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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 葵禪軒 독서일기 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대동야승』 제11권
[기묘록 별집(己卯錄別集)] 제현봉사(諸賢封事) 請復廢妃愼氏
정축년(1517)에 눌재(박상)와 충암(김정)이 폐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다. 충암 지음 [丁丑訥齋冲庵請復廢妃愼氏] 冲庵製 -
* 대동야승 원문에 정축년이나 실제는 을해년 1515년이다. 옛선비들도 착각한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제왕(帝王)으로서 천명(天命)을 이어받아 표준[極]을 세우는 도는 처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일을 시작하는 처음에 바른 데서 출발하면 큰 기강과 근원이 질서정연하여 광명(光明)이 위에서 비춰 온갖 일과 교화에 통하여 미침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듯 하여, 어디를 가더라도 바르지 않음이 없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교화가 이루어지기만을 바란다면, 마치 근원을 흐려 놓고 흐르는 물이 맑기만을 바라는 것과 같으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주역(周易)》에는 건곤(乾坤)을 앞에 실었고, 《시경(詩經)》에도 관저편(關雎篇)으로 시작하였으니, 배필의 관계는 인륜의 시초이며 온갖 교화의 근원이요, 기강의 으뜸이며 왕도(王道)의 처음입니다. 노(魯) 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면류관(冕旒冠)을 쓰고서 친영(親迎)하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공자는 추연(愀然 슬픈모양)히 낯빛을 변하면서, “두 이성(異性)이 결합하는 경사로써 선왕의 뒤를 계승하여, 천지ㆍ종묘ㆍ사직의 주인이 되는 일인데, 어찌 임금께서는 너무 과하다고 하십니까.” 하고 대답하였고, 제(齊) 나라 환공(桓公)은 규구(葵丘)에서 회맹(會盟)하면서 첫 명령에, “첩(妾)을 아내로 삼지 말라.” 하였습니다.
무릇 공자께서 낯빛을 변하신 것은 애공이 천지ㆍ종묘ㆍ사직의 주인될 사람을 소홀히 여겨 그 예식을 함부로 하려고 한 것을 한심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또 환공은 패자(霸者)이면서 오히려 배필이 중한 줄을 알고 능히 그 명분을 그르치고자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시초를 마련하고 이루는 도리인 바 왕자(王者)로서 삼가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옛적 주(周) 나라가 창건될 때에, 태왕(太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은 모두 성덕(聖德)이 있어서 제가(齊家)의 도(道)를 숭상할 줄 알았고, 예(禮)를 지키어 문란하지 않았으며, 대대로 어진 왕비를 얻어 인륜의 근본을 바로잡았으니, 왕화(王化)의 근원을 맑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주 나라가 처음의 시작을 바르게 하고 근본을 단정하게 하기를 깨끗하고 흠이 없게 하였으며 짙고 두터워서 경박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왕의 교화가 집안에서 시작하여 조정에 양양(洋洋)하게 넘쳐흘렀고, 성대하게 사방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마치, 천지의 조화가 음양에 근본하고 일월성신과 호흡하여, 한서(寒暑)가 순환하여 산천(山川)ㆍ조수(鳥獸)ㆍ초목(草木)에까지 널리 미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지아비는 지아비로서, 지어미는 지어미로서, 아비는 아비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 임금은 임금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 각자 도리를 다하여 조금의 간사함이나 더러움도 그 사이에 섞이지 않아 천지가 편안해지고 만물이 제대로 생육(生育)되기에 이르렀고, 추우(騶虞)와 인지(麟趾) 등의 아름다운 상서가 나타나 장구하게 8백 년이라는 국운을 누렸으니, 어찌 〈관저〉ㆍ〈작소〉(鵲巢 《시경》의 편명, 후비의 덕을 칭송함.) 등의 풍화가 아니겠습니까.
국운이 쇠퇴하기에 이르러서는 내교(內敎)가 무너져서,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정궁(正宮 왕후)을 폐출하여 마침내 오랑캐의 화란을 불러들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첩을 올려서 정궁으로 삼아 예의와 명분을 어지럽히다가 마침내 쟁탈하는 난을 재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당(唐) 나라 고종(高宗)은 황후(皇后)를 폐했다가 마침내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자손까지 끊어졌으며, 송(宋) 나라 철종(哲宗)도 황후를 폐해서 본원(本源)이 무너지니 간사한 무리들이 재앙을 빚어내어 결국에는 정강(靖康, 1126~1127)의 변고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물며 첩을 부인으로 삼아 떳떳한 체통을 더럽혔던 사람들이야 그 화란이 어찌 적었겠습니까. 위(魏) 나라 문제(文帝)가 곽귀빈(郭貴嬪)을 왕후로 삼으려고 하자 중랑(中郞) 매잠(枚潛)이 논쟁을 폈고, 당(唐) 나라 명황(明皇)이 무혜비(武惠妃)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을 때에는 어사(御史) 반호례(潘好禮)가 간쟁하였습니다. 대저 예부터 치란과 흥망의 자취는 이와 같이 뚜렷하게 징험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제왕의 배필을 중하게 여기고 풍화의 근본을 바르게 하고자 한다면,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 등이 삼가 보건대, 고비(故妃) 신씨(愼氏)가 폐척을 당해 궐(闕) 밖에 있은 지 거의 12년입니다. 신 등으로서는 당초의 사유를 자세히 알지 못하온대 무슨 큰 사고가 있었습니까. 어떠한 큰 명분에 의해서 이런 너무나 놀라운 일을 하셔야 했습니까. 무릇 임금이 대통을 받들어 선왕의 뒤를 계승하게 되면 먼저 부부(夫婦)의 도를 바르게 하여 천지와 나란히 하고, 안으로는 음교(陰敎 내교(內敎))로써 밖으로는 양덕(陽德)으로 다스려서 묘사(廟社)와 신지(神祗)를 주재하는 것입니다.
대저 배필이란 그 중대함이 이와 같으니, 만약에 부모에게 불순하였거나 종묘ㆍ사직에 죄를 짓지 않았다면, 설사 자질구레한 허물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코 의절(義絶)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명분도 사고도 없이 폐척하였으니 어떻게 종묘를 받들 수 있겠으며 하늘의 뜻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옛적 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원망한다는 이유로 곽후(郭后)를 폐하였고, 송(宋) 나라 인종(仁宗)은 질투한다는 이유로써 황후를 폐하였는데, 당시뿐만 아니라 후세에까지 기롱하고 풍자하여 명군(名君)으로서 큰 과오였다고 여겨 왔습니다. 이제 신씨는 폐출할 만한 사유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폐출하신 것은 과연 무슨 명분 때문이었습니까.
정국(靖國) 초기에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 등이 신수근(愼守勤)을 제거하고나서 생각하니, 신비(愼妃)는 신수근이 낳았는지라, 그 아비를 죽이고 그 딸을 왕비로 세우면 다음날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자신을 보존하려는 사심에서 신비를 폐출하려는 모략을 꾸며냈던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이유도 명분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씨는 전하께서 세자가 되시던 첫해부터 점괘에 잘 맞아 좋은 배필로 삼으시고 의식을 갖추어 자전(慈殿)께 뵈었을 때, 고부(姑婦)의 분의(分義)는 이미 정해졌던 것이며,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받드시게 되자 중곤(中壼)에 정위(正位)하여 신민(臣民)의 하례를 받으셨고 종사의 주부(主婦)로서 응하였으니, 전하에 대해서는 유적(䄖翟 꿩무늬가 있는 황후의 제복)의 존엄함이 세워졌고, 조종(祖宗)과 신지(神祗)에 대해서는 빈조(蘋藻 제사 음식)를 받들게 될 희망이 있게 되었으며, 국민에 대해서는 모후(母后)로서의 명분이 분명해졌습니다.
자전께서는 어기고 거슬러 꾸지람을 받으실 만한 일이 없었으며, 제주(第稠)에는 쫓겨갈 만한 허물이 없었으니 귀신과 사람이 슬퍼하고 원망하는 바입니다. 전하께서는 강포한 신하들의 억제를 받아 항려(伉儷 부부)의 중함을 보전할 줄 모르셨으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말에 ‘빈천할 때의 친교는 잊을 수 없고, 조강지처는 내쫓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신씨는 대저(代邸)에서 몇해동안 주장(酒獎)을 갖추었고 쇄소(洒掃)를 받들었습니다. 사생을 같이 하기로 맺고, 의기(義氣)로 서로 믿어 암울한 조정의 변란도 함께 겪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귀하게 왕비의 몸이 되어 천승(千乘)을 차지하였건만 미련도 없는 버림을 받았으니, 높고 낮아 환경을 달리함이 한때 높은 하늘에 오르는 듯하다가 다시 아홉 길 못에 빠진 격이옵니다. 지존(至尊)의 배필이며 금슬(琴瑟)의 벗으로서, 임금의 정전(正殿)을 멀리 떠나 여염집에 섞여서 기상(氣像)이 쓸쓸하니, 이 소식을 듣는 자 눈물을 흘리고 그 앞을 지나는 자 탄식합니다.
옛적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오랑캐의 난을 당해서 황급한 중에도 돈독했던 은의(恩義)를 어기지 않았던 일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예기(禮記)》에, “자식으로서 그 아내가 아무리 좋다라도 부모가 좋아하지 아니하면 그 아내를 버리고, 자식으로서 그 아내가 싫더라도 부모가 나를 잘 섬긴다 한다면, 자식은 부부의 예(禮)를 행하여 죽을 때까지 은의를 쇠하게 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아내를 폐출하는 일은 한결같이 부모의 명령을 들어야 함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이번엔 자전(慈殿)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서 왕실의 주부(主婦)를 가볍게 폐체(廢替)하였으니, 주 나라의 왕계(王季)의 일과는 다릅니다.
《주역》에, “부부의 도는 영구하지 않아선 안 된다.” 하였고, 그 말을 부연(敷衍)한 자는, “부부란 것은 종신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영구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합근(合巹)한 예를 지키고, 만세의 시초를 중하게 여겨 감히 옮기거나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배필이었던 문정(文定)을 생각지 않으시며, 보불(黼黻)과 빈조(蘋藻)의 주부라는 것도 돌보지 않으시고, 흙덩이를 버르듯 내형(內刑)을 내리시니, 주 나라 문왕(文王)의 일과 다르기도 합니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도는 가정을 다스리는 데에 근본하나니, 한번 가정을 바르게 하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부터 어지럽고 망하게 되는 것은 가법(家法)이 바르지 못한 데에 원인을 두지 않은 것이 없건만, 우리 나라의 가법은 한결같이 정도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태조(太祖)께서는 왕업을 창건하시고 규범을 남기신 성군(聖君)이시나, 총희(寵姬)에게 미혹하여 적서(嫡庶)의 명분을 흐리려 하셨고, 선릉(宣陵)께서도 애매한 사고를 연유로 송(宋) 나라 인종(仁宗)의 잘못된 전철을 밟았습니다.
한 번 근본 세우기를 잘못하자, 그 흐름이 연산(燕山)에게 파급되어 드디어 방탕한 끝에 3강(三綱)이 끊어지고 종사(宗社)가 거의 폐허로 될 뻔하였으니, 그 앙화가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대횡(大橫 거북점에 큰 가로무늬가 나타난 것으로 제왕이 될 조짐이라 한다.)한 길운(吉運)을 얻고, 억조 백성의 촉망에 순응하여 위태로운 사태를 헤쳐 평탄하게 시행하고, 거칠고 어두운 법령을 척결하여 청명한 데로 나아가게 하셨으니 이 시대는 바로 3령(三靈 천ㆍ지ㆍ인)이 눈을 닦고 우러러보면서, 전하께서 혁신하는 날만을 기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마땅히 한 가정의 근본을 다스리고, 천지와 생민을 위해서 만세에 전할 큰 터전을 세워, 해와 달이 하늘 복판에 걸린 것처럼 빛나고 밝게 할 때이건만, 헐떡이며 힘을 내어 떨칠 줄 모르시고, 인륜과 왕화의 근원을 위로부터 먼저 흐리게 하셨습니다. 이러고서 다스려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 많은 의혹을 사게 됩니다. 아, 어찌 전하 혼자의 허물이겠습니까. 당초에 권세를 빙자하고 일해 온 신하들은 베어 죽여도 그 죄는 오히려 남을 것입니다. 원종(元宗) 등이 어찌 명분의 중대함이 천지와 같이 엄절하여 범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마는 오직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간교한 계락이 앞섰던 까닭에, 방자하게 돌아봄도 기탄함도 없었던 것입니다.
중국에 보낼 소초(疏草)를 잡은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즈음을 타서, 전하께서는 오직 그들이 하는 바를 어기거나 거스리지 못할 것이다 하여, 임금을 겁박하여 손바닥에 놀리듯 하면서 국모를 내쫓아 새 새끼 팽개치듯 하였으니, 이를 차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 심사(心事)를 추측하면 동탁(董卓)과 조조(曹操) 같은 행동인들 무엇을 꺼리겠습니까.
신하로서 반역할 마음을 품으면 반드시 주벌하는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로서 바로 이 따위 무리 때문에 만든 것이겠습니다. 만약 신씨가 죄인의 소생이므로 지존의 배필이 될 수 없고, 종묘 제사의 주부가 될 수 없다는 것으로 핑계를 삼더라도, 수근(守勤)의 죄는 본래 종묘 사직에 관련되지 않았으니 신비에게 무슨 누(累)가 되겠습니까. 설사 종사에 죄를 지어 죽음을 받았다 하더라도 신비는 간여한 일이 없었으니, 허물로 잡아 논급(論及)할 바가 아닙니다.
옛적 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에 곽씨(霍氏)가 반역을 모의하다가 3족이 베임을 받았으나 곽후(霍后)는 간여하지 않았다 하여 폐출당하지 않았고, 우리 나라에서도 심온(沈溫)이 헌릉(獻陵)에게 죄를 받았으나 소헌왕후(昭憲王后)께서는 옥 같은 몸에 아무런 욕도 받지 않았으니, 지나간 역사에서도 이를 분명하게 고징(考徵)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수근은 국가에 관계된 죄가 아니었으니, 주관 의친(周官儀親)의 법에 따른다면 비록 용서하여 목숨을 온전하게 하여도 괞찮은 일이지만, 이제, 이미 죄주었고 또 신비에게도 누를 입혀 폐출하여야만 했으니, 이것은 자신들의 몸만 아끼고 임금은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왕실의 주손(冑孫)으로서 대통을 이었으니, 명분이 바르고 공론이 순조로와 3대(하(夏)ㆍ은(殷)ㆍ주(周))의 세 대를 계승하던 일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었건만, 원종 등이 국사를 도모한 것이 착하지 못하여서 전하를 쇠란한 세대에 서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연산(燕山)은 지극히 무도하여 삼강(三綱)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도리가 없었으므로 신(神)이 싫어하였고, 조종(祖宗)이 의절(義絶)하였으며 친척이 배척하였고 인심이 떠났으니, 비록 왕위에 앉았을지라도 실상은 왕위에서 옮겨진 외로운 필부(匹夫)로서 이성(異姓 다른 성을 가진 사람)에게 척살(刺殺)될 뻔하였습니다.
다행히 신명의 보이지 않는 도움과 사방(四方)의 구가(謳歌)에 힘입어, 3보(三寶 토지ㆍ인민ㆍ정치)가 전하에게 귀속된 까닭으로 전하께서 왕위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저 대통을 이어 대를 계승하는 것은 천지 고금의 대사(大事)이니 마땅히 명명백백하게 하여 실올만큼도 속이거나 감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태양이 하늘 복판에 걸려 있어 만물을 명쾌하게 보는 것과 같은데, 어찌 구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정(反正)하던 처음에 마땅히 대비(大妃 인목대비)의 명을 거행하여 연산이 천지와 조종과 신민에게 버림받은 죄상을 낱낱이 따져 묘사(廟社)에 아뢰고 천자에게 고하여 명(命)을 청한 다음에 전하께서 빛나게 대위(大位)에 올랐어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와 같이 했더라면, 대통을 이어 대를 계승한 도(道)가 명명백백하여 속이거나 감춤이 없고 사방에서 만세토록 하늘에 걸린 태양을 우러러보듯 하였을 터이니, 어찌 거룩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원종은 대의에 어두워서 전하께서 대통을 이은 광명 정대함을 우선 선대(禪代)했다는 문투(文套)를 빌려 천조(天朝)를 속였으니, 애석합니다. 전하께서 강포한 신하에게 억제를 받고 가교(家敎)마저 그르치어 인륜의 근본과 왕화(王化)의 근원과 정시(正始)의 도리를 능히 빛내고 넓게 선양하지 못하셨으니, 무엇으로 중화(中和)하고 위육(位育)하는 공을 이루며 하늘의 마음을 편하게 하시겠습니까. 온갖 교화가 따라서 날로 잡박(雜駁)하여지고 풍교가 자연히 퇴폐하여진 것입니다.
괴상한 기운이 자욱하고 음양의 순환이 질서를 잃었으며, 일월(日月)이 엷어지고 침식되며 수재와 한재(旱災)가 비등하고, 꽃과 열매가 겨울에 피며, 심한 서리가 여름에 내리고, 장맛비ㆍ뜨거운 볕ㆍ바람ㆍ우박ㆍ별ㆍ무지개ㆍ곤충 따위 요사스러운 재변이 거듭 나타나곤 합니다. 근래에 후정(後庭)에게 애도하는 반열(班列)을 철거한 지 얼마 안 되어 장경왕후(章敬王后)께서 갑자기 빈천(賓天)하시고 곤위(壼闈)가 참혹하니, 생각하건대, 하늘이 전하에게 깊이 경고한 것인가 합니다.
《한서》〈유향전(劉向傳)〉에, “화평(和平)한 기운은 상서를 이루고, 괴상한 기운은 재앙과 변이[災異]를 이룬다. 서녀(庶女 빈천한 여자)라도 원통함을 품고 죽으면 6월에도 서리를 날려 제비[燕]를 친다.” 하였습니다. 저 빈한한 마을 미천한 여자가 하늘과 아무런 간여도 없을 것 같지마는 그 원통한 것으로 맺힌 기운이 오히려 서리를 날리는 재변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존의 배필로서 천지와 묘사의 주부였으니, 신인(神人)과 상제(上帝 하느님)도 당연히 돌봐야 할 터이건만, 연고도 없이 폐출하여 적막한 집안에서 길이 그윽한 고민을 맺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천지의 화평한 기운을 해롭게 하였으니, 여러 가지 요사스러운 기운이 거듭 잇달아 오는 것도 괴이할 것이 못 됩니다. 성상(聖上)께서도 여기까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었습니까.
아, 기왕의 잘못은 할 수 없거니와 어찌 다시 바로 할 수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마음 한 번 돌리시는 데에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내정(內政)에 주장이 없으니 이때를 틈타서 꺼림없이 결단하시어 신비를 다시 곤전(坤殿)의 위(位)에 바로잡으신다면 천지의 마음이 편할 것이요, 조정의 신령이 마땅하다 여길 것이며, 신민의 소망에 부응(副應)하는 바가 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자리(왕후의 자리)를 누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이미 떨어진 근본을 보존하고 이미 어긋났던 옛 은의를 온전하게 하시면 이것은 바로 큰 의리와 정당한 도리에 합치되는 것이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령 어떤 자가 이미 폐출되었다는 이유로 망령되게 이론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전일에 폐비하자고 주장하던 신하에게 아부하여 형편을 관망하고 다시 전하의 가법(家法)을 어지럽히려는 데에 불과합니다.
원종이 비록 왕실에 큰 공이 있었다 하나 그 당시에 천명과 인심이 다 전하에게 귀속하였으니, 이 무리가 아니더라도 신기(神器 왕위)는 딴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침 천명과 인심의 기회를 타서 힘을 썼던 것인데, 그 공을 자부하여 방자하게 군부(君父)를 겁박하고 국모를 추방하여 천하 고금의 대의를 범하였으니, 이는 만세의 죄인입니다. 공으로써 죄를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발호할 때에 전하께서는 확고하게 폐비하라는 청을 듣지 않으시고 협제(脅制)한 죄상을 살피어 명백하게 형법(刑法)을 바로하였더라면 옳았을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시지 못하시고 그들을 본디와 같이 영귀(榮貴)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공에 대해서는 흡족히 포상한 바가 되었습니다. 지금 원종이 비록 죽었으나 마땅히 그 죄를 밝게 바로잡아서 관작을 추탈하고 중외(中外)에 효유하여 당세나 후세에게 큰 명분은 절대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을 환하게 알려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몇 가지 일에 대하여 의리를 바탕으로 처리하고 제정하여 지체하고 의심하는 바가 없으시다면 이왕의 잘못을 깨끗이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인륜의 근본과 왕화의 근원과 정시(正始)의 도리가 맑고 빛나서 천지가 막혔다가 다시 활짝 갠 것 같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또 정일(精一)하고 근독(謹獨)하시어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바탕을 미루어 모든 정사를 확충하실 수 있다면, 주(周) 나라의 인지(麟趾)ㆍ추우(騶虞)와 같은 풍화도 이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왕업은 8백 년을 넘어 만세 무궁하기까지 이를 것입니다.
신 등이 소원한 신하로서 외람되이 지위에 넘치는 짓을 했다는 꾸지람을 받게 됨을 피하지 아니하고, 감히 전하의 귀를 더럽히는 것은 진실로 이 몇 가지 일이 명분과 의리에 관계된 지극히 중하고 또 큰 것이므로, 마음속에만 접어두어 한 번이라도 임금에게 아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 등이 가슴에 분하고 억울함을 품은 지 오래였습니다마는 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은, 장경왕후께서 곤위(壼位)를 주장하시는데 만약 신비를 복원하면 장경왕후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장경왕후께서 빈천하시고 곤위가 다시 비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때가 바로 신비를 반정할 기회이며 또 말을 구하시는 때를 당하였으므로, 신 등이 급급하게 곡진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방금 하늘의 주지함이 그치지 않고 정치 교화가 순수하지 못하며 온갖 일들이 향방(向方)이 틀어지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힘껏 하시되 오직 공경하시어 천심을 편하게 하시기를 엎드려 원하옵니다. 신 등의 구구한 회포에 억울한 생각이 아직도 많사오나 모두 말씀드리기 어렵사오니, 전하께서는 굽어 통촉하시옵소서.
[한국고전종합DB]
[팔경논주]
이 상소의 목적은 장경왕후의 사망에 따라 빈 왕후 자리를 원자 보호를 명분으로 폐비 신씨를 복위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사림파가 김식으로 하여금 이 상소문을 써서 박상과 함께 상소하도록 한 이유는 중종반정 공신들을 주축으로 한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함이었고, 훈구파들은 이 상소가 품고 있는 저의를 파악했기 때문에 김식과 박상을 벌주도록 청하였다. 이로써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조정 중론에 따라 일단은 김식과 박상이 유배를 갔다. 그러나 곧 사림파의 권세가 강해지면서 이듬해 해배되어 조정으로 귀환하였다.
훈구파들은 자기들이 쫓아낸 단경왕후 신씨가 다시 왕후로 복위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계비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는 매우 어렸다. 그래서 박원종이 수양딸로 삼아 입궁시킨 경빈 박씨 소생의 장성한 복성군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홍경주 역시 자기 딸인 홍빈을 생각해서 경빈을 지지했다.
그러나 사림파로서는 복성군이 세자가 될 경우에는 훈구파가 계속 권세를 잡게 될 것이므로 복성군을 반대하고 어린 원자를 지지하는 것이 정치적 이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참에 훈구파를 거세하고 명실상부한 도학정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이 상소를 기점으로 하여 세자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정쟁이 시작되었다.
상소문에서 신씨를 복위하여 원자를 보호하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는 하자가 있다. 신씨가 왕후가 되면 왕자를 낳을 수 있다. 그렇게 될 경우 후일에 세자 자리를 두고 엄청난 문제가 발생한다. 김식이 당장에 경빈 박씨가 왕후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러한 논리를 폈지만 후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김식이 상소에서 경빈 박씨가 왕후 자리에 오르지 못할 이유로 여러 가지 고사를 사례로 들지만, 그것은 반정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한 견합부회라고 할 수 있다. 복성군은 이미 장성한 맏아들이다. 경빈 박씨가 왕후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면 경빈 박씨가 왕후가 되면 복성군은 대군이 되어 적통 문제가 해결된다.
중종 다음에 적통인 인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인종이 갑자기 죽고 명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후사 없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군의 세째 아들인 하성군을 왕위에 올려 선조로 하였으니 결과적으로 적통이 아닌 서계가 조선왕조를 이었다. 처음부터 경빈 박씨를 왕후로 책봉했다면 왕위를 둘러싼 궁중 암투와 정쟁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기묘사화 후에 김안로에 의해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죽고 인종이 세자 자리를 든든하게 했으나, 제2계비 문정왕후가 왕자를 낳음으로써 조정은 다시 왕위 다툼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었다.
김식을 대표로 한 사림파들이 세운 전략이 4년 동안은 빛났으나 중종의 배신으로 사림파가 기묘사화를 당해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장성한 세자 인종을 중심으로 남곤과 김안로 등이 권력을 장악했으나 명종이 태어나고 장성하면서 윤원형 등 문정왕후 쪽 세력이 차츰 강해지게 되었다. 이후 세자 인종을 보호하던 김안로가 윤원형에 의해 숙청되면서 세자 인종은 울타리를 잃고 말았다.
조광조를 주군으로 하는 사림파가 몰락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세자 자리를 둘러싼 후계 구도에 너무 깊이 집착한 잘못이 있다. 세자 자리는 왕과 왕실에 맡기고 조정 대신들은 나리 일에만 성실하면 된다. 그런데 괜히 미리 후계 구도를 걱정하며 상소를 올림으로써 화근을 만들었다. 앞 시대 이방원의 난과 세조 찬탈 등의 왕위 싸움에 사대부들과 선비들이 관여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전주이씨 왕조인 이상엔 왕족들끼리 싸워 왕위를 결정하도록 하고, 신하들은 몇 발 물러섰어야 했다. 어느 한 편에 붙어 승리하면 고관대작에 부귀영화를 누릴까 하다가 자기도 죽고 상대편도 만고의 난신적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조광조와 사림파를 숭상하는 후세인들로서는 이 상소가 갖는 의미가 클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전개된 정치 상황을 복기해 보면 이 상소가 갖는 문제점이 상당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