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러시아혁명과 1918년 1월 윌슨 미 대통령의 14개조 평화원칙. 두 사건이 식민지 조선의 민족종교에 불씨를 댕겼다.
특히 윌슨의 14개조 중 식민지 민족자결(제5조)과 국제연합체의 필요(제14조)는 피식민 국가들에게 거의 복음과 같았다.
그런데 이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특히 대종교인들은 민족 간 평등과 반제국주의 사상에 도달해 있었다.
백암 박은식은 1912년 저술한 「몽배금태조(夢拜今太祖)」에서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한 제국주의가 결국 전쟁을 불러오고, 그 뒤를 이어 평등주의가 부활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피해를 가장 잘 아는 나라가 조선이니, 우리가 반제국주의 기치의 선두에 서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1918년 이전에 이미 이 지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사상은 1917년 7월 상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으로 구체화되었다.
신규식·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성환 등 대종교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이 선언은 크게 세 가지 주장을 담고 있었다.
(1) 순종이 1910년 8월 29일 황제권을 포기한 그날 민권이 발생한 것으로, 대한제국 최후의 날이 신한국의 첫날이라는 주권불멸론과 국민주권론.
(2) 해외 각 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묶는 통일전선 구성.
(3) 민주공화제와 법치주의 실행.
이 선언은 2년 뒤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이어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는 더 전투적이었다.
조소앙이 기초하고 김교헌·박은식·신채호·윤세복·김좌진·이승만·안창호 등 39명이 서명한 이 선언서는 한일합방의 무효를 선언하고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라며 무장투쟁을 정면으로 호소했다.
3·1 독립선언서가 비폭력 무저항의 결기를 담은 것과 달리, 이 선언서는 칼을 뽑아든 선언이었다. 서명자 39명 가운데 대다수가 대종교 핵심 인사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선언서는 사실상 대종교의 독립선언이기도 했다.
당시 천도교 측의 이종일은 이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적었다. "중광단원 39명이 오히려 우리보다 앞서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겠다고 하니, 우린 무얼 했느냐."
대종교의 선제 행동이 천도교의 3·1운동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손병희는 1919년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을 불러 독립운동의 방략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운동'이라는 세 가지 원칙이 정해졌다. 그가 나중에 경찰 취조에서 밝힌 동기는 명확했다.
"파리 강화회의에 제창된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는 민심을 탐지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의 취지에 따라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언으로 뜻을 알리는 것이 목표였다.
보천교의 차경석은 달랐다. 그는 신통묘술로 일제에서 독립시킬 인물로 추앙받던 강증산의 제자였다.
1918년 10월 제주도 법정사에서 "왜노들이 조선을 병합하고 동포를 학대하여 조선민족의 구적이 되었다"고 선동하며 신도들을 이끌고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방화해 138명이 검거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도주한 차경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 잠입해 고종 인산에 참여했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니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사방으로 보내고 산중으로 사라졌다.
각각 비폭력 시위, 무장투쟁, 비밀의례.
같은 목표를 향해 세 종교는 전혀 다른 방법론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