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부산, 찍고 다시 광주로
(춘삼월 봄바람 따라간 旅程의 5박6일)
밤과 새벽엔 영하에 가깝고 낮엔 영상10도를 넘나드는 계절은 칼로 무 자르듯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가고 오는 철이 공존해 큰 일교차를 피할 수는 없다지만,
요즘 날씨를 보면 봄이 어중간하기만하다.
겨울이라기엔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딱히 봄이라 하기에는 너무 쌀쌀맞다.
따뜻한 기운과 찬 기운이 한반도에서 서로 자리다툼을 하면서 날씨변덕이 심한
계절이기 때문이리라.
봄 꽃소식이 남쪽으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동해 쪽엔 눈 예보도 있었다.
봄에는 바이러스 활동이증가하고 면역력이 떨어져 한 겨울보다 감기에 더 쉽게 걸린다.
물을 자주 마시고 과일이나 신선한 야채를 많이 먹는 것이 좋다.
변덕스런 기온에도 장단을 맞춰 줘야하는데 두꺼운 옷 한 벌보다는 통풍이 잘되는 옷을
겹쳐 입는 것도 센스에 하나다.
아내와 함께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모처럼만에 가는 여행인데 여러 가지 약봉지가 자꾸 촐랑대며 알랑거린다.
멀쩡한 보일러를 켜두었다는 아내의 건망증으로 버스정류장으로 가던 길에
되돌아서 확인하고 오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서울 날씨를 알 수가 없었으니 잠바상의에 털 내피를 달아야하느냐, 마느냐 하는
언쟁은 아내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달고 갔는데 그것은 잘한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늙고 나이 먹은 탓이 아닌가.
같은 바람인데도 겨울바람은 춥고 여름바람은 시원하지 않던가.
졸지에 길치인 나는 심 봉사가 되었고,
아내는 길잡이가 되어 강남버스터미널을 이리저리 잘도 빠져나갔고 지하철을 타고
뚝섬유원지역에서 내렸는데 나는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여든 살 매형이 용돈 하라며 내게 돈을 내밀고 옆에서 누이는 자꾸 받아야 된다고
눈짓을 한다.
오! 사랑하는 누이여,
당신은 내 삶의 전부이고, 평생 갚을 수 없는 나에 부채이며.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의미의 하나입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 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어머니 같은 내 누이여.
아침저녁으로 아내와 나는 누나에게 즐거운 식 고문(食 拷問)을 당해야했다.
야채에 샐러드, 과일, 쇠고기, 청국장주스까지, 이것은 유기농이고, 저것은 무공해이고,
친환경식품이라며 먹기를 권유한다.
그것이 설사 독약이라 한들 내 누이의 사랑과 정성으로 보약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울의 여정(旅情)은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21세기를 걷는 한옥마을,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거리인 북촌을 찾았다.
축대를 사이에 두고 한옥마을이 현대식거리와 어우러져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19세기말에 지어진 오래된 한옥이 1970-80년대 풍경을 간직한 토박이 가게들과
뒤섞여 시대를 넘나드는 기분을 선사하고,
학교와 도서관, 음식점이 모여 있어 왁자지껄 떠드는 학생들의 수다와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이 정겹기만 한 북촌.
하나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골목,
나뭇가지처럼 뻗은 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덧 새로운 골목으로 접어들고,
낮선 길이 들어날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멋진 한옥 풍경은 두려움보다 감탄이다.
그러나 여기는 어디지? 라는 물음에 미로에 갇힌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북촌은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어 자동차로 이동하기가 어렵고, 큰길에서 보이지
않는 골목 구석구석에 재미가 숨어있었다.
또한 북촌 전체를 하루 만에 거닐기에는 무리할 만큼 쉽지 않는 거리였다.
인사동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1차로인 차도(車道)에 차량들이 길게 정체되어 있는 것도 이색적이었다.
종로, 광화문과 인접해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는데. 종로2가에서 안국동 사거리에
이르는 700m의 길에는 그림, 도자기 등을 파는 가게가 즐비했다.
한편에는 떡과 다과를 비롯한 한국음식에서 사찰음식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맛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는 아이를 목말 태운 가족부터 카메라를 들고 추억을 남기는 연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한국관광의 필수코스라고 한다.
한국의 음식과 문화를, 그리고 종교유적부터 근현대 독립운동의 흔적까지 인사동엔
볼거리가 가득하다고했다.
길을 물어보려고 젊은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더니 일본사람이었다.
부산행고속버스를 탔다.
부산에 사는 딸아이가 KTX편으로 내려오라고 기차표예매까지 했는데 서울역 가는 길을
몰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 편으로 내려갔다.
소요시간 4시간30분에 1회 정차한다는 운전기사 말에 걱정을 했는데 잘 참았다.
나이 먹으면 어쩔 수 없는 남자의 고민 때문이었다.
매화는 남녘에서 이미 피었지만 벚꽃은 이제부터 북쪽으로 꽃을 피우며 내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부산의 벚꽃 개화예상일이 29일이라는데,
벚꽃도 사람인양 평지에서는 하루에 약20km로 쉬이 달리지만 산위를 향해서는
하루에 50m정도로 힘겹게 오른다고 한다.
벚나무는 일평균기온 5도를 경계로 눈을 틔우고, 10도를 넘으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토-옥 톡” 꽃망울 터지는 소리 때문일까 한결 날씨가 부드럽다.
남도 부산은 매화꽃 세상이었다,
조선 선비들은 어떤 매화를 사랑했을까?
일단 매화나무가 수백 년 정도 늙고 깡말라야하고 껍질이 울퉁불퉁 부르튼 것을
으뜸으로 쳤다.
가지도 듬성듬성 드물게 나야하고 꽃은 다소곳이 오므린 것을 귀하게 여겼다.
향기도 진한 것 보다는 맑고 청아한 것을 좋아했다.
아내는 일찍이 이런 매화십자수를 놓아 거실에 걸어두고 감상하고 있었다.
어찌 매화뿐이랴, 흰 목련, 노란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버들가지에는 연초록물감이 번지고 있었고 단풍가지는 붉은 홍조를 띄고 있다.
벚꽃도 개화를 시작하면서 만개한 꽃으로 봄의 향연을 열고 있었다.
해운대가 마천루로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발전하는 부산이 부럽고 약간은 시샘이 났다.
물류창고型 마트를 갔는데 엄청나게 저장된 많은 물량과 상품종류에 놀랐고,
회원제운영인데도 평일에 발 디딜 곳 없을 만큼 많은 인파에 놀랐다.
현금과 삼성카드만 결제 가능한 운영기법도 특이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건강기능보조식품을 몇 개 샀다.
세 살짜리 손녀딸이 시식코너를 지날 때 마다 “하비야, 저것 먹고 가자”하는데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산에서 3박 4일을 보냈다.
아내와 아이들은 쇼핑하기에 바빴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찻집에서 커피 잔만 기우렸다.
우리아이들이 성실하게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고 자랑스러웠다.
서울, 부산, 찍고 다시 광주로 돌아왔는데 한 주일동안 밀린 신문이 현관 문 앞에 쌓여있다.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편한 곳은 내 집이었다.
(2011년 4월 3일)
첫댓글 참부럽대이.잘 하셨네요.가끔 가족여행은 값진 것이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