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편
극락의 하나님
요절: 3절
내용 관찰
43편은 42편의 계속입니다. 원래는 하나의 시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5절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43편의 핵심은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극락의 하나님"입니다. 극락의 하나님은 43편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언제나 중심에 좌정하셔야만 할 분이십니다. 문제는 범죄하여 추방당한 인간이 어떻게 극락의 하나님 제단에 나아갈 수가 있는가, 이 점이 풀어야 할 난제요 43편은 그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고 하나님 제단에 나아가게 되기를"(4) 사모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도 극락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합니다. 42편에서도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2) 하고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봅니다.
첫 절에 보면 지금 시편 기자는 "경건치 아니한 나라"의 "간사하고 불의한 자”(1)에게 붙들려 송사를 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에게 "나를 판단하시고 변호하시며 건지소서" 하고 호소합니다.
경건치 아니한 나라가 1차적으로 어떤 나라를 가리키고 있든지 그리고 간사하고 불의한 통치자가 누구를 가리키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고 그의 백성을 압제하는 "원수”(2)라는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 임금“(요12:31)이요,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엡6:12인) 사탄의 권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그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4)라고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해답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 이르게 하소서"(3) 합니다.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도록 하나님이 보내주실 "빛과 진리"가 누구이겠습니까? 57:3에서는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고 같은 뜻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실 빛과 진리가 되시고 은혜와 진리(요1:9,17)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벤전 3:18에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결론은 분명하여졌습니다. 42편과 43편의 낙망과 불안은 육적인 낙심이 아니라 극락의 하나님께 이를 수 없음에 대한 근원적이고도 본질적인 낙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은 "빛과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빛과 진리를 보내주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42:1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은" 갈망도 결국 극락의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마5:6) 갈급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시편 기자만의 갈급함이 아니라 구약시대 성도들 모두의 갈망임을 성령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신약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이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히10:19-20) 이제 아셨습니까?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하) 한대로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묵상해 봅시다.
42, 43편의 중심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낙망과 불안은 결국 무엇에 대한 낙망입니까?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게 됨이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적용: 형제도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게 됨을 확신하게 되었다면 낙심이 변하여 오히려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암송: 하나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4).
제 44 편
옛날에 행하신 일을 추억하라
요절: 4절
내용 관찰
44편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적과의 싸움에서 패퇴한 후에(9-16) 하나님께 호소한(17-26) 마스길입니다. 마스길이란 교훈 시라는 뜻인데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9-10) 한대로 적과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습니다.
먼저 알 것은 성도가 당하는 크고 작은 시련이 반드시 어떤 죄 값으로 당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점을 17절 이하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17)고 말씀합니다. 시련을 만나면 하나님은 주무시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영원히 버리신 것 같은(23) 절망감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하여야만 할까요. 44편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묵상함이 도움이 됩니다. 시인은 첫 부분(1-3)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1)을 회상합니다.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은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3),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1) 말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신(롬5:8) 그 사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이 당면한 시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과거를 기억하며 그런 연후에 둘째 부분(4-8)에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4) 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고백할 때에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5)고 확신합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6-7)고 이미 승리하게 해주신 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셋째 부분(9-16)에서 "그러나 이제는…… "하고 비로소 현재의 고난을 진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17-26)에서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26) 하고 간구함을 올립니다.
사도바울은 본문 22절을 환난 중에 있는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에 인용함으로써 (롬8:26) 시편 44편이 성령께서 시련 중에 있는 신구약 모든 교회에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임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6-37) 합니다. 우리도 그러합니까?
44편은 결론에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26하) 합니다. 이는 일시 대적과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결국은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이 사건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대적 원수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될 것과 속량(구원)하여 주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속량"입니다.
묵상해 봅시다.
첫 부분에서 무엇을 회상하고 있습니까?
둘째 부분에서 무엇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런 후에 셋째와 넷째에서 비로소 무엇을 진술하고 있습니까?
적용: 형제가 시련을 만나거든 이 비결을 활용하여 승리하십시오.
암송: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