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당 조만식 선생을 기리며
어제 서울 YWCA 대강당에서 고당 조만식 선생의 57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은 현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평양 숭실학교에서 수학한 후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오산 중학교에서 9년 동안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교장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건너가 제2차 만세시위운동 조직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년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민족경제의 자립을 위해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인 대일저항운동을 주도하였고, 1929년에는 서울역 앞에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 또 다시 일경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31년 만주에서 발생한 만인보 사건 때 많은 한국인이 학살되자 이를 위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동포 보호에 앞장서기도 하였고, 1934년에 결성된 진단학회를 통해 군자금을 마련하여 독립군을 지원하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지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43년 경에는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용에 반대하다가 다시 구속되기도 하였다. 해방직후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정치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나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련군에 의해 1946년 1월에 강제연금당하였다가 6.25 발발 후 9.28 수복에 따른 인민군 퇴각시 사살되어 평양 근교에 암매장되었다. 그의 정확한 사망일자를 알지 못하지만 구소련으로 망명한 북한 외무성 부상을 지낸 박길용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10월 18일에 사살되었다고 한다. 고당 선생이 1948년 사모님만을 월남시키면서 잘라 준 모발이 1991년도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그의 시신을 대신하고 있으니, 43년 동안이나 선생의 모발 한 웅큼을 선생으로 생각하며 살았을 사모님의 슬픔 또한 얼마나 컸겠는가?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70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앞서 본대로 1991년에 국립묘지에 그의 모발을 안장하였고, 얼마 후 사모님이 돌아가시자 함께 합장을 하여 민족 지도자에 대한 예우를 다 하였으니, 하늘나라에서나마 부부가 다시 만날 수 있었으려나......
영웅은 역사가 만든다고 했던가? 살아 있는 정신은 역사의 질곡 앞에서도 굴하지 아니한다. 고당 선생은 일제 강점의 그 암울했던 시기 몇 안 되는 애국지사 중의 한 분으로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민족의 생활 향상을 통해 국권 회복을 위해 애를 썼던 분이다. 얼마 전 고당 조만식의 모교인 숭실대학교는 선생을 기념하여 고당 조만식 기념관을 건립하여 헌정하기도 하였다. 평양에서 개교한 숭실대학은 1937년에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스스로 폐교의 길을 택하면서도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가, 1954년에 서울에서 재건한 이래 지난 10일 개교 110주년을 맞이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고당 조만식 기념관을 건립한 것이다. 몇 해 전에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의 기념관을 지어 민족정신을 고양시키기도 한 숭실대학교의 대학축구단은 지난 2-3년 동안에만도 전국 대학축구대회에서 네 차례나 우승한 전력이 증명하는 명실상부 대학 최고의 명문 축구팀이다. 이처럼 숭실대학이 축구팀에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평양 숭실대학과 서울의 경성제대의 축구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경평축구대회를 개최했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그 암울했던 시기에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는 축구경기만한 이슈도 없었다. 처음에는 사상 검증 없이 일제의 탄압을 피하면서도 민족이 한 마당에 모여 어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평 축구대회도 점차 그 경기를 통해 민족의 혼이 결집되자 일본은 4년 경기 후 더 이상 대항전을 치루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더 이상 경평축구대회가 맥을 잇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1990년대 이후 남북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국가대표 축구시합을 치루고 있다는 점이다.
고당 선생의 추모식을 맞아 되돌아보니 지금 남한에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민족 지도자가 드물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고당 선생이 살았던 그 시대에 비해 다변화되어 버린 현대세상에서 고결한 지도자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공백을 틈타 몇 몇 연예인들의 에스 라인이 꿈의 대상이 되어 버렸고, 몇 몇 스포츠 스타들의 근육질이 동경의 목표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정신이 무망한 현대인들, 오직 몸으로만 승부하려는 현대인들은 왠지 공허하다. 고당 조만식 선생은 그의 자식들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세 가지 글자를 기록으로 남겼다. 바로 용서할 서(恕)자와 참을 인(忍)자 그리고 부지런할 근(勤)자이다. 스스로를 부족과 결함투성이라고 반성하며 자식들에게 용서와 관련하여 남의 사정을 알아서 접어 생각해 주는 일이라며 공자의 가르침을 빗대어 사람을 사귐에 있어 오직 “忠하고 恕할 따름이라”며 성실할 것을 부탁했고, 참을 忍에 대하여도 9대가 함께 산 옛 가정을 예로 들며 그 많은 세대가 한 집에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오직 참고 견디는 일이었다고 일깨웠고, 부지런할 勤에 대해서도 一勤天下無事이고 勤側必成(하루 근면하면 천하가 무사하고 근면하면 필히 성공할 것이다)이라는 성어를 빗대어 부지런함은 무슨 일에나 성공의 기초가 된다고 당부하였던 것이다.
한나라당 이명박씨에 이어,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씨가 대통령후보로 결정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야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된 것이다. 그들의 정치 지도력이 어떻게 발휘될지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대선으로 당분간 세상은 요란할 듯하다. 두 사람의 대결구도가 끝까지 갈지 아니면 다른 변수가 나타날지 아직은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좋은 분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축복이 이 나라에도 있으면 참 좋겠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간의 신뢰가 점점 더 쌓여가고 있는 지금, 여전히 남남간의 갈등은 골이 좁혀지지 않고, 세대간, 지역간의 간격도 좁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이에 대한 반발 또한 만만치 않다. 정기국회에서 국감이 시작되었지만 정동영 후보와 이명박 후보의 비리의혹 사건에 대한 증인 채택 문제로 여야 국회의원들은 멱살질을 하고 있고, 제대로 국감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복잡한 것인지 모른다. 모두가 세상사에 나서서 광야의 외침을 하고 있지만, 세상은 서로의 입만 있을 뿐 귀가 없으니 어찌하랴. 듣는 귀가 열려지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당 조만식 선생이 1911년 동경에서 항일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하면서 했다는 말 “고향을 묻지 말자, 우리가 고국에 돌아가게 되면 피차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하자, 인화와 단결이야말로 국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나라가 독립을 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이 뇌리를 때린다.
우리 모두 고향을 묻지 말자. 우리는 모두 지구인 아닌가? 지구가 둥글어서 안정감을 찾지 못하는 거짓말을 그만 좀 하고, 그냥 하나로 살 수는 없는 것인가......
2007년 10월 19일, 법률저널, 오시영의 세상의 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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