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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춘계답사 및 회원간담회 성료
○ 테마: 대구근교 유교 관련 유적지(제3차)
○ 일시: 5월 12일(일) 08시 30분~21시
○ 답사지역: 대구시 동·북구 일원 유교 관련 유적지
○ 답사지: 향교 출발→도동(문창후 최치원 影堂)→평광동(와룡정, 경희정, 첨백당, 홍옥사과나무)→百源書院→도동측백수림(九老亭)→점심→지묘동(表忠祠[신숭겸장군유적지], 다천정)→연경동(硏經書院 舊址, 畵巖)→서변동(西溪書院)→저녁·회원간담회→향교 도착
○ 참석: 배희구 회장 외 49명
배희구, 이갑규, 박 주, 송은석, 신혜주, 이원균, 전일주, 정여호, 정우일, 최덕수, 한정호, 허미라, 곽영선, 권순찬, 권영탁, 소기옥, 민택기, 박정호, 김상도, 서우석, 송동인, 신창범, 윤주양, 이동영,
이명교, 이명신, 이원우, 이윤남, 이종한, 이주은, 이효식, 정동남, 정병기, 정재남, 조익목, 조정숙, 최순희, 최영기, 홍해수, 황경보(이상 정회원, 원로회원 40명)
고동현, 권정희, 김강희, 성호승, 심대용, 이아영, 이재범, 정지영, 최고경, 추나진(이상 대학생회원 10명)
○ 도움 주신 분들: 이갑규·정우일·이원균·정여호(각 10만원), 성독회(5만원), 백송현(참외 1박스), 박필선(떡 60set) 이명교(요플레 60개), 배인성(생수 80병), 이원균·송은석·최덕수(답사자료집 정리·편집), [서계서원 회원 경전암송]최영기(太極圖說)·조익목(書集傳序)·이명교(단소 연주)·성독회원(夙興夜寐箴)·대학생부원(歸去來辭)
※ 현장 안내 및 문집·자료집, 다식 등을 준비해 우리 일행을 환대해주신 답사 현지 관계자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답사후기」 원고 모집. A4용지 1장 내외. 6월 10일 기한.
문의: 사무국장 송은석(☎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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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시지 못한 회원님들을 위해^^
현장사진 및 답사자료집을 참고하여 그날의 즐거웠던 소식을 요약해봅니다...
프롤로그
2주 전만해도 팔공산 일대는 분홍색 복사꽃 세상이었는데 지금은 흰 사과나무 꽃이 한창이다. 우리 대구청유 제14대(회장 배희구) 집행부에서는 임기 내 선현유적답사의 태마를 「대구근교 유교관련 유적지」로 정한 바가 있다. 이에 1차로 ‘달성군 하빈·현풍 일원(2012. 4. 22)’을, 2차로는 ‘대구 남·동부 일원(2012. 10. 28)’ 답사를 성황리에 완료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우리 가까이에 이렇게 많은 유교 관련 유적지가 산재되어 있음에 많은 회원들이 놀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급속한 산업발달과 도시화. 그 와중에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무형의 유가 전통을 지키고 계시는 많은 문중(門中)들과의 만남을 통해 큰 감동을 받은 것이다. 먼 지역이 아닌 대구 도심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만날 수 있는 우리 유가의 전통을 다시 한 번 더 확인코자 한다.
이번 3차 답사지역은 ‘대구 동·북부 일원’이다. 5월의 사과 꽃 향기 가득한 도동과 평광동을 시작으로 지묘동, 연경동, 서변동 일원을 둘러보게 될 것이다. 1·2차에 이어 이번 3차 답사 역시 보람되고 행복한 답사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도동]문창공 영당(文昌公 影堂)
불로동 입구에서 동쪽으로 불로천을 거슬러 도동 방향으로 올라가다보면 도동 측백수림이 있는 향산을 만나게 된다. 이 향산 초입에서 이정표를 따라 우측으로 난 길을 약 500m쯤 가면 좌측으로 향산의 남쪽 사면에 잘 가꾸어진 공원 형태의 문창공 영당이 나타난다. 영당 앞 문화재 안내판에는 영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되어 있다.
문창공 영당(文昌公 影堂)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766-4
이 건물은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912년 경주최씨 후손인 최경교 등이 세운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은 신라(新羅) 사람으로 자(字)는 고운(孤雲)이다. 그는 당(唐)나라에 유학하였으며, 당나라 희종 6년에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키자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檄黃巢書)을 지어 그 이름을 중국 천하에 떨쳤다. 28세에 귀국하여 벼슬을 받았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여 여러 곳을 다니다가 마침내 해인사(海印寺)에서 남은 생을 마쳤다.
이 건물은 장방형으로 둘러싸인 담장 안에 있는데 구조는 정면이 3칸, 측면이 1칸이며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문창공 영당은 영정각으로서는 그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솟을지붕과 기둥머리장식 또한 특색이 있어 조선 후기 목조건물의 전형과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영당 안에 봉안되어 있는 영정에 대해서 「경주최씨 사성공파 녹양동 종친회」 daum 카페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문창후 고운 최선생 영정
이 영정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정으로 동구 도동에 있는 문창공 영당에 봉안되어 있다. 재료는 극채색 견본이며 사용된 색채는 9종이다. 전신좌상으로 신선경을 배경으로 바위에 앉아 있고 좌우에 책을 두고 있는 신선도계열 화풍의 민화이다.
그의 영정은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리산 쌍계사본과 가야산 해인사본을 들 수 있다. 선생의 옛 소요지인 이 두 고찰에 보관되던 영정은 영호남의 유림에서 공의를 일으켜 1783년(정조 7)에 쌍계사의 것은 호남 태인의 무성서원으로 옮겨 고종(高宗) 때 이를 개모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고, 해인사의 것은 청도 및 대구지방으로 옮겨서 봉안하다가 무성서원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그림이 퇴색하여 거의 같은 시기에 개모하였다.
본 영정은 후손인 최흥원(1786∼1871)이 1865년 경상감사의 도움을 받아 대구 동구 지저동에 있는 계림사에 봉안하였으나, 이곳에 비행장이 들어서게 되자 1912년 현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16호인 청도 계동사(啓東祠)의 고운 영정과 비교해 볼 때 청도의 것은 중국풍의 문인상 형식을 취한 민화로 1882년 개모된 것이고, 본 영정은 신선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청도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약 20년 정도 빨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대구 도심에서 불과 10여분 거리에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개인적인 답사에서는 어느 영당 할 것 없이 봉안된 영정을 알현하기란 쉽지가 않다. 문창공 영정에 대한 알현. 우리 일행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영당을 잘 살펴보면 의아스러운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문창후(文昌侯) 영당」이라는 편액이다. 영당의 안내판을 비롯한 각종 인터넷 자료 등에는 예외 없이 「문창공 영당」이라 칭하고 있다. 문묘(文廟)의 위패(位牌)에는 「문창후 고운 최치원」으로 되어 있다. 과연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답사 당일 현장에서의 숙제로 남겨두고 이제 다음 답사지인 평광동으로 이동한다.
[평광동] 첨백당, 와룡정, 경희정
문창공 영당에서 나와 도동 측백수림을 거쳐 불로천을 따라 차량으로 10여분 정도 북쪽으로 달리면 사과 주산지로 이름난 평광동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일행에 있어 오늘의 평광동은 「단양우씨 세거지」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운이 따라준다면 아마도 늦은 사과나무 꽃들의 향연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곳에 대해서는 좋은 자료가 하나 있다. 바로 본회 전일주 부회장님의 영남일보 연재물이 그것이다. 회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남일보(2012. 6. 29) 「전일주의 대구 古家를 찾아서 6」(동구 평광동 단양우씨 세거지) 기사 전문을 옮겨본다.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坪廣洞)은 팔공산 자락에 있는 아늑한 동네의 하나이다. 대구 시민들에게 대구사과의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농토의 대부분은 사과나무가 심겨 있는 마을이다. 평광동을 가려면 불로동 화훼단지를 지나 불로동 입구 다리 직전에서 오른편으로 불로천변을 따라 향하면 도동이란 마을이 있고, 도동 다음 동네가 평광동이다. 도동에는 천연기념물 제1호인 측백나무 숲이 있다. 백림(栢林)이라 불리는 이곳에 몇 년전 공원을 조성하여 주변 경관이 잘 정비되어 측백이 자란 절벽을 바라보며 휴식하기에 알맞다.
측백나무 숲을 지나면 대구-포항간 고속도로 다리가 길게 놓여 있고 도로 밑을 한참 가면 도동 끝자락에 한때 유명했던 약수터가 있고, 지금도 주위에 예전의 닭백숙을 하던 가게가 있다. 좁은 골짝을 따라 맑은 시내를 벗하며 한참 가면 확트인 곳이 나온다. 마치 좁은 호리병 입구를 통과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 수령이 오래된 왕버들 한 그루가 서 있고 나무 앞 큰 돌에 ‘평광동’이라 새긴 표지석이 있다. 큰 돌 뒤에도 옛날에 세운 표석인 ‘평광동(坪廣洞)’과 ‘봉화교(奉華橋)’가 있어 다리 이름과 동네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평광동은 산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 자급자족할 만큼의 평지가 있어 옛날에는 은거하기 좋은 곳으로 여겨진다. 몇몇 성씨가 세거하며 집성촌을 이루고 있지만 주민 대부분이 단양 우씨들이다.
예전엔 대구 사과의 재배 면적이 넓었지만 거의 없어지고, 평광동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금씩 품종 개량을 하여 어린 나무도 있지만, 아직도 수령이 오랜 사과나무들이 있다. 첨백당 부근에는 사과나무의 수령이 80년 된 ‘홍옥’ 품종이 남아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 이 나무에서 수확한 홍옥은 전량 청와대에 납품한다고 하니, 대구사과의 명성과 상징성을 이 홍옥 사과나무가 지켜가는 셈이다.
평광동 동네의 지형이 입구 표지석에서 보면 Y자 형세이다. 표석에서 직진하면 신숭겸(申崇謙) 장군 유적지를 볼 수 있고, 표석의 오른 편으로 향하면 단양우씨 집성촌의 전통가옥과 첨백당을 볼 수 있다. 동네 입구 언덕 어귀에 효자 강순항의 정려각과 비석이 있어 눈길을 끈다. 안내판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또 한 군데의 고가는 신숭겸 장군의 모영각(慕影閣)인데, 모영각을 보려면 동네 사과밭을 지나 한참 올라가야 한다. 큰 동네 끝자락에 솔숲이 보이고, 솔숲아래 작은 동네가 또 있다. 산기슭 기와집이 바로 모영재와 영각유허비각이다. 새로 단장을 하며 예전보다 규모가 있다. 모영각의 안내판에 의하면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세운 것이데, 매년 음력 9월 9일에 신씨 문중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 대청1칸 방 3칸의 아담한 건물인데, 편액과 주련, 기문, 한시가 걸려 있어 장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모영각 뒤편에 산자락에 있는 장절공 영각 유허비도 둘러볼 만하다.
발길을 돌려 갔던 길을 되돌아 500m쯤 내려오면 오른편으로 언덕 넘는 길이 나온다. 팔공산 둘래길의 하나로 평광동 왕건길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언덕을 넘으면 단양우씨 평광 세거지가 보이며, 길가에 유허비와 기적비(記績碑) 9개가 있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 고가들이 보이고 마을 끝 산자락에 첨백당(瞻栢堂)이 보인다.
첨백당은 효성이 지극했던 우효중(禹孝重)과 절의를 지켰던 조선시대 말기의 선비 우명식(禹命植)을 기리기 위하여 1896년(고종 33) 후손들이 세운 재실(齋室)이다.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13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한일자형 구조이다. 건물은 동향이며, 중앙 5칸은 홑처마 맞배지붕을 달고, 좌우 협칸은 박공면에 내림 지붕을 달았다. 양쪽에 있는 작은 툇마루가 멋스럽고 실용적이다. 당호(堂號)는 우명식의 묘가 있는 ‘백전곡(栢田谷)을 우러러 보는 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첨백당에는 여러 개의 편액과 주련, 시판들이 걸려 있으며, 글씨는 당대의 대가들이 휘호하여 격조가 있다. 대문에는 ‘선조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른다’는 이유문(履有門) 편액과 백전곡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첨백당’ 편액이 3개, 선조를 경모한다는 의미의 ‘경지재(敬止齋)’ 편액과 첨백당을 건립하게 된 내력을 적은 기문, 상량문과 중수기, 여러 사람들이 지은 시문(詩文)이 걸려 있고, 방안에는 백하서실(栢下書室)이란 작은 편액이 있다.
첨백당의 주련은 회산 박기돈 선생이 행서체로 휘호하였는데, 내용은 첨백당을 노래한 시이기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白駒縶場嘉賓永夕 백구집장가빈영석
흰망아지 마당에 매어두고 귀한 손님과 밤새도록 얘기하고
黃鳥懷音有朋遠方 황조회음유붕원방
꾀꼬리는 소리를 품으니 벗이 멀리서 찾아 왔네.
談經子弟遊焉息焉 담경자제유언식언
자제들은 경전을 얘기하며 이곳에서 노닐고 쉬며
叙倫宗族歌斯聚斯 서륜종족가사취사
친족들은 인륜을 펼치며 여기에서 노래하고 모이네.
維玆桑梓必恭敬止 유자상재필공경지
조상님 계신 고향에서 공경할 따름이니
矧彼松柏曾攀撫者 신피송백증반무자
저 소나무 잣나무도 어루만질 수 있네.
分內當行孝悌而已 분내당행효제이이
안으로 분수 지키고 효도와 공경을 행할 뿐이요
餘外何求詩書自在 여외하구시서자재
이밖에 무엇을 더 구하리, 시서가 절로 있으니.
건물 앞 주차장에는 해방을 기념하여 심은 소나무 한 그루와 표지석이 있는데, 전국에서 해방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수와 기념비는 희소한 편이다. 세월이 흘러 소나무도 반송처럼 운치 있게 자랐고, 표지석도 전서로 써서 눈길을 끈다.
평광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면 첨백당 가기 전에 경희정과 와룡정이라 이름한 정자가 있다. 두 곳 모두 단양 우씨들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와 건물이다.
와룡정(臥龍亭)은 조선 후기의 정자로, 동네 어귀 냇가에 와룡지처(臥龍之處)가 있다 하여 골짜기 안 이름과 아울러 명명하였다고 한다. 용재공(龍齋公) 우명재를 봉향하기 위하여 1879년(고종 16)에 세운 건물이다. 원래 세워진 곳은 건너편 산속이었는데, 너무 외딴 곳에 있어 관리하기가 힘들어 1966년 현재의 장소로 이건하여 서당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편액과 기문, 주련이 걸려 있다.
경희정(景喜亭)은 단양 우씨 평광동 세거조(世居祖)인 우익신(禹翊臣)의 10세손인 만희재(晩喜齋) 영석(暎錫), 11세손인 단봉(丹峰) 규환(圭煥), 12세손인 운제(雲齋) 효봉(孝鳳)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970년에 건립한 것이다. 만희재는 경사(經史)에 박식하고 위선사업과 후진 양성에 성력을 다하였다고 한다. 단봉은 식견이 풍부하고 시문에 능통하여 경향각지의 선비들이 추존하였다. 문집을 남기고 있다. 운재는 품성이 강직하고 법도가 엄정하며 덕망이 높았으며,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올망졸망한 산세를 지닌 평광동은 도시인들이 나들이하기 좋은 마을이다. 자전거를 타거나 산보하며 시골의 정취를 한껏 누리기엔 평광동이 제격이다. 몸과 마음을 동시에 상쾌하게 하는 조용한 산골에서 하루쯤 자신을 돌아보는 일상이 되었으면 한다.
효자 강순항 정려각(孝子 姜順恒 旌閭閣)
위의 기사에는 빠져있지만 평광동 초입에는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35호인 「효자 강순항 정려각」이 1m 남짓 높이의 축대위에 자리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정려각에 설치된 안내판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5호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 1180-5
이 건물은 효자 강순항(1745-1830)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이 세웠다고 한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1칸, 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정면에 정려 현판이 걸려있다. 현판에는 ‘효자숭정대부행 동지중추부사 강순항지려 숭정기원후 사 을미십일월일’이라는 기록이 있어 1835년(헌종 1) 11월에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순항은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행으로 지역민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는 병으로 누워 있던 아버지에게 겨울에 참외를 구해 주고, 잉어를 잡아 주었다고 전한다. 또, 여름의 바쁜 농사철에도 쇠고기를 구해 주는 등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이에 1816년(순조 16) 경상관찰사 이재수의 건의에 따라 효자로서 포상과 함께 통정대부가 된다. 1830년(순조 30)에는 숭정대부행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로써 그의 부인 및 조상 3대가 여러 관직을 거슬러 받게 되었다.
참고로 평광동 일대는 현재 「대구팔공산 올레길 4코스(평광동 왕건길)」·「팔공산 왕건길 6 길」의 주요 길목에 해당한다. 마을 입구에서 출발하여 골짜기 안쪽 신숭겸장군 영각유허비각까지는 편도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사과꽃이 피는 4월 하순, 사과가 열리는 10월경이 걷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다. 끝으로 평광동은 예전부터 ‘실왕리(失王里)’ 또는 ‘시랑이’ 마을로 불리는데, 이는 왕건과 관련된 일화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본 자료집 표충사 항목 참조) 첨백당 맞은 편 개울가에는 석천(石泉)이라 음각된 거대한 입석이 있다. 우리 일행은 아쉽지만 늦봄 산골마을의 파릇파릇한 기운을 뒤로 한 채 다음 목적지인 도동 백원서원으로 이동한다.
[도동] 백원서원(百源書院)
‘효자백행지원(孝者百行之源)’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의 유서 깊은 전통마을에는 효자와 관련된 유무형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 우리는 평광동 초입에서 「효자 강순항 정려비각」과 「첨백당」이라는 유적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일행을 맞이하고 있는 백원서원 역시 효와 관련된 유적이다. 백원서원에 대해 요약이 잘 되어 있는 소개글이 있어 전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487번지
전귀당(全歸堂)은 인조 4년(1626) 서시립(徐時立) 선생이 이 곳 도동에 건립한 강학지소(講學之所)였으나 1928년 공산 백안동(百安洞)에 있던 백원서원(百源書院)이 옮겨오면서 이 서원의 강당으로 되어 1947년 중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원서원은 지방유림들이 서시립 선생을 봉안하기 위해 숙종 18년(1692)에 창건한 것으로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22년 복원, 1928년 현 위치인 전귀당 부지로 이건(移建)하여 현재에 이른다. 서시립은 정한강(鄭寒岡), 장여헌(張旅軒)선생의 문인으로 인조 24년(1646)과 27년(1649)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전귀당은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등이 서시립의 효행을 칭송하여 지어준 당명(堂名)이라 한다.
백원서원은 도동마을 산자락에 남서향으로 좌정하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2단으로 조성된 대지에 외삼문(由仁門), 강당(全歸堂), 사당(景德祠)을 일축선상에 둔 전학후묘형(前學後廟形)이고, 강당 앞에는 동․서재(東․西齋)를 두지 않았으며, 사당은 강당 뒤편 높직한 곳에 토담으로 둘러막혀 일곽을 형성하고 있다.
백원서원에 대한 또 하나의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한다. 우리지역 향토사를 읽기 쉽게 자신만의 스타일로 잘 풀어내시는 심후섭 선생의 신문기사글이다. 역시 기사전문을 옮겨 보았다.
백원서원 당호에 깃든 삶의 태도
[대구일보 2013년 4월 24일자 기사(심후섭 아동문학가·교육학박사)]
옛 달성 땅이었던 대구 동구 도동 487번지에 가면 효자 전귀당(全歸堂) 서시립(徐時立, 1578∼1665) 선생을 배향한 백원서원(百源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 같은 이름의 서원이 있는데 이는 ‘효도(孝道)는 백행지원(百行之源)’이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서원에 들어서면 본당 왼편에 선생의 모부인(母夫人)인 강씨(姜氏)의 효행비가 서 있다. 이 비문에 선생의 효행은 그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밝히는 구절이 나온다.
達城孝子徐時立 달성 효자 서시립은
其孝人稱類厥慈 그 효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는데
今日偶看三省錄 오늘 우연히 삼성록을 보았더니
有慈如比有兒宜 효부 며느리에 마땅히 효자 아들이 있음이다
이 구절에 따르면 선생의 어머니도 지극한 효부였음을 알 수 있다. 대저 자식은 그 부모를 본받기 마련이니 어머니가 효부라면 그 아들이야 두 말하여 무엇 하리.
선생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대도(大道)를 행하였다. 선생의 행장에 따르면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해, 이웃집 소가 선생의 마당으로 들어와 장독을 깨뜨리고 말았다. 어린 선생은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태연하게 말하였다. “소는 분별없는 축물이라 무얼 알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저 우리 집 운수소관일 뿐입니다.”
선생의 어머니는 장독값을 받지 않았다.
또한 이웃 밭에서 씨앗을 뿌릴 때마다 조금씩 밭고랑을 넓혀 선생의 밭쪽으로 넘어왔다. 그러자 이번에도 선생의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하였다. “그냥 두어라. 아무리 넘어온다 한들 우리 밭 전부를 다 차지할 수야 있겠느냐?” 이러한 어머니를 보고 자란 선생은 매우 깊은 심성을 지니게 되었다.
어느 해 여름 이웃집에 초상이 났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장지가 건너편 산에 있었는데 골짜기에 물이 세차게 흘러 상여가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상가에서는 마을 뒤에 있는 선생의 밭에 무덤 쓸 것을 요청해 왔다. 선생의 밭은 양지쪽인데다 물 빠짐이 좋은 명당이었다. 이에 집안에서는 반대가 컸다. 그러나 선생은 허락 하였다. “사람이 당하는 많은 어려운 일 가운데에 부모를 여읜 일만큼 큰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밭에 모시기 바랍니다.”
이에 상가에서는 선생의 밭에 묘를 쓰고 그 값을 내려고 하였다. “괜찮습니다. 이웃에서 걱정을 덜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저는 도리어 기쁠 따름입니다.”
어느 해, 선생은 이웃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 중 몇 사람은 선생과 마주치지 않으려 하였다. 꾸어간 곡식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선생은 먼저 음식을 장만하여 마을 사람들을 청하였다. “재물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갚지 않으셔도 괜찮으니 부디 이웃에 살던 정만은 잊지 맙시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고마워하며 선생과의 이별을 슬퍼하였다. 이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그 뒤 서원을 지어 선생을 기리게 된 것이었다.
선생의 호가 전귀당(全歸堂)인 것도 예사롭지 않다. ‘온전히 부모 곁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니 이 역시 부모님께 온전히 효도를 다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호는 당시 왕자의 태실사(胎室使)로 이곳에 들른 정승 이호민(李好閔)이 선생의 효도에 대해 듣고 지어준 호이다. 서원 마루에 올라서면 오른쪽 벽에 전귀당이라는 당호와 함께, 왼쪽 벽에 순효당(純孝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역시 효도와 관련 있는 당호이다. 우리 고장에 이처럼 효도와 관련 있는 유적이 많은 것은 그만큼 백행지원의 도를 충실히 지켜온 덕분이다.
[도동] 측백수림·구로정
즐거운 점심식사 시간이다. 지금 향산(香山) 측백수림 앞 한식당에는 우리 일행을 위해 영양 만점 한방백숙이 준비되어 있다. 마침 측백수림 지킴이 및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식당 사장님(백림정 김지훈)께서 우리 일행을 맞이해주시기로 했다. 측백수림 앞 안내판의 내용을 인용해 참고자료로 대신한다.
달성(達城)의 측백수림(側柏樹林)
천연기념물 제1호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산 180
불로천의 상류 지역에 해발 160m되는 향산이 있다. 이 향산의 북쪽에는 불로천이 흐르면서 높이 100m, 길이 600m에 이르는 절벽에 측백이 자생하고 있다. 측백은 우리나라와 중국을 원산지로 하는 항상 푸른 ‘상록바늘잎나무’로 떨기나무 또는 큰 키 나무로 자란다. 이곳의 측백수림은 측백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남쪽 한계를 나타내므로 식물지리학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1962년 천연기념물 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자연생은 대부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낭떠러지에만 남아 있다.
이곳에 자생하고 있는 측백도 처음 지정될 때는 나이 100년, 밑둘레 20cm, 높이 10m나 되는 수천 그루가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높이 5-6m정도 되는 100여 그루의 측백이 잡목과 섞여 있다. 또한 숲 아래의 바위틈에는 일본학자가 여기서 처음 발견하여 새로운 변종으로 이름 붙인 ‘구와꼬리풀’이 자라고 있다.
이곳 도동 측백수림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이다. 그런데 이 측백수림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몇 개 있다. 측백수림의 명성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구로정’과 ‘동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사이좋은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노거수’, ‘시비(詩碑)동산’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우리일행의 답사와 관련 있는 구로정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
구로정(九老亭)
일찍이 조선초기의 文臣(문신)이며 학자인 四佳亭(사가정) 徐居正(서거정)이 읊은 大邱十詠(대구십영) 중에서 第6景으로 꼽는 道洞(도동)의 香林(향림)은 대구시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는 側柏樹林(측백수림)이다.
이 香山(향산)의 북쪽 절벽 중턱 약 10평 남짓한 곳에 19세기 초엽, 인근에 살았던 아홉 노인의 詩會(시회)를 기리는 후손들이 1933년 3월에 이 九老亭(구로정)을 창건하였다고 香山記(향산기)가 기록하고 있다. 白樂天(백락천)의 香山九老會(향산구로회)를 본따서 九老亭(구로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북향 3樑(량) 홑처마 맞배지붕의 방 2칸 기와집이다.
구로(九老)는 최운경(崔雲慶), 채정식(蔡正植), 도윤곤(都允坤), 곽종태(郭鍾泰), 최완술(崔完述), 채집도(蔡潗道), 곽치일(郭致一), 서우곤(徐宇坤), 서영곤(徐永坤) 이다.
측백수림 바로 아래 개울은 여름철이면 물놀이장이 된다. 이 글을 적고 있는 필자 또한 예전에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와 천렵을 했던 기억이 선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오전 답사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를…
오후 일정은 다음 게시글로 이어집니다...
사진자료: 사무차장 한정호
자료정리: 사무국장 송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