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 3일 노량진 검정고시 대신학원에 등록하고 3달후 1984년 1월에 월반해서 (예전 중학교 2학년까지 우수한 성적으로마친 게 있고 서울와서 약8개월동안 매일 몇시간씩 저녁에 천자문을 공부해서 중학교 과정 공부에 어려움이 없었음) 1983년 3월에 생긴반으로 올라가서 1984년 4월에 중학교 졸업검정고시 보고 합격 1년후 고졸 검정고시 합격하는 과정에서 같은반에서 공부한 수많은 사람중에 지금도 만나는 친구들이 있음 어제 8명이 만남
모자공장하던 친구는 지금도 모자하고 가방공장하던 친구는 지금도 가방하고 세탁소하던 친구는 세탁소하고 빵집하던 형은 직원 60여명정도 되는 체인점하고 있고 대부분은 전에 하던일은 계속하고 있었음
나를 포함한 몇몇사람은 직업이 바뀜
각자 살아온 얘기를 하다보니 사기당한 친구도 있고 사업이 잘되고 있는 친구도 있고 건강이 않좋은 친구도 있고
나이대가 60대부터 70대이니 조금씩은 크고 작은병을 안고 살고 있음
서로에게 단지 추억을 나누는 사이를 떠나 서로에게 삶의 에너지를 나누어 주는 멋진 친구들(선배,후배들)
나한테 사장님이 피던 양담배 몰래 갖다주던(당시는 내가 담배를 피웠음)여학생 짝꿍 이름도 기억안나지만 잘살고 있으리라
학원 커플이 생겨 공부그만두고 결혼한 사람도 있었음. 난 공부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음
아래는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나의 가치관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글을 씁니다.
악과 깡으로 점철된 인생 !
갓난아기때 거의 죽어 뽕밭에 묻을 뻔 했다고 하고 국민학교 2학년때 너무 아파 학교보다 병원과 보건소 다닌 기억만 남
내가 국민학교 입학전 논을 노름으로 다 날리고 기억으로는 한마지기정도 쥐꼬리만한 논 만 있었음
어렸을때부터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마을 뒷편 만경 강가에서 온가족이 모래채취하는 일 함
모래 채취업 하도 어린나이에삽질하여 손에지문이 없어짐
어렵사리 전주서중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결국은 중도에 그만둠 당시 중2성적기준으로 3학년 1반과 2반이 결정되었는데 1반과 2반은 전주고등학교 준비반이었는데 나는 일하느라 공부를 못해 두개반에 편성성적미달된다는 소식을 담임한테 듣고 전주고반에 들어가도 희망이 있을까말까 한데 기타반에서는 전주고입학은 꿈도 못꾸었다. 전주고반에만 들어갔으면 농협장학금으로 고등과정을 마쳤을 수도 있었는데 !
3학년 책과 교복을 후배에게 팔고 전주 전미동 집에서 동산촌역역까지 먼거리를 걸어가서 용산역까지 560원하는 완행열차타고 1975년 2월 19일 서울에 옴. 손에 남은 돈은 300원
16세부터 상경(우리가족은 내가 상경함으로 인해서 전가족이 해체됨. 이때 헤어진 넷째 동생이 3년전 성동경찰서를 통해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동생의 만남거부로 아직 못만나고 있음)
서울에와서 수많은 직업을 전전 월급1000원으로 시작 3개월후 3000원 당시 100원에 5개하던 붕어빵도 안사먹고 술담배안하고 독하게 돈을 모음. 잠자리는 양화점 문닫은후 가게바닥에서 형들과 4명이서 잠. 밤에 특별히 할일 없을때 미친듯이 천자문과 1800자 한문공부만 함. 1년후 급여는1만원 2년후 약 3만원 1977년 맹장이 터져 벌어놓은 돈 병원비로 다쓰고 20세때인 1979년초에 기술이 늘어 불광동에서 관철동 에스콰이어 여화 수제화 부분으로 들어감. 당시 나보다 나이 4살 이상되는 견습공을 데리고 최고의 기술자가 되어 주급 약 8만원에서 11만원까지(월 24만원-44만)벌다 나랑 공부수준이 비숫했던 국민학교친구들이 1979년도에 서울대, 전북대, 고대등을 가면서 돈버는 것 보다 공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아버지 돌아가시고 집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등기라는 것을 알게되고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벌어놓은 돈으로 혼자 생활하면서 방위마치고 바로 일상을 공부체계로 바꿈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 공부하는 일을 찾다보다 수많은 일을(할부장사,영등포시장앞 가판 등등) 전전하다 돈도 못벌고 공부도 못하게 되어 결국은 지인 찬스로 다시 구두일을 시작함 명동 랑콤 양화점에서 새 구두하루2켤레만 만들고 수선들어오는 것 수리해주고 출퇴근은 자유롭게 즉 라디오에서 애국가 나오기전에 퇴근해도 되는 허락을 받음. 노량진 학원다니면서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열시정도 출근하고 세시정도 퇴근하여 남보다 유리한 환경에서 일정수입도 있고 공부도 하게됨 고등과정까지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중학교 과정 마치고 구두공장(회사)을 그만두고 공부하다 전세방까지 다 까먹고 다시 돈이 떨어져 학원에서 숙식하며 학원지도원 생활하면서 고등과정 졸업 (당시 학원교실이 약20개 넘었는데 연탄난로여서 하루 약100여장되는 연탄을 지도원 3명이서 다 갈고 4층에서 1층 쓰레기버리는 곳까지 연탄재까지 다버림) 저녁마다 알바하던 분식집에서 만두가져와 주던 여학생도 생각나고
학원에서 지도원하면서 열심히 산 소문은 여러 곳까지 날 정도였음
어머니가 산판 사업하다 잘못되어 시골에서 음식점및 구멍가게 하고 있었는데 가게 있던 사이다까지 압류가 들어오자 충격을 받았고 취직해서 돈벌려고 했으나 한국통신 4급 시험보았으나 낙방
1985년 고졸검정고시 합격후 시골에서 당시 중3이던 동생 공부가르치며 세월을 보냄 (동생은 홍성대가 설립한 상산고에 들어감)
1987년 28세때 어머니가 나에게 기대를 걸고 집을 처분해 공부하라고 몇백만원 챙겨줌
관악구에서 전에 관악경찰서, 동작구 전화국앞,신림동등에서 해보았던 구두닦이를 하기로 맘먹고 봉천6동 국민은행앞 센터를 300만원에 사고 봉천동에 월세방을 얻어 직원과 같이 생활하기 시작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기 시작함 공부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영어와 수학은 기본기가 있어(당시바이블 성문종합영어, 수학은 실력정석) 혼자하고 과학등 사이드과목 단과를 들으면서 입시준비 (낮에 손님 없는 시간에 공부)
그 와중에 에피소드가 많음
어떤 젊은 여자가 씩씩대면서 구두센터에 와서 나를 찾음
아저씨 땜에 내가 못살겠다고 ! 무슨일이냐고 물어보니 어머니가 국민은행 앞 구두닦는 분은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한다는데
너는 도대체 뭐하는 거냐고 핀잔을 들어 누군지 궁금했다나!
인근가게 사장님이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자녀가 중3인데 과외해달라고 하여 일요일에 시간나는대로
공부 가르치고 열심히 살라고도 하고
그때부터 여러가게 사장님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지금도 제자 몇명은 만나고 있음
과외하기전 오목을 먼저 가르치고 오목수준을 전교최고수준을 만들어 학교가는 재미가 있게함
내제자들은 다니는 학교에서 오목은 전교 탑이었음. 이후 인터넷시대에서도 전국 최상위 실력임
제기차는 것도 가르치고 싸움하는 것도 가르치고 (10대때 얄개씨리즈유행으로 태권도 배우러 다녔는데 토요일에는다른 운동도 가르쳐줌 내가다니던 도장에서 영화한장면찍음)
제자중 한명이 실제 아이를 때려서 내가 파출소가서 데려온 적도 있음
애들이 하는 오락 스트리트화이터가 뭔가하는 것은 난 못했고
시험 두달전에 계속 일을 할 수가 없어 직원 한명을 채용해서 두명이서 운영하라고 하고 두달동안 공부만 함
그날 번 돈을 나한테 입금시키고 월급을 달라고 해야 하는데 그날 번돈은 다쓰고 월급은 달라고 하고 황당했지만
시험때까지 참고 있다 시험후 한사람 정리하고 다시 일하기 시작함
당시 한켤레 닦는비용은 300원 일때 직원 안나오면 혼자서도 4만원이상 최고 6만원까지도 벌었음
최고급 여화 수제화 제작했던 경험이 있어 명품구두등 수리비용으로 약 절반이상의 매출을 올림
직원들이 가죽상태를 잘파악하지 못해 방수처리 안된 구두를 구두약을 잔뜩발라 구두를 버려 명동에 가서 새신발을 사주기도 함
아무튼 여자구두수리에 있어서는 전국최고였다고 자부함
당시 구두닦는 일은 험한 일이었음 타동네 사람들이 와서 센터를 뺏을려고 하는 일이 자주 있었음
봉천동은 억센동네였고 내가 오랫동안 살던 동네라 친구들이 많아 건달친구(송00,김00등)들이 다 해결해주고 나는 술사고
이후 한두살 연상이고 키도크고 예쁘장한 여자가 찾아와서 강원도 고향에 부모가 땅도많고 저쩌고 하면서 꼬리치길래 나이도있고해서 결혼하자고 했더니 교회다녀야 한다고 해서 교회를 갔는데 그교회가 유명한 낙성대교회(JMS) 30개론수료하고 다배웠으니 이제 결혼하자 했더니 심화학습180개론 해야 된다고 해서 바로 헤어짐. 그래서 JMS기본교리는 잘 알고 있음. 이것이 계기가되어 탁명환선생 사망이후 이단연구가 된다고 약3년정도 공부를 소홀히하고 여타의 종교에 열심인 적이 있었음
오늘은 일년을 마감하는 날 여기까지 정리하고 후에 다시 정리하기로 함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도 있나보네 하는 의미에서 읽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제가 모르는 많은일들이 있었네요
건강이 최고여요 형님 앞으로는 행복한일들이 넘처났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