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요나탄의 우정 다윗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일, 바로 요나탄과의 우정입니다. 그는 요나탄과 깊은 우정을 이룹니다. 성서 안의 다윗과 요나탄의 우정은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다윗과 요나탄이라는 악단이 여러 개가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매형이었습니다. 사울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윗을 이미 왕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원래는 왕의 자리를 놓고 다투어야 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들의 우정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왕권을 놓고 싸움을 벌여야만 했던 원수 사이였을 것입니다. 사울이 몇 번씩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요나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요나탄은 다윗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과 요나단의 각별한 우정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야기를 다 하고 나자, 요나탄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그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다.”(1사무 18,1)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여 그와 계약을 맺었다. 요나탄은 자기가 입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심지어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도 주었다”(1사무 18,3-4).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1사무 19,1).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사랑으로 다윗에게 다시 맹세하게 하였다.”(1사무 20, 17). 다윗도 요나단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며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털어놓았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요나탄이 죽자 이렇게 울면서 탄식했습니다.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아름다웠소.”(2사무1, 26). 다윗과 요나탄은 그들 사이의 우정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아름답고 순수한 그리고 진정한 우정을 꽃피웠습니다. 다윗과 요나탄은 이런 우정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는 언약까지 맺었습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 17살쯤이었습니다. 그 후 13년 동안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서른이 되었을 때에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헤브론에서 5년 정도 다스리고 있었을 때에 사울과 요나탄이 전사하고 그의 막내아들 이스 보셋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2년을 다스립니다.(2다윗 2,10). 그때 이스 보셋의 나이는 40 살이었습니다. 적어도 요나단은 40대 후반에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30살에 헤브론에서 왕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하고 5년 반이 지날 즈음에, 다시 말해 다윗이 35살 때에 요나단이 죽었으므로, 다윗과 요나단의 나이 차이는 적게는 열 살에서 많게는 열다섯 살까지 납니다. ‘다윗과 요나탄의 이별’ “다윗이 사울에게 이야기를 다 하고 나자, 요나탄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그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다.”(1사무 18,1)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여 그와 계약을 맺었다. 요나탄은 자기가 입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심지어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도 주었다”(1사무 18,3-4). 그런데 우정은 어떻게 오는 걸까요? 만약 요나탄이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될 2인자로서 권력에 집착했더라면, 하늘이 울리고 땅이 울리는 함성으로 환영받는 다윗을 위협으로 느껴 “나쁜 놈”이라며 잡아들였을 것입니다. 또 요나탄이 권력 강화에 다윗이 필요해서 다윗을 아꼈어도 깊은 우정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정은 친한 척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나’의 마음을 보여주고 ‘너’의 마음을 보여주며 마음과 마음이 만든 세상을 공유할 때 깊어지는 것이니까요. 얼굴이 보이는 듬직한 남자가 요나탄이니 칼을 찬 뒷모습의 사람이 다윗이겠습니다. 다윗의 칼이 저것인가 보지요? 얼마 전 이스탄불에 다녀왔는데, 거기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서 다윗의 칼이라고 하는 칼이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묵묵히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자 너무 좋았던 어머니 헬레나는 감사의 표시로 기꺼이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길고도 오랜 순례 길에서 찾아온 성물(聖物) 중에 다윗의 칼이 있었습니다. 톱카프에 전시되어 있는 그 잘생긴 칼이었습니다. 그것이 진짜 다윗의 칼이었는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1700년의 세월을 다윗의 칼로 살아온 다부진 칼은 이미 다윗의 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칼은 원래 요나탄의 칼이었겠지요? 저 그림 ‘다윗과 요나탄의 이별’ 속에 다윗이 차고 있는 저 칼은 요나탄의 것이었습니다. 요나탄이 이별의 정표로 다윗에게 준 것입니다. 칼은 그렇다 치고 목동이었던 다윗의 옷도 생각보다 화려하지요? 그것도 요나탄이 건넨 것입니다. 저 시대에 자신의 옷을 입혀 준다는 것은 자기를 나눠준다는 뜻이었습니다. 일종의 도원결의였던 셈이지요. 요나탄과 다윗은 그만큼 가까웠습니다. 뒷모습만으로도 전달되지 않습니까? 요나탄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다윗이 요나탄의 품에서 절망스럽게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저렇게 요나탄의 품에 무너져 있는데도 다윗이 안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는, 두려움 없는 우정이 부러울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후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요나탄이 전사했을 때 다윗이 썼던 조가(弔歌)가 자연스럽습니다. “너 이스라엘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나의 형 요나단이여, 나 애통하오. 내게 소중했던 형이여,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에로스 사랑보다 아름다운 우정을 아십니까, 친구의 처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요나탄 같은 속 깊은 친구가 있으십니까? 사랑이 소유가 아니듯 우정도 소유가 아닙니다. 저 그림을 보니 진정한 우정은 옆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뒷모습만으로도 당장 쓰러질 것처럼 지치고 슬퍼 보이는 저 다윗을 보니 아마 저 그림을 그릴 때 렘브란트는 울고 싶었나 봅니다. ‘나’를 받아주는 큰 품에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을 모두 쏟아내고 싶었나 봅니다. 그 슬픔은 무엇이었을까요? 1642년 작품이니, 그 해는 바로 렘브란트가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를 잃은 해입니다. 렘브란트 나이 서른여섯, 얼마나 암담했을까요? 슬플 땐 울어야 합니다. 슬픔이 응어리져 굳어지기 전에 울고 또 울어야 합니다. 저렇게 서럽게 울고 나면 자신만의 독특한 운명을 받아들일 힘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을 친한 친구인 것처럼 생각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다윗과 요나탄의 관계가 모범적인 우정으로 제시되고, 그들의 우정을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한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이미 기름부음받은 메시야였고 요나탄은 그것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마음에 합당한 왕을 그 백성에게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고자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관계를 어렵게 만들면서까지 자기에게 돌아올 왕관을 다윗에게 돌린 요나탄의 행위는 메시야가 오는 길을 여는 진실한 믿음의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요나탄과 다윗의 우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요나탄의 우정과 사랑이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우정과 사랑이었습니다. 요나탄이 오히려 다윗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탄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한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도록 기꺼이 돕고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탄의 우정과 사랑은 어떤 불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요나탄은 다윗을 돕기 위하여 ‘활의 약속’을 하고 그대로 실행하게 됩니다. 사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사울 왕과의 식사 자리에 다윗이 나가지 않고 들에 숨었습니다. 초하루 식사자리에 다윗이 없애려는 것을 발견한 사울은 다윗에게 무슨 사고가 생겼나보다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그 이튿날도 다윗이 없자 다윗이 어디 갔는지 요나탄에게 물었습니다. 요나탄은 다윗과 약속한 대로 다윗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말하자 사울의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화가 나서 결국 아들 요나탄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왜 없애고 싶어 하는지 그의 말을 들으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살아있는 한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일찍이 자신의 왕권이 박탈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지위가 넘어갈 것을 하느님의 목소리를 통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반드시 죽어야 하겠다.”고 하는 사울에게 요나탄이 “그가 무슨 죽을 일이 한 것입니까?”라며 강하게 만류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요나탄을 향하여 분노를 터뜨립니다. “이 더럽고 몹쓸 계집의 자식 놈아! 네가 이사이의 아들과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러자 사울은 요나탄을 죽이려고 창을 던졌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욕하였으므로 다윗을 두고 슬퍼하였습니다. 요나탄의 우정은 단순한 친구의 우정이 아니라, 불의한 권력 앞에서 항거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눈물 흘릴 줄 아는 우정이었습니다. 다윗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 요나탄이 다윗과 활의 약속을 한 대로 활을 쏘고 아이에게 활을 주워오게 하면서, 다윗이 도망해야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