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혜(雪慧)...!
푸른빛 어둠으로 아침이 밝아 오고 그 기운 속에 겨울 숲이 깨어나는군요.
쉼터에서 아침을 먹습니다.
아침이라고 해봐야 보온병에 넣어온 둥굴레차와 떡 한조각, 밀감 하나...
설혜(雪慧)...!
푸른 산죽잎위에 제법 많은 눈이 쌓여있습니다.
불어오는 아침바람이 차가워 모자를 쓰고 천천히 걸어요.
며칠 동안 운동을 좀 했다고 천천히 걸으면 그냥 숨가쁘지는 않아요.
뱀사골 산장이 오늘의 목적지니 지도를 보건데 여유가 있어 좋아요.
멀리 흰눈을 이고 있는 종석대가 보이는걸 보니 여긴 한 겨울입니다.
길이 가팔라지고 흰눈 사이로 맑은 계곡이 흐르고 이마엔 땀방울이 맺히네요.
설혜(雪慧)...!
도로에 올라서자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산은 한마디로 설국이군요.
겨울산입니다.
당신은 늘 그대로 빈 사무실 컴 앞에서 작기만한 나를 기다리고 있을테지요...
이렇게 바람이 몰아치고 추운 날 당신의 해살거림이 생각나 웃음과 미안함이 돋습니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람과 구름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눈이 시리p>
설혜(雪慧)...!
지금 나무들을 감싸고 있는 저 순백의 결정체들은 눈이 아닙니다.
밤새 바람에 날려온 안개, 이슬, 습기가 나뭇가지에 집을 지었어요.
참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한가지 아쉽다면 나를 날려버릴 듯이 미친 바람이 불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설혜(雪慧)...!
왜, 이 산이 처음이련만 이리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걸까요...?
당신이 주는 바다 같은 사랑의 내음만큼이나
이 산의 깊음에서도 느끼며 내 소명을 함께 일깨워서일까요...
눈 쌓인 주능선길이 포근한 아름다움입니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요...?
천왕봉, 웅석봉,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마음이겠죠.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라도 항상 내 한편에 당신이 웃고있지요
내 가슴 온통 전부라 말하지 못하는 난 당신에게만큼은 나쁜 놈입니다.
산봉우리를 넘고 넘어도 또 산봉우리가 앞에 있습니다.
그게 이 끝없는 길, 결국은 마음이겠지요.
설혜(雪慧)...!
한 그루의 나무는 왜 홀로 저렇게 바람 속에 서있나요...?
괜히 당신이 떠올라 제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많이 외롭지는 않겠지요.
당신은 언제나 씩씩하고 푸르른 밝음의 나무니까요...
새들이 고단한 날개를 쉬었다가고, 바람이 어루만져 주고 가겠지요.
설혜(雪慧)...!
천천히 걸었는데 벌써 삼도봉입니다.
"순백의 절정으로
서리꽃이 피었습니다.
먼 그리움으로
천왕봉을 바라보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돌아 돌아 가게 되려나... ...
오늘은 뱀사골에서 쉬렵니다."
설혜(雪慧)...!
뱀사골 대피소에 배낭을 풀고 토끼봉으로 갑니다.
겨울숲이 아름답군요.
"가을 가고 찬바람 불어 하늘도 얼고
온 숲의 나무란 나무들 다 추위에 결박당해
하얗게 눈을 쓰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도
자세히 그 숲을 들여다보면
차마 떨구지 못한 몇개의 가을잎 달고 선 나무가 있다
그 나무가 못 버린 나뭇잎처럼
사람들도 살면서 끝내 버리지 못하는 눈물겨운 기다림 같은 것 있다
겨울에도 겨우내 붙들고 선
그리움 같은 것 있다
아무도 푸른 잎으로 빛나던 시절을 기억해 주지 않고
세상 계절도 이미 바뀌었으므로
지나간 일들을 당연히 잊었으리라 믿는 동안에도
푸르른 날들은 생의 마지막이
가기 전 꼭 다시 온다고
죽은 줄 알았던 가지에 잎이 돋고 꽃 피고 설령 그 꽃 다시 진다 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 있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 생도 짙어져 간다는 것을 믿는 나무들이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내내 버리지 못하는 아픈 희망
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푸르른 그리움과 발끝 저리게 하는..."<도종환님의 시에서>
설혜(雪慧)...!
이제 곧 이산에 어둠이 내립니다.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오래도록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싶은...
당신도 당신의 밤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나는 머무는 곳이 어디나 집이겠지요.
그래도 늘 가슴 한편에 당신을 고웁게 재워두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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