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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김 성 한
멀리서 교회당 종소리가 울려왔다. 기도와 챤송가에 도취된 군중의 수성대는 소리가 들려올 듯 고요히 흐르는 밤이었다.
하꼬방 한모퉁이에는 열흘 동안 자취를 감줬던 중절모 사나이가 까딱 않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마모도 다쯔꼬(三本龍子)는 판대기 걸상에 앉은 채 김이 오르기 시작한 우동 남비를 지켜보면서 이따금씩 젖혀쓴 중절모에 겉곁을 보내면, 눈도 깜빡이지 않는 시선이 뺨을 찌르는 듯하였다. 어슴프레한 등불에 비치는 사나이는 사십이 훨씬 넘었고 오십까지는 된 상 싶지 않았다. 가끔 던지는 말투는 가장 고상한 말로부터 제일 천한 욕설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열흘 전만 해도 플라톤의 이데아가 어떻구, 이원론이 어떻구 떠들썩 하다가는, 당장 말머리를 돌려 자기가 밤마다 이리루 찾아드는 것이 뭐 그까짓 우동맛이 좋아서 그러는 줄 아느냐, 천만에 말씀이다, 그 근본원인으로 말한다면, 일녀(日女)의 그것을 일찌기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늘어놓았다. 술잔이나 마셨다면 혹 그릴 수도 있겠지마는, 이건 사람이냐 짐승이냐, 뻔뻔스럽기 한량없다고 마침 손에 들었던 다꾸왕 접시를 냅다 던졌다. 접시는 중절모를 스쳐 뒷벽에서 부서지고 사나이는 먹던 우동 그릇을 쓱 밀어젖히면서 힐끔 노려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밤마다 늦으막하게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미끄러지듯이 들어와서는 우동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먹는지 빠논지 통행금지 싸이렌이 불어야 일어서는 사나이였다.
그 사나이가 다꾸왕 접시 바람에 열흘 밤을 결근한 것이다. 결근 첫날 밤에는 문을 닫으면서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다음 날 밤에는 괴상한 사나이라고 했다. 사흘째 되던 날 밤에는 재미있는 사나이라고 했다. 닷새가 되고 보니 호젓한 느낌이었다. 일주일이 되어서부터는 그리워졌다. 이미 세상을 단념한 사십 과부가 이게 무슨 잡념이냐고 스스로 웃었으나 웃건 말건 그리운 건 그리운 거다. 문 밖에서 발자욱 소리만 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믐날 밤에는 들어는 안 오고 문반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다짜고짜 중절모로 단정하고 달려가다가 남포를 들이받아서 부숴버렸다. 새로 갈린 인테리 반장이 내일 아침 아흡시에 무슨 시위행렬에 나오라고 한마디 던지고 달아났다. 캄캄한 하꼬방 속으로 들어서니 괜스레 부아가 치밀어서 발끝에 채이는 쓰레기통을 마구 짓밟았다. 틀림없이 온다고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는 심사나 다름없었다. 기계적으로 풍로 앞에 가서 걸상 위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생각하면 허무한 노릇이었다. 이름도 직함도 모르는 사나이가 거진 한달을 두고 밤마다 찾아왔다고 하자. 은근히 보내는 눈초리도 심상치 않았다고 하자. 무엇이 그다지도 대견하다고 이렇게 발광하는 것 이냐? 세상을 단념했노라는 것도 생판 거짓말이 아니냐?
어둠 속에서 불을 켤 생각도 않고 남비를 내려놓았다. 빨갛게 핀 구공탄 구멍이 송송하였다. 판자벽에 걸어놓은 작업복 웃통이 나타났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난히 고요한 밤이었다. 세상은 모두 밤이요 자기의 지각만이 살아서 이렇게 수다를 떠는 것만 같았다. 근거 없는 수다였다. 허공에 뜬 수다였다. 그렇다, 내 자신 허공에 뜬 존재다. 가고시마(鹿兒島) 뒷산 옆대기 감나무 밑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가, 고아의 신세가 되어 목사의 손에 구출되어 가지고는 동양천지를 굴러다니다가, 이제 사십 객이 다 되어서 서울 변두리 하꼬방에 과부 신세로 구공탄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니까 말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거점이 있다. 풀 한 포기라도 뿌리를 박는 땅이 있고 산돼지도 굴이 있다. 산돼지는 그래도 굴이 무너지면 다른 굴을 장만하겠지만, 나는 요 하꼬방이 유일절대의 거점이다. 이것이 날아가는 날에는 모든 것이 없어지는 날이다. 그것은 내장을 세계로 삼는 거시〔蛔血〕가 내장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하꼬방 거시다. 중절모를 기다리는 마음은 거첨의 확대를 그리는 본능이 아니냐? 일찌기 대일본제국이 득세하였을 때는, 강아지 밸처럼 기다란 섬에서 와글와글하던 거시들의 거점은 이 반도를 거처 만주 벌판으로부터 중국대륙, 남방까지 터졌다. 그 당시만 해도 캄캄한 밸 속에서 꾸물거리는 거시의 의식은 조금도 없고 일망무제한 초원을 달리는 사슴의 기개가 있었다. 팔굉(八紘)은 일우(一宇)였다. 적어도 일본 민족에게는 그랬다. 바다를 건너 반도를 거쳐 대륙에 퍼지고, 멀리 남방에 흩어진 그들은 하는 일 없이 원주민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거시들이었다. 슈바이처 숭배자인 남편은 보따리를 걸머지고 만주로 건너가서 이 거시들의 행패를 사하여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뼈를 그 땅에 묻기로 맹세하였다. 다쯔꼬는 반대하였다.
―당신이 기도한다구 피를 안 빨거나 하느님이 용서할 줄 아시오? 공염불이지요. 용서해 달라는 건 피를 빨아먹는 걸 그냥 내버려뒀다가 죽으면 천국에 거둬넣어 달란 말이 아니에요? 차라리 모조리 없애버려 달라구 기도하시구려.
그래도 남편은 듣지 않았다. 믿음이 굳센 자의 기도는 하늘을 통한다는 것이었다. 통해서 못된 놈들의 마음이 착해지고 원주민들을 사랑하게 되고, 따라서 하늘나라가 우선 동양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사명이라고도 했다. 이 열렬한 목사를 따라서 봉천(奉天)에 자리잡고 고아원을 경영했다. 더러운 아이들을 줏어다가 깨끗이 씻어주고 잘 돌보아 주었다. 밤낮으로 이런 일을 되풀이하다가도 화가 치미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엔 남편한테 덤벼들었다.
“아 그래 이 따위 똥되놈 새끼 몇 마리 길렀다구 칠천만이 지지른 죄악이 용서될 줄 아시우? 데데해요.”
이런 때면 남편은 언제나 웃기만 하고 대담이 없었다. 스무 살이나 더한 남편, 일찌기 돌아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기를 먹여주고 공부시킨 그는 딱한 경우에는 항상 남편으로부티 아버지의 위치로 돌아가서 자식의 엉석을 웃음으로 무마하려 들었다.
8월 I4일, 그날은 다쯔꼬의 생일이었다. 몰렸던 화가 일시에 터져서 들고 일어섰다.
“당신은 위선자요, 자위에요. 하느님이 어딨어요? 그래 당신, 하느님 본 일 있어요?”
그날 따라 남편은 정색을 하고 대꾸하였다.
“난 진심으루 하니까 적어도 위선자는 아니야. 자위일는지는 모르지, 하느님 이 있구 없는 걸 모르니까. 사람은 원래 버러지야. 버러지가 하느님 같은 위대한 존재가 있구 없는 걸 알 수 있나? 그지 믿는 거지. 믿으면 있는 거야.”
“그러니까 자위죠. 머리 속에서 만들어낸 하느님이니 가치니 사명이니 하는 따위루 둥이를 틀어 놓고는 그 속에 앉아 뻐기는 버러지가 당신이에요.”
남편은 껄껄 웃었다.
“아, 그래 기도를 하면 용서하구, 안 하면 벌을 주구, 자기를 믿어야 천국에 넣구, 다른 자들을 모조리 지옥에 쓸어넣는 고따위 불깍쟁이 하느님이 어딨어요? ”
남편은 또 껄껄 웃었다.
“웃기만 하면 되나요?”
남편은 여전히 껄껄 웃었다.
다쯔꼬는 홱 돌아서 거리로 나가 한 바퀴 돌았다.
이튿날 일본인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부부는 밤이 되어도 뒤숭숭하기만 하고 잠이 오지를 않았다. 다쯔꼬는 날이 밝는 대로 일본으로 돌아가자거니 남편은 이 땅에 뼈를 묻기로 하느님께 맹세했으니 무슨 일이 있든 버티고 있어야 한다거니, 옥신각신하는 판에 고아들 칸에서 와자끈하고 유리가 마구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웽강뎅강 소동이 벌어졌다. 다쯔꼬는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쩔 줄을 몰랐다. 남편은 크게 기침을 하고 일어서더니 바지를 입고 문을 활짝 열었다. 큰 놈, 작은 놈, 고아들은 제각기 집읕 부순 몽둥이를 들고 벌써 앞마당에 몰려와서 씩씩거렸다. 남편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웬일이야?”
스무살 난 반장 아이가 몽둥이를 위로 쳐들면서 무어라고 외치자 모두들 바싹 다가오면서 연제든지 넘겨칠 자세를 취했다.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느냐!”
남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반장은 흥 하고 이빨을 보이더니 어둠 속을 뚫고 층계를 올라섰다.
“배은망덕? 요 왜놈의 새끼야, 당장 물러가라!”
남편은 부드드 떨었다.
“나는 과연 왜놈의 새끼다. 그러나 내가 너희들한테 무슨 나쁜 짓을 했단 말이냐, 어디 말해 봐라.”
반장은 몽둥이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주둥아리는 여물었구나. 나쁘구 좋구 다 없어, 년 왜놈의 새끼니까 물러가란 말이다.”
반장 왕검(王劍)은 목사의 어깨를 내리갈겼다. 목사는 주저앉으면서 몽둥이를 빼앗아 들었다. 다른 아이들이 왁 몰려들었다. 쏘아보는 1대 30여 개의 눈초리 사이에는 살기를 띤 침묵이 흘렀다. 목사는 몽둥이를 어둠 속 멀리 냅다 던지고 웃통을 벗어젖히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느님이시여, 이들을 용서하소서…… 자 여기 나를 때려죽여라. 너희들 손에서 죽어서 뼈를 이 땅에 묻는 것이 내 소원이다.”
소원을 풀어준다고 대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때까지도 다쯔꼬는 이불 속에서 꼼짝을 못했다. 제정신이 들어서 뛰어나갔을 때는 피에 주린 무리들이 이미 한 생명읕 처치하고 자기의 목숨을 노리면서 달려오는 길이었다. 그는 어둠을 타고 뺑소니를 쳤다.
이때부터 다쯔꼬는 허공에 뜬 존재가 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하느님을 거점으로 하던 남편도 별수가 없었다. 내갈기는 방망이에는 얻어맞게 마련이요, 맞으면 죽고, 죽으면 어느 땅속이나 개굴창에서 썩게 마련이었다. 위대하다던 제국도 하루 아침에 쓰러지거든 계집 한 사람이 무엇이 어떻다고 날뛸 계제가 되느냐 말이다. 그러기에 남쪽을 향해서 헤매다가 피난민 열차를 집어탄 덕분에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했을 때에도 그는 태연하였다.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의 병사’가 팔뚝 같은 자지를 한 손에 거머쥐고 통로를 천천히 걸어오면서 눈에 띠는 계집마다 머리채를 잡아젖히고는 까레쓰끼? 야뽄스끼? 하던 때도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막상 자기의 머리칼을 잡아젖히고 ‘오, 야뽄스끼? 호로쇼’하고는 모든 사람의 시선도 본 척 만 척 사타구니를 멀리고 수작을 시작할 때도 가슴이 떨리기는 했으나 까무라칠 지경은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불신, 세상에 대한 지주가 남아서 꿈틀거릴 뿐이었다. 악착같이 살 생각도 없는 반면에 구태여 죽는다고 수다를 떨 맛도 없어서 흐르는 대로 흘러다니다 보니 지금 이 순간은 우동장수가 된 것이었다. 되려고 된 것은 아니었다. 보따리장수를 할 때도 보따리장수를 면하려고 애쓴 일도 없고, 지금도 이 하꼬방을 면할 의욕은 없었다.
이련 다쯔꼬가 요즘 와서 중절모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가 바탕으로 하논 허공에 한 점 구름이 나타난 것이었다.
사나이가 우동 그릇을 받은 지도 벌써 한 시간이 되었다. 이자는 먹는 것이 아니라 진짜 빠는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헤헤, 옥상 그동안 뭐니 뭐니 해두 내가 그리웠죠?”
없을 때 그립던 정이 단박 사라졌다. 다쯔꼬는 다시금 인간이 없는 허허벌판으로 돌아갔다.
“그리웠죠.”
화난 것도 아니지만 정다운 말투는 물론 아니었다.
“오 소레다(아 그거야), 내가 노린 건. 정이란 건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데서
백열화하는 물건이거든. 털어놓구 말해서 고레데모(이 래뵈두) 일찌기 미국, 영국, 불란서에서 가꾸몬노 운노오 기와메다 오도꼬데네 (학문의 심오한 원리를 연구한 사람이야), 그러나 인생 오십에 깨달은 바가 있어. 어때, 오늘밤에는 그 백열화한 정을 실천에 옮겨 볼까?”
다쯔꼬는 입을 삐죽했다.
“지금은 그림지두 아뭏지두 않아요.”
“앗다 변덕이로구나. 여성의 변덕은 애교라 이 말씀. 사실은 내가 좋지?”
아무리 보아도 미치광이 같았다. 한점 구름도 다 사라졌다.
“자 통행금지도 다 됐는데 어서 가 주무시지요.”
“흥, 반발은 애정의 표시요, 때로는 애정의 요구도 될 수 있지. 다 알구 있어.”
중절모는 일어서면서 “오라아 모도모도 시나진난다(난 원래 중국사람이야). 기미다찌노 오까게데 찡꼴로노 메이쇼오 이다다이다네 (너희들 덕분에 쌍꼴로라는 별칭을 받은).” 하고 지껄이면서 다쯔꼬가 자는 침대로 가서 걸터앉았다.
“호오, 팔굉일우(八紘―宇)가 줄어들어서 다다미 한장이 되었구려 다쓰꼬사마. 이래서야 어디 쓰겠나이까. 일우(一宇) 주인의 자리가 다다미 한장이래서야. 하기는 우동가게일망정 한국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 드나들 테니 꼬마 팔굉 일우는 되는 셈이로군. ……그건 그렇구 당신은 일본사람 나는 중국사람, 일우에서는 다같이 텐노헤이까의 적자(赤子)가 아니겠소? 적자끼리 사랑한다면 헤이까도 얼마나 좋아하겠소. 그렇지 않을까요? 다쯔꼬사마:”
밖에서는 열한시 싸이렌이 울었다.
“싸이렌이 사랑을 재촉하는구나. 하꼬방 일우도 못 이루고서 팔굉일우야 어림이나 있겠소? 다쯔꼬상 어서 이리 좀 오시 라요. 일본열도 하구 중국대륙이 일우가 되면 기타는 저절로 일우가 되게 마련 아니우?”
다쯔꼬는 화가 났다.
“이거 뭐 십년 천인 줄 아시우? 팔굉이구 일우구.”
“하, 이거 어떤 철학자의 말에 의할진대 시간이란 결국은 없는 거랍니다. 그러니까 십년쯤 문제 되나요?”
다쯔꼬는 대꾸를 안하기로 결심하고 걸상 위에서 돌아앉아 구공탄만 들여다보았다. 등 뒤에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다다미 위에 철썩 눕는 소리가 들렸다.
다쯔꼬는 걸상읕 구석에 옮겨다 놓고 벽에 몸을 기댔다.
야마모포 다쯔꼬라는 존재는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었다. 자기가 자기로부터 풀려나오는 과정이 의식에 떠오를 뿐이었다. 사람들은 살아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죽음이라 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살았다고 이름을 부를 따름이 아니냐? 그렇다, 모든 병통은 생각하는 데 있다. 생각에서 해방되는 날 천국이 오리라. 지 미치광이를 상대로 그리워하구 이러쿵 지러쿵 시비를 가린다는 건 도대체가 이만저만한 발광이 아니다. 없는 것으루 치자. 나도 결국은 없으니까.
등 뒤의 사나이가 말을 던졌다.
“여보 옥상 그래 하느님이 남녀의 생식기를 만들 때 오줌이나 쏘구 나서는 그렇게 틀어박아 두었다가 죽어서 썩어지라구 한 줄 아시우?”
다쯔꼬는 잠자코 가만있었다. 사나이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오줌을 쏘는 것이 능이라면 구태여 사내하고 계집하구 다르게 만들 게 무어냐 말이우? 그렇잖소, 옥상?”
다쯔꼬는 비로소 돌아앉았다.
“당신은 평생 짓부수구 돌아다니는 위인이군요.”
사나이는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마잇다(항복이다). 부수는 게 내가 살아 있다는 표식이거든. 이 짓부수는 작
업이 그치는 날 본 중국 백성은 죽는 날이지요. 나같이 부수는 친구가 있어야 세우는 친구들이 심심치 않을 뿐더러, 영광에 빛날 것이 아니오? 일례를 들깝쇼? 가령 오늘 저녁에 당신과 내가 여기서 그걸 해서 열 달 후에 애새끼가 하나 났다고 합시다. 나기는 했으나 귀찮아서 길가에 팽개쳤더니 죽어버렸다, 경 찰이 허둥지둥 범인을 찾아다닌 결과 당신과 내가 잡혀서 취조를 받고 재판을 치룬 후에 감옥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간 법과 도덕을 위해 분투 노력하는 친구들에게는 공이 서고 밥이 생길 거 아니오? 이거 얼마나 좋은 일이우? 나같은 사람이 하나두 없다면 우선 목사부터 형무소 간수에 이르기까지 밥통이 안 떨어질 줄 아시우? 위대할진저 그 공덕이여!”
사나이는 필시 악당이리라. 다쯔꼬는 이렇게 점을 찍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중절모는 연달아 지껄였으나 여자는 눈을 감고 자는 시늉을 하였다.
“……좋아, 이래 뵈두 강간엔 으뜸가는 솜씨가 있어. 허지만 강간은 맛이 안 나거든. 동이 틀 때까지 여유가 있으니 두구 보기로 합시다. 옥상 미상불 이 중국 쾌남아가 이길 듯한데요.”
눈을 실같이 가느다랗게 떠보니 사나이는 다다미 위에 여덟 팔자로 드러눕는 길이었다. 다쓰꼬는 그대로 한동안 있다가 사나이가 조용해진 틈을 다서 조심조심 걸상을 모아 널찍한 자리를 만들고 드러누웠다.
퍽 오랜 시간이 흘렀다. 긴장에 지친 그가 어렴풋이 잠이 들락말락 가물거리는 판에 시꺼먼 것이 위에 덥썩 내리덤비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사나이였다.
다쯔꼬는 피난민 열차에서 당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나는 없다. 허공에 뜬 존재가 아니라 허공 자체다. 줄 것도 없고 빼앗길 것도 없다. 맘대루 해라.
사나이는 일을 마치고 도로 다다미에 올라가 자뿌라졌다. 이윽고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쯔꼬가 잠을 깬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하꼬방 속은 흰하게 밝아오고 이웃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다미 위를 쳐다보니 사나이가 아니라 검은 무더기였다. 엉키고 성킨 추(醜)의 덩어리였다. 증오가 불길처럼 일었다.
다쯔꼬는 반사적으로 ― 뛰어일어나 구석에 있는 도끼를 들어 힘껏 골통을 내리쳤다. 중절모 사나이는 끽소리 한마디 없이 대가리가 단박 부숴졌다. 팔과 다리를 한두 번 움쩟할 뿐 조용하였다. 여자는 도끼를 한손에 쥔 채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다음 순간 도끼를 내던지고 찬장에 손을 넣어 쥐약을 집어들었다. 역시 아무 생각없이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모든 것이 평정하였다. 생도 사도 없었다. 무로 돌아가는 초조한 향수가 있을 뿐이었다. 모든 사고에서 해방되어 거점이 무한으로 확대되는 기쁨을 느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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