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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 너는 하나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제가 어릴적에는 남자 아이가 울면 <사내 자식이 울면 쓰나> <남자는 우는 것이 아니야 뚝>하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심지어 <남자는 평생 3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집니다. 그 중에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주 엉터리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겐 선물을 안주신대요
(중략)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리마을을 오늘밤에 다녀가신대
예수님께서도 성경에 보면 세상에 계실 때 3번 우셨다는 기록이 있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① 첫째는 요11:35절 말씀에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을 때였습니다.
② 두 번째 우신 것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에를 마치시려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③ 세번째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게셋마네 동산에서 심히 통곡하실 정도로 우셨습니다.
마26:37-38에 보면 [고민하고 슬퍼하사] 그리고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말씀을 2번이나 하셨습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렸고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3번 우신 것 중에서 나사로가 죽었을때와 십자가를 지시기전 게셋마네 동산에서 우신 것은 상황이 전부 슬픈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때는 슬픈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나귀새끼의 안장에 자신들의 옷을 벗어 얹었고,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감람산에서 예루살렘까지 <2km>나 되는 길에 옷을 깔고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당장이라도 새 세상이 올 것 같은 굉장한 분위기였습니다. 마치 길거리 축제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마치 사람에게 대하듯이 <너>라는 말을 7번이나 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여기서 [우시다](에클라우센)는 말은 단순히 우는 정도가 아니라 슬프고 비통하여 통곡했다는 뜻입니다.
● 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슬프고도 비통한 마음으로 통곡 하셨겠습니까?
먼저 42절을 보겠습니다.
■.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루살렘을 너라고 부른 것은 예루살렘안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될뿐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을 칭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 오실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환영하면서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
본문의 앞부분인 38절에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들은 평화를 몰랐습니다.
그 평화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천사들의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평화을 주려고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랬어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예언하기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을 받습니다. 영원한 형벌에 처합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전 결혼하여 가까이 사는 딸이 제 엄마 주려고 꽤 비싼 옷을 싸갖고 왔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둘 사이에 다투더니 딸은 자기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저도 속이 상했어 나갔다 와보니 거실에 있던 그많던 두 외손녀 장난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난감 어쨌느냐?’ 하니 전부 창고에 쳐박아 놓아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그래도 두 손녀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왔습니다. 어린이집에서는 오후 2시쯤 되면 두 손녀의 그날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이야기와 함께 사진이 몇장씩 올라오는데 그걸 <키즈노트>라 그러는데 <키즈노트>를 할아버지 할머니인 저희 부부에게도 딸이 스마트폰에 올려줘서 시간이 되면 키즈노트가 올라왔다는 알림 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열어보게되는데, 그걸 열어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키즈노트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표시만 떠올랐습니다. 우리 부부가 보지 못하도록 딸이 비ㅁ닐번호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기가막히고 꽤심하던지요? 그때부터는 저도 화가 났습니다. 제 마음에 화평이 깨어졌습니다. 화평이 깨어지니 그 귀엽던 손녀들이 보고 싶지를 않게되었습니다. 정이 딱 떨어졌습니다. 화평이 깨어지니, 손녀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이 창고에 쳐박혔습니다. 키즈노트의 문이 닫쳐버렸습니다.
☞여자들의 싸움이 무섭다는 것을 60대 중반에 들어왔어야 알게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 끝장입니다.
☞죄 때문에 항상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죄 문제를 해결받지 않으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군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므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즉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과의 인류의 화목을 이루시기 위한 것인데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까? 42절에 ‘네 눈에 숨겨졌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그들이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항상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비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메시야는 다윗같은 메시야, 삼손 같은 메시야를 기댜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정치적이고 군대적인 영웅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고난받는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좇아내시고, 오병이어의 기적 등을 행하시는 등 능력을 행하셨을 때는 메시아로 생각하고 호산나 라고 외치며 환영했지만,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로마군인인에게 잡혀서 빌라도 법정에 서자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잘못된 메시아관을 바꾸지 않아 예수님을 고난받는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예수를 믿어 영웅이되고 싶어합니다. 목회에 성공하여 명성을 한국 교계에 내고 싶어합니다.
정작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나 좁은 길로 가라는 말씀이나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주님을 따라오라는 이런 말씀들은 그냥 설교에 인용만 할뿐 정작 우리가 원하는 말씀은 아닌 것은 아닌가요?
교단이 분열하고 교회가 쪼개지고, 성도들의 헌금이 소송비용으로 년년히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것은 평화의 주님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이 땅의 무수한 예배당을 바라보며 울고 계시지 않도록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다시 한번 바라보도록 하십시다.
●● 두 번째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것은 장차 임할 재앙 때문이었습니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날이 이를지라’에서 ‘이른다’는 말은 ‘온다’는 뜻입니다. 여기 ‘날’은 이스라엘에 재앙이 임하는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온다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그들을 사면으로 가두고 그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에 메어치고 돌 위에 돌하나 남지 않고 무너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AD. 70년경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로마의 학정이 더해가자 유대인들은 66년 5월에 체계적인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로마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그의 아들 티투스 장군을 통해서 로마의 정예부대를 보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로마에 항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항복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아무것도 유입할 수 없게 되자 성안에서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하루에 수천 명씩 굶주림으로 쓰러지고 여인들은 자신의 아기를 잡아먹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마침내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성전은 불에 탔고 무너졌습니다. 온통 성은 시체로 뒤덮였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 금붙이를 사용한 것을 알고서 금붙이를 찾으려고 성벽의 돌을 전부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무너진 돌을 하나씩 하나씩 다 뒤집었기 때문에 돌 위에 돌이 얹쳐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찾아가 기도를 드리는 ‘통곡의 벽’은 당시 로마 군인들이 기념으로 남겨 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 열심당원들은 마사다로 후퇴하여 960명이 최후까지 버티다가 3년 후인 5월 더 이상 로마워 싸워서 이길 승산이 없자 그들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기하여 세계 전역으로 흩어졌으며 2000년 동안 집 잃은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된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44절 다시 읽습니다.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하나님께서 오시는 그 시간’로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the time of God′s coming to you) '하나님이 너를 방문하신때', 혹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 라고 반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보살핌을 받는 날>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메시야를 보내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2천년 전에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 택하신 백성들을 보살피시려고 주님 다시 오실것입니다. 그런데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지는 않는가요? 억겁을 살 것처럼 땅에 것을 찾는 자들이 교회 안에도 많아져갑니다. 주님 다시 오신다는 이 기다림의 신앙이 희박해져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