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가. 그리스 청소년에게 보내는 메시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 동안의 카잔차키스의 소설들과는 달리 평이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소설은 10대 소년의 시각으로 시작된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에 대한 열망과 그리스 청소년들을 고무시키기 위해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는 이미 고대에 일찍이 지혜로 넘쳐나던 곳이었다. 오늘의 서양 철학은 아직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는 로마로 넘겨지고 그리스는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리며 왜소할 대로 왜소해져서 그 흔적만 겨우 유지하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카잔차키스의 시대에도 그런 굴욕은 이어졌다. 그는 그런 그리스를 보며 마음 아파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리스의 옛 영광을 꿈속에서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미래는 청소년들에게 달렸으므로 그들에게 그리스의 위대함을 일깨워주고 싶었을 것이다.
먼저 그는 그리스의 젊은이들에게 웅대한 꿈을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왜소한 그리스지만 한 때는 세계를 무대로 종횡무진 했던 영웅의 이야기가 제격일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야기는 그런 구미에 꼭 맞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 알렉산드로스의 간략한 생애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에 태어났으며 기원전 336년 20세에 왕위에 올랐다. 유년기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20세에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왕위에 오르자 그 동안 꿈꿔왔던 아시아 정벌 준비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원전 334년 봄에 페르시아를 쳐들어갔다. 즉, 3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재위기간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으로 보냈다.
그는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출발로 하여 북아프리카는 오늘의 리비아까지 사막을 넘어갔으며, 아시아는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까지 정복을 했다. 그는 정복지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웠다.
그 중 일부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도시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기도 하다. 그는 점령지에서 아프리카 정복을 꿈꾸다가 서른 세 살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가 마케도니아를 떠나 정복에 나선 기간은 대략 8년 남짓한 기간이다.
정복 전쟁으로 날을 지세다 사망했으므로 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마케도니아를 실제로 통치한 기간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시선은 온통 세상 끝으로 향했다. 그는 세상의 끝을 모조리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 끝없는 정복을 통한 문화 융합
알렉산드로스는 왕이 되기 전부터 이미 전투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부왕 필리포스는 왕비인 올림피아스와 이혼을 하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왕의 결혼 축하연 자리에서 한바탕 분란을 일으키고 어머니와 에페이로스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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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직후 부왕의 사과로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갔으며 화해를 했지만 입지는 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던 중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되자 군대의 지지를 받아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즉시 경쟁자들과 반대파들을 물리치고 국내를 안정시켰다.
국내 정치가 안정되자 그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아시아 정벌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의 기세에 눌려 늘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승리였으며, 페르시아 대왕인 다리우스의 도주로 막을 내렸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도 점령하여 파라오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며, 이집트 해안을 돌아보던 중 나일강 하류의 한 지점에 도시를 세우기도 했다. 도시는 로도스 출신 건축가 데이노크라테스가 설계를 했으며, 그 도시는 지금도 옛 영화를 간직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유프라테스 강의 관개시설을 개량하고 페르시아 만 해안지방에 정착촌을 만드는 사업계획으로 분주하던 중에 장시간의 연회와 술잔치 끝에 갑자기 병에 걸렸다. 10일 후인 BC 323년 6월 13일 그는 33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12년 8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알렉산드로스가 품었던 구상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정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말하자면 기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함에도 어떻든 지휘관으로서 알렉산드로스는 일찍이 세상에 알려진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의 전략은 능숙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다.
라. 새로운 세상을 꿈꾼 영웅
알렉산드로스의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그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작용했다. 그의 원정과 과학탐구에 대한 개인적 관심 덕분에 지리학과 박물학 분야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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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정길을 떠날 때는 언제나 측량사, 기술자, 건축가, 과학자, 궁정관리, 역사가들을 대동했다. 이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지목한 곳에 도시를 건설하는 핵심 인력들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처음부터 세상의 끝을 볼 때까지 그리스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고 할만하다.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어디나 그리스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점령지에 그리스 문화를 심고 그리스 혼을 심기 위해 도시 건설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스 문화와 현지 문화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것이 헬레니즘 문화이다.
이를 통해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어가 현재 중동지방,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 지방에 퍼지게 된다. 특히 인도에서는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미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것이 헬레니즘 문화이며, 그 흔적 중의 하나로 부처상의 곱슬곱슬한 머리 모양을 들 수 있다.
그의 활약으로 문명의 커다란 중심이 동방으로 옮겨졌으며 광범위한 식민지개척의 물결을 타고 헬레니즘이 근동 전역에 전파되었고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경제적·문화적으로는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단일 세계가 창조되었다.
바로 이런 점이 카잔차키스가 이 소설을 쓰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스 청소년들에게 선조들의 영웅담을 들려줌으로써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세계로 시선을 돌리고 원대한 꿈을 꾸라는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