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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글
-저는 분명히 사치에 대한 개념을 다른 분과의 토론에서 말한 기억입니다..황룡사를 지을 때의 국제정세나 신라의 국력이 당시 백제와 같았나요 ㅡㅡ?
안압지는 674년 만들어진 공원입니다. 장인들도 고구려, 백제 장인들이 주축을 이루었구요.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전력을 다했다고 하기에는 무리입니다. 매소성 전투당시 아무 근거없이 당나라군 대부분이 기병이었다는 역스의 방영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게다가 승전국으로서의 이득을 생각한다면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답변***
황룡사는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643년이라면 신라가 백제의 대공세로 대야성과 40성을 잃고, 여제연합군에게 당항성을 공격당해서 김춘추가 목숨내놓고 고구려갔다온 642년의 바로 다음해군요... 당시 신라가 얼마나 급박한 존망의 위기였는지는 아시겠지요? '미륵사지을 당시 백제'와 비교해서 그 국력이 결코 나은 상황이 아니었다는 건 명백하네요.
당나라는 물론 나당전쟁에 '전력을 다한' 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죠. 토번이라는 또다른 큰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거란 말갈등까지 동원한 20만이라는 대군이 신라입장에서 결코 만만한 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승전국의 이득'이라뇨... 반신라정서가 매우 강한 백제고지를 차지한적이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득'을 봅니까? 이건 님만의 상상이라고 밖엔 볼 수가 없군요.
(사족을 달자면, 당군의 주력이 기병이었다는건 사실입니다. 당은 돌궐에 대항하기 위해 중장기병제를 버리고 경기병제도를 채택하면서 기병의 '힘'보다 '기동성'을 살리는데 이는 동시에 '질'보다 '양'을 택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중장기병보다는 경기병이 다수확보에 좋으니까요. 실제 당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높았습니다. 그때 역스에서도 당군 '대부분'이 기병이었다고 한게 아니라 기병의 비율이 높았다고만 했습니다.)
-황룡사는 553년, 신라 전성기인 진흥왕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찰입니다. 그로부터 '100년'후인 선덕여왕때는 9층석탑을 '추가'한 것 뿐입니다. 이건 기본중의 기본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고대에서 조직적인 반란을 이끌 특정 단체가 없는 한 승전국이 패전국의 인적 자원을 약탈해 가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백제인 개개인의 반신라적 정서를 운운할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는 부흥운동이 소멸되고, 그나마 백제계 관료로 구성되어 있던 당나라 괴뢰정권도 붕괴된 상황이었습니다. 백제인들의 정서를 하나로 묶어줄 구체적인 조직체가 없었으며, 반신라적 정서 운운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미륵사나 황룡사 안압지같은걸 만드는게 국력이 기울 정도로 심각한 역사는 아니란 겁니다. 당연히 그걸 가지고 나라의 멸망원인을 논한다는 건 적절치 못합니다.
님의글
-축구에서 볼 점유율 90%를 차지한다고 해도 결국 골 넣는게 중요한 겁니다. 신라 전군에 가까운 4만이 쫄딱 전멸해서 온게 '압도'한 것인가요?
***답변***
우선 전쟁은 축구가 아니란걸 말씀드리고 싶구요...-_-;;;a
전세의 우열을 판단하는 것은 전체적인 양상이지 한차례의 전투가 아니죠. 662년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서 방효태의 당군이 전멸했다고 해서(사수대첩) 고구려가 당에게 우세했다고 말할 수는 없죠. 전쟁터가 고구려니까요. 백제본기 무왕조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횟수는 10회, 신라가 백제를 공격한 횟수는 2회입니다. 백제의 일방적 공세였다고 밖엔 할 수 없습니다.
-영양왕 때 고구려가 수를 공격한건 1번, 수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4번이나 되니 당시 국제정세는 수나라의 일방적인 우위였군요..설마 5:1과 4:1의 숫자차이를 들먹이시지는 않겠죠.
님의글
-당나라의 상륙은 의자왕의 우유부단함이지 당나라의 해상 전력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백제가 당나라보다 해상전력에 있어 압도적이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제3자인 왜의 눈을 빌러도 알 수 있죠.
왜는 비록 백제에 많은 영향을 받고 백제를 형님국으로 모시고 있었으나, 7세기 초~중렵부터 실질적으로는 백제보다 당나라에서 많이 배울려고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당시 10장, 대충 30여미터의 배를 만들 능력을 가지고 있던 왜에게 우수한 배의 상징으로 백제 선박을 언급하는 장면이 자주 보입니다.
650년 왕명으로 만들어진 선박 2척에는 백제선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죠.
***답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백제가 당나라보다 해상전력에 있어 압도적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는 위험천만한 단정을 하시네요. 역사를 소설로 아시는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단편적 기록에 보이는 백제의 선박건조술이 우수하다고 해서 '해상전력이 당을 압도했다'고 어떻게 단정합니까?
그리고 님의 주장의 논리적 모순이... 만약 백제의 해상전력이 '당을 압도'했다면, 의자왕이 '우유부단'할 이유도 없죠.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당군을 압도'해버리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래도 끝까지 오직 의자왕 일인의 탓이라고만 주장하신다면 답답한 논쟁을 접을 도리밖엔 없겠군요...
-고구려와 당이 라이벌이었다면, 영류왕이 당에 빌빌거렸을 이유도 없죠. '라이벌'국가끼리 뭘 세삼스럽게 그렇게 빌빌 깁니까?
...고구려사 싸이트에서 고구려사를 비꼬니 죄송스럽지만, 님의 논리는 이런 식의 어설픈 논리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8만 대 1만의 관도전투에서 8만이 무자비하게 패한 이유는 원소의 우유부단함이였습니다. 아, 원소도 그 전에는 나름대로 효웅이라고 불리던 군주였다죠?
님의 글
-사치와 방탕, 난폭한 성질을 가진 군주이니 망국의 군주가 된 것이지 망국의 군주에게 그런 수식어가 붙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승자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는 것은 막아야겠지만, 저는 승자의 역사, 패자의 역사 운운하는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승자는 승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구요, 패자는 패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승자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을 높이세우고 패자가 패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적는 것을 과장이라고 하신다면, 전 할 말이 없습니다.
***답변***
역사를 볼 땐 사료비판이라는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기록이 왜 그렇게 쓰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정복전쟁엔 항시 명분이 있기에 승자의 기록에서는 (대개는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은)그 명분이 사실처럼 기록되게 됩니다. 이 점을 생각하지 않고 역사를 봐야 한다면 역사가는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승자의 역사 패자의 역사 운운하는것을 님이 개인적으로 싫어하신다는게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하나의 아집으로밖엔 보이지 않습니다만......
망국의 군주가 되는 원인은 전략적, 외교적 실패나 혹은 중과부적의 한계 등이 더 크게 작용합니다. 고려의 공양왕이나 조선의 고종, 순종 황제가 '사치, 방탕, 난폭'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저는 망국의 군주 의자왕의 변명을 해주자는게 아닙니다. 승자가, 그리고 유학자들이 곡필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치니 방탕이니 하는 허울을 극복하고 진짜 그가 망국의 군주가 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거죠.
-공양왕, 고종, 순종과 의자왕을 비교하시는 겁니까?
공양왕, 고종, 순종은 그들이 무지막지한 군주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왜곡될 소지가 없는'기록이 단편적으로마 남아있는 군주들입니다. '왜곡될 소지가 없는 기록'하나는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기록'10개보다 더 큰 신빙성이 있습니다.
물론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자왕이 실제로는 영민한 군주였음을 증명하는 '왜곡될 소지가 없는 기록'이 존재한답니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삼국사기는 재위 초기에는 정치를 잘 하던 의자왕이 언제부터 난폭해졌는지 분명히 기록합니다.
님의 글
-그 근거가 궁금합니다. 소정방 암살설이네 뭐네 해서 백제 공격 이후의 소정방의 행적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적어도 부흥군 마크에 있어 소정방이 갈리고 유인궤가 투입된 이유는 명백합니다. 소정방이 13만의 대군을 이끌고도 연전연패했기 때문이죠.
***답변***
삼국사기에 버젓이 나와있는 내용인데요... 기본사료의 내용확인 문제가지고 논쟁하는건 피곤한 일입니다만... 굳이 원하신다면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5 태종무열왕 7년(660) 9월 3일조
- 낭장 유인원에게 군사 1만 명으로써 사비성을 지키게 하고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 급찬 길나와 함께 7천명으로써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정방은 백제왕 및 그 왕족과 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명을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으로 돌아갔는데, 김인문과 사찬 유돈, 대나마 중지 등도 동행하였다.
이 기록 바로 전에 신라군이 임존성의 백제군을 공격했다가 패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소정방의 연전연패로 사령관을 갈아치우는'것으로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군요. 소정방이 연전연패해서 사령관직에서 '짤렸다'면 바로 이듬해 고구려공격에 또다시 나설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구요.
13만의 대군을 철수시키고 1만명만을 남겨둔 것은 바다건너의 점령지에서 그런 대군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건 당대 백제인(복신)의 말에서도 확인되구요...
-그 기록은 소정방의 군대가 1만을 남기고 되돌아갔다는 기록이고, 그해 9월 소정방이 돌아간 직후 왕도문, 유인궤를 수륙 양면으로 따로 군사를 파견해 백제군을 토벌하게 합니다.
부흥군이 일어난 것은 660년 7월 말에서 8월 초, 8월 26일 신라군이 임존성을 공격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을 볼 때 이미 소정방이 돌아간 9월 3일 부흥군은 대단히 강대해져 있었습니다.
소정방이 그런 시기에 황급히 돌아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황제가 흑치상지에게 친서를 보낼 정도로 강대했던 부흥군 토벌을 위해 경험이 있는 소정방을 놔두고 유인궤를 투입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분명히 소정방은 부흥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했고, 이에 당나라 조정은 백제 신료들을 데리고 돌아오라고 한 뒤 유인궤와 왕도문을 파견했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백제의 우방국임과 동시에 백제가 멸망하여 3면으로 포위되는 것을 가장 우려한 국가였고, 왜가 백제를 공격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즉, 적은 신라와 당밖에 없다는 얘기인데 나당연합군에 대해서 전력을 다한다는 개념이 생성되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 의문입니다.
***답변***
'교통'문제를 언급했듯이, 고대의 전쟁에서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은 고대의 열악한 기동성 때문입니다. 나당연합군이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그것을 지방 곳곳에 전하고, 그에 응해서 각 지방의 백제군들이 이동해와서 사비방위에 투입되기까지의 시간이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진군하기까지의 시간보다 길다는게 문제라는 겁니다. 황산벌전투의 5천결사대와 백강에서 당군과의 전투에 패해 죽은 백제군 1만, 그리고 사비와 웅진에 남아있다 항복한 패잔병이 당시 백제가 실질적으로 단기전에 동원할 수 있었던 전력의 전부였죠. 내분의 가능성 문제는 추정일 뿐이니 일단은 접어둡시다.
백제의 영역은 그리 넓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백제의 전략은 요충지를 지키며 국내의 전력을 결집하고 우방국의 원병을 부를 시간을 버는 장기전이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하고 때를 놓쳐 수도상비군만으로 평지결전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 백제가 망하게 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음은 이미 다른 글에서 밝혔습니다.
-'백제의 영역은 그리 넓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백제의 전략은 요충지를 지키며 국내의 전력을 결집하고 우방국의 원병을 부를 시간을 버는 장기전이어야 했지만 '
님은 분명 스스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 말이 탄현과 백강을 지키며 시간을 벌며 국내의 전력을 결집한 뒤 전면전을 펼쳐야 된다는 것인데, 거기서 '고대국가에 있어 전력전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가 이제와서 평지결전을 하는 어리석음 운운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