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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일본 전도와 조선 및 일본에서 천주교 박해 및 기리시탄 다이묘!
16세기에 예수회가 동남아를 거쳐 일본과 중국에 그리스도교 포교를 시작할때 중국, 일본 및
조선 세 나라는 모두 유교, 그중에서도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으니 서양의 천주교는
동양에서 전도가 쉽지 않았는데 특히 조선에서는 5차례에 걸친 대규모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1866년의 병인양요는.... 정조때 신해박해를 비롯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등
4번 이후에 그 다섯번째인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일어난 것인데, 프랑스와 조선인
수만명의 천주교도 학살로 일어난 것이니 예년 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고 할 것입니다.
1866년 러시아의 함경북도 침입을 프랑스의 힘을 빌려 저지하려고 했던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
가 지방에서 늦게 오는데다가 러시아군이 물러갔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천주교 탄압 교령을
포고하자 기독교 성경을 불태우고 십자가와 마리아상이 처참하게 짓밟히니 "병인박해" 입니다.
프랑스인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되었으며 박해는 수개월간 이어지니 공식적
으로는 천주교 신도 8천여명이 처형되었는데..... 하지만 체포를 피해 산속으로 피신
하여 쫓기다가 사고나 병으로 죽고, 굶주림에 쓰러지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
였으니 그 숫자 까지 포함하면 피해자는 공식 기록 보다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나라 보다 먼저 천주교를 접한 이웃 일본에서도 조선에 못지 않은 천주교
박해가 있었으니... 예수상이나 십자가와 성화를 길에 깔아두고 밟는(에후에)
사람은 배교자로 간주해 용서했으나 거부하는 자는 고문을 가하고 죽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주로 화형을 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고통을 안겨 죽이기 위해 거꾸로
메다는 “아나즈리 처형” 을 하는 등 수많은 일본 천주교도가 "순교" 했습니다.
1549년 8월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인도 고아에서 말레이시아로 건너오니
말래카의 저팬타운에서 일본인 안지로의 도움으로 규슈 가고시마에 상륙해 선교를 하고
이어 도착한 야마구치에서 다이묘 오우치씨는 천주교 포교를 도왔으며, 1569년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교토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만나서는 천주교 포교에 큰 도움을 받습니다.
일본인 수사 로렌스는 히데요시를 알고 있었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은후인 1586년 3월 16일,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와
루이스 프로이스는 공사중인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 천주교 포교에 대해 도움을 받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에 보면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일본은 동생 히데나가에게 맡기고
자신은 조선과 중국을 정복하고자 하니, 지금 2천척의 선박을 건조하기 위한 목재를 모은다면서
선교사들에게 대포와 총을 갖춘 대형 서양선박 나우선 2척의 조달을 알선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에게 조선과 중국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두 크리스천이
되도록 명령할 것이며 그 후에 자기는 일본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는.... 또 장래 일본인의
절반 혹은 대부분이 크리스천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사카성 천수각과 재보가 저장된 탑의
문을 열어 구경시켜 주는데 오르간티노 신부의 기록에는 포르투칼 배를 알선하겠다고 말했답니다.
히데요시는 “ 이 방에는 금이 가득차 있고 다음방에 은과 견사, 그 옆방에 다마스커스 직물, 또 다른
방에는 차 도구, 다음은 도검과 무구가 있다” 고 말하고는 다른쪽 방으로 가니 유럽산 홍색 외투
12벌, 또 금실로 재봉된 조립식 침대, 그리고 황금으로 장식된 다실 등을 일일이 구경시켜 줍니다!
선교사들은 성 안의 크리스천 부인들을 통해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가 남편 히데요시에게
선교사들에게 특허장을 내려주라고 부탁하니, 애처가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에서 천주교
의 포교를 허락하며 교회에 대해서는 일체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고 병사들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특허장 2장을 발부해 주면서.... 한통은 인도와 포르투칼에도 보내랍니다?
서양 선교사들에게 오사카성의 방들을 손수 구경시키며 입에 혀처럼 놀런 그토록 친절했던
히데요시는 규슈를 정복한 후에 돌연히 기리시단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선교사들을 힐문하더니 1587년 6월 19일 청천벽력같은 선교사 추방령을 발표합니다.
대원군이 러시아가 물러가자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없어지고 내실에 천주교도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돌자 태도를 180도로 돌변해 천주교 탄압력을 내렸듯이, 히데요시도 사쓰마의 시마즈씨가 80%를
장악한 규슈를 정복하는 전쟁에서 혹시나 서양 무력의 도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모양
인데 이제 규슈를 정복했으니 더 이상 서양 무력을 빌릴 필요가 없으니 배척하게 된 것으로 봅니다?
“너희는 왜 일본 방방곡곡 거리에서 포교하는가? 왜 말고기와 소고기를 먹는가?
왜 너희 유럽 상인들은 우리 일본인 부녀자들을 돈을 주고 사서는 외국에 노예로 파는가?”
그러니 토사구팽이라는 것은 동서고금 어느시대나 있던 것으로 필요할때는 간절한 태도를 보이지만,
일본에서 다이묘들 까지도 천주교도가 되어 세력이 급격히 늘어난데다가 서양 상인들이 저 일본인
부녀자들을 노예로 마카오에 파는게 심기를 거슬린 것인데 규슈 정복 후에야 본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히데요시의 추방령에는 “일본은 신국이므로 크리스천 나라에서 악마의 가르침을 설교하기 위해
온 것은 나쁘며, 예수교 신도들은 신과 부처의 사원을 파괴하니 일본의 법이 파괴되는지라
선교사들은 20일 내에 떠나라, 단 포르투칼 나우선들이 상거래를 위해 오는 것은 허락 한다”
서양 선교사들에게는 비와호수에 천수각을 금으로 도배한 의 히데요시의 이즈치성
아래에 교회를 설립하는 편의를 봐주는등 몇년간 봄날이었는데 전혀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추방령으로 선교사들은 나가사키로 가서는 숨어지내게 됩니다.
나가사키의 교회들이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히데요시는 이후 별다른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는지라 흐지부지되었다가 나우선의 사령관이 예방하고 선교사 발리냐노가 인도
부왕의 사절이라고 칭하고는 교토 취락제에서 히데요시를 만나면서 없었던 일이 됩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주교도들을 처형하니 3만 7000명에
달했는데.... 부모 앞에서 자식이 온천구덩이에 던져지고, 사람의 몸에 불로 고문을 가해 타
죽이기도 했으니 당시의 극심한 박해로 현재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인구의 1%에 못미칩니다.
"절망하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두렵습니다. 당신 침묵의 무게가 두렵습니다. 기도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허공에 기도하는 것입니까?"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을 원작
으로 한 마틴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는 이처럼 끊임없는 천주교 탄압에 고통받는 포르투갈
인 신부의 모습을 통해서.... 종교 만큼이나 숭고한 인간적 고뇌의 과정을 유려하게 묘사합니다.
영화의 무대는 나가사키로 천주교 선교 성지(聖地)라 역사적, 문화적 유산들이 많이 남아있으니
1597년 2월 5일 히데요시의 '천주교도 추방령' 에 의해 간사이에서 전도하던 선교사 6인과
일본인 신도 20명이 처형된 곳이고 순교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화형과 물고문으로 처형 됩니다.
1956년 사적(史蹟)으로 지정하고는 26명 성인의 등신대 동상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는 니시자카 공원이 완성됐으니 1950년에는 로마교황 피오 12세가 이곳을 천주교 교도의
공식 순례지로 공표했으며 개항 후인 1865년에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 이 건축되었습니다.
천주교 금교(禁敎)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온 천주교도들이 250년간 세월을 뛰어넘어 프랑스인
신부와 만났던 '신도발견' 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한데 건물 안에는 100년 전에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어 있고 마리아상은 1865년 프랑스에서 직접 가져와 경건함을 더합니다.
기리시탄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 이라고 불릴 정도였는
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에도 탄압이 계속되니 1637년에는 시마바라반도에서 아마쿠사시로
주도로 4만명의 신도가 반란을 일으켜 4개월간 12만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마바라반도 운젠시의 온천은 뜨거운 온천수가 지표면을 뚫고 솟구쳐나오니 끓어오르는 땅, 산불
이라도 난 듯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수증기,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지옥'을 만드니
개종을 거부한 천주교 신자 수십명이 펄펄 끓는 늪지대에서 고문을 당한 끝에 던져져서 죽었습니다.
시마바라는 키리시탄이었던 아리마씨가 전봉된후 마츠쿠라씨가 들어오면서 천주교도를 무지막지
하게 탄압했고 농민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린데다가 키리시탄의 본거지인 필리핀의 루손을
공격하겠다면서 전쟁세까지 부과하며운젠 지옥(雲仙地獄) 고문이라 부르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인근인 아마쿠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로 가톨릭이 융성했지만 테라자와씨가
들어와 종교 박해를 자행하자 시마바라의 키리시탄 농민 2만여명이 무장 봉기를
일으키니 아마쿠사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합세하니 지도자는 하느님의 대리인
이라고 불리던 세례명 '예로니모' 의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라는 16세 소년이었습니다.
또한 막부의 영지 재배치로 인해 주군을 잃고 낭인이 되어 떠돌던 기독교 신자 사무라이들도 대거
참가했으니 반군의 병력은 3만 7천의 키리시탄이었다는데 시마바라 번에서 3천명의 군대를
보냈지만 참패당하고 혼도성이 포위되니 주민들이 궐기해 반란군에 합류하니 혼도성이 함락됩니다.
천주교도 반란군은 나가사키까지 장악해 막부군과 장기간 농성전을 계획해 도미오카성
을 공략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폐성이였던 하라성을 보수해서 농성전을 시작하는데
이후 3번의 공세 끝에 이타쿠라 시게마사가 이끄는 진압군을 궤멸시키자 에도 막부
는 병력을 12만으로 증강시켰고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마츠다이라는 육지와 바다 양쪽으로 포위하여 하라성 자체를 봉쇄했으며 닌자들을 성내로
잠입하고 정찰시키니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해초로만 연명하게 될 지경이 되자
총공격을 감행하니 4개월 만인 1638년 4월에 하라 성이 함락되는데 반군은 단 1명도
항복하지 않고 전부 전사했는데 믹부군도 10,800명이 전사하고 11,00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일본은 서양세력의 침략을 두려워 해서 나가사키 섬 데지마 에 선교에는 관심없이 무역을 원하는
"네델란드인의 상관" 만을 허락한채 "쇄국정책" 으로 들어가는데, 일본인은 외국에 출국과
입국을 일체 금지하니 동남아에 거주하던 일본 상인들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서 삽니다.
일본은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말레이시아 말라카의 일본인촌에서 만난 안지로의 안내로 1549년
8월에 일본에 온데 비해 조선은 1631년 정두원이 북경에서 천주실의 책을 가져온 이래
성호 이익등에 의해 학문적으로 연구되다가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그라몽 신부
에게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부도 없이 교회를 세우니 "일본 보다 이백여년" 이상 늦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 상인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동남아로 진출해 필리핀, 베트남, 태국, 말레이에
일본인 거류지 저팬타운을 만들고 무역한데 비해 조선은 500년간 단 한척의 무역선도
띄우지 못했고 단 한명의 상인도 자율적으로 나가지 못했으니 조정의 쇄국정책도 있지만
또 “효” 의 나라라 외지에서 부상을 당해 부모님 걱정끼치는걸 불효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상인들은 먼저 조정에 신청해 돈을 내고 허락을 받은 후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에
끼여 북경에 따라가 숙소 마당에서 찾아온 중국 상인과 거래했으니, 조선은 백성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으며 농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천시한지라 상인들은 관리들
에게 돈을 주고 따라가는데 압록강을 넘을때와 올때도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조사당했습니다.
일본인 동남아 거류지 중에도 베트남 호이안과 태국 아유타야야가 큰데 아유타야에서는 일본
상인들이 칼을 들고 태국 왕실의 후계자 분쟁 전쟁 에 까지 참가해 큰공을 세운 일도
있으며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인도 고아에서 말레이시아 말래카로 와서 일본인촌
에서 만난 안지로에게 세례를 준후 그의 안내로 1549년 8월에 규슈 가고시마에 상륙합니다.
유럽에서 개신교 등장으로 인해 교황은 불안했고 종교재판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을 뿌리뽑아 없애려
했던 도미니크 수도회도 좌절하긴 마찬가지였으니,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교황을 알현해 세상의
종교를 교황청을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면서 자비에르등과 함께 ‘예수회(Jesuite)’ 를 창설했습니다.
규슈 가고시마에는 자비에르 공원 ザビエル 公園 이 있으니 공원에는 일본에 최초로 "천주교
를 전파한 자비에르" 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으며 야마구치시에도 기념비와 성당이
있고 시모노세키시 항구에도 기념비가 서 있으니 “ Α-Ω 알파에서 오메가“ 라고
적힌 비문은 “聖 フランシスコ サビエル 下関上陸記念碑” 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사무라이인 안지로를 인도 고아에 있는 성 바울 대학에 보내
신학공부를 시켰지만, 그 수십년 전에 가고시마 출신으로 동남아에 진출해 있던
“베르나도” 라는 일본인이 최초로 유럽에 가서 대학 공부를 하고는 교황 바오로와
이그나시오 로욜라를 만났으며 1557년에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인 1582년에는 규슈의 기리시탄 영주들인 아리마 하루노부와 오토모 오토모 요시시게 등이
4명의 덴쇼 소년 사절단을 로마에 보냈으니.... 선교사 추방령이 흐지부지되던 무렵 저 인도
부왕의 사절단(?) 이 오사카성에 가서 히데요시를 만날때 소년들도 함께 서양악기를 연주했습니다.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가고시마에서 안지로의 친척들에게 포교를 한 것을 시작으로
1549년 9월 이찌우지 성에서 타카히사 성주를 만나 천주교를 전도한후 북쪽 규슈
센다이로 가서 포교활동을 해서 100명의 예수교인을 확보하는데 1550년 7월
교토로 가기 위해 후쿠오카를 거쳐 시모노세키에 상륙한후 야마구치 (山口) 로 갑니다.
당시 야마구치 나가토(長門, 시모노세키)와 스오, 히로시마등 4국과 북규슈 2국등 6국은
백제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의 31세손인 다이묘 오우치(大內) 씨 영지였으니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화승총 등을 선물
하자 크게 기뻐하며 대도사라는 빈 절을 교회로 내줄 정도로 전도활동을 도와주었습니다.
야마구치에서 5개월간 전도해서 500명에게 세례를 준 자비에르는 중국 전도를 위해 1551년에
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27일에 광둥성 앞의 섬에서 열병으로 죽는데
중국 전도는 1583년에 중국에 도착해 곤여만국전도와 천주실의를 저술하고 1601년 북경
에서 신종 황제를 만나 천주당허가를 받고 200여명 신도를 얻어 천주교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마테오 리치가 1594년에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는 7년후 1631년 정두원이 조선에 가져
왔고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교회를 세운게
조선 천주교의 유래로 봅니다만.... 일부 학자들은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191년
전인 임진왜란 때로.... 1593년 세스페데스 신부가 진해에서 미사를 올린 것을 시초로 봅니다.
임진왜란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병사까지 천주교도라 군기로 십자가 를 앞세우고 조선을 침략
했으며 웅천왜성에서 포르투갈 선교사 세스페데스 집전아래 "미사" 를 올렸으니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로, 아버지는 요나단이고 어머니는 막달라며 처는 쥬스타이고 대마도주인 소
요시토시 부인이 된 딸은 마리아 였으니 신앙심이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으로 믿음의 가족 이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외에도 제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간베에, 다카야마 우콘, 고지마 쥰겐,
야마쿠사 다네모토, 소 요시토시, 오토모 소린, 아리마 하루노부, 오토모 요시시게, 오무라
요시아키등이 모두 일본의 기리시단(吉利支丹 Christian) 으로 잘 알려진 다이묘들이니
"기리시단 부대" 는 십자가 군기(軍旗)를 앞세우고 조총으로 무장해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습니다!
고니시는 조선인 “줄리아” 를 규슈 우토성에 데려가 처인 쥬스타에게 맡기니 1596년 5월 베드로
모레홍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도쿠가와 후궁 시녀가 되었다가 1612년 절해 고도 고즈시마
에 유배 되어 죽는데 매년 5월 셋째주 토, 일요일 “줄리아 축제” 가 열리니.... 도쿄에서 180km
뱃길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며 “서던 올 스타스” 의 노래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입니다.
돌아가라 나의 푸른 새 메마른 느릅나무의 가지 곁으로
네가 없는 오오 세상 속은 아침 해 조차 떠오르지 않아
불타라 여름의 십자가 남쪽하늘 높이
밤의 어둠을 비추는 별자리는 눈물의 상들리에
마치 무지개처럼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사랑의 끝을 알리듯이 찢겨진 나의 로자리오
13살에 포로로 잡힌 또 다른 소년 권빈첸시오는 고니시의 딸이며 대마도주의 아내 마리아에게
지극한 신앙으로 양육되어 교토 신학교를 졸업하고는 1603년 예수회 수사 가 되었으니
권빈첸시오 수사는 조선 전도를 위해 여러차례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한후
1625년 소라신부 등과 순교하는데...... 1867년에 205명 순교자는 복자위(福者位) 를 받습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 27일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해 웅천왜성(倭城) 에
들어왔으니 일요일에 미사가 열렸는데, 하느님의 복음이 최초로 전해졌으며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천주교에 귀의한 자들이 다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1600년 20만이 참전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1611년 천주교 박해때는 21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순교했으니..... 세스페데스 신부는
노예가 되어 마카오등지로 팔려가는 조선인 남녀 2천여명을 구출해서 영세를 주었다고 합니다.
천주교를 비방하는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항해기에서 과장되기는 했어도, “임진왜란 당시 왜 장군
들은 전부 그리고 사병들 대부분이 천주교인 이었다.” 라고 썼습니다. 대영 백과사전 의 일본인 역사
편에서 블린클리는‘부산에 상륙한 25만 왜군 중 최소한 10% 이상이 천주교인 이었다.’ 라고 적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Luis Frois) 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며
30여년을 왜국에서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들은 사실을 기록한 일본사(日本史) 라는
책에서 조선인 을 ‘이교도(異敎徒)’ 라고 기술 했으며..... 기리시단 장수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 ‘하느님이 쓰시는 칼’, ‘임진왜란을 하느님의 성전(聖戰)’ 이라 적었습니다.
위의 표현은 성결대 교수이자 전 중앙일보 기자로 이순신 인성 리더쉽 포럼 대표인 김동철씨의 글에
나오는데... 홍성옥 목사, 필립 천지인, 사랑해 알라스카, 바닷속, 감만 라디오, 초승달 및 아천님의
블로그에도 보이지만....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정성화역 임진난의 기록과 박수철역 오다 노부나가
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는 보이지 않는데, 12권 짜리 일본어판 완역서에는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인에게는 끔찍한 전란 이지만 예수교 신부들에게는 하느님의 성전이라? 일본사(日本史)
에서 “히데요시는 인물됨이 하찮았지만 신부들은 ‘하나님의 칼과 채찍’ 이라 꼬드겨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 왜란때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는 세례를 받고 예수회를 광신하는 자 였던 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때 고니시를 제1군 선봉장으로 신임한 것은 예수회이기 때문이다.” 라고 김동철씨는 말합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지은 일본사(日本史) 에는 마리아의 남편으로 조선
에서 매년 쌀 1만섬을 받고 있던 대마도주 야카타(소 요시토시)는 장인인 쓰노카미
(고니시 유키나가) 에게 일본군이 조선에 쉽게 침입하는 방법과 조선 정복에
필요한 지식과 수단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선봉을 지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아고스티뉴(고니시 유키나가)로 부터 보고받은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은 무척 흡족했으며 다른
모든 군대에 앞서 진격하는 명예(제1군)을 아소스티뉴에게 부여하자 이에 다른 영주들은 시기
했는데 시모(규슈)에서 조선에 쉽게 건너갈수 있는 항구가 어딘지 묻자 가신들은 히젠국
동프로타지우의 형인 하타라고 불리는 이교도 무장의 영토 가라쓰의 나고야 라는 항구를 말합니다.
아고스티뉴(유키나가) 부하 중에 기리시단 다이묘와 장수들은 사위 야카타(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아리마 영주 프로타지우(아리마 하루노부), 바르톨로메우(오무라 스미타다), 산슈(오무라
요시아키), 히라도의 제로니무(고테다 자에몬)와 형제들, 아마쿠사의 영주 주앙(히사타네),
오야노의 영주 주앙, 고쓰우라의 영주, 사사키의 영주 비센테 베에몬(히비야 효) 등을 거론합니다.
제1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7000명, 소 요시토시 5000명, 마쓰라 시게노부 3천명, 아리마 하루노부 2천명,
오무라 요시아키 1천명, 고토 스미하루 700명 합계 18,700명인데..... 이교도는 마쓰라 시게노부가
유일하니 부산진성, 동래성, 상주성, 충주성과 탄금대, 한강과 한성(서울), 임진강 및 평양전투 를
치뤘으니 9군의 일본군이 치른 전투의 90% 를 1군 기리시탄 다이묘와 천주교 병사들이 치른 것입니다?
일본사에는 아고스티뉴가 4월 13일 부산진성 공략과 14일 불과 2시간만에 사다리를 타고 넘어 동래성
을 함락시키는게 나오는데 조선군 전사자는 5천명이고 일본군은 100명 전사에 400명 부상이며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상주를 거쳐...... 충주 탄금대에서 도라노스케(가토 기요마사) 군대의
도움을 거부하고 조선군을 전멸시키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조선군 생존자는 이일등 4명이라고 합니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같은 천주교도인 아고스티뉴에게는 승리를 쟁취하는 장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유키나가의 동생 루이스가 조선군을 먼저 베었다고 칭찬하면서 불교도인 도라노스케
(가토 기요마사)는 교활하고 술수로 가득찬 위선자라면서 고니시의 승리를 가로채기 위해
서울 진군을 함께 하겠다는요구를 고니시가 거절하면서도 길잡이 한명을 내주었다고 말합니다.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흰 비단에 붉은색 십자가 군기를 들었다면 제2군 가토 기요마사
는 일연종(日蓮宗) 신도이니 남묘호렝게교 (南無妙法蓮花經 남무묘법연화경) 깃발을
앞세웠는데...... 함경도에서 호랑이 사냥으로 유명한 장수로 북한 통일신보는
경상도의 민요인 “쾌지나 칭칭나네” 가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철수하는 왜군을 보고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 라고 한 환호에서
변형되었다고 하며...... 임동권이 지은 『한국민요집1』 에도 진주 지방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철수 하게끔 하는 내용을 담은 쾌지나 칭칭나네 수록본이 있다는데....
‘쾌지나 칭칭 나네’ 는 지금까지 농악에서 쓰이는 꽹과리 소리의 의성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는 히데요시의 1등 참모인 부친 구로다 간베에(요시타카) 처럼 천주교도
인데 정유재란시 5,500개의 조선인 코를 잘라 일본에 보냈으니 교토에 12만 영령이 묻힌
이총(耳塚)인데, 간베에는 원래 희메지성주였으나 노부나가에게 내부하면서 아들 나가마사
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쳤는데 부젠국 영주가 되고 전후 나가마사는 후쿠오카번주가 됩니다.
1614년 이수광이 펴낸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 (芝峯類說)에는“조선시골 장날의 장터에는 왜병이
산 사람의 코를 잘랐기 때문에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코 없는 사람이 많았다.” 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종군승려 교넨(慶念)의 조선일일기 (朝鮮日日記) 기록에 보면 정유재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이처럼 참혹한 전쟁은 없었다. 약탈과 살육후 집에 불을 지르니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고 조선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어린아이 노인, 여자 할것 없이
귀를 자르고 코를 베니 길바닥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산천을 진동했다. 조선사람들의 머리, 코, 귀를 대바구니에 담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사냥을 했다.”
루이스 는 다음과 같이 일본사 를 맺습니다. “이리하여 7년에 걸친 조선 전쟁 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전쟁은 우리(왜인) 천주교도들의 커다란 노고와 비용
지출 위에 지속되었던 것으로 영지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측면도 있었다.
하느님은 진실로 선하신분 이므로 성스러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의 적들로 부터 얻을수 있는 거대한 승리에 관한 기쁜
소식을 머지않아 접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성스러운 주 하느님의 심부름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