 여호와의 명하신 바를 지킬찌며
23:7 레위 사람은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며 다른 사람이 전에 들어 오거든 죽이고 왕의 출입할 때에 시위할찌니라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저희들 가슴속까지 파고들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양식이 없어 목마름이 아니라, 말씀이 없어 목말라하는 이 시대에 말씀이 출렁거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말씀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만들어지는 나라입니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시면 하늘나라 보좌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언약궤가 보인다고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 말은 천국이라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언약하셨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늘의 천국도 언약대로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의 주인공은 새 언약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대로 된 것이 천국이라면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사는 자라만이 그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좀 어렵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 홍수가 일어났을 때에 하나님께서 노아라는 사람과 언약을 맺었는데 노아가 지상에서 만들어낸 것이 노아의 방주였습니다. 만약에 그 당시에 방주를 만든 노아라 할지라도 자기가 만든 방주 속에 들어가지 아니했으면 노아와 그 식구들은 다 물 속에 빠져 죽었습니다. 비록 자기가 만들었지만 자기가 만든 그 언약 속에, 즉 하나님의 방주 속에 들어갔더니만 그들은 하나님의 홍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21세기에 하나님의 어떠한 심판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노아가 만든 방주 같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면 됩니다.
그 언약이 바로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사람이 바로 방주 안에 들어오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갖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이야기는 성경에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고 다른 곳에 눈을 두면 그건 큰일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주 자기 인생을 배려놓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들의 환경이 여러분들을 아무리 난처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어떠한 질곡과 어려움과 환난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신다면 그 어려움에서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효과입니다.
요나 라는 선지자는 비록 이스라엘 나라와 수 천리 떨어져 있는 곳의 물 속에 들어가 죽을 지경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더니만 하나님께서 언약의 효과를 발휘해서 그 바다 밑바닥에 있던 요나가 육지로 다시 건져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 정도의 효과입니다. 상상도 못할 효과입니다. 요나는 그 바다 밑을 죽음의 세계라고 표현했습니다. 음부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의 세계요, 죽음의 세계의 한 가운데 놓여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면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언약의 효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언약의 중심체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아달랴'라는 나쁜 여왕이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체계를 완전히 다 부숴 놔 버렸습니다. 노아 방주를 도끼로 부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언약이 없으면 구원이 되지 못하는 나라인데 아달랴라는 이 악녀가 출현해 가지고 이스라엘나라에서 약속의 흔적, 언약의 흔적은 모두 다 없애 버리는 그러한 엄청난 나쁜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야다라는 제사장은 기가 막혔지요. 여호야다는 제사장이지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 계통의 왕을 통해서 그 때,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언약에 의하면 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왕으로 언약이 맺어지도록 되어 있는데 왕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악마가 활개를 치면서 설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온 회중이 하나님의 전에서 왕과 언약을 세우매"라는 아주 어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이 있으면 되지 왜 왕을 세울까하는 오해를 하게 되겠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구체적인 그 근거가 노아 당시에는 방주를 만들라 했지만 그때 당시에는 다윗 계통, 다윗이라는 혈통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왕이 있음으로서 그것이 그 당시에 노아의 방주 같은 역할을 하는 언약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 이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지금의 언약 왕이십니다.
이것은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디모데전서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 곧 구원을 이끌어 주시는 그 구원자가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건 오늘날 이 시대의 이야기이고 그때 이스라엘 시대에는 아직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는 바로 다윗의 계통에서 흘러나오신 그 족보에 연결되어 있는 왕이 있어서 그 왕이 그 당시의 하나님의 언약에 중심이었다 이 말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은 "목사님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요즈음 한국교회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요즘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서 교회가 있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불도가 심한 어떤 시집에 시집가서 교회에도 못나가다가 그만 연탄가스로 죽어버렸다, 그러면 그 며느리는 교회에 안 나갔다고 지옥 갑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언약이라는 말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또 예를 들어볼게요. 어떤 예수 잘 믿는 청년이 원양어선을 타고 교회도 없는 황량한 바다만 있는 남태평양 한 가운데서 고기 잡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몇 년 동안 교회도 한번 안 나갔으니까 지옥 갑니까? 남태평양이든 어디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요나 같은 사람은 바다 속에 들어가도 구원받았는데 배타고 나가서도 예수 믿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제가 왜 이렇게 강조하느냐하면 한국에서 교회에 잘나가다가 교회가 드물고 낯선데 가면 그만 교회를 잘 안 다녀요. 결국 그 사람은 그 낯선 곳에 가기 전, 한국에 있을 때부터 예수 믿을 생각을 안하고 교회 다닐 생각을 한 거예요. 우리는 예수 바라보면서 교회를 나가야 됩니다. 교회만 바라보면서 교회를 나왔기 때문에 교회가 없는 오지에 가면 그만 신앙생활 팽개쳐 버리고 교회 없다는 핑계를 하게 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마는 오늘날의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왕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왕을 세우면 될 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왕이 없으면 아무나 왕을 세우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에요. 다른 나라의 왕은 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모세 언약에 의해서 왕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모세 언약이라는 말은 왕이 이스라엘이 있기 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제사장이 있었던 거예요. 그 제사장이 어떤 제사를 드림으로서 나라가 복을 받는데 이 관계법을 모세가 하나님한테 율법을 받아서 줬다고 해서 그것을 모세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뒤에 다윗이 왕이 될 때는 다윗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뒤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된다는 언약은 새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일부러 만들어낸 게 아니고 그렇게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이거예요. 어쨌든 간에 하나님과 인간사이에는 우리가 잘나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를 건져내는 어떤 포크레인 같은 것이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예요. 노아 때는 노아가, 모세 때는 모세가, 다윗 때는 다윗의 계통이,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인간은 스스로 훌륭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누군가 낚싯대로 건져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건져주는 자가 목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십자가 진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딱 건져서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오직 예수님이에요. 오직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저 하나님 아는데요"라고 나설 분도 계시겠지만, 하나님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알아야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우리를 걸어서 건져주시는 그 중간에 계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너는 아느냐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 누구 믿고 건방지게 천당 오느냐?", "저 예수 믿고 건방지게 천당 왔습니다", "그러면 됐다 합격이다", 이게 성경입니다. 자꾸 교회에서 사람들 들볶지 마세요. 착해야 된다고 요구하지 마세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착해야 된단 말입니까. 믿음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착해집니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평생 계속 겸손하게 의지할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을 물으셔야 합니다. 어떻게 완벽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 완벽은 다른 상황이 되면 힘도 못쓰고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착하다고 저주 안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안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아예 안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의지하고 계시는 분이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분이 따로 있어야 하고 그분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왕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 다녀도 돈 버는 사람 많습니다. 저주는 예수 안에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돈으로 환산되어서 돌아오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레위 사람은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며 다른 사람이 전에 들어오거든 죽이고 왕의 출입할 때에 시위할지니라"는 아주 어려운 말이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왕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거룩한 공간에서 거룩한 사람들에 의해서 왕이 옹립되어야 되는 겁니다. 지금 현재 왕이 없는 상태에서. 다윗의 혈통에 따라 왕을 세워야 하는데 그 왕은 마치 대 제사장 같은 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거룩하지 않은 백성들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의 왕이어야 하기에 모세 법에 의한 거룩한 왕이 참다운 왕으로 옹립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6절에 보면 "제사장과 수종드는 레위 사람은 거룩한즉 여호와의 전에 들어오려니와 그 외의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모든 백성은 여호와의 명하신 바를 지킬지며", 그리고 "다른 사람이 전에 들어오거든 죽이고"라고 7절에 나와있죠.
모세의 약속에 의하면 왕은 다른 사람과 달라야 됩니다. 왕은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서 왕이 됩니다. 그런데 그 왕은 레위지파에 속하는 거룩한 제사장에 의해서 옹립되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하면 옛날에 왕이 있기 전에는 제사장이 그 일을 다 담당했거든요. 그런데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 대제사장 아닙니까, 그런데 대제사장이 하나님 보시기에 제대로 못했다 말입니다. 그게 엘리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에서 나오는 제사장에게서 그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왕이 사울 왕입니다. 이 사울 왕으로도 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인간이 원했기 때문에 세운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원했던 왕을 도중에 없애버리고 하나님이 딱 집어서 "네 후손이 너 같은 인간이 되어야되고 장차 올 메시야도 너 같은 왕이 되어야 되"하고 하나님이 미리 예정해 놓은 왕의 계통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다윗입니다.
참, 구약을 잘 알아야 되는데, 이게 사무엘상 16장 1절에 나오는데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여기 예선된 왕이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입니다.
그러니까 이 다윗이라는 가문에만 장차 메시야와 연결되는 진짜 정통 왕의 가문이라고 하니까 다른 가문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네가 뭐가 잘나서 우리를 잦히고 너희 가문은 특별나다고 왕이 되느냐"고 하겠지요. 그러면 다윗은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자기도 하고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꼭 집어서 "너 이제부터 왕의 가문이야, 옛날 노아에게 방주로 언약을 세우듯이 나는 네 가문과 언약을 세워서 네가 가문대로 잘하면 나라가 복을 받고 네가 가문대로 못하면 온 나라가 저주받도록 너하고 언약을 세운다"하시면서 언약을 맺어버렸습니다. 다윗이 잘났다는 말을 제가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윗은 우리하고 똑 같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강간하고 그 남편까지 살인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보다 더 못하지요. 여러분은 사람은 안 죽였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살인자요 간음한 그 다윗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 하나의 방주 역할을 하느냐? 그건 우리가 모르지요. 그건 저한테 물으면 안됩니다. 그걸 하나님이 꼭 집었는데 어떠합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노아만 구원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우리가 모르지요.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고 창세기 6장8절에 나오지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노아에게만 은혜를 입혔어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박사동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왜 우리만 교회에 나옵니까? 그건 모르지요. 하나님이 꼭 집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의 택한 자를 통해서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다윗이라는 못나고 어설프지만 다윗계통을 통해서 언약을 맺은 겁니다. 그게 조금 전에 읽었던 3절 아닙니까. "온 회중이 하나님의 전에서 왕과 언약을 세우매 여호야다가 무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왕자가 즉위하여야 할지니",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대로 언약을 세워서 이제 왕이 생기면 그 왕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만약에 왕이 없어 악마의 여인, 아달랴가 설치면 그 나라는 멸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모든 사람은 1/3씩 조를 짜서 성문에 엉뚱한 사람들은 다 죽여버리고 왕을 호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서 왕을 옹위하기 위해서 여자가 작전을 벌리고 있는 그 장면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왕은 우리와 똑 같지만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분이 하나님과 우리 인간사이에 어떤 거룩한 존재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거룩하지 못한 우리도 그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언약 때문에 우리가 거룩한 성도가 되고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겁니다.
저는 교회에 오는 여러분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평생 돌아가실 때까지, 하늘나라 가실 때까지 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나는 못났다, 나는 못났다"고 하지 마세요. 못났으면 얼마나 못났습니까. "나는 잘났다"라고도 하지 마세요. 잘났으면 또 얼마나 잘 났어요? "목사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원래부터 죄는 짓게 되어 있습니다. 왜 자꾸 자기 죄 지은 것 때문에 가정에 우환이 생기고 가정이 파탄이 나고 저주받는다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크게 생각합니까. 이건 마귀의 시험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행동을 잘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 자체가 너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두하고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마귀의 시험에 흠뻑 빠진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잘나도 아무 것도 아니고 못나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못난 우리를 건져내시는 포크레인 같은 예수님이 귀한 거예요. 그렇다고 죄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무엇을 바라봐야 되느냐가 천당과 지옥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너무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예민하지 마시고 너무 소심하지 마시고 너무 민감하지 마세요. 그것 때문에 목사들한테 쥐여사는 거예요. 목사들은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교인들을 가지고 노는데 절대로 거기에 말려들지 마세요. 주님께서 나를 의롭게 보시면 의인되는 거예요. 우리의 운명은 주님한테 달려있지 목사든 누구든 인간에게 달려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한테 달렸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 천국 갈 때까지 꼭 쥐고 있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왕이 없던 왕이 새로 생겼습니다. 악마가 설치고 마귀가 설치더라도 거룩한 제사장에 의해서 왕이 다시 옹립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한 세대에 하늘에서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과 안타까운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그 하늘에서 오신 왕을 놓치지 않는 현명한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30. 왕 세우기 (역대하 23:8-11)
23:8 레위 사람과 유다 무리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모든 명한 바를 준행하여 각기 수하의 안식일에 입번할 자와 안식일에 출번할 자를 거느리고 있으니 이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출번하는 자를 보내지 아니함이더라
23:9 제사장 여호야다가 하나님의 전 안에 있는 다윗왕의 창과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백부장들에게 주고
23:10 또 백성들로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되 전 우편에서부터 전 좌편까지 단과 전 곁에 서게 하고
23:11 무리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 책을 주고 세워 왕을 삼을쌔 여호야다와 그 아들들이 저에게 기름을 붓고 모두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우리가 왕이 없이 구원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다른 종교에서는 우리 자신들이 구원의 대상자이기 때문에 따로 왕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교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가 부처고, 미륵이고, 스스로가 도를 통하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 되고 해탈되어 극락에 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에 보면 왕 없이 구원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왕은 다른 말로 기름 부은 자,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왕 없이 구원될 수 없기에 구원되는 사람은 자기를 구원해주신 왕만 드러내게 됩니다. "이분 덕분에 나 구원받았소"라고 이야기하게 되지요.
그런데 요즘 현대인에 있어서는 왕 개념이 없습니다. "이 민주제도 사회에서 왕이 뭐 필요한가, 인간이 인간을 믿다니 그게 무슨 되지도 않은 이야기냐"라는 생각에 왕 의식을 거부합니다. 그 왕 의식이 없는 대신에 그 자리에 불교처럼 내가 성화 되어 가지고 혹은 멋있게 달라진 사람이 되어서 나의 이 멋있는 윤리와 괜찮은 성품을 근거로 해서 천당 가보자고 하는 분위기가 온 교회에 확대되고 확산되고 있는 추세에 있습니다.
새 생명운동이라든지, 성화운동이라든지 하는 것이 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인간을 긍정하자는 거지요. 우리 박사교회에 나왔다가 안 나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는 이야기가 왜 박사교회는 인간의 행함을 긍정하지 않느냐라는 것 때문에 삐쳐서 나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종교 생활의 목표가 없으니 도전할 맛이 없는 신앙이 뭐가 재미있겠느냐는 뜻에서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아니에요. 왕만 증거하자는 겁니다. 왕이 없이는 우리는 구원될 수 없다, 그리고 왕을 전면에 앞장세우지 않는 자를 신자라고 용납할 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왕을 내세우지 않을 경우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필연적으로 그 자리에 자기의 솜씨가 파고 들어가게 되어 있고 그 솜씨를 가지고 타인의 입지와 비교하게 되어 있고 그 비교에서 욕망이 불붙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까요? 아닙니다. 모든 세상사의 근심 걱정은 우리 자신들이 짊어져야 됩니다. 앞으로 1년 뒤에 어떻게 될까, 몇 개월 뒤에 어떻게 될까, 내 장래는 어떻게 될까, 내 가족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과 공포를 마주하면서 역시 믿을 자는 나밖에 없구나 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내가 이토록 착하니 내 착한 덕분으로 미래의 난관을 해쳐봐야지 하는 생각이 현대 인간들의 사고 구조에 맞습니다. 이게 더 끌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더 좋아한다는 그 점은 인정할게요. 왕이 없는 대신 자기를 절대자로 모시고 사는 것이 현대인들입니다. 잘나도 내가 잘나야 되고 모든 문제는 내가 알아서 내 손에서 해결해야 된다는 식으로 훈련받고 몸에 배겼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글쎄요, 그게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건 신념이지요. 자기를 독촉하고 자신을 관리하면서 부축이고, 절제하고, 자기를 치고, 자기에게 촉구하고, 이건 하나의 신념체제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왕을 앞장세우는 사람은 늘 왕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가볍게 무게를 줄이고, 왕을 앞장세우고 그 뒤에 숨는 겁니다.
우리나라 유명한 노래 중에 "그대 앞에 서면 난 왜 작아지는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가사입니다. 그런데 이게 현대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너 잘났냐? 나도 너 못지 않아"이렇게 나오거든요. 너 앞에 서면 작아지기는커녕 이참에 널 아예 따라 붙이겠다는 이게 도전하는 현대인의 속성에 맞는 거예요. "나는 아무리 잘나도 당신 앞에 서면 왜 이렇게 초라해지고 작아지고 당신을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하는 생각이 없다 말입니다. 하나의 라이벌로 여기고 도전하는 대상으로 잡는 겁니다.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그런데 이런 비 신앙이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됨이고, 성화 됨이고, 이게 신앙생활에 본질인 냥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현대인의 심리구조에 맞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야다 라는 사람이 보면 어디 나쁜 짓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최고의 대제사장 아닙니까. 말씀과 경건에 대해서 모범 되는, 누가 봐도 훌륭한 제사장이요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의와 선행이 많이 확보해 놓은 사람처럼 간주되는데 하지만 당사자는 자신의 의로서, 자신의 선행으로 천당 갈 수 있겠고 생각하지 않고 반대로 자꾸 왕만을 앞장세웁니다. 왕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것을 이 분은 아는 것입니다. 구원되고 안 되고는 내 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왕 하나 잘 만나면 그분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물론 미래도 보장되고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될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부하기를 우리가 세상일에 너무 걱정 근심하는 것을 세상 탓으로 돌리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요즈음 경제가 어려워서 현대건설 쌍용, 전부다 회사가 어려운데, 이런 상황이라든지 환경이 나를 괴롭게 한다고 자꾸 핑계를 대지 마시고 이런 환경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사도들은 어떻게 살았겠는가, 이런 환경을 하나님이 던져 줌으로 말미암아 정작 내가 신앙인인지, 아니면 신념에 죽고 신념에 사는 비신앙인 인지를 한번 확인해보세요. 내가 과연 평소에 누구를 앞장세우면서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왔는가, 한번 생각해보면 이거 참, 어려울수록 신앙이라는 것이 찾기가 힘들다는 주님의 말씀이 실감 날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왕은 어떻게 생겼으며 왕이 해야될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한번 봅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눈에 띄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1절에 "무리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 책을 주고 세워 왕을 삼을 새"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율법 책을 주고 왕을 삼으라는 거죠.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왔다"고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자, 그리스도, 왕으로 오신 분이 왜 율법 책을 옆에 두어야 됩니까.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구원하면 안됩니까? 왜 율법 책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자, 여기 본문 가지고는 왜 율법 책을 주면서 왕을 세워야 되는 이유가 안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신명기 17장 18절에서 20절에 보면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 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이 뭐냐하면 왕 하나 제대로 만나면 그 왕 때문에 온 나라가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왕만 있으면 복 받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거기에 조건이 붙는데 그 조건이 바로 왕이 자기의 평생을 다하도록 율법책을 옆에 두고 그 율법책에 적힌 내용대로 하나님의 말씀 뜻대로 모든 율법과 규례를 지켜 행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 왕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진정 장차 올 메시야의 모습대로 나타나게 되거든요. 그럴 때, 그 왕이 말씀 속에서 나타나 보여주는 그 예수님의 정신 속에서 이스라엘은 축복을 받게 된다는 법칙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왕을 세울 때, 그 왕이 인물이 잘났느냐, 키가 크냐, 자식이 몇 명이나 이런 것을 보지 말고 그 왕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사랑의 모습이 비취느냐 안 비취느냐를 봐야 됩니다. 거기에 따라 이스라엘이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왕의 존재, 왕이 바로 율법 책을 모범적으로 수행해야 될 그런 위치에 있다는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 사회, 모두다 평등을 주장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굉장히 이상스럽게 들리는 거지요. "아, 우리도 개인적으로 잘할 수 있는데, 나란 인간도 신앙생활 괜찮게 한다고 자부하는데 이 신앙생활 잘하는 나를 제쳐두고 내가 또 누구를 의지해야 된단 말인가. 왕을 믿어야되고 그분을 앞장 세워야되고, 에이 그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자,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를 제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삼상 8장에 보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상에서 보면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이 왕 그 자체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왕으로 섬기면 어느 나라도 이스라엘을 건드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작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서히 하나님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이 보이지도 않는데 보이는 저 사람들이 훨씬 정감이 가지,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정이 가"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 나라처럼 자기들에게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6절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라고 되어 있지요. 이 내용대로 이제 여호와께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7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왕을 주기는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관점에서 주느냐하면 회개하라고 주는 겁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요구에 부응해서 주었다는 것은 그 달라는 인간의 의식이 훌륭하거나 의로워서가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이러니까 너희들이 스스로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거지"라는 것을 더 밝혀주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주신 그것을 증거물로 삼아 너희들의 죄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점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들었지만 "에이 당신 같은 인간이 무슨 왕이야"하고 차버렸거든요. 그건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왕을 주실 때는 우리들의 속에 품고있는 죄가 얼마나 추잡고 더럽고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자 들인지 이점을 회개하라고 주셨는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왕은 어떤 메시야를 원했느냐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욕망과 자기의 꿈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서 왕을 원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왕을 만나고 난 뒤에 "참, 내가 잘못되었구나, 진짜 하나님은 이런 모습인데 나는 왜 엉터리 왕만을 고대했을까" 하고 회개하기 위해서 왕을 모셔야 되는데 회개는커녕 자기의 야망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차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나중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려 죽게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 그 자체로 인간에게 더 이상 의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 발가벗겨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회개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로 반긴 사람은 누구입니까? 날 때부터 소경 된 자, 문둥병자, 창기와 세리들, 소위 이 땅에서 희망을 잃고 절망에 속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이 말씀이 유일한 빛으로, 최후로 얻은 기쁨 소식처럼 받아드려진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그들은 뽕 가버린 겁니다. "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자에게만 예수님이 제대로 메시야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자기의 야망을 달성하는 이용가치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무용지물의 존재 밖에 안됩니다. 교회 목회나 성공시켜주고 목사를 살리는 그런 메시야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인간들에 의한 하나님 버림을 언급하시면서 왕 제도의 실체를 알려주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8장 11절부터 쭉~ 나옵니다마는 "너희들이 왕이 너희들의 야망을 채운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왕을 세워 놓으면 왕은 너희들이 갖고있는 제일 좋은 것을 다 빼앗고 그것을 착취할 것인데 그래도 그 왕이 좋으냐?" 그러니까 백성들이 대꾸하기를 "그래도 좋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인간들은 그저 베풀어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그저 사랑해주시고 대가없이 용서하시고 대가없이 영생주시는 진짜 왕, 진짜 하나님은 사람들은 버리고, 인간이 조금만 성의만 보이면 즉시 자기 소망과 자기 욕심을 달성해 줄 수 있는 그런 왕을 자꾸만 찾고 있어요.
"내가 당신 믿어 줄 테니까 당신도 내게 메시야로서 할 도리를 다하라"는 식입니다. 이러면 바로 왕과 백성들의 흥정이 되는 겁니다. 이런 왕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왕이고 그런 왕 때문에 이스라엘은 나중에 망합니다. 백성들에게 희생하는 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위에 군림해서 모든 걸 맡기면 모든 것을 자기의 야심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노릇 하는 그런 왕을 사람들은 자꾸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 요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왕으로 믿습니다 고 해놓고는 뒤에 결과를 보는 겁니다. "자,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난 뒤에 나의 욕망의 손익 계산이 어떻게 되는가, 손해보면 나는 예수 안 믿는다"이런 식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우리 주님과 비교할 때 못났으며 저질이며 더럽고 추한지 어떤 이들은 그 분에 자복하고 "용서하소서,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는 반면에 대다수의 인간들은 이용하기 좋은 가짜 예수를 더 신봉하려고 합니다. 자꾸만 예수 믿고 난 연후에 손익계산을 따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엉터리 예수라는 말입니다.
신명기에서 왕 옆에 율법 책이 있다는 말은, 만약 율법 책과 무관한 왕이라면 사람들이 그 왕을 마음껏 이용해서 자기 야망을 채우려는 식의 왕이 되겠지만, 참된 율법의 정신이 들어있는 왕 같으면 진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참된 그 사명과 그 증거물을 전하는 그런 진짜 모범적인 왕이 된다 말이죠. 그럴 때 백성들은 그 왕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모습을 대비해보고 그 왕 앞에 회개하면서 "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 왕 앞에 진정으로 무릎을 꿇고 회개한 사람은 소경들이었고 문둥병자였고 세리였고 창기였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왕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를 정리해 봅시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가 율법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누구를 앞장세워야 됩니까? 하나님 말씀 잘 순종하고 믿음 생활 잘하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야 됩니까? "나 이만큼 성화 되었다, 너희들 따라오너라, 나는 이만큼 예수 믿고 착해졌다 그러니까 칭찬해 줘" 이런 것을 내세워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만 바라보면 저는 부끄럽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날 위해 피 흘리신 것, 생각만 해도 저는 참으로 나쁜 놈입니다"라고 회개를 촉구하는 진짜 왕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다시 한번 낮추면서 "나 이제 예수님 없이는 못산다, 예수님만 자랑할거야", 이런 사람이 바로 신자고 성도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왕 옆에 율법 책이 있는 것은 나머지 백성들로 하여금 그 왕 앞에서 회개하고 자기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인 줄 압니다 오늘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세리처럼, 창녀처럼, 문둥병자 처럼, 소경처럼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진정으로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31. 거짓 제사장의 죽음 (역대하 23:16-21)
23:16 여호야다가 자기와 뭇 백성과 왕의 사이에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한지라
23:17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23:18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의 직원을 세워 제사장 레위 사람의 수하에 맡기니 이들은 다윗이 전에 그 반차를 나누어서 여호와의 전에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자기의 정한 규례대로 즐거이 부르고 노래하게 하였던 자더라
23:19 또 문지기를 여호와의 전 여러 문에 두어 무릇 아무 일에든지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3:20 백부장들과 존귀한 자들과 백성의 방백들과 온 국민을 거느리고 왕을 인도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내려와서 윗문으로 좇아 왕궁에 이르러 왕을 나라 보좌에 앉히매
23:21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었더라
『하나님이 살아계신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 하늘나라의 백성과 국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이 시간 다시 한번 정립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나옵니다. 그 나라와 현재 우리나라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세운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이 세웠다는 이스라엘 나라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세상 나라는 왕이 최고이며 그것이 전부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이 최고로 중요한 장소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 드리는 장소가 그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왕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호와의 성전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멸망당할 세상 나라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성전이 최고라는 이 이야기는 곧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인정을 받고 세상적으로 존경을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세상적인 부귀 영화가 들어있는 것을 원하지 않고 우리 몸 전체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되기를 원합니다. 움직이는 성전, 하나님이 늘 함께 임재 하시는 성전, 그럴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정말 우리 마음속에 소중한 것은 부귀 영화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귀한 보물이고 최고의 선물이고 가장 귀한 가보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옛날 구약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거예요. "야! 옛날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데 그 나라는 과연 다른 나라와 다르더라, 그 나라는 하나님의 성전이 최고더라"고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사람과 얼마나 일치되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과 얼마나 차이 나느냐, 그게 더 중요한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납니까? 옆집에 사는 아저씨와 나와는 어떤 차이가 나며, 앞집에 사는 불교신자와 나는 어떤 차이가 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있음과 하나님 없음의 차이입니다. 이것보다 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멸망이고 하나님이 계시면 그건 영생과 구원이에요. 얼마나 간단합니까. 이보다 더 간단한 게 어디 있어요. 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 행운을 그렇게 귀하게 보지를 않습니까? 왜 그걸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요? 하나님 없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운 겁니까?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부터 뭔가 잘못된 마음이 있으면 이걸 수정하고 바꿀 수 있는 그런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제사장들이 한가지 일을 해냈습니다. 무슨 일을 했느냐하면 없던 왕을 새로 세웠습니다. 왕은 아무나 시키는 것이 아니라 뭔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없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에 의해서 왕이 다시 세워진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들고 싶어서 만들면 안됩니다. 자꾸 상상을 해서 하나님을 만들어 가지고 있어야 되겠다 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뭔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려면 우리 힘으로 이루어낼 수 없는 다른 어떤 계기가 있어야 되고 다른 일이 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냐? 지금까지 내 마음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내 마음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통감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한테 대들고 싶고 예수한테 침이라도 뱉고 싶은 이런 나쁜 마음이 은연중에 우리를 장악하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교회 나오나 안나오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없어지고 예수님이 고맙고, 예수님이 좋아지고, 예수님이 나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바뀌고 있는 변화 같은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걸 보고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고 하는데, 사람이 완전히 변한 거죠. 하나님을 왠지 싫어하고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멱살을 쥐고 싶고 공격하고 싶고 그런 마음에서 이제는 전혀 하나님을 반기고 싶고 고개 숙이고 싶고 절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이런 마음이 새로 생긴 거예요. 전에 전혀 없었던 마음이 새로 생긴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왕이 없었는데 새로 생긴 거예요. 그러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없던 왕이 새로 생겼느냐, 그 과정을 16절 17절에 살펴보면 "여호야다가 자기와 뭇백성과 왕의 사이에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한지라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게 되고 신앙이 들어오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뭔가 처분하고 싶고 깨부수고 싶고 내어쫓고 싶고 저런 것을 싫다고 하는 마음이 들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은 내 마음속에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말입니다. 그 당시에 제사장들은 우상을 깨뜨리고 그 우상을 섬기도록 독려했던 최고의 지도자, "맛단"이라 하는 바알의 제사장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람 죽이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우상을 깨는 일이 그리 쉬운 일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서 보게 되니 "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 저건 꼴 보기 싫다, 저런 인간은 제거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이처럼 이러한 하나님의 거부반응을 받아드린다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라도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 강단에서 설교를 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가 강단에서 섰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누구를 더 좋아하겠습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사도 바울이 여기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와서 여기에서 강의를 한다고 합시다. 어느 쪽에 더 관심이 있고 어느 쪽에 더 많이 모여들겠습니까? 김 대통령이 수요일 박사교회에서 강의를 한다고 한다면 수요일 날 안 빠질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한다든지 사도 요한이 설교를 한다고 한다면 우리 마음속에 "아이구 들어봐야 설교 그거 뻔한 것, 하나님 잘 섬기라는 것, 그것은 왠지 듣기 싫더라"면서 우리 마음이 끌리지 않는 거예요. 결국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흔히 거짓 선지자, 나쁜 선지자를 죽인다는 이 말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아, 저런 목사는 없애고 싶다. 저런 목사의 설교는 귀를 막고 싶다"는 마음이 그냥 드는 것이 아니고 신앙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목사야 다 똑같은 목사인데, 뭐 아무 목사나 있어라, 교회만 되면 되지 뭐, 목사가 한두 명인가? 신학교 졸업생이 많은데 아무나 와서 하면 되지"라는 생각보다는, "저 목사가 어떤 말을 하는지 한번 들어보자. 아! 저런 말은 하면 안 되는데, 저건 잘못된 말이고, 이건 하나님 뜻이 아니고 완전히 자기 자랑이네"라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판단력이 생기고 "저건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소리야"라고 구분이 된다는 그 자체가 신앙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아니 목사님 그렇게 껄끄럽게 해 가지고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교회가면 잠만 오지 그것 따질 생각 않는데요, 어떻게 그걸 다 따지고 삽니까, 그냥 교회 참석하고 집에 가면 그만이지요."이렇게 우리는 편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저는 우리 마음속에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적인 변화가. 뭔가 오늘 본문처럼 부술 것을 부수고 죽일 자는 죽이는, 그러한 왕의 마음과 일치되지 못하다 이 말입니다. 요즘 교인들이 세상에서 바쁘다 보니까 교회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구~ 예배 한시간만 떼워라, 설교야 다 좋은 말씀이지 뭐, 내가 판단하니 뭐 설교를 아나 뭘 아나 그냥 졸다가 축도나 받고 집에 가지" 이렇게 나오시면 말씀에 대한 성의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정신을 쏟는 구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저 교회는 교회대로 운영하고 나는 우리 가정만 운영하면 된다는 식으로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요즈음 추세가 다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 15절 산상보훈 가운데 나오는 말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라고 나와 있는데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가 있다는 이야기고 거짓 선지자가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는 아주 선한 선지자, 훌륭한 목사처럼 나타날 수가 있으니까 너희는 그것을 판단을 잘 해야 된다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를 했잖아요. 그러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저 말씀이 하나님의 소리인지 인간의 소리인지를 살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알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왕을 누가 세우느냐하면 레위인들이 세웁니다. 18절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과 직원을 세워서 제사장 레위 사람의 수하에 맡기니 율법대로 제사를 드렸다고 나오고 19절에 보면 또 문지기를 여호와의 전 여러 문에 두어 무릇 아무 일에든지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레위 인들에게 이 모든 제사와 성전 관리를 맡겼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좀 전에 제가 말씀 드렸듯이 이스라엘은 성전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왕도 성전에서 세워서 왕궁으로 모셔야 되는 겁니다. 성전에 하나님의 인가가 나야 된다 이 말이죠. 성전에 있는 레위 사람들에 의해서 왕이 이렇게 받들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 안에 놓이게 합니다.
자, 레위인들, 그리고 제사장들이 왜 그리 중요할까요? 왜 이스라엘에서 이 레위인들이 그렇게 제일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느냐에 관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나오는데 좀 어렵더라도 유념해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32장 28, 29절에 보면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라는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잖아요. 그때 산 밑에서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내려와서 너희들이 금송아지 만든 것은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고 이 금송아지 만든 것을 잘못 되었다고 수용하는 사람은 모세 편에 서고 수용하지 않는 사람은 반대편에 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맞다 모세 말대로 우리가 금송아지 섬기는 건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모세 편에 선 사람도 있었고 "우리가 다 하나님 위한다고 섬긴 것인데 무엇이 나쁘냐"고 하면서 모세의 반대편에 선 사람도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지시했느냐 하면 모세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반대편 가운데는 자기의 동생도 있고 형님도 있고 친척도, 친구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 친구였고 형제간이었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서로 반대편에 서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 놈들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죽이겠습니까. 친구고 형제인데. 그 때 레위 인들이 칼을 들고 비록 자기 형제이며 친구이지만 가차없이 그 맞은 편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 죽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잔인한, 이런 무서운 일을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하나님 앞에 헌신했다고 합니다.
보통 교회에서 헌신예배 많이 드리잖아요. 그런데 이게 헌신이에요. 헌신은 친구라든지 형제지간으로 끌어왔던 인간 관계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편이냐 아니냐의 재분배하고 재정리하자는 데 있어 충성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 서겠다, 형제 친척보다도 나는 하나님 편을 선택하겠다는 사람을 헌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출애굽기 32장에 보니까 그렇게 형제들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레위 지파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성경이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유교에서는 형제간에 잘 지내고 부모에게 공경하라고 가르쳐왔잖아요. 사회규범이나 윤리 도덕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말짱 도루묵이고 소용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그걸 수용하고 "맞습니다, 하나님 옳습니다"하고 끼어 들면 헌신이고 끼어 들어서 형제를 죽였던 사람들이 바로 레위 인들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할 수 있는 그런 복과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 의해서 왕이 세워지는 겁니다. 그 레위 지파에 의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성전에 문지기가 있어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부정한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조항이 있는데 그러한 자들은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걸 바로 하나님 앞에 헌신했던 레위 지파들이 담당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가 거룩한 성도가 된다는 말은 "이 몸을 하나님을 위해서 바치겠습니다"라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보다도 부모보다도 친척, 친구보다도 하나님이 우선이고 하나님이 최고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헌신되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이 이스라엘나라는 이상한 나라여서 왕보다도 국민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이 최우선으로 귀하고 거룩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나라와의 차이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그 말을 들을 때 "그렇지 그 말이 맞지"라고 쉽게 받아 들였겠지만 막상 오늘 본문에 더러운 놈은 이 성전에 못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야 이거 신앙이 장난이 아니구나, 하나님 섬긴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고 이게 취미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거구나"하고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교회에 들어온 목사가 양의 탈을 썼는지, 세상 잡담을 하는지, 윤리 도덕을 이야기하는지, 아니면 복음을 이야기하는지, 여러분들 같으면 "내가 뭐 신학을 했나 뭐 졸다가 집에 가면 그만이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도 지금 하나님께 헌신했는데 목사가 하나님께 헌신을 안하고 월급 올려달라, 차 사달라, 이런 소리를 해도 "아~ 저건 하나님의 헌신된 자가 아니다"는 것을 가려낼 수 있어야 그것이 교회가 되는 거예요. "아, 목사는 주의 종이니까 건드리면 저주받지, 아이구 귀찮은 소리는 하지 말지 뭐", 이러면 목사가 문제가 아니고 교인이 문제예요. 교인들이. 교회 올 때 헌신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일까,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의 자세로 딱 교회를 와야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가 있으니까 다니면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되고, 헌신된 사람이 되어야 되고, 내가 움직이는 교회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양식을 먹으면서 날마다 주의 말씀이 맞으면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주님 앞에 또 다시 헌신하는 생활이 되풀이되어야,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게 헌신된 레위 지파요 거룩한 성도요 이게 신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상하다 그 사람 왜 죽이지, 거짓 선지자를 왜 죽이나 살려두지, 사람 죽이는 것이 취미인가, 우상을 왜 부수지, 그 참 쓸데없는 인간들"이라고 이렇게 비꼬지 마시고 지금도 사람 죽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바알 선지자를 죽이고 나라의 모든 우상을 부술 때, 그 헌신된 심정을 마음으로라도 같이 이해를 하고 같이 동정을 해야 되고 옳다고 같이 박수를 쳐주어야 됩니다. "나도 그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죄를 짓다니"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정말 헌신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교회를 해야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난다고 주님께서 분명히 당부했건만 우리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관심도 없이, 말씀에 관심도 없고 헌신하고픈 마음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도 없이 그저 내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게 아닌가, 다시 한번 자기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상을 깨고 거짓 선지자를 죽였던, 그 신실한 제사장의 신앙을 본 받아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참된 신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32. 요아스의 성전 사랑 (역대하 24:1-7)
24:1 요아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칠세라 예루살렘에서 사십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24:2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며
24:3 여호야다가 왕으로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자녀를 낳았더라
24:4 그 후에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중수할 뜻을 두고
24:5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해마다 너희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되 그 일을 빨리 하라 하였으나 레위 사람이 빨리하지 아니한지라
24:6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24:7 이는 그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깨뜨리고 또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을 바알들에게 드렸음이었더라
이스라엘 나라가 왕이 없던 시절에서 왕이 있던 시절로 다시 이어집니다. 그 왕의 이름이 요아스인데 그 요아스가 왕 자리에 나아갈 때 나이 7세라고 되어 있거든요. 일곱 살 먹은 애가 뭘 알겠느냐,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뭘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겠지만 왕이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혹시 생각하시기를 "다른 나라에도 왕이 다 있는데 그게 무슨 기적이냐, 왕 없으면 세우면 되지" 라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소홀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만 잠언서 25장 2절에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3절에는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같이 왕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느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하나님은 항상 숨어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추진하시고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왕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나라, 일반나라에 있어서의 왕은 그저 사람들이 민주적으로 혹은 세습제로 사람의 뜻에 맞추어서 원하는 힘있는 영웅을 세우면 되지만 이스라엘 나라에서의 왕이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내는 존재로서 출현이 되니까 왕이 있다는 존재 자체가 기적이 아니고 뭡니까. 하나님의 일을 숨기는 것이 영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일을 은밀히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욱 더 위엄과 경외심을 유발시키고 왕은 다른 백성들이 알지 못하는 그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종 왕에게 드러냄으로서 왕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영광스러운 그러한 직책과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그 왕을 오늘날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 이스라엘의 왕이 일곱 살이라고 무시할 일이 아니라 왕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그 왕을 통해서 전도를 하고자 하는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를 밝혀내는 것,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왕과 백성들의 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왕은 무슨 일을 전달하고 무슨 일을 했을까요? 오늘 본문4절부터 7절까지 보면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일을 추진합니다. 멀쩡한 성전이 부서졌나 왜 수리를 하느냐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7절에 보니까 "이는 그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깨뜨리고 또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을 바알 들에게 드렸음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왕이 없을 때, 하나님의 뜻이 잠시 감추어졌을 때, 바알의 악녀 아달랴와 그 하수인들이 완전히 하나님의 성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래서 왕의 입장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통치하고 하나님이 임재 한다는 그 성전이 그렇게 파괴되어 있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전을 수리하려고 한 겁니다. 4절과 5절에 보니까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레위지파에 속한 제사장들과 사람들에게 성전을 수리할 것을 명령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실행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다그치는 거지요. 너희들은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어 가지고 빨리 일을 진행하라고 요아스 왕이 지시했습니다.
자, 요아스 왕이 지시한, 성전을 다시 한번 수리하고 개축하라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것이고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이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깊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전을 중수하기 위해서 돈을 어떻게 모으느냐, 돈을 어디에서 조달하느냐가 여러분들이 궁금하실 거예요. 하나님의 전 같으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돈 보따리라도 던져 줘야지 아니 사람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돈을 각출해서 하나님 자신의 전을 지으라고 하느냐고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는 것은 곧 다른 나라에 없는 게 있다는 거예요. 다른 나라에는 구원도 없고 생명도 없지만 성전이 있는 이 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된 영생과 구원이 있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에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서 하나님께서 생명의 숨통을 트인 거죠. 그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이 그 당시에는 유다 나라에 살아있는 거예요. 성전이 있는 걸로 봐서 알 수 있다고 그렇게 요아스 왕은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성전에 돈 내는 것이 어떻게 생명의 돈이 되겠느냐, 성전에 낸 돈은 성전 세지 그게 무슨 생명의 돈이냐고 하시겠지만 이것이 출애굽기 30장에 보면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11절,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목숨 값을 내 놓으라는 말이죠. 15절에는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부자라면 돈을 더 내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 가난한 사람은 좀 봐주어서 깎아 주면 안됩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0장 11절에서 요구하는 생명 값, 속전은 그 사람의 경제 상황을 보고 고려해서 내라는 것이 아니고 경제상황은 제쳐두고 "네가 살 거냐, 죽을 거냐"를 따지는 거예요. "네가 내 앞에서 살래, 아니면 죽은 자로 있을 래"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경제적인 구조 안에서는 나는 너보다 부자다, 나는 너보다 가난하다, 부자와 가난한 것이 이렇게 구분이 되지만 하늘나라 앞에서는 부자고 가난하고 구분도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거지 나사로도 천당 가잖아요. 그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바라봤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거지로서 바라봤던, 부자로서 바라봤던, 이 땅에서 한달 수입이 얼마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고 가치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 때에는 너보다 내가 더 가치 있다는 점을 소득이 많다는 걸로 통해서 증명하려 들겠지만 하늘나라 앞에서는 그것이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인간이 죽은 인간인지 산 인간인지 구분하는 것이 관건이고 중요한 문제예요. 그래서 부자라고 인심 써 가지고 더 낼 필요도 없고 가난한 자니까 좀 봐달라고 할 수도 없는 거예요. 부자라고 더 내고 가난하다고 더 내지 말고 동일하게 최저 작은 돈으로 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얼마나 귀하냐가 아니라 목숨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 네가 갖고 있는 경제사정 보다도 더 중요한 사항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배를 골고 있거나 아니면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 시급하고 더 다급한 문제가 과연 하나님에 의해서 내 목숨이 살았느냐,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서 지금 내 목숨이 죽은목숨이냐,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돈을 모아서 성전을 운영하는 운영비로 쓰여질 때 사람들은 그 성전을 바라보면서 내가 돈을 내어서 지었다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나의 돈 액수와 상관없이 저 성전이 있음으로서 우리는 산목숨이고 천당 가는 목숨이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확인하는 거예요. 재 다짐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올 때 헌금을 하죠. 일반적인 예배당을 짓는다든지 어디에 다급하게 돈을 쓸 게 아니고 운영비로 쓸 때에 여러분들은 '야! 내 돈 아니면 이 교회가 무너진다'라는 생각이 안 들잖아요. 다른 교회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는 헌금을 하는 것이 교회가 안 무너지라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사랑해서 헌금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주님을 아직도 믿고 있다는 그런 마음에서 헌금하실 거예요. '내가 아직도 주님 믿습니다. 나는 주님 없이는 못 삽니다' 라는 그런 의미에서 드립니다.
그래서 시편 50편 8절에 보면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이 말씀이 하나님이 배가 고프고 아쉬워도 너희들한테 달라는 소리를 않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재물을 많이 바쳤더니만 구원을 빨리 이루고 천당 갈 때 높은 자리 앉는다는 게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돈이 궁해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 낼까" 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는 말이죠. 나에게 돈 갖다 바칠 생각하지 말고, 돈 바쳐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생각하지 말고 나를 불러라, 나는 돈 없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의 각양 재물, 수양과 수소를 갖다 바친다고 하나님께서 얼굴을 내미는 하나님, 그 때 인심 쓰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 없이도 값 없이도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돈 내는 인심 쓰기가 힘들겠습니까, 어려울 때 하나님 부르는 것이 힘들겠습니까, 어느 것이 힘들겠습니까? 보통 생각하기로는 하나님 부르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여기고 돈을 내는 것이 더 힘들지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리워서 보고 싶어서 하나님 없으면 못 살겠다고 부르는 것은, 이건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찾기 힘듭니다. 하나님 없이도 사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아쉽겠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친척 중에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부모님 살아 계시고 내 자식으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사는 데 뭐 때문에 하나님 부르겠어요. 어디가도 교회가 천지인데 뭐 때문에 하나님 부릅니까.
하나님을 부른다는 말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고백을 뜻합니다. 부동산이 있든, 식구가 열이든 백이든 간에, 어쨌든 내가 기대고 의지하고 마음 바치고 사랑 바칠 대상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 없이는 죽겠습니다, 못살겠습니다 라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바로 부르는 마음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짜 신앙 인이 아닙니까. 이 눈치, 저 눈치 안보고, 사람 만나면 고개 숙이지 않고, 어떤 어려운 환경이 와도 기죽지 않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나는 하나님이 그리워서 교회에 오고 하나님이 좋아서 헌금했고 하나님 말씀이 그리워서 다시 교회 찾았고, 이게 신앙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 한번 안 본다고 굶어 죽을 일이 있나, 친구 많은데 친구와 재미있게 놀지, 하나님 말씀에 흥미가 있나 그냥 심심할 때 가면 된다는 이런 마음이 보편적인 마음과 얼마나 큰 차이를 보입니까. "아이구~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다"는 마음이 어떻게 성령이 아니고서야 생기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예 돈을 교회에 떡 칠을 하는 사람보다도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더 귀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헌신이고 재물이 되는 거예요. 결국 그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내 목숨 구하고 찾을 곳은 바로 하나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는 부자가 되었든 가난한 사람이 되었든 동일한 마음이 되어야 됩니다. 부자라고 믿음이 더 많아야 되고 가난하다고 믿음이 더 적다는 게 아니라, 부자의 경제적 상황이라든지 가난이라는 악한 상황이라든지, 그런 것에 하나님의 관심은 없고 내가 찾는 것은 진정으로 나, 하나님에게 생명이 달려있는 줄 알고 하나님만 찾는 그런 사람이기를 원한다 해서 성전 세를 누구든지 동일하게 반 세겔, 즉 누구든지 믿음에는 한결같아야 된다는 말이에요. 목사라고 믿음 더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 교회에 나왔다고 믿음 적으라는 법도 없습니다. 동일한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요아스 왕이 성전을 중수하라는 말과 또 정해놓은 성전 세를 더 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건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 성전이라는 곳에 하나로 모으자는 말이에요. 그런데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 왕이 지시를 하는데 레위인들이 왜 말을 안 듣는가? 레위인들은 아마 "좀 있다 하지 뭐 그렇게 바쁘나, 대충하면 되지"라는 생각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요아스 왕에 있어서의 성전은 단순히 건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동안 왕이 없던 시절, 하나로 결집될 수 있는 구심체가 없던 시절에 백성들의 마음은 열 갈래, 스무 갈래 다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향하지 않고 전부 다 각자 흩어진 마음, 그 해이한 마음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레위 인들이 말을 안 들었다는 것으로 드러나거든요.
여호야다와 레위인들이 왕의 말을 안 들었다는 이 말은 성전에 관심도 없고 하나님께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밖에 관심 없는 그런 생활을 지금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누구하나 왕에게 성전 고치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요아스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했습니다. 정직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그 요아스 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시점에서 그 유다 나라에 지시하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라고 더 내라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덜 내라는 것도 아니고 부자냐, 가난한자냐 하는 그러한 껍데기에 너무 관심들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에 혼란케 너무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변함없는, 변동이 없는, 흔들림이 없는 신앙, 그것은 바로 내 목숨이 거저 우리한테 주어졌다는 겁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한 것이 교회에서 이득을 보자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귀한 예수님의 목숨을 거저 주었기 때문에 거저 준 것에 대해서 너무 고마워서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항상 그 밑바닥에는 하나님 앞에 산 사람이 된 것이 돈으로 산 게 아니고 저거 얻었다는 거예요. 이 거저 얻은 목숨 값, 이 생명이 너무 좋아서 이제는 우리의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하나로 모아야 된다는 것이 요아스의 이야기이고,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인 줄 압니다. 현재 경제가 어려워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우리는 "그래 마음껏 혼란스러워 봐라,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 영생은 도대체 어디서 날라 온 거야, 도대체 누가 주신 거야, 내 공짜로 얻은 이 목숨 값은 도대체 누가 대신 치른 거야"라고, 우리가 여기에 관심이 있다면 아마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든, 어떤 자리에서든, 우리 마음이 요동치 않고 곧게 신앙생활을 잘 할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온통 세상이 정신 없이 경제문제, 가정문제, 자식 교육문제에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래 놓고도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묻고 있습니다. 주여! 이미 해답은 나와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거저 얻은 이 목숨, 이것이 누가 주신 것이고 어떻게 얻은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우리의 관심사는 흔들림이 없이 주님에 대한 고마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마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33. 요아스 왕의 변절 (역대하 24:15-22)
24:15 여호야다가 나이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일백삼십세라
24:16 무리가 다윗성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24: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24:18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24:19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24:2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4:21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24:22 요아스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하나님! 저희들에게 보여주신 이 진리가 오늘날 이 시대에도 똑같은 원리로 적용되는 줄 압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들으신 줄 압니다. 기독교 신자라는 사람들은 목걸이에다가 십자가를 걸고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그 십자가로 목걸이를 만드는 것은 좋은데 그 십자가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그 이유에 대해서 그 십자가 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포도원에 농장이 있는데 그 주인이 농부들에게 삯을 받기 위해서 자기 종들을 보내었다, 그런데 농부들이 얼마나 마음씨가 악한지 그 주인이 보낸 종들마다 다 상처 내고 쫓아버리고 죽여버렸다, 그런데도 주인은 참고 아들을 보내면 저 농부들이 잘 대우를 하지 않겠느냐 해서 아들을 보내었더니만 도리어 그 농부들이 그 아들만 죽이면 포도원 농장은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 바로 그 짓을 너희들이 한다"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자, 십자가 의미가 뭡니까? 그것은 농부들의 속마음처럼 우리 인간들의 속마음이 하나님의 속마음과 너무나 대비가 되는 나쁜 마음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은 인간들이 감추고 있었던 본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극악무도한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점을 십자가가 들추어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는 말은 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인입니다, 나는 이렇게 나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 내 대신 이렇게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의 진정한 뜻을 아는 사람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떤 분들은 말씀하시기를 , 그렇게 사람을 부정적으로 봐서 무슨 목회가 되겠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물론 인간이라는 것이 나쁜 짓도 하지만 착하고 좋은 짓도 많이 있지 않느냐고 따지는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인간의 깊은 내면에 담겨있는 본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깡패 세계에도 의리가 있고 그 나름대로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건 제가 인정하는 겁니다. 하지만 깡패가 의리가 있은들 그 의리가 하나님 영광이 되겠습니까, 사랑이 있은들 그 사랑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겠습니까. 인간 세계가 다 이와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채 자기 의를 드러낸다고 그게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겠습니까?
인간의 본심이 이미 어두운데 거기서 하나님의 착함과 선행의 폼을 낸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 사람이 구원 될 만큼 하나님께 만족스러운 영광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구원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긍정할만한 인간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신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판 받을 대상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죠.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의 입장에 서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우리 인간들을 다시 한번 봐야 됩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실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여호야다 라는 제사장이 일백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은 왕이 없는 나라에 요아스라는 왕을 새로 세웠지요. 그 왕을 세워놓고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요아스라는 왕은 그 여호야다의 평소 살아 계실 때에 하는 훈계대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신봉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야 마땅한데 17절에 보면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에 있는 소위 지도자급들이 죽~ 몰려와서 왕에게 절을 넓죽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18절에 보니까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깁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상하다 요아스 왕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잘 믿다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제사장이 죽고 난 뒤에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서 우상을 섬기느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요아스 왕이 그동안 자기 본심과 무관하게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여호야다가 살아 있으니 살아있는 그분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하나님을 믿는 체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아버지가 잘 믿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아들이 잘 믿으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믿는 체 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 계시면 체면 차릴 것도 없으니까 깊숙이 있던 자기 본심을 속시원하게 그대로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 생각도 안 하면서 하나님 믿는다고 얼마나 마음고생 많았겠습니까. 참 마음고생이 많았겠지요. 하지만 진짜 신앙 인은 이렇지 않습니다. 어느 자리, 어느 장소, 어느 때와 관계없이, 환경이나 상황에 전혀 관계없이 어디에 가도 하나님을 잘 섬깁니다. 주위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산 속에 넣어놔도 기도할 사람이고 물 속에 넣어놔도 기도할 사람 이예요. 그저 친구 체면보고 억지로 교회 나와주는 사람은 언제 가는 본심을 자유롭게 펼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본심 깊숙이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그저 교회 가까이 있으면 옛날 어릴 때 다녔던 습관대로 억지로 교회에 다니다가 근처에 교회가 없으면 교회 없다는 핑계로 안 다니는 거예요. 어느 것이 본심이냐 하면 우상으로 돌아오고 하나님 버리는 것이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심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본심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큰 기적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된 통으로 얻어 받는 놀라운 변화, 진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성경말씀대로 거듭나는 놀라운 획기적인 기적이 있어야 그 사람은 어디를 가 있든 하나님을 잘 섬기게 됩니다. 심지어 불신자 앞에서도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 사랑하게 되지 인위적으로 신앙의 폼 낸다고 해서, 제자훈련 몇 년 한다고 해서,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발심만 생기죠.
여기서 여러분들이 하나 아셔야 될 것은 왜 사람들이 하나님 빼놓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를 그렇게 좋아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요아스 왕만 우상 쪽으로 돌아선 게 아니고 밑에 신하들도 다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이 더 좋을 건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말씀 위주거든요. "내 율례와 법도를 지켜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 자기 위주입니다. "네 몸은 나의 피조물이니 나에게 몽땅 바쳐라"는 이것이 항상 먼저 선행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무엇이 되든지 하여튼 네 몸과 마음을 다 바쳐라,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시작하는 반면에 여호와 외에 모든 신은 다 우상인데 이 우상들의 공통점은 욕심을 정당화하고 채워준다는 겁니다. 내 전부를 하나님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흥정만 잘하면 내가 소망하는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그리고 내 노력여하에 나의 선행여하에 따라서 큰복도 주어질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가지고 관계하는 신은 전부 다 우상입니다 우상. 대표적인 것이 갓바위 아닙니까. 여러분 가까이 늘 있잖아요.
기독교가 한국에 150년 전에 들어와도 벌써 100년 넘어서 버리면 이미 정신적으로 쇠퇴 할 대로 쇠퇴해져 버립니다. 껍데기만 기독교이지 실상은 기독교가 아니라 우상의 종교로 변하고 말입니다. 거기에는 우상의 예수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진짜 여호와 신을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디에 가도 하나님 생각하고 사랑한다 이 말입니다. 어디를 가든, 누구 앞에서든, 안 믿는 친척들과 어른 앞에서도 주님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은 절대로 마음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그게 성령의 기적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어떤 목사가 와서 공갈을 치고 총회장이 와서 협박을 해도 끄떡없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온 천지가 우상 덩어리라도 그걸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상 숭배자적인 사람은 몸은 교회에 와 있는데 지금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불신자들은 마음대로 활개치고 술 마시고 놀음하는 그들의 자유로움이 은연중에 부러워질 수 있습니다. 교회를 10년 다니든, 20년을 다니든 항상 그 마음속에는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핵심이 지금 19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제가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속마음을 이렇게 잘 아시는지 놀랐습니다. 분명히 들키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데 이상스럽게 성령이 임한 선지자들이 자꾸 다가서서 "가짜 맞지? 너 엉터리로 신앙 생활 하고 있는 것 맞잖아", 이런 식으로 이래저래 쑤시면서 다가온단 말입니다. 이게 참 신기한 거예요. 온 한국교회가 타락하고 모든 것이 나자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일반 평신도 가운데 진실로,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러 더러 있더란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거냐 말이죠. 목사가 제자훈련 잘 시켜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 만난 기적을 받은 사람이 정말이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큰 교회 부럽지 않고 작은 교회에서도 감사할 사람 이예요. 큰 교회 다닌다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직분도 부러워하지 않고 목사도 부러워하지 않고 그런 성령 받은 평신도들을 목사 안 되도 오직 주님만 감사하면서 고마워하면서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러더러 있어요. 진짜 성경대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자꾸 대비가 되면서 자신의 속내를 하나님께서 들키도록 촉구를 하는 겁니다. 아직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이니까 기회를 준다 이 말입니다. 그 말이 오늘 본문에서는 돌아오게 하려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130년 동안 살다가 죽은 그 제사장의 아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습니다. 그 사람이 스가랴라는 선지자인데 이 스가랴 선지자가 평소에 신학을 많이 하고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예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아무리 신학을 많이 하고 공부를 많이 해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아니하면 감히 왕 앞에 그런 소리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식인데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덤벼들겠습니까. 단순한 오기가 아니에요. 학문적 오기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 때문에 이런 바른 소리를 하는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 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정말로 하나님은 귀신이고 도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버린 줄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참, 희한하거든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지으신 분이 되어서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농땡이 부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지, 사람들은 모르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도사같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이 나를 버렸기 때문에 나도 너희를 버린다는 하나님의 심중의 뜻을 그대로 신하들에게 알려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선지자가 왕을 설득시킨다든지 회개시킨다는 책임과 의무는 없습니다. 여러분 그걸 꼭 명심해야 됩니다. 목사가 설교 잘한다고 그 교인들 신앙이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목사의 임무는 증거 하는 것 뿐 이예요. "이렇게 하면 당신들 지옥 갑니다"라는 소리를 할 뿐이지 협박 공갈해서 목사 말 잘 들으라는 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음흉한 목사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뜻만 전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마지막 심판 때에 하실 그 기준 그대로 이 지상에서도 그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이 이러한 관점에서 너희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전달할 뿐이지요. 회개하고 안 하고는 그 사람의 소관이고.
그런데 이러한 증언을 했을 때에 21절에 보면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여호와의 말씀을 높여야 될 그 성전 뜰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종을 죽여버렸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보고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 사건이 왜 벌어진 거예요? 우리를 살려 주라고 오신 그 주님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대우합니까? 돌로 쳐죽이듯이 못박아 죽이잖아요. 십자가는 결국 이래서 터진 사건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도 믿고 세상 욕심도 챙기고 둘 다해도 구원되지 않겠느냐, 설마 그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라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진짜 하나님의 종이 와서 잔소리 해버리면 대번에 오기가 쏟아져서 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다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조목조목 무엇이 잘못 되었으며 주의 뜻이 아니라서 우리가 그런 바른 선지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맞기는 맞는데 어쨌든 싫다는 거죠. 그래서 죽여버린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또 우리는 생각하기를 "오 신이시여! 내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이만한 신앙 생활을 좀 봐 주십시오"라고 자기 변명을 하지만 막상 진실한 주의 종이 와서 잔소리 해버리면 우리는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살인 충동을 느끼는 것이 우리 마음이지요. 그걸 그대로 오늘 본문에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니까 마지막에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라고 외칩니다. 스가랴가 마지막 죽으면서 하나님께 지금 이 사태를 지켜 봐 주시고 여기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 달라고 호소를 합니다.
자, 여러분 보통 생각하기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신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잘 대우해서 남들에게 보아란듯이 출세시키고 성공하는 인물로, 이 세상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생각이 얼른 들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을 하나님은 그냥 개죽음 당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4장에도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 잘 드린 동생이 형한테 도리어 개죽음 당하잖아요. 이런 개죽음이 사도행전 7장에도 나오는데 스데반 집사님이 바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고 있는데 저희들이 돌로 쳐죽였다고 했습니다.
이런 십자가 사건이 지금도 계속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보고 재수 없는 놈이라고 돌리지 마시고 그렇게 억울하게 복음 때문에 고생 당한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도 그렇게 당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행여나 예수님 죽음에 우리가 동참한 마음은 아닌지 아니면 정말 예수님 편에 서서 나도 같이 당했다는 그런 마음인지 스스로 자기의 속마음을 한번 살펴보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걸 보면서 말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마음으로, 진짜 하나님의 똑바른 정신으로 옳은 소리를 하는데 "듣기 싫다, 나가 죽어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기심과 질투심이 번져 나오지요.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지난 주일 오전에 설교한 내용대로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하다"고 할 때, 기분 좋게 듣는 남편 누가 있겠습니까. "뭐가 남편보다 예수가 더 소중해, 우리 가정이 최고지"라고 반발하고 싶은 그 반발을 그냥 일상적인 것으로 묻어두지 마시고 "바로 예수님을 죽인 이 십자가사건의 못된 마음이 내 속에도 들어있구나, 이래 놓고도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회개하면서 "이래서는 안 돼, 이건 신앙이 아니야, 이런 신앙을 가지고서는 제대로 구원될 수 없어"라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돌아가심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은 어디를 가도 신앙생활을 잘하며 여호야다와 같은 진실한 신앙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가 맞아떨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희들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말고 내 속을 날마다 살펴볼 수 있게 하옵소서 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주님을 미워하는지 날마다 자기를 점검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34. 징벌에 담긴 진정한 뜻 (역대하 24:23-27)
24:23 일주년 후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려하여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 중에서 그 모든 방백을 멸절하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
24:24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 손에 붙이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24:25 요아스가 크게 상하매 적군이 버리고 간 후에 그 신복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인하여 모반하여 그 침상에서 쳐 죽인지라 다윗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 하였더라
24:26 모반한 자는 암몬 여인 시므앗의 아들 사밧과 모압 여인 시므릿의 아들 여호사밧이더라
24:27 요아스의 아들들의 사적과 요아스의 중대한 경책을 받은 것과 하나님의 전 중수한 사적은 다 열왕기 주석에 기록되니라 그 아들 아마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하나님. 이 시간도 하나님의 하신 일에 우리가 겸허한 자세로서 하나님께서 어떤 원칙 가운데서 일 하시는지 저희들이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 원칙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지난 시간에는 요아스라는 왕이 나중에 변질해서 하나님을 배신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여호야다라는 훌륭한 제사장이 있을 때에는 어느 정도 요아스라는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듯 했는데 여호야다가 나이 많아서 죽고 난 뒤에는 그 신하들과 백성들이 우상을 원했기 때문에 각종 목상과 우상을 다시 세웠습니다. 선지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고, 특별히 죽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바른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성령 받은 선지자의 목숨을 개죽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오늘 본문입니다.
그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가 뭐라고 기도했느냐 하면 22절에 자신이 너무나 억울하고 비통하게 죽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자기의 죽음을 기억해 달라고 하며 자기를 죽게 한 원수도 기억해 달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23절에 "일주년 후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려하여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 중에서 그 모든 방백을 멸절하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 24절 끝에는 "이와 같이 아람 사람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왜 요아스에게 이런 난데없는 날벼락이 떨어졌습니까. 요아스가 현재 유다 나라에 왕으로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왜 하나님이 관여하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이점부터 정리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찬양이나 받고 복이나 주지 왜 내 일에 간섭하느냐는 말입니다. 나한테 잔소리하는 선지자, 내가 왕이 된 마당에서 그 인간을 돌로 쳐죽였다. 뭔가 잘못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 하는 일에 관여해, 엉뚱한 이방나라 아람군대가 쳐들어 와 징벌하느냐 이 말입니다. "아니 목사님 그건 하나님 믿는 사람 같으면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하나님 믿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사람에게 대들고 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살 때는 하나님이 징벌하잖아요, 그 당연한 이야기가 그렇게 의문시됩니까"하고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신다면 저는 그냥 고마울 따름이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같으면 그분은 자기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지 하나님께 원망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오늘날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앞서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리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한테 어떻게 했다고 나의 뜻대로 안 들어주느냐고 반항 조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물론 노골적으로 데모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태만의 몸짓들을 하고 있지요. 바쁜데 교회에 가지 말자고 하는 이런 것이 반항의 한 일종입니다. 오늘은 몸 아픈데 교회에 가지 말지 뭐,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느냐고 하는 이런 것이 이유 없는 반항입니다. 이 반항 속에는 나름대로의 오기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에게 한번 버텨 본다는 식으로 틀어보는 겁니다. 약간의 방탕과 타락의 길로 들어서면서 하는 속으로 하는 말이 "그러니까 하나님, 나에게 잘해 달란 말이야 내게 섭섭하게 해주니까 싫어서 내 마음대로 하잖아" 이런 식으로 반항의 몸짓을 하는 것처럼 저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대들었더니만 하나님께서 가만 계시지 않고 다른 엉뚱한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징벌을 줬다는 이 공식이 정말 여러분은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십니까? 이러한 원리와 원칙이 당연하다는 자세가 바로 올바른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즉각적인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 같으면 평소 그 사람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서 하나님께 고마움과 감사를 드리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가지 말라고 말려도 교회에 올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믿지 말라고 공갈 협박해도 안 넘어갈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핑계거리가 있고 조금만 무슨 구실거리가 있으면 그걸 핑계삼아 하나님 앞에 소홀해도 마땅한 것처럼, 교회에 안나와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이러한 마음자세한테는 "설마 하나님이 살아있기는 뭘 살아있어, 아무 일 없을 거야 거봐"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바로 이런 정신이 깔려있는 사람에게는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해서 큰불만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요아스 왕은 자기한테 바른 소리하는 그 스가랴 선지자를 돌로 쳐죽였습니다. 사실 그는 말로만 하나님 믿었지, 실지로 하나님 계신 것을 믿었겠습니까. 안 믿었을 거예요. 믿을 것 같았으면 쳐죽였겠습니까, 벌벌 떨고 회개했지요. 이렇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런 사람의 모습처럼 오늘 우리도 교회에는 나오면서 하나님 의식 안 하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지는 않았는지요? 내가 하나님 만나 주면 그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만나주어서 고마워해야 되고 내가 싫다고 하면 하나님도 안 만나주는 그러한 느긋한 마음과 대범한 마음이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이 아닙니까? 이런 상황을 두고서 오늘 성경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해줍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기본으로 깔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점을 분명히 하고 경고하기 위해 오늘 본문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자라면 분명히 사람을 겁내는 인생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을 겁내는 것보다도 나의 미래가 나를 실망케 할지라도 겁내지 않는 사람이 될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미래가 우리의 꿈대로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실망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지금 듣는 순간에 여러분의 기분이 산뜻하고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한 말씀 더 드리면 그 산뜻한 것이 혹시 섬뜻한 것으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방금 이런 신앙으로 올바르게 살았던 그 선지자가 결국 요아스 왕한테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어떤 환경 속에, 어떤 처지 속에서도 하나님에 의해서 산뜻하게 살아갔던 분이 계속 나중까지 잘 풀리면 우리도 뭔가 희망을 갖겠는데 성경 본문에 보면, 그게 아니라 확실하게 믿었다가 산뜻하게 그냥 죽임을 당하고 말았어요. 21절에 보면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자, 죽고 난 뒤에 원수가 징벌을 받아봤자 이미 죽어버린 자에게 무슨 위로나 이익이 있겠습니까.
22절 끝에 보면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얼마나 분했으면 이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이러한 말은 괜히 한풀이 식으로 내뱉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이 기도대로 이루어진 말씀이냐를 우리가 검토해서 이런 사태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을 우리가 확실히 해두어야 합니다.
과연 1년 뒤에 난데없는 아람군대가 쳐들어와서 요아스 왕이 있는 유다 나라를 완전히 작살을 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쪽 나라가 군대를 많이 몰고 온 게 아니었습니다. 24절에 보니까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 손에 붙이셨으니",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쳐들어 온 적들의 숫자는 얼마 안 되는데 그걸 방비하는 이 유다 나라는 숫자는 대단히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믿는 유다 나라의 군대가 하나님 안 믿는 소수의 허수아비 같은 이방나라한테 욕을 당해도 보통 당한 게 아닙니다. 결국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사태가 아니라 뭔가 배후에 이렇게 유다 나라가 망가지도록 조치하신 분이 따로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전쟁 붙여주심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24절에 붙인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걸 시간이 가더라도 제가 좀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나님이 은혜 주신다, 여러 가지 말로 하는데 이 구약에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일 하실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붙이신다는 말을 꼭 합니다. 하나님이 붙이신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숫자가 얼마 안 되고 적들의 숫자는 많을지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이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하나님이 붙이시면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시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어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호수아 6장 2절에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이미 이스라엘백성에게 붙였으니 너희들의 밥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는 예수 안 믿는 사람 겁내지 마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 안 믿는 사람 지옥가게 했기 때문에 하등의 걱정하지 말고 겁내지 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필히 지옥 보낼 자를 지옥 보내고 너는 천당 보내준다고 이미 승리자와 패배자를 결정했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더 이상 상대방에게 겁내지 않지요.
제가 한 예를 들겠습니다. 박세리 선수의 골프 대회에서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아슬아슬하게 우승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다가 그 다음에 신문을 보니까 박세리가 2승했다고 나왔습니다. 이미 박세리 선수가 승리하고 난 뒤에 뉴스를 보는데 걱정 할 필요가 없지요. 왜냐하면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보는 것은 어떻게 승리했는가하는 그 절차만 확인 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죠.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이미 승리는 했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그 과정이 궁금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1등으로 나가다가 막판에 3등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마 그 때 TV 꺼버린 사람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 마지막판에 역전을 해서 1등을 했다는 거죠. 그것을 이미 승리를 모르는 사람 같으면 가슴 조마조마 하겠지만 이미 승리한 것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꾸로 그 과정을 보면서도 마음 푹 놓고 신나는 모험적 인생을 보낼 게 아니냐 말이죠. 이게 구약으로 말하지만 '하나님의 붙이심'입니다. 하나님이 이기도록 붙여주니까 너무 걱정하지를 말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벌벌 떨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 믿는 자에게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일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무덤에 들어가는데 예수 믿은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안 믿은 사람은 지옥의 부활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가 확정되어 버렸잖아요. 내가 서울 가서 살든 부산 가서 살든 미국 가서 살든, 그건 하나의 절차에 불과한 거예요. 승리하기 위한 하나의 중간, 사소한 과정에 불과한 겁니다. 이게 구약에서 붙이심입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붙이시매 심지어 해가 지지 않고 멈추게 하시기까지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붙이시매 많은 숫자가 와도 적들은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붙이시매 멀쩡한 대군들이 무기를 놓아두고 도망가게 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 줄줄이 보면 하나님께서 붙이시매 에서는 숫자의 우열과 상관없이 붙여주는 쪽이 승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 덕분에 이 유다 나라가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오늘본문 24절에 보니까 사정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어떻게 거꾸로 되었느냐하면 유다 나라는 숫자가 많고 유다 나라를 징벌하려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보내온 아람 나라는 도리어 숫자가 적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가 누구에게 붙여주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믿는 유다 나라를 적군에게 붙이는 게 아니고 적군이 도리어 유다 나라에 붙여 가지고 반드시 적군이 이기도록 조치를 해버리니까 이 어찌 유다 나라가 안 망하고 되겠습니까! 자, 이러한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모두 누구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스가랴 선지자의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했던 결과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버리십니까, 왜 하나님 믿는 나라를 지게 만드시느냐고 하시겠지만 하나님은 유다 나라 편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적군 편입니까? 적군 편도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하나님은 언약편입니다. 언약대로 언약 안에 들어오면 적이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아무리 자기가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처해도 하나님의 언약, 말씀을 버려버리면 그건 완전히 날라 가는 겁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원래 하나님의 언약 편이니까 죽어가면서도 그 신앙을 포기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래는 바로 이 선지자가 믿는 그 언약대로 끝장나는 거예요. 요아스 왕이 완전히 착각하기를, 이 유다 나라는 자기 것이라는 겁니다. 내 것인데 하나님이 왜 간섭하느냐는 거지요. 내 소유인데 스가랴 선지자 네가 뭔데 왕에게 대드느냐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게 어떻게 네 것이냐 하나님 것이지" 그러면서 도로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버리신 거예요. 그리고 요아스 왕은 25절에 보니까 침상에서 죽었습니다. "요아스가 크게 상하여 적군을 버리고 간 후에 그 심복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인하여 모반하여 그 침상에서 쳐죽인지라", 요아스는 이 나라가 내가 왕이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편이지 내 편이 아닙니다.
아무리 이목사가 십자가를 이야기하지만 제가 하나님의 십자가를 버리면 저도 또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죠. 하나님은 제 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 편이고 예수님 편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면 전부 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교회 당회장이 되면 교회가 예수님 교회가 아니고 자기 게 되는 줄 압니다. 만약 교회를 내 것이라고 우기면 여기에 반드시 희생자가 생깁니다. 가인은 아벨을 쳐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아벨의 피, 스가랴의 피, 이건 뭐냐하면 아벨이나 스가랴는 바로 하나님 편에 속했는데 그걸 희생시키고 그걸 핍박하는 사람은 그동안 자기 것이라고 우긴 사람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우겨 버리면 하나님의 증인들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신원 하여서 복수를 감행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변함 없는 계획인 것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하나님의 변함 없는 원칙입니다. 변함 없는 원칙 이예요. 왜 이런 애매한 죽음을 유발시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은 아예 하나님의 것으로 맡겨야 될 건데 하나님께 내 것 도와 달라고 자꾸 하나님마저 내 것으로 만들려하고 예수마저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진짜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게 되고 진짜 하나님의 백성을 압박하게 되니까 거기에 대한 징벌로서 우리에게 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편입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하지말고, 예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하지말고, 우리가 언약편이고 우리가 하나님 소속이 되어 가지고 정말 느긋하게 붙여주시니 이미 승리했다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그 주님 품안에서 느긋하게, 그리고 아주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셔서 자기 말씀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이 반드시 구원과 심판을 감행한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심판이 오기 전에 내 것이라 여기는 것을 버리고 우리 자신 전부를 하나님 것으로 말씀의 종으로서 살 수 있도록 저희들을 헌신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35. 부모의 죄와 자식의 죄 (역대하 25:1-4)
25:1 아마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25:2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
25:3 그 나라가 굳게 서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25:4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 율법 책에 기록한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이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스라엘의 왕은 다른 나라의 왕과는 많이 다릅니다. 다른 나라의 왕은 힘센 사람이 왕 자리를 차지하면 그만이지요. 그러나 선택받은 유다 나라의 왕은 하나님의 약속된 그런 계통만 왕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 하나님의 약속된 왕 외에 다른 왕을 세운다든지 또는 자기가 나선다든지 하면 하나님이 가만 두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마샤 라는 사람이 왕이 되는데 이 사람은 바로 다윗의 혈통 계통이기 때문에 일단 왕이 되는 데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서 그게 자동적으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왕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를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내가 왕이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왕 같으면 왕다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도 크게 당한다는 심판의 대상으로 놓여져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왕을 세워 주셨다고 해서 자기가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신약에 와서도 이 원칙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나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도 역시 허용될 수가 없는 겁니다. 성도라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고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해야 될 책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 24장 25절에 보면 요아스가 사실 나쁜 건 맞습니다. 왜냐하면 스가랴 선지자를 성전 문에서 돌로 쳐죽였으니까 나쁜 왕이지요.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하나님께서는 그 부하를 통해서 요아스 왕을 처단하고 맙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해야 될 것은 "나쁜 왕이 있다, 그래서 부하가 나서서 그 왕을 죽였다, 그러니까 이 부하는 훌륭하지 "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나쁜 왕을 처단했다고 해서 그 신하를 하나님께서 부추겨 주고 잘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신하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왕을 친 게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의 권력을 쥐고자 하는 또 엉뚱한 속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임을 당하는 왕도 나쁘지만 그 왕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공격하는 신하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역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 나쁜 왕을 치니까 왕은 하나님의 뜻대로 죽어야 되겠지만 왕을 쳤던 그 신하도 하나님의 심판을 당해야 될 그런 처지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유다 나라의 특징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법대로 되어야지 사람의 감정적으로 처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오늘 성경본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아마샤라는 왕이 등장하는데 이 왕은 또 무엇을 했는가를 살펴봅시다.
이 왕이 어떤 일을 했습니까? 우선 1, 2절에 보면 아마샤 왕에 대해서 하나님의 평가가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아마샤가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평가를 보게 되면 아마샤가 처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부합되는 일을 했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자 이 말입니다. 그런데 끝이 안 좋다는 것을 우리에게 느낌으로 오잖아요. 그래서 아마샤 끝이 어떻게 끝나는가는 다음 시간에 보게 되겠지만 일단 오늘 본문에서 아마샤 라는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데 그 정직히 행한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살펴 볼 지점에 도달한 겁니다. 그가 정직히 행한 것만큼은 인정해 주자는 말입니다. 정직히 행했다는데 무슨 일을 정직히 행했는지 살펴보자 말입니다.
3, 4절을 보면 거기 아마샤 왕이 일을 하나 했습니다. 무슨 일을 했느냐하면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한 대로 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요아스 왕이죠. 자기 아버지를 죽인 그 신하들에 대해서 아마샤 왕은 용감하게 대처합니다. 주저주저 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들을 처단했습니다. 이건 정직하게 행한 일인데 여기에다 또 잘한 일은, 자기 아버지는 죽이되 그 신하의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들의 범죄를 빌미로 삼아 아들까지 처단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올바른 것으로 평가 내리고 있습니다. 올바르냐, 올바르지 않느냐 하는 것은 율법에 준해서 결정됩니다.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고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라'고 한 모세 율법의 말씀 그대로 아버지 죄로 인해 자식과 온 가족까지 몰살하지 않았으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신명기 24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요즘 우리가 이 대목을 대하면서 무슨 영문으로 이 말씀이 적혀 있는지 잘 이해가 안되지요. 아버지가 죄를 지었는데 아들을 죽일 리가 있나, 아버지 죄 때문에 아들까지 죽이지 않는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그것이지 뭐가 정직한 일이 되며 착한 일이 되느냐고 생각하겠지요. 물론 요즈음은 다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된 것에도 숱한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국가들은 개인이 지켜야 될 도덕적 양심까지 아예 법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 법만 지키면 전부 다 도덕 군자가 되고 윤리가 옛날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도록 조치를 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즈음 현대 국가 시민들이 신명기의 이 말씀을 보면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죄 때문에 자식까지 죽이지 말라는 그러한 한계조항을 내세웠느냐 하면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이런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십계명이 나오는데 제삼 계명에 보면 이런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다시 읽어 드리면 하나님을 향하여 형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 만약 이것을 섬기는 자는 그 죄를 하나님이 필히 갚으시는데 아비로부터 3, 4대 아들에까지 저주가 이르게 하고 만약에 나를 사랑하면 천대까지 대대로 너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분명히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 벌이 3, 4대까지 저주가 미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다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 앞에 잘 공경하면 그 은혜는 3, 4대 정도가 아니고 천대까지 내려간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 매맞는 것 너무 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죄 많은 우리가 은혜를 입어서 영생의 하늘 나라 가는 것을 더 크게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어느 집 장례식에서 어느 장로님을 만나 한 30분 동안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느낀 점이 "뭐 안 하면 벌 받습니데이, 뭐 안 하면 벌 받습니데이, 이거 진짜 입니데이 목사님!" 그러면서 자꾸 벌받는 이야기를 해요. 이 땅에 살면서. 죽어서 영생 얻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영생이 영원히 사는 것 아닙니까. 아니 죽어도 죽음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이 은혜를 받았으면 이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이야기를 해야지 엉뚱하게 교회 내에서 뭘 안 하면 저주받고 목사한테 대들면 벌받아서 집안 꼴이 엉망이 된다는 겁주는 이야기만 자꾸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이구 이 분의 신앙 방향이 정말 잘못 되었구나, 그 교회 목사가 잘못 가르쳤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꾸 뭐 안 하면 벌받고, 기도 안 하면 벌받고, 헌금 안 하면 벌받고, 목사한테 대항하면 벌받고, 그 집안 꼴이 말이 안 된다는 이런 이야기를 자꾸 끄집어내는 것이 본 십계명의 취지가 아닙니다. 아니, 교회를 손해 안 보려고 다닙니까? 초대교회 사도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들은 자기 인생을 평안하기 위한 목적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이건 너무 이기주의적 생각 이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갚지 말라는 이 말씀은, 3, 4대까지 저주를 내린다는 십계명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나쁜 인간들이 권력과 폭력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가지고 원수의 자식에게까지 스스로 저주 내린다고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엄명입니다. "너 봐,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하늘의 심판자가 되어 가지고 네 일족을 멸하리라", 이렇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본인이 하나님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누구에게 3, 4대까지 벌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자기가 할 몫이 아닌데 그 사람이 남한테 감정이 있으니 그런 식으로 성경 말씀을 도용해서 복수를 감행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노인이 지나가는데 젊은 아이가 인사를 안 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를 불러서 "야 어른한테 인사를 해야지"하고 끝나면 될텐데 "저놈의 자식은 나중에 장가가서 저주를 받을 거고 아들은 어떻게 될 것이고..."하면서 갑자기 인사 안 하는 것에 저주를 퍼붓는 것입니다. 그 본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확대를 시키면서 3, 4대까지 다 저주를 해버리면서 심술을 불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아버지 죄를 아들에게 갚지 말라는 이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이런 폭력성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난무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다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내가 만약 아마샤 왕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요아스가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이 눈 부릅뜨고 지금 장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아들로서 복수를 하고 싶지요. 누구라도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만 죽이는 게 아니라 즉 "김장관! 우리 아버지 죽였지, 당신도 죽어"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김 장관! 당신 집안을 내가 몰살할거야, 아무 죄도 없는 당신 아들 내 놔, 손자, 며느리 3대를 멸해", 이렇게 나오면 이게 바로 인간의 복수심의 발로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놓고 자기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거룩한 하나님의 택한 왕을 죽인 신하의 원수를 갚았습니다",라 하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할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는 모든 매사가 다 이렇습니다. 자기 절제가 안 되요.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는 안정성이 없습니다. 좀 좋으면 난리고 좀 나쁘면 복수하려고 칼을 갈고. 이럴 때 누가 잡아줘야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잡아줘야 됩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 보면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이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것까지만 해야지 더 이상 넘어가지 말라는 말이죠. 남을 비판하고 남을 징계하려고 하기 전에 나도 문제가 있고 징계하는 나도 하나님께 당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사야 14장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패권자의 홀을 꺾으셨도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앗수르라는 몽둥이를 통해 이스라엘을 칩니다. 그러니까 몽둥이로 사용된 앗수르가 자기들이 잘나서 치는 줄 알고 또 까불어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앗수르 너는 또 뭐야", 그러면서 몽둥이를 또 몽둥이로 쳐버립니다.
이사야 30장 3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마다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탈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앗수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치는 몽둥이 역할이라면 이제 앗수르라는 몽둥이는 또 다른 몽둥이, 바벨론 이라는 몽둥이에 의해서 하나님이 치겠다는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해 분수를 지키라는 말입니다. 자기 절제를 하라는 말입니다.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겁니다.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겁니다. 사적인 복수심이나 사적인 원한관계를 하나님의 말씀 지킨다는 핑계로 집어넣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문제가 많으니까요. 상대방도 문제가 많지만 남을 지배하는 나도 역시 문제가 많으니까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그 선에서 그쳐야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신이 나서 하나님이 자기편이 되는 양 함부로 남을 정죄 해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마샤 편을 든 게 아니고 아마샤 왕이 신명기의 말씀대로 말씀에 넘어가지 않으니까 그 말씀에 넘어가지 않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정직하다고 이야기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 편이 아니고 하나님 자기편입니다. 목사편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말씀밖에 모릅니다. 자기가 내세웠던 약속과 말씀만 고집하고 그것만 고수하시는 거예요. 집사님이 인터넷에 올린 글처럼 말씀은 스스로 그 말씀을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참 하나님은 자기 약속과 맹세에 대한 말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가 없구나, 말씀에 합당하면 누구라도 칭찬하고 아무리 대단한 신앙인 이라고 해도 말씀에 안 맞으면 가차없이 아니라고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니까 여러분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이 말씀이 뭐라고 지시하는가, 그 말씀만 감사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마샤 왕이 정직하게 행했는데 과연 오늘날 우리는 정직하게 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괜히 영웅심에 들떠서 하나님의 말씀 핑계 대고 자기의 오기나 자기의 욕망이나 풀고 있지 않는지 저희들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은 말씀편인 것을 늘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