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1608년 2월에 선조는 행궁의 침전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화재로 불탔던 중화전이 복구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 순종에게 제위를 전위 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하였다.
지정현황 : 사적제124호 덕수궁일원(1962.7.25지정, 2007.2.7 추가지정)
대지면적 : 63,069.2㎡(18,514.6평)
고건물 : 중화전, 석조전 등 22동
- 국보 : 1건(보루각, 자격루) - 보물 : 3건(중화문 및 중화전, 함녕전, 흥천사종) - 등록문화재 :3건 (석조전 동관, 석조전 서관, 정관헌)
편의시설 : 화장실 3동, 매점 1동
수목 : 111종 10,296 그루
1500년대
1592 (선조25)
4월 임진왜란 발발
1593 (선조26)
10월 의주(용만)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환도,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을 임시 행궁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라 칭함
1595 (선조28)
궁역의 동쪽과 서쪽에 문을 세움
1600 (선조33)
6월 선조의 비 의인왕후 박씨 서거함
1606 (선조39)
종묘와 궁궐의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함
1608 (선조41)
2월 선조 정침(석어당 추정)에서 승하. 다음날 광해군 서청(즉조당 추정)에서 즉위
1611 (광해 3)
10월 창덕궁으로 이어하며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함
1611 (광해 3)
광해군 다시 경운궁으로 이어함
1615 (광해 7)
병조판서 이항복이 궁장(宮薔)을 두르고 궁궐의 모양을 갖춤
1617 (광해 9)
광해군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함
1618 (광해10)
광해군 기울어진 궁장의 수리를 지시함
1620 (광해12)
경운궁에 유폐된 인목대비의 호를 폐하고 ‘서궁(西宮)’으로 낮추어 부름
1623 (인조元)
경운궁의 허술한 북쪽 담에 내장(內薔)을 쌓으라고 지시함
1623 (인조元)
3월 인조 반정에 성공한 뒤 경운궁 침전(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함, 창덕궁으로 이어
1623 (인조元)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소실되어, 인조 경운궁에서 경덕궁(경희궁)으로 이어함
1679 (숙종 5)
7월 선조의 침전 두 곳(즉조당, 석어당 추정)을 제외하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본주인에게 돌려줌 5월 숙종이 호조(戶曹)에 명하여 경운궁(慶運宮)을 개수할 것을 명함
1700년대
1773 (영조49)
2월 선조가 환도해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을 맞아 세손(정조) 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행함 1월 영조가 석어당(昔御堂)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에 현판을 걸게 하다
1800년대
1876 (고종13)
고종이 경운궁을 수리를 명하고 즉조당에 전배하며 선조의 기거청정을 회상함
1883 (고종20)
美 공사 ‘푸트’가 정동 민계호의 저택을 구입 美공사관으로 쓰기 시작함
1890 (고종27)
英 공사관 준공함 (정동 4번지)
1894 (고종31)
고종이 선조 환도 5주갑(300년)을 맞아 세자(순종)와 즉조당에서 추모사 배례 하고 부근 노인들에게 쌀을 나누어줌
1895 (고종32)
1월 갑오농민전쟁 봉기 / 7월 갑오경장 시행
1896 (건양元)
10월 일본 공사 미우라가 주동이 되어 ‘을미사변’ 자행함
1897 (건양 2)
2월 고종 세자(순종)을 데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함 2월 고종 경운궁 수리 지시함 2월 고종이 인화문(仁化門)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함 4월 경운궁 진전(眞殿) 상량문 제술관 임명함 5월 경복궁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으로 옮겨 지음 6월 선덕전(善德殿)과 보문각(寶文閣)의 상량문 제술관 임명함
1897 (광무元)
8월 고종 경운궁 수리 독촉함 8월 광무(光武) 연호를 반포함 9월 고종과 엄비 사이에서 영왕(英王) 탄생함 9월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을 경운궁으로 옮김, 또한 경복궁 집옥재에 봉안되었던 역대 선왕의 어진을 경운궁 별당으로 옮김 10월 원구단을 남별궁 영빈관 터에 착공함 10월 경운궁 즉조당 현판을 태극전으로 바꿈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정함 10월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경운궁 태극전(太極殿)에서 황 제가 된 이후 처음 하례를 받음 10월 엄비 아들(영왕) 출산함 11월 명성황후 장례식 거행함
1898 (광무 2)
2월 태극전의 명칭을 다시 중화전(中和殿)으로 바꿈 10월 정동제일교회 완공(정동32-2번지)
1899 (광무 3)
원구단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건립, 황천상제(皇天上帝) 이하 제신위의 위판을 봉안함
1900년대
1900 (광무 4)
1월 경운궁 궁장 공사를 완료하고 경계를 확정지음, 전기를 끌어옴 경복궁 흥덕전(興德殿)을 경운궁으로 옮겨오는 등 선덕전, 보문각을 이축 또는 신축함 (선덕전은 함녕전의 옛이름) 4월 경운궁 흥덕전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함 경운궁 석조전 시공함 10월 경운궁 진전(眞殿)에 화재가 발생하여 숙종 이하 7왕의 어진 소실됨
1901 (광무 5)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넘어가는 구름다리 설치된 것으로 추정됨 경운궁 돈덕전(惇德殿) 지어진 것으로 추정됨 7월 고종 황제의 오순(五旬)을 칭경(稱慶)하는 진연(進宴)이 베풀어짐 10월 경운궁 수옥헌(漱玉軒:중명전, 정동10번지) 화재로 소실됨
1902 (광무 6)
5월24에 정동의 미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영사관에서 경운궁 남쪽 담이 붙어 있는 가구(架構) 상가로 통하는 길을 폐쇄(양옥들의 접근을 피하려는 목적) 9월 현재의 중화전이 완공됨 9월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해 기념비전(紀念碑殿)과 원구단 옆 석고(石鼓) 를 건립 10월 손탁호텔 2층 양관으로 지음
1903 (광무 7)
4월15일 廟 社 壇 宮의 地界를 사방 150m로 정하고 경운궁의 경우는 사방 250m로 하여 접근하지 않도록 통보
1904 (광무 8)
2월 러일전쟁 발발함 2월 한일의정서 체결함 4월 경운궁 대화재 발생, 고종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김 8월 제1차 한일협약 체결함 (중명전, 고문정치) 11월 황태자(순종)의 첫 번째 비(妃)인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 석어당에서 승하
1905 (광무 9)
7월 日美 사이에서 가쓰라 ·태프트 밀약 11월 중명전(重明殿)에서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체결 (통감정치)
1906 (광무10)
1월 안국동 별궁에서 세자(순종)와 윤택영의 딸 윤씨 가례식과 중명전에 서 외교사절 초청 결혼 축하연이 개최됨 2월 경운궁 중명전에 일본 통감부를 개설, 초대 통감으로 이등박문 부임 4월 경운궁 대안문(大安門) 수리 다시 상량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 7월 경운궁 중화전(中和殿)을 단층으로 준공함
1907 (광무11)
중명전에 서 외교사절 초청 결혼 축하연이 개최됨 4월 남대문 좌우측 성벽을 헐고 도로를 개설 4월 고종 네델란드 헤이그에 ‘특사’ 파견 위해 중명전에서 특사 접견
1907 (융희元)
7월 황제 양위식 중화전에서 거행됨. 궁호를 덕수(德壽)라 함 7월 한일 신협약 체결됨 (차관정치) 8월 군대 해산식을 훈련원에서 가짐 8월 연호를 융희(隆熙)로 결정 8월 순종 경운궁 돈덕전에서 황제 즉위식 10월 순종 창덕궁으로 이어를 결정, 창덕궁 수리를 명령 11월 순종 창덕궁으로 이어
1908 (융희 2)
7월 경희궁으로 가는 구름다리 철거(추정)
1909 (융희 3)
덕수궁 석조전 완공 창경궁을 개조하여 식물원, 동물원으로 만듦
1910년대
1910 (융희 4)
8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소위 ‘한일합방’ 체결(조선왕조 막을 내림)
1910
10월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바뀜
1911
원구단과 황궁우 등 주변일대 총독부 소관으로 넘어감 7월 엄비 덕수궁 즉조당에서 승하함
1912
황토현(現광화문사거리 부근)에서 남대문을 잇는 남북축의 도로 개설함
1913
경성일보 사장 ‘요시노’가 벚나무 500그루를 기증형식으로 덕수궁에 심게 함
1914
9월 황궁우만 남긴 채 원구단 자리에 조선총독부 철도호텔 신축함
1915
덕수궁 중명전 ‘경성구락부’(외교클럽)의 사교장으로 쓰이기 시작함
1916
4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개설함
1917
11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큰 불이 나 내전 일대가 소실됨
1919
1월 고종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
1920년대
1921
덕수궁 중화전에 봉안되었던 고종의 어진을 창덕궁 신선원전으로 옮김
1922
궁의서쪽 선원전 터 일부를 통과하는 길을 뚫어 소위 덕수궁 돌담길(현 미국대사관저와의 사잇길)이 만들어짐 도로서쪽의 엄비의 혼전(魂殿)을 헐고 그 북쪽으로 경성제일여고(경기여고) 교사를 지음
1923
덕수궁 돌담길 동쪽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지금의 덕수초등학교)를 지음
1925
3월 덕수궁 중명전 화재로 전소됨
1926
4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종 승하 6월 순종 인산일을 기해 6.10만세운동 전개됨 10월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청사 건물 준공됨 11월 덕수궁 선원전 부근 동쪽 언덕에 경성방송국을 지음
1930년대
1933
일제에 의해 덕수궁 대부분의 건물 훼철 공개입찰, 방매 처분 당함 10월 1일공원으로 만들어져 일반에 공개함 (국화전시회 최초로 개시; 8 ·15와 6 · 25중 6년을 제외한 70년까지 32회 개최)
1938
3월 31일 석조전별관 준공,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사용됨 1945년 8월 15일까지 현대미술품 진열 광명문(光明門)을 현 위치로 옮겨 놓음
1940년대
1945
10월 석조전에서 해방기념 미술전람회가 개최됨
1946
1월 16일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임시회의 개최됨
1948
UN한국위원단에서 1950년 6 · 25까지 석조전을 사용함
1950년대
1954
6월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
1955
6·25 동란중 파괴된 석조전 건물 일부을 육군 공병단에서 수리복원
1960년대
1961
10월 덕수궁 사무소 설치함 11월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1차 도로 확장공사로 시청 쪽 담장을 철거하고 철책으로 설치, 272평 도로편입 및 지당 491평 반감 (담장공사로 궁내 연못이 491평이 반감되고 수중다리가 철거됨)
1962
7월 25일 당궁을 사적 제124호로 지정
1964
4월 15일 야간공개 시작
1968
5월 20일 서울시 도로 확장공사로 시청쪽 도로편립(1,137평)되어 철책을 철거 하고 담장설치(7월) 남대문경찰서 태평로파출소 신축공사에 당궁 대지 25평 편입 7월 15일 담장 이전공사로 담장만을 궁 내부로 이전하고 대한문(大漢門)은 원위치 도로상에 폐쇄 고립됨. 당초 당 궁 총면적 20,114평 중 1,977평이 도시계획 등에 의해 편입되어 18,137평이 보존관리 면적으로 남게 됨.
1969
5월 3일 당궁에서 관리하여 오던 미술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이관 (대통령령 제3525호 1969. 7. 24.자)
1970년대
1970
8월 21일 도로상에 폐쇄 고립된 대한문(大漢門) 이설공사 착공.(1971년 1월 2일 이설준공)
1980년대
1987
석조전 서관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화발전연구소가 임대(1994년 1월까지 사용함)
1990년대
1992
12월 석조전에 궁중유물전시관 개관함
1994
9월외곽담장(포덕문→월곡문 15m) 보수 11월 외곽담장(태평파출소↔영국대사관 30m) 보수
1998
12월 석조전 별관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개관함
2000년대
2004
2월 6일 덕수궁 석조전 동관 (제80호), 덕수궁 석조전 서관(제81호), 덕수궁 정관헌(제82호) 등록문화재로 등록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
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이후 영조때(영조 49) '선조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과 선조의 기일(승하일)을 맞이해, 영조가 세손(정조)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는' 등 기념의식을 갖기도 하였고, 고종 30년(1893)에 '선조가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5주갑(300년)을 맞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후 1897년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환어(還御)하기 전까지 비어있게 된다.
대한제국시대, 일제시대의 덕수궁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후 부터이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무려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당시 경운궁 주변 정동 일대는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들의 근거지였던 만큼, 이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같은해(1897년) 8월 고종은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하고,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 뒤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처럼 경운궁의 또 다른 역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와 더불어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작되었다.
경운궁은 고종이 본격적으로 임어하게 되면서 그에 걸맞는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지만,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은 또 한번 큰 시련을 겪는다. 중화전을 비롯한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궐내각사(闕內各司) 등 중심부에 있던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경운궁(덕수궁)은 이전의 모습을 크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의 모든 건물들은 이 이후에 재건되었으며, 그 규모도 대폭 축소되고 만다.
그러던 중 1905년 경운궁 중명전(重明殿)에서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에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황제의 특사자격으로 비밀리에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로 인해 1907년 8월 일제는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이 경운궁 돈덕전(惇德殿)에서 황제에 오르게 된다. 황제에 오른 순종은 그 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했으며, 이로써 경운궁도 마침내 궁궐로써 그 기능과 생명을 다하게 된다.
이때 순종은 경운궁에 계신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를 올리는데, 오늘날 덕수궁(德壽宮)이란 이름은 이렇게 얻게 되었다. 한편 덕수(德壽)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특정 고유명사로서가 아니라 물러난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격인 셈이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자, 덕수궁은 주인이 없는 궁궐이 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덕수궁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전통적인 궁궐제도에 입각한 배치형식이나 자연지세에 따른 자유로운 배치가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1910년도의 덕수궁 배치도 참고) 당시 덕수궁의 전각을 살펴보면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궁궐의 중심부가 밀집된 동남쪽에는 대한문을 비롯 중화전·함녕전·즉조당·석어당·준명당·정관헌 등 당시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 등이 있었으며, 궁궐서쪽으로는 미국 영사관과 러시아 공사관 사이에 서양식 2층 건물인 중명전 일대와 환벽정 등이 있어, 접견실·연회장 등으로 주로 쓰였다. 북쪽으로는 선원전(璿源殿)과 혼전(魂殿)이 있던 지금의 舊경기여고터, 덕수초등학교 위치로 왕실의 제사가 치러지던 곳이 그것이다.
그밖에 덕수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 구름다리(雲橋)가 각각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북쪽의 구름다리는 러시아 공사관 언덕 위에서 경희궁으로 이어져 있었고, 남쪽의 구름다리는 중화전 남쪽 옛 영복당 자리에서 옛 법원자리로 옮겨온 의정부(議政府)와 연결하기 위한 통로였다. 고종이 승하한 뒤 3년만에 일제는 현재의 덕수궁 돌담길을 뚫고 도로의 개설, 학교, 방송국 등을 지어 덕수궁을 절단한다. 이로써 덕수궁의 면적은 더욱 축소되고 그 모습을 잃어간다.
아울러 대부분의 건물을 철거 또는 방매(放賣)하였으며, 훼철된 덕수궁을 1933년 10월 공원(公園)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덕수궁은 대한제국기의 원형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때에 잔존하게 된 전각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 대한문 · 포덕문 · 건극문 · 용강문 · 생양문 · 광명문 · 중화문 ○ 중화전 · 준명당 · 즉조당 · 석어당 · 함녕전 동행각 일부 · 덕홍전 · 구여당(함 녕전 뒤쪽의 2층집) · 정관헌 · 석조전
이 외에 궁성 밖 서쪽 정동 10번지에 광무 8년 4월에 경운궁에 불이 났을 때 고종이 피하였던 수옥헌(嗽玉軒)이 있다. 1905년 11월 17일 한일조약을 체결한 장소이고 1907년 7월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후에 중명전(重明殿)으로 개칭되었고, 순종의 이어소(移御所)로 사용되다가 구미인(歐美人)의 클럽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개인 회사의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는 3층 건물이다. 중명전과 러시아 영사관 사이에 환벽정이 있었다. 순종이 태어난 건물이 있고 명성황후의 혼전이던 경효전(景孝殿)과 순명황후의 혼전(魂殿)인 의효전(懿孝殿)도 있었다. 의효전은 창덕궁으로 옮겼다.
일제강점 이후에 궁의 서쪽 선원전(璿源殿)의 터를 일부 통과하는 도로를 열었다. 지금의 미국대사 관저와의 사잇길이 이것이다. 도로 서쪽에 떨어져 나가게 된 엄비(嚴妃)의 혼전(魂殿)을 헐고 그로부터 북쪽으로 전일의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그 맞은 편, 즉 도로의 동편 제사 준비소 터에다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의 교사를 지었다. 1927년에는 그 동쪽 언덕 위를 밀어내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의 청사를 지었다.
엄비의 혼전 부근에는 그가 소유하던 과수원이 있고 제사의 준비소에는 희생(犧牲)의 도살장 제수용구(祭需用具)를 두는 건물들이 있었고 방송국의 동남방에는 귀족들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던 수학원의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정동 3번지로 지금의 성공회 교회당이 있는 일대가 그 터전이다.
그러나 광무 11년의 고종 폐위(廢位) 및 융희 4년(1910) 한일합병으로 국세가 크게 기울어짐과 함께 궁궐 안의 많은 전각 문루 등이 차례로 헐리어 1935년경에 와서는 대한문(大漢門), 건극문(建極門), 포덕문(布德門), 생양문(生陽門), 용강문(用康門) 등의 궁장(宮墻) 문 안으로 중화전, 함녕전, 덕홍전, 석어당, 즉조전, 정관헌, 준명당, 양심당, 구여당, 석조전 등의 일부 건물만이 여기 저기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전각(殿閣), 문루(門樓) 등이 헐린 사이 사이에는 화단(花壇)과 초장(草場)을 만들고 잔디와 작약(芍藥), 모란 등을 심어 새로운 경관(景觀)을 이루며 이 동안 1913년 봄에는 경성일보 사장 길야태좌위문(吉野太左衛門)이 길야루(吉野樓) 500주(株)를 진상하여 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3년부터는 궁내를 일반에게 공개 관람하게 하니, 이제는 시민들의 소풍 산책하는 고궁으로 화하였다.
또 종래 황실의 귀빈 접대시 사용되던 석조전은 일제 미술품의 진열 전시장으로 바뀌어지며, 1936년 3월에는 다시 석조전 서쪽으로 미술관 신축공사를 착수하여 1938년 8월에는 연건평 1,000여평의 미술관을 이룩하고 창경궁박물관 소장의 미술품, 고고학자료 등을 옮겨 수장 전시하여 일반의 인기를 모으기도 하였다. 또 일반공개가 시작됨과 함께 여기 저기에 매점, 휴게실 등이 생기니 고궁의 인상은 차츰 희미하여지게 되었다. 또 1921년에는 창덕궁 화원에 새 선원전(璿源殿)이 이루어짐과 함께 중화전에 봉안(奉安)되었던 고종의 어진(御眞)도 옮겨가니 덕수궁과 고종과의 깊은 관계도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대한제국기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 일대 모습
일본이 강압적으로 조선과 먼저 수호조약을 체결하자 구미제국들도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문호가 대외적으로 개방되었고, 그리하여 서울의 정동을 비롯한 주요한 곳에 서구공사관이 자리를 잡았고 앞다투어 양옥건물이 세워지게 되었다. 미국공사관은 덕수궁 후문 쪽에 자리잡고 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된후 1884년 최초의 주한공사 루시우스 H 푸트장군이 부임해오자 당시 정5품 한림 민계호(閔啓鎬)의 저택을 미화2천달러(한화1만냥)에 구입하여 공사관 겸 저택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러시아공사관은 현 정동교회 건너편(정동 15-1번지, 1977년 사적253호 지정)에 1890년(고종27) 건축되어 고종황제가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1986년2월1일부터 다음해 2월20일까지) 머물렀다.
영국공사관은 덕수궁 북쪽 현재의 위치(정동 4번지)에 1890년 세워졌다. 프랑스공사관은 1886년6월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고 그 이듬해 박동 독일공관 서편에 인접한 한옥을 사용하였으나(수표교 북방도로 현 관수동 126번지) 협소한 것을 이유로 1888년 11월 러시아공관과 정동교회가 인접한 지역(현 창덕여중 자리)에 새로 공관기지를 선정 구매하여 1889년 10월 이사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공사를 철수하였다. 1901년(광무5)에는 각 외국 공관에 정동 황궁(皇宮) 근처에 고층건물을 짓지 말도록 통보하기도 하였다.
구미열강의 공사관 뿐만 아니라 구미인들이 세운 양옥건물들도 줄을 이어 세워졌다. 덕수궁 서남쪽에 있는 정동교회(정동32-2번지)는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가 조선에 입국하여 감리교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1885년 7월 한국인 가옥을 구입하여 예배처로 삼은 것에서 비롯되어 1895년 한옥을 개조하여 새 교회당건물을 세웠다. 1890년 조선에 전파되어 온 성공회성당(정동 3번지)은 1914년 서울 도시계획에 의해 현재의 태평로 일대가 확장되면서 영국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어 1926년 5월 완공되었다.
외국인 상대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이 1900년 정동(정동 32번지)에 세워졌다. 이 호텔은 1885년에 초대 노국공사(露國公使) 웨베르(Waber)와 함께 내한(來韓)한 손탁양이 1895년에 고종으로부터 정동에 있는 한 가옥을 하사 받아 외인(外人)의 집회소로 사용하다가, 1902년 10월에 이 구식가옥을 헐어서 2층 양관을 신축하였다. 2층은 귀빈실, 하층은 보통실과 식당을 두었다고 한다. 이 호텔 건물은 1918년에 이화학교에서 매수하여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그것을 헐고 1923년 프라이 홀을 지었다.
일제시대의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일대 모습
일제강점이후에는 궁의 서쪽 선원전의 터를 일부 통과하는 도로가 열였다. 지금의 미대사관저와의 사잇길이 그것이다. 선원전을 헐고 그로부터 북쪽으로 전일의 경기여고 교사를 지었다. 이듬해 1923년에는 그 맞은편 제사 준비소 터에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의 교사를 지었고, 1927년에는 그 동쪽 언덕 위를 밀어내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의 청사를 지었다.
이화학당(梨花學堂)은 중학과(中學科)와 대학과(大學科)의 창설로 학교체제가 완비되어갈 무렵 학생수가 증가하여 기왕에 있던 메인홀(Main Hall)만으로는 학생을 완전히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학당장 프라이(Lulu E. Frey)는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하여 정동 30번지를 구입하였는데, 이 터는 1896년에 설치되었다가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폐쇄된 원호국 시종원(侍從院)이 있던 곳이다. 프라이는 미쓰 홀부룩(Miss Holbrook)이 희사한 기금으로 1914년 착공하여 1915년 3월 준공하였다. 원래 홀부룩의 기금은 그의 동생인 사라 심프슨(Sarah J. Simpson)이 세상을 떠날 때 위탁한 것이기 때문에 이 건물을 심프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이라 하였다. 또한 학당장 월터는 독자적인 유치원 건물의 필요성을 느껴 미국의 에드가 후퍼부인(Mrs. Edgar Hooper)으로부터 기부금 1만원을 받아 이명원(李命遠)으로 하여금 유치원 건물을 짓게 하였다.
1921년 5월 우선 60평의 교사를 건립하고 동년 10월에 40평의 교사를 동년에 증축하여 총 건평 100평의 유치원 전용건물(에드가 후퍼기념관 : Ralph Edgar Hooper Memorial Kindergarten Building)이 완성되었다 한다. 프라이홀(Frey Hall)은 정동 29번지에 184평의 손탁호텔을 구입하여 이 자리에 새 건물을 건축한 것으로, 1922년 8월 제5대 학당장 월터가 착공하여 1923년 9월 제6대 학당장 아펜젤러 때 완공되어 프라이홀이라 하였다. 이 건물은 1935년 전문학교가 신촌으로 옮긴 뒤 이화여고에서 사용하다가 1975년 화재로 2 · 3층 474평이 소실하였다.
조선말에 호조 대신 조세, 국채, 화폐 등 재무 행정을 관장한 관아인 탁지부는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나서 세종로에서 덕수궁 옆 중구 정동으로 이전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호조를 폐지하고 탁지아문(度支衙門)을 설치했는데 1895년에 탁지부로 개칭한 것이다. 탁지부가 이전되어 사용한 건물은 고종이 양위(讓位)하기 전에 의정부 청사로 설계한 것으로 1907년 12월에 준공되었지만 한일신협약이 체결된 이후였으므로 탁지부 청사로 변경했다. 이 건물은 일제 침략기에 고등법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1970년에 헐렸다. 현재 서울특별시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서울고등법원 청사는 중구 서소문동 37번지에 위치해 있다. 본래 재판소는 대한제국시대부터 공평동에 있었으나 1927년 6월 정동 언덕의 원래 총독부 분실이 있던 자리에 경성재판소로서 새 청사의 신축을 시작하여 1928년 8월에 준공되기도 하였다.
광복이후 현재의 덕수궁
광복을 맞으면서, 덕수궁 내의 석조전이 새로운 역사 문화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그 해 10월 해방기념 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으며, 그 이듬해 1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임시회의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또한 1948년부터 1950년 6.25가 발발할 때까지 UN한국위원단에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54년 6월에는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하였으며, 1955년에는 석조전 건물의 일부를 육군 공병단에서 수리 복원하였다. 1961년 10월 정식관리기구인 덕수궁관리사무소가 설치되어 관리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 해 11월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 1차 도로확장공사로 시청 쪽 담장이 철거되고 철책으로 대체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7월 덕수궁을 사적 제 124호로 지정하였다. 다시 1968년 5월에는 서울시 도로확장공사로 시청쪽 도로에 편입되어 설치된 철책을 철거하고 담장을 설치하였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남대문경찰서 태평로파출소가 덕수궁 동북담모서리에 신축되었으며, 이 공사로 덕수궁 대지 25평이 편입되었다. 7월 15일에는 담장 이전공사로 담장 만을 궁 내부로 이전하고 대한문(大漢門)은 원위치 도로상에 폐쇄 고립됨. 당초 당 궁 총면적 20,114평 중 1,977평이 도시계획 등에 의해 편입되어 18,137평이 보존관리 면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덕수궁에서 관리하여오던 미술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대통령령 제3525호) 1970년 8월에는 도로상에 폐쇄 고립된 대한문(大漢門) 이설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이설 준공되었다. 1973년부터 86년까지 석조전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으며, 98년 8월 석조전 서관이 다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개관하였다.
1992년 12월 덕수궁 관리사무소의 직제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궁중유물전시관은 덕수궁관리는 물론 5대궁궐 13개능원에 분산 소장되어있던 궁중유물을 한군데 집중 관리하게 되었으며, 석조전에 일반인들을 위한 전시관도 개관하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사적 제124호. 지정면적 6만3190㎡. 이 궁은 조선시대에는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려왔으며,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여기서 즉위하였다. 그해 창덕궁이 완성되었으므로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으며, 경운궁이라는 궁호(宮號)를 붙여주었다.
조선 후기의 이 궁에는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는 정도였다.
고종 말년 조선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왕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897년 왕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하여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다. 이 무렵 궁내에는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는데,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고 궁의 정문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으며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910년 궁내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 궁에서 일어났는데, 1897년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까지 거처하였고, 1904년 헌종의 계후(繼后)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하였으며,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하였다.
1907년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하였고 고종의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며,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그 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다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자리에 들어오게 되어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석조전은 6·25사변 중 내부가 불타기도 하였으며 사변 후 이 궁은 공원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어왔다.
〔위치와 건물배치〕
덕수궁은 당초 사가(私家)이던 것을 선조 때 임시로 왕이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이 된 것인 만큼, 궁이 자리잡은 위치나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 위치는 한성부(漢城府)의 서부 황화방(皇華坊)·정릉동(貞陵洞)일대로 이곳은 원래 태조의 계비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능은 태종 때 옮겨지고 그 자리에 월산대군의 집이 지어졌던 것이다.
이곳은 도성 내의 주요가로와도 직접 면하여 있지 않은 곳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은 궁이 있는 곳으로는 여겨지지 않던 것으로 보인다.
덕수궁은 결국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건물의 배치도 이때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의 상태에서 그 위치를 알아보면 궁의 서쪽은 미국대사관 남쪽 길을 따라 러시아공관이 있던 언덕 일대와 신문로 일대에 해당되고, 북쪽은 영국대사관을 거쳐 성공회(聖公會) 앞길을 따라 덕수국민학교 담 위쪽을 지나 신문로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이 자리에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로 영국·미국·러시아의 공관터를 내주면서 궁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서양식 건물이 지어지고 도로가 생기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정전과 침전(寢殿)이 있는 부분, 선원전(璿源殿)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重明殿)이 있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남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이 있었다.
정전의 뒤편에는 석어당·즉조당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은 고종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건물들이다.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고 함녕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 동북쪽에 수인당(壽仁堂), 동쪽에 영복당(永福堂)이 있었다. 중화전의 서북쪽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으며 관명전(觀明殿)·보문각(寶文閣) 등이 중요한 것들이었다.
중화전은 처음 중층지붕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져, 2층으로 조성된 월대(月臺)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화재 뒤 재건되면서 규모를 줄여 단층건물로 만들었다. 중화전 주변에는 사방에 행각이 세워져 있어 중화문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것도 철거되어 없어졌다. 중화문 역시 당초는 중층건물이었으나 재건되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축소되었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형식(翼工形式)의 간결한 건물이다. 1985년 중화전 및 중화문이 보물 제819호, 함녕전이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석어당은 궁내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본래 이 건물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여 선조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1906년 재건된 건물이 지금 남아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조적식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평성문 밖 지금 미국대사관 서쪽에는 이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던 중명전이 있었고,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에 대하여는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이밖에 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는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러시아공관 북쪽 언덕에서 큰 길을 건너 경희궁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지방법원이 있는 자리로도 이어졌다. 남쪽의 구름다리는 그 건너에 과거 의정부(議政府)가 옮겨와 있었기 때문에 궁과의 내왕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었다.
〔건축구성의 변화〕
궁의 배치는 1904년 큰 화재가 있은 뒤로 변화되었고,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되었는데,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은 기존의 정전 건물들과 축(軸)도 일치되지 않고 그 위치도 정전과 인접하여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리고 말았다.
화재 뒤 건물이 중건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의 변경이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6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그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쳐 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궁으로의 진입은 동쪽 모퉁이에서 시작되어 서쪽을 보고 들어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꺾여 정전에 이르게 되었다. 대한문은 1968년 도시계획에 의하여 덕수궁 담장이 안쪽으로 옮겨지면서 1970년에 안으로 옮겨졌다.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며, 이 가운데 돈덕전·석조전이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돈덕전은 평성문 밖 북쪽에 있었으나 철거되었고 그 남쪽 가까운 위치에 석조전이 세워졌다.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건물로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이웃한 궁의 정전과 주변의 한식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건축구성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더욱이,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의 본래의 모습이 상당히 파괴되었다.
덕수궁은 비록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줄여서 원단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된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된 원구제는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원구제는 중단되었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에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부터이다. 현재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 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구 러시아 공사관(사적 제253호)
고종 27년(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이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 2층만이 남아있었으나, 1973년에 복구되었다. 한쪽에 탑을 세웠으며, 정문은 개선문 양식이다. 일본군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세자와 함께 피신하여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을 했다. 현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어 이곳에서 덕수궁까지 연결되있었다고 한다.
정동교회(사적 제256호)
고종 광무 2년(1898)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건물이다. 본래는 십자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 날개 부분만 늘려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모습에는 손상이 없다. 벽돌쌓기를 하였으며, 곳곳에 아치형의 창문을 내어 고딕양식의 단순화된 교회당 모습을 이루고 있다.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기단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배어있어 주목된다. 이 교회당의 종은 장식없는 내부 기둥들의 겉모습과 함께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기 있다.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북미계통의 단순화된 교회건물이다.
경희궁지(사적 제271호)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서울성공회성당(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35호)
로마네스크 양식의 3층 교회건물이다. 조선 고종 27년(1890)에 우리나라에 온 성공회 1대 주교인 코프의 전도활동으로 성공회의 기초가 잡히게 되자,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가 건립하였다. 영국인 딕슨의 설계로 감독관 브로크가 192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5월에 완공하였다. 十자형의 평면구조를 갖고 있는 이 교회는 기초부와 뒷면의 일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나머지 벽체는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건물 전체에 공간상의 높낮이를 다르게 하여 율동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종탑부는 중앙의 큰 종탑과 그 앞의 작은 종탑이 생동감있게 연결되어 있다. 서울 성공회성당은 일제 침략기에 서양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본격적인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경교장(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129호)
1938년에 지어진 양옥주택으로 안정된 비례와 아치창을 이용한 단아한 외관이 특징이다. 1930년대 성숙된 건축술을 잘 보여주는 이 건물은 광복 후 김구(1876~1949) 선생이 한동안 사용하기도 하였다. 김구 선생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국내ㆍ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광복 후 남북이 하나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힘썼다. 경교장은 1949년 김구 선생의 저격사건이 벌여진 현장이기도 하다. 내부에 부분적인 변형이 있지만 건물의 모습이나 기본적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