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사진은 조선왕조실록 단종 8권(1453 계유) 10월 10일(계사)
6번째기사 '이현로의 간사한 성품과 반역죄로 효수당하기 전까지
의 행적'이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이현로가 이용에게 당부하여 밤낮으로 세조를 얽어 모략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병조 정랑으로 있을 때에 남의 뇌물을 받고 속여서 관직을 주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폄축(貶逐)되었으나
용서를 받아 서울로 돌아왔다. 용이 이현로가 풍수의 술(術)을 안다 하여 의정부에 부탁하여 천거하여, 문종의 산릉 도감 낭청으로
삼아 드디어 선공 부정이 되었다. 이현로가 임의로 정부(丁夫) 를
감하여 면포를 거두고 연해 여러 고을에 정부를 보내어 널리
해착(海錯)을 토색하고, 새로 집기(什器)를 만들어 매양 산릉 제조가 예빈시(禮賓寺)에 와서 모일 때 공찬이 겨우 베풀어지면 이현로가
친히 사사로이 갖춘 것을 가져다가 바꾸어 놓고 팔뚝을 뽐내며
스스로 자랑하였다.
세조가 용·황보인·김종서와 더불어 함께 제조로서 능소에 왕래하데
이현로가 밤에는 가만히 용과 정부의 하처에 나아가서 성대하게
주찬을 베풀고, 항상 용을 불러 ‘우리 대군(大君)’이라 하였다.
세조가 이현로를 매질한 뒤로부터는 용에게 붙은 정부의 사람과
용의 문객이 더욱 의구심을 품어 밤낮으로 모여 모의하였다.
또한 노산군이 어리어 권세가 정부로 돌아갔는데,
정부와 요지가 모두 용의 우익인 것을 보고 서로서로 이끌어 주었다.
이현로가 벼슬이 떨어져서 충청도 관찰사 안완경·체찰사 정분을 따라 충주에 이르렀는데,
미처 말에서 내리기 전에 잡는 자가 끌어내리어 묶어서 담 그늘에 두었다.
종자가 술을 찾아 먹이니, 이현로가 말하기를,
“뜻밖에도 내가 묶이어 담 밑에서 술을 마시는구나!”하였다.
이현로가 성품이 간사하여 꾀가 많고, 아첨하여 이를 좋아하여 항상 기절(奇節) 을 세우고자 하며,
또 음양의 비술과 활 쏘고 말타는 병략을 좋아하고 그 재주를 자랑하여 걸핏하면 예전의 유명한 사람을 끌어서
스스로 비교하며, 사람과 말할 때는 반드시 어깨를 치키고 팔을 벌려 성기를 거짓으로 지어 방약무인(傍若無人)이었다.
무릇 자그마한 일도 반드시 괴이한 이름을 숭상하여 그 종에 갓을 만드는 자를 초공(草工)이라 하고,
신을 만드는 자를 혁공이라 하고, 풀무질을 하는 자를 금공이라 하여, 사람을 대해서도 그렇게 불러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불령(不逞)한 사람들을 꾀어 들여 노복으로 부렸는데, 저들 역시 풍지(風旨)를 이어받아 분주하게
사역에 복종하여 혹시라도 뒤질까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사천으로 귀양갈 때에 의상과 기물이 무려 수십 바리가 되어
모두 건장한 종에게 맡겼는데, 실상은 가동(家僮)이 아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도 수행하는 자가 또한 많았는데,
주형을 당하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사람됨이 여우처럼 아첨하고 원숭이처럼 사특하여 음흉하고 걸힐(桀黠) 한 것이
더불어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그 동료 강희안이 자제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녀석을 가까이 하지 말라. 마침내 제 집안에서 죽을 자가 못된다.
내가 일찍이 이 녀석의 골통을 보니, 피에 얼룩진 형상인데, 어떻게 생긴 노파가 이 녀석을 길러냈을까?”하였다.
이상 조선왕조실록에서 용은 양평대군을 말한다.
“궁을 백악산 뒤에 짓지 않으면 정룡(正龍)이 쇠하고 방룡(傍龍)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안평대군의 책사 이현로(李賢老)는 한양도성의 궁궐배치를 풍수로 비판한 내용이다.
이현로는 조선왕실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문제를 풍수의 입장에서 제기한 것이다.
원래 이 풍수설은 김보명이란 사람이 처음 제기한 것으로 경복궁이 들어앉은 자리로 인하여
조선 왕실은 적장자가 아닌 자식이
연이어 왕위를 맡게 될 것임을 암시한 것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풍수를 빌려 수양의 뜻을 꺾어보려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현로는 문과급제자 출신으로 세종 때는 촉망받는 문신이기도 했다.
세종29년(1447년) 2월 16일자에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이때 그의 관직은 집현전 부교리다.
이현로는 이 자리에 있으면서 뇌물을 받았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받아 전라도 순창, 경상도 사천 등지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가 받은 뇌물의 규모는 대단히 컸던 것 같다.
세종은 이현로가 공신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사형은 감해 주었다.
이후 이현로는 세종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관직에 복귀할 수 없었다.
이현로는 당대의 대표적인 풍수지리 전문가이기도 했다.
세종도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집을 마련할 때 이현로를 불러서 터를 보도록 할 정도였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면서 이현로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문종은 세자의 책봉일을 정하면서 은밀하게 이현로를 불러 택일을 부탁했다.
이현로가 다시 관직에 복귀하는 길을 열어준 인물은 다름 아닌 김종서였다.
문종1년(1451년) 1월 13일 평안도 도체찰사로 떠나게 된 김종서는
“군에서는 부대의 출동여부를 결정하는 데 방위의 점을 아는 것이 매우 중대한데
이현로가 그런 재주가 있으니 고신을 돌려주고 관직에 복귀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문종에게 건의를 했고 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현로는 술학(術學)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그래서 예술을 좋아하던 안평대군 이용의 눈에 들어 일찍부터 안평의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실록에는 안평과 이현로가 서로 시로 묻고 답하는 장면도 여러 차례 나온다.
당시 부사직으로 관직에 복귀한 이현로가 맡은 임무는 왕실에 보관 중인 풍수관련 지리서를 열람하고 공부하는 일이었다.
문종 때 그가 주로 한 일도 왕실의 풍수와 관련된 자문이었다.
병약한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와 안평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고 수양이 대항세력이 되었다.
김종서와 안평의 연결고리가 다름 아닌 이현로였다.
단종1년(1452년) 6월 6일 동생 안평대군의 집을 방문한 수양대군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현로와 가까이 하지 말 것을 권유하며
“장차 이현로와 얽혀들게 될지 모르니 내 말을 절대 잊지 말라”고 경고성 당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등에 업은
이현로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