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 퀸스랜드 괴물>
1964년 12월 프랑스의 사진가인 Robert Serrec은 가족들과 여행을 즐기는 중 이었습니다. 그가 손으로 젓는보트를
타고 있었을 때 갑자기 사진속의 괴물이 물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주검은 큰뱀에 올챙이처럼 생긴 모양이었는데 크기는 약
75-80feet정도였다고 합니다. 등에 상처가 난 흔적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진이 너무나도 선명하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인지 믿지를 않습니다. 대부분의 괴물 사진이 흐리거자 작게 찍히는데
반해서 그의 사진은 너무나도 선명하다는 것이지요. 또한 사진상에서는 괴물이 뒤에 있는 보트와 비교해서 무지막지하게 크지만 실제로 괴물을 바로
앞에서 찍었다면 사실상 그괴물의 크기가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쨓든 크기야 크든 작든 사진상의 괴물은 무엇 일까요? 과연 조작된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 발견된적이 없는 바다 생물체 일까요?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고대부터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건축물이다. 기원전
2세기에 살았던
Sidon의 시인 안티파트로스(Antipatros)는 그리이스 사화집에 75편의 시를
남겼는데,
이 시 속에서 다음의 7개 건조물을 7대 불가사의라고 했다.
1) 바빌론의 벽돌로 쌓은 성벽 2) 쿠프왕의 대피라미드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niceemail.com%2Fmonster1%2Fpyramid.jpg) 기원전 2550년경 제4왕조때 건설
: 3) 제우스 신상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niceemail.com%2Fmonster1%2Fzeus.jpg)
:the Statue of Zeus at Olympia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의 올림피아 신전에 제작된 높이 12m의 제우스 상
4) 바빌론(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niceemail.com%2Fmonster1%2Fgarden.jpg)
:the
Hanging Gardens of Babylon 현재의 바그다드 근처에 있었던
바빌론 왕국에 기원전 6세기에 테라스 모양으로 건축된 거대한 정원 5) 로도스섬의 (크로이소스 ) 거인 동상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niceemail.com%2Fmonster1%2Fcolossus.jpg)
: the Colossus of
Rhodes 태양신 헬리오스(Helios)의 거대한 동상. 높이는 32m로 자유의
여신상보다 다소 작다
6) 하리컬라소스의 마우솔로스(Mausolos) 왕의
묘(Mausoleum이라고 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niceemail.com%2Fmonster1%2Fmausoleum.jpg)
:the
Mausoleum of Halicarnassus 기원전 4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 마솔루스( Mausolus)의 거대한 흰 대리석으로 만든 묘 7)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niceemail.com%2Fmonster1%2Fartemis.jpg)
:the Temple of Artemis at Ephesus 기원전 6세기에 건축된 달의 수호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
참고 : 흔히 세계 7대 불가사이라고 하면 바빌론의 흙벽돌로 쌓은 성 대신 파로스섬의
등대를 넣는다!
기원전 2백80년경에 파로스섬에 고대 역사상 가장 높은 등대 높이 약
100m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niceemail.com%2Fmonster1%2Fpharos.jpg)
밤을 밝히는 30층 규모의 등대
예로부터 지중해 사람들은
선원들을 인도할 수 있는 거대한 기념물을 항구에 세웠다. 주로 엄청난 규모의 거상이나 먼곳에서도 보이는 신전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러한 건물이나 거상이 항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배들이 낮에만 도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밤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선박들의 선원이 항구를 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2백80년경에 파로스섬에 고대 역사상 가장 높은 등대를
건설하게 된 요인이다.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더는 전략상 이집트에 커다란 도시를 세울 생각을 한다. 그것은 나일강 계곡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인데다가 아랍과 리비아, 그리고 아시아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파로스섬에서 멀지 않은 마레오티드가 새로운 도시를 세울
적절한 장소라고 여겨 이 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다. 건축가 디노크라테스는 도시를 북남과 동서로 나눴는데 스트라본은 길이가
5.32km, 폭이 1.42km가 된다고 적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로마시대를 걸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건설된 지 2세기가 지났을
때 주민의 숫자는 무려 30만명이나 됐고, 오거스트 황제 시대에는 1백만명에 이르렀다.
등대는 피라미드를 제외한 다른 불가사의와
달리 비교적 후대까지 잘 운영됐다. 기원전 3세기에 세워져 14세기까지 운영됐으며, 796년에 3층 부분이 파괴되자 술탄 이븐 툴런이 돔식의
모스크를 세웠다. 956년의 지진으로 높이가 22m 정도 줄어 들었고, 1100년 또 다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 많은 부분이 손실됐다. 이때
파로스 등대의 유명한 반사경이 파괴됐다는 전설도 있다. 당시에 등대를 관리하던 아랍인들의 과학기술은 매우 발달해 이 등대에 설치한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50km 밖에서도 보였으며, 맑은 날에 햇빛을 반사시키면 1백60km 정도 떨어진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떤 원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높이 1백m로 추정
1261년 다시 지진이 강타해 거의 모든
부분이 파괴됐지만, 1272년 유명한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이 재건을 명령해 겨우 등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1303년 8월 8일에
일어난 강력한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된다. 이 지진은 그리스는 물론 전 이집트의 델타 지역을 강타했다. 그 후 등대의 운명은 급격히 추락한다.
마그레브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알렉산드리아를 두번 방문했는데 1329년에는 등대의 램프에 올라 탑의 문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1346년
두번째 방문했을 때는 파로스 등대가 완전한 폐허로 변했다고 했다.
여러 자료에 의해 등대는 3개층으로, 상부로 올라갈수록 적어지고
4각형, 8각형, 원형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대의 형태는 완전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등대가 철저히
파괴됐고 워낙 높기 때문에 꼭대기까지 직접 올라가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1백m나 되는 건물을 묘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등대는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데, 이는 현대에도 사용되는 방법으로 바다에 있는 선박에서 가장 찾기 쉬운 모습이며 가장 멀리에서도 보인다. 학자들은 야간에
거의 50km 지점에서도 등대가 보였다는 전설을 사실로 믿는다.
1477년 술탄 카이트-베이가 파로스섬의 북동쪽에 요새를 세우라고
명령했고, 이것이 현재의 카이트-베이성이다. 학자들은 카이트-베이성의 소탑이야말로 파로스 등대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추정한다. 특히 소탑은
사각형인데 한 변의 길이가 거의 31m로 파로스 등대 한변의 길이와 거의 같은 값이다.
파로스의 등대가 세계의 불가사의로 뽑힌
것은 기원전 3세기에 30층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가 고층 건물을 본격적으로
세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부터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시대를 걸쳐 과학기술이 발전하자 고대에서 가장 높다는 건물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절로 일어난다. 파로스 등대를 건설할 때 1백m나 되는 건물을 건설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파로스 등대의
위치
1477년에 술탄 카이트-베이가 파로스 섬의 북동쪽에 요새를 세우라고
명령했고 이것이 현재의 카이트-베이 성이다. 학자들은 카이트-베이 성의 소탑이야말로 파로스 등대의 기초 위에 세웠다고 추정한다. 특히 소탑은
사각형인데 한 변의 길이가 거의 31미터(100피에)로 파로스 등대의 한 변의 길이와 거의 같은 값이다. 카이트-베이가 요새를 건설하라고
명령한 지 2년 후에 현장을 들렸던 독일의 여행가인 투처(Tucher)의 여행기를 근거로 1909년에 독일의 고고학자 레르만 티에르쉬가 파로스
등대를 복원했다. 그것이 가장 잘 알려진 파로스 등대의 모습으로 모형으로도 만들어져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수중 발굴팀에 의하면
파로스 등대는 독일인 티에르쉬의 복원도와는 다소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파로스 등대가 전적으로 그리스 스타일을 답습한 것은 아니고 이집트의
전통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에 많은 신전을 건설했으므로 그들은 이집트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특히 파로스 등대는
석회석과 대리석뿐만 아니라 아스완에서 화강석을 운반하여 시공할 만큼 시공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건축 기술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석조기술도 여러 곳에서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수중 발굴팀의 조사에 따라 새로운 모습의 등대를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파로스의 등대가 바빌론의 성벽을 밀어내고 세계의 불가사의로 뽑힌 것은 기원전 3세기에 30층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가 고층 건물을 본격적으로 세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부터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시대를 걸쳐 과학기술이 발전하자 고대에서 가장 높다는 건물을 어떻게 건설했을까하는 호기심이 절로 일어났다. 결론을 말하면 파로스 등대를 건설할
때 100미터나 되는 건물을 건설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이 있었다.
파로스 등대의 발굴
1994년 가을에 프랑스의 고고학
발굴팀이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 깊이 7미터 정도의 바다 속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파로스 등대의 잔해 수백 점을 건지는데 성공했다.
발굴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4.55미터, 무게 12톤의 여신상을 기중기로 끌어올렸으며 5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에 거상들의 토르소, 목이
떨어진 스핑크스들이 수없이 수장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최소한 3천 개가 넘는 건축용 돌들이 카페트와 같이 깔려 있으며 원형기둥들의
파편들도 수백 개가 된다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스탄블과 다르다엘 사이의 프린스 섬에서 채석되는 백색 대리석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이 채석장에서 대리석을 수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다. 1998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궁전 터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로 추정되는 스핑크스를 인양했다. 이 대리석 스핑크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얼굴에 사자
몸통을 결합한 모양으로 고대 알렉산드리아 항구 수중유적 중에서 여왕 궁전과 전용부두가 있었던 안티로도스 섬 지역에서 발견했다. 이시스 신전
대사제상과 당시 침몰됐던 선박도 인양됐다. 2,000여 년 전의 고대 알렉산드리아 항구 및 파로스 섬, 안티로도스 섬 등이 지진과 조류에 의해서
고스란히 가라 않았다는 뜻으로 발굴팀은 전차가 달렸던 도로는 지금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말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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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세워진 대피라미드
일반적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포함되는
피라미드는 이집트 기자의 3대 피라미드를 의미하지만, 이 중 가장 큰 쿠프왕의 대피라미드 하나만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칭하기도 한다. 여기서도
대피라미드만을 거론한다.
대피라미드의 규모에 관한 모든 수치는 이집트 정부가 1925년 최종적으로 내놓은 보고서를 따른다. 남쪽면
2백30.4 5m, 동쪽 2백30.39m, 서쪽 2백30.36m, 북쪽 2백30.2 4m였다. 대피라미드의 높이는 1백46.60m로 확인됐고
기울기는 51°52′였다. 2.5t의 돌덩어리가 2백30만개나 사용됐으며 무게가 거의 7백만t에 달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참여했던
수학자 몽즈는 대피라미드의 체적이 2백60만m3나 되며, 이것만 갖고도 프랑스의 국경을 3m의 높이에 0.3m의 폭으로 둘러 쌀 수 있다고
계산했다.
이 모든 돌을 연마하기 위해 사용된 도구는 돌과 구리로 된 연장이 고작이었고, 당시에는 철이 발견되기 이전이었다. 운반을
위한 썰매, 끌기 위한 밧줄과 도르레, 미끌어져 내리기 쉬운 진흙과 경사로를 만들기 위한 벽돌이 사용된 도구와 재료 전체에도 이런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면, 피라미드를 불가사의 중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환기구멍의 정체는
천체창
대피라미드의 내부는 건설 중 최소한 두번
계획이 변경됐다. 공사가 완료되기 전 왕이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두개의 묘실을 우선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쿠프의 현실에
아직도 뚜껑이 없이 비어 있는 석관이 남아 있다.
대피라미드가 다른 피라미드보다 가장 특이한 점은 높이 20cm, 폭 22cm의
천체창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천문학자 트림블은 남쪽의 환기구멍이 기원전 2600년에서 기원전 2400년경의 오리온자리 세별에 정확하게 조준돼
있다는 것을 발표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oldhome.pe.kr%2Flosthistory%2Fmysteri%2Fimages%2Fimage098.gif)
이것을 근거로 환기
구멍이라기보다는 천체창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실제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에서 완성된 천체창은 쿠프의 대피라미드에만 있다. 현대
기하학의 요람이 이집트라는 설은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세르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일강이 범람할 때마다 과거에
구획된 토지의 경계를 알아낼 수 없게 되는 난처한 문제에 봉착했다. 이러한 경계를 정확히 찾기 위해 이집트인들은 모든 경작지를 선으로 구분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런 과정에서 기하학이 생겼는데 그들은 땅을 재는 것뿐만 아니라 바다와 하늘까지 영역을 넓혔다.’
천문학적으로 볼
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임의적으로 방위를 알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쿠프의 피라미드는 방위의 평균 오차가 3′6″으로,
매우 미소하다.
황금배율 적용된
설계
피라미드를 건설할 당시
북쪽을 의미하는 용자리 알파별을 이집트인들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대지와 건물의 방위로 보아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단순한 추와 조준할 때 사용하는 막대기 베이가 측량 장비로 사용됐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더욱이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몇천년 전부터 태양, 달, 별, 행성들의 운동을 세밀하게 관측하는 등 천문학에 고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우선 그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나일강의 홍수가 일어나는 날과 큰개 별자리 시리우스별이 1년에 1회 동트기 직전에 나타나는 것을 정확히 탐지해 1년이
3백65.25임을 알아냈다. 또한 한달을 30일로 한 12개월에 여분으로 5일을 더해 1년으로 삼았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체적과 표면적을 계산하고 수직을 세우는 것인데 이집트인들은 그 방법도 숙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황금비율 (ф)과 원주율 (π)에
관한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ф=1.618이고 π=3.1416이다.
우선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해 직각삼각형인 경우
x2=b2+h2 임은 잘 알려져 있다(오른쪽 그림). 쿠프의 대피라미드의 경우, 그림에서 x/b의 값을 계산해보니 놀랍게도 황금비율인
1.618이 나왔다. 이집트인들이 피타고라스 정리와 황금비율은 머리 속에 계산하고 있었다는 말일까. 또대피라미드의 밑변 둘레 절반과 높이의 비가
π와 같다는 점도 놀랍다. 즉 4b/h=3.1429이 된다.
또한 현실을 건설할 때 의식적으로 기하학 지식을 적용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쿠프의 현실은 바닥 면적이 20×10쿠데(1 쿠데=0.5m)이며 높이는 11.172쿠데(5.586m)이다.
이를 계산해보면
서쪽과 동쪽 긴 단면의 대각선은 15쿠데(7.5m)가 된다. 이럴 경우 직각삼각형의 밑변이 10쿠데(5m)이고 높이는 √5가 된다. 이
15쿠데(7.5m)의 대각선은 긴 밑변과 긴 변 대각선이 3:4:5인 ‘직각삼각형’이 된다.
현실의 위치가 밑변의 절반이 되는
곳에 있다는 것도 이집트인들의 높은 기하학 수준을 보여준다. 어느 정도 측량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주어진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면적이
두배인 정사각형의 변의 길이와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므로 현실의 위치를 정확하게 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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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풀과 꽃,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계단식 아파트의 발코니에 꽃과 커다란 나무들을 심은 것과 유사하다.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바빌론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을 당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차지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간 유명한 왕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 중에서도 바빌론을 재건하고 공중정원을 직접 건설했다는 아시리아의 정복자 세미라미스가
매우 유명하다.
놀랍게도 세미라미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세미라미스에 대한 전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학자들은
세미라미스를 기원전 8백23년에서 8백10년까지 바빌론을 통치했던 삼시 아다드 5세의 왕비인 ‘사무-라마’로 여긴다. 삼시 아다드 5세는 유명한
아슈르나시르팔왕(기원전 883-859)의 손자다. 세미라미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것은 바빌론을 재건축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는 님루드가 수도였는데 그녀는 수도를 바빌론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기기 위해 재건한 바빌론은 고대의 바빌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성곽을 가진 도시였다.
고대에서 가장 넓은 성곽이라고 해도 폭이 8m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빌론의 성곽은 무려 17.7m가 됐다는
것이 근래의 발굴에 의해 알려졌다. 외부 성곽은 11.3km이며, 내부 성곽은 6km다. 성곽 옆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수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된 다리가 놓여졌는데, 기둥들의 간격은 3.6m, 다리의 폭은 9m였으며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
이 성채는 1백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성벽이 어찌나 거대하고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현재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확정되기 전부터
세계의 불가사의에 단골로 들어간 기념물이었다. 사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명명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필론도 자신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파로스섬의 등대 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선정했다. 바빌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거대한 성벽과 공중정원 등 두개가 포함됐다는
뜻이다.
설계자는
누구인가
한편 공중정원은 기원전 5백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위해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경에서는
느브갓셀 2세라고도 함)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왕국 키약사레스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건축가는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4백m, 폭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한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일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진짜 공중정원을 건설한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경우 공식적인 이름은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공중정원을 건설한 장본인으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도 거론되기 때문이다. 결국 두사람 모두 공중정원을 건설했다고 보면 의문점이 해결된다. 사실 테라스에 나무나 풀을 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즉 도시 주위를 흐르는 강물을 이용해 식물을 재배하는 정원은 매우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니니브의 소위 ‘나무로 꽉 채워진 장소 아래에서의 향연’으로 유명한
아수르바니팔왕과 왕비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향연을 베푸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디디오르가 기록한 공중정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인공정원은 한변이 거의 1백20m의 사각형으로 마치 극장과 같이 계단으로 한단씩 올라가게 설계됐다. 테라스 또는 플랫폼에 재배되는 모든
식물의 무게는 높낮이가 있는 기둥으로 지지되도록 했다. 가장 높은 기둥은 약 25m로, 정원 최상부를 지지하며 벽체의 두께는 6.6m나 된다.
테라스는 돌출부분을 포함해 16×4피에(1 피에 = 0.3m)의 크기로 아스팔트로 많이 칠해진 벽돌(갈대를 포함)로 주의를 구분한 후 다시 구운
벽돌로 치장했다. 이곳에 얇은 납판을 붙여 물이 기초 부분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테라스에서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해 준 장치인 것이다. 테라스에는 각종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그 규모나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기둥의 높낮이도 다르게
만들어 강도가 다른 빛이 들어오도록 유도함으로써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의 내부 공간에 신비감을 주도록 했다. 단 하나의 기둥이 천장부터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데, 이 안에 다량의 강물을 테라스까지 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수력기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기계는 밖에서 볼 수
없다.”
물을 공급하는 두가지
방법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력기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렸다는 것. 체인에 물통을 연속적으로 매달아 상부로 물을
올린 다음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물을 흘려주거나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두번째 방법은 디오도르와
스트라본이 기록한 것으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수력기계 방식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구조다. 특히 이 방식의 장점은 물레방아가 도는 힘으로 아르키메데스 나사가 돌면 물이 달팽이식 나선형 홈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기술자들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기술이기도 하며, 광산의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거나 고층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됐다.
첫번째 방식의 경우 물을 상부로 올리는 체인이 밖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일설에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물레방아를 각 층마다 설치했다고 함)을 갖고 있다. 두번째 방식은 디디오르가 지붕에서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
기둥으로 물이 올라갔다는 설명에 부합된다. 하지만 이 경우 각층에 수많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사, 즉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상층부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이 두가지 방식을 병용하거나, 방문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물을 상부로
길어 올렸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공중정원 발굴
학자들은 아직 공중정원의 위치를 확정한
상태는 아니지만, 비교적 예전부터 공중정원의 위치로 알려진 아무란의 언덕으로 추정한다. 바빌론은 내외 이중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공중정원은
내성에 위치하며, ‘텔 아무란 이븐 알리’(Tel-Amuran-ibn-Ali, 추장의 언덕)라고도 불렸다.
바빌론의 폐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이라크 정부는 특히 공중정원을 집중적으로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다른 불가사의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바벨탑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공중정원의 신화가 혼합됐기 때문이다. 또한
공중정원은 다른 불가사의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이뤄진 건물이라는데 더욱 매력이 있다. 천하의 영웅 알렉산더가 자신이 죽을
장소로 바빌론을 지목한 것도 이해가 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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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섬의 청동상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 중 하나인
로도스섬은 예전부터 고대의 격전지로 수많은 정복자들이 탐을 내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섬이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청동거상이 건설된 섬이기 때문이다. 34m 높이의 청동거상은 바다를 응시하며 두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데 한쪽 다리는 단단한 땅 위, 다른 쪽 다리는 방파제 위에 올려져 있었고 그 사이를 거대한 함선이 지나 다녔다는 전설까지 있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동상의 두다리 사이로 배가 지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거상의 높이가 최소한 1백20m는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거상의 두다리 사이로 배가
다닌다는 것은 모두 상상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로도스섬의 거상이 배가 다닐 정도로 규모가 컸다는 환상을 줄 만큼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태양신 헬리오스 청동상은
기원전 3백3년에서 2백91년 사이 조각가 샤레 드 린도스에 의해 로도스섬의 항구에 건설됐다. 청동상이 건립된 이유는 기원전 3백6년에서
3백5년 사이에 로도스에서 점령군 시리아와 치열한 전투를 벌려 그들을 완전히 축출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거상을 만드는 네가지
방법
거상을 만드는 방법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서로 다른 재료를 사용해 거상을 여러 조각으로 나눠서 제작한 후 조립하는 방법이다. 거상의 얼굴, 손과 다리는 대리석으로 만들고, 몸체는
청동으로 만들거나 일부분을 나무로 만들어 각 부분을 조립한 후 매끈하게 마무리한다는 것. 두번째 방법은 보통 조각가들이 청동상을 만드는 것처럼
규모가 다소 크더라도 한번에 주물하는 것이다.
세번째 방법은 주물을 한번에 부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청동상을 만들 때 사용하는
것으로, 몇단계로 나눠 주물한 후 하나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로도스섬의 거상과 같은 청동상을 단 하나로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청동의 두께를 2.5cm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34m의 높이라면 적어도 2백t 이상의 청동이 필요하다. 마지막 방법은 일부 학자들이 제기하는
것으로, 로도스섬의 청동상은 외형만 청동판으로 붙였다는 것이다. 프린느는 부서진 청동상 안에서 돌의 잔해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로도스섬의 청동상 전체를 주물로 하지 않고 어느 부분은 돌로 만든 다음 청동판을 붙였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정확한 위치와 구조에
대한 의문
로도스섬의 청동상이 유명하기는 하지만
거상이 실제로 어디에 설치됐는가 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아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와 같이 거상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우선 거상이
건설된 지 겨우 66년 후에 무릎 부분이 파괴돼 전복됐기 때문이다.
로도스인들은 곧바로 청동상을 재건하기 위해 델피의 신전에
‘청동상을 재건해야 하는가’라는 질의를 했다. 그러나 델피 신전의 신탁은 놀랍게도 청동상 복원에 대해 부정적인 답을 줬다. 예상치 못한 답변을
델피 신탁으로부터 들었지만, 로도스인들은 신탁의 말을 그대로 존중했다. 그들은 로도스섬의 거상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 역작임에도 더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복원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했다.
그렇다면 로도스의 거상은 어디에 세워졌을까. 학자들은 실무적인 면을 고려할
때 만드라키와 항구의 입구를 보호하고 있는 셍니콜라스라고 불리는 원형으로 된 작은 교회를 거상이 세워졌던 곳으로 제시한다. 이 지역은 방파제가
있을 만큼 넓은 지역이었는데, 중세 시대의 자료에도 이곳에 로도스섬의 거상이 있다고 알려진 장소다. 더구나 이 지역의 바위는 로도스 거인상의
무게를 지탱할 수도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거상의 얼굴은 알렉산더 대왕을 묘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서 평소에 듣고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자주 발견하자 스스로 구세대를 탈피해 새로운 세대를 만드는데 힘썼다. 새로운 세대의
아이디어를 자신이 정복한 모든 지역에 알리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주민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로도스, 밀레, 에페스, 페르감 등에서 새로운 도시가 세워진 이유다. 새로운 도시의 주인공은 당연히 알렉산더 대왕이었고 조각가들은
수많은 알렉산더 대왕을 조각했다. 로도스섬에 있었던 청동상의 얼굴 모습이 알렉산더 대왕을 묘사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여기에서 나온다.
현실적으로 거상에 대한 흔적이 전혀 나오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고대에 청동의 가격이 금과 같을 정도로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653년 아랍의 칼리프 우트만의 지시로 현장에 방치돼 있던 거상은 잘게 잘려서 시리아로 옮겨진 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유대인
에데스가 청동 조각을 모두 구입한 후 9백개의 청동 낙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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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가 비바람은 물론 천둥과 벼락을 만드는 신이라고 믿었다. 벼락은 하늘에서 내린 신의 징벌로
생각했기 때문에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도시마다 제우스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아무래도 그리스
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인 올림피아(올림피아는 도시가 아니고 신전과 경기장이 세워진 장소다)에 안치된 제우스 신상이었다.
제우스 신상의
건설
그리스인들은 가장 먼저 올림피아의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우스를 위해 거대한 제우스 신전을 건축했다. 기원전 4백70년의 일이다. 이 건물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회석으로 건설됐는데
하얀색의 치장 회반죽을 건물 외벽에 바랐다.
제우스 신전의 놀라운 점은
인간의 착시 현상을 고려해 건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의 아테네에 보존돼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얼핏 보기에
동일한 굵기의 기둥이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된 직사각형의 ‘반듯한’ 건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지어진 건물은 이와 매우 다르다. 우선 가장자리
기둥은 가운데 있는 기둥보다 좁은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불균형하게 건설한 것은 만일 동일한 굵기로 만든 기둥을 동일한 간격으로
세웠다면 건물의 모양은 직사각형이 아니라 위나 옆으로 퍼져 보이기 때문이다. 대들보의 가운데도 위로 볼록하게 휘어져 있으며, 가장자리의 기둥은
안쪽으로 약간 휘어져 있다. 기둥은 위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수평선은 실제로는 중앙 부분이 처진 듯이 보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거대한 돌들을 맞춰 나가면서 중앙부를 약간 들어올렸다.
제우스 신상은 신전이 건설된
후 40년이 지났을 때 피디아스에게 주문됐다. 피디아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로 기원전 4백70년에 피라테에서 8m나 되는 대형
아테나 신상을 만들었고,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을 조각했다. 그는 크리세레환틴 방식(나무에 상아와 금을 입히는 장식)을 사용해
10m 크기의 아테나 여신상을 완성했으며, 아테나 신상 덕분에 피디아스는 그리스가 배출한 최고의 조각가로 자리매김했다. 피디아스는 8년여의 작업
끝에 기원전 4백47년 제우스상을 완성했다. 이것이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상과 함께 피디아스의 2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제우스 신상도
아테나 여신상과 마찬가지로 크리세레환틴 방식으로 제작한 것이다. 13m나 되는 제우스상은 높이가 90cm, 길이 10m, 폭 6.65m 크기의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옥좌에 앉아 있는데 천장에 거의 맞닿을 정도였다. 제우스를 서있는 형태로 조각했다면 거의 18m나 달하는 거인이었다.
이와 같이 거대한 신상임에도 불구하고 피디아스는 제우스의 신성한 위엄과 너그러움을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들었다.
신전의 파괴
제우스 신상 앞에는 파로스에서 운반된 백색
대리석으로 된 웅덩이가 있는데 그것은 신상에 사용된 상아가 적정 습도를 유지하도록 칠하는 기름을 보관하는 곳이다. 반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는 기름 대신에 물이 준비됐다. 그것은 파르테논 신전이 건설된 아크로폴리스가 고지대여서 매우 건조하기 때문에 기름 대신 물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제우스 신전도 수난을 면치 못한다. 393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올림픽 경기를 금지시키고, 그의 손자인 테오도시우스 2세는
제우스 신전에 대해 더 강력한 명령을 내린다. 신전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것이다. 물론 단서가 붙었다. 신전을 철저히 파괴하되 제우스 신상만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라는 것이다. 당시에 이 신상을 옮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것은 기록에도 남아 있다. 그러나 제우스 신상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후 얼마되지 않은 475년에 화재가 일어나 한줌의 재로 변했다.
발굴 및
현재
1755년 독일인 학자 빈켈만(John J.
Winchelmann :1717 ~ 1786)이 <고대 그리스 미술에 관한 논문>이 발표되면서 고대문화에 대한 열기에 불을 당기기
시작했다.
1766년 영국인 찬들러(O. Chandler)가 빈켈만의 고대미술사와 고대시가지지(古代詩歌地誌)의 두 권의 책을 안내로 삼아 이 올림피아
유적지를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 올림피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 엘리스주(州)에 있으며, 북으로
크로니온(Kronion;제우스 신의 부친 Kronos에서 유래됨) 산자락 구릉과 서쪽에 그라디오스(Gradios) 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운동경기를 마친 뒤에나 또는 연습 후 목욕이나 샤워를 이 그라디오스 강에서 했고, 또한 이 물을 끌어들여 올림피아 도시에서 목욕탕에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위치는 이곳이 정확했다.
찬들러는
발굴에 착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우스 신전'을 발굴하였다.
1829년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단기간 발굴에 착수하여 메도프(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그 후 50여 년이 흐른
1876년, 베를린 대학교수 E.쿠르티우스(1814~1896)의 발굴계획을 독일 정부가 승인한 후 그리스 정부도 발굴유물을 현지에 보관한다는
엄격한 단서를 붙여 허가하니 6년간에 걸친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발굴작업은 현재의 유적지 규모로 발굴됨으로
그 당시의 체육시설의 건축분야와 기록동판 13,800매, 비석 400개,
조각품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4차 발굴은 1937∼58년(제2차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중단)에 실시되었는데,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는 학술적으로 대단히 귀중한 성과를 올렸다.
1950년대 제우스 신전 터에서 페이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제우스
신들 중 최고의
지배자로 '낮의 밝은 하늘'을 의미하며 천상을 지배하는 기상학적
현상(비,눈,우박,번개,우뢰)을 맡아보는 신인 동시에 인간 사회의 정치.법률.도덕 등 모든 생활을 지배했다. 신들뿐 아니라 인간은 제우스를
주인으로 섬겼다. 그러므로 제우스는 왕이고 인간의 왕들은 그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사투르누스)와 레아(옵스)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로노스는 <시간>을 상징한다. 그리스어 크로노스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크로노스는 자식을 낳은 족족 잡아먹는 것으로 전해지는데(자신의 자식 중에 자신을 누르고 왕위를 차지하는 자가 있다는
예언때문에), 크로노스의 이러한 속성은 태어난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자체의 속성을 상징한다. 제우스의 6남매도 크로노스에게 삼켜졌다가 다시
토해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제우스 6남매가 이로써 시간을 극복했음을 상징한다. 어머니 레아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험을 모면한
제우스는 그의 첫번째 아내 테티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뱃속에서 그의 형제들을 토하게 한다.
형제자매와 함께 그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와 그 형제인 티탄 신속들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들을 정복하고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무한지옥에 가두어 버린다. 제우스의 무기는 천둥과 번개이고, 헤파이스토스(불카누스)가 그를 위해 만든 아이기스라는 방패도 가지고
있다. 제우스가 총애한 새는 독수리로 이 새가 제우스의 번개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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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솔레옴의 영묘란
모솔레움이란 페르시아 제국 카리아의
태수 모솔왕을 위해 그리스의 할리카르나소스(현재 보드륌)에 건조된 무덤을 뜻한다. 가로·세로의 길이는 32×38m, 총 높이는 거의 50m로,
당시까지 세워진 무덤으로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제외하고 규모가 가장 컸다. 모솔왕의 생전에 착공돼 그가 죽은 뒤 왕비 아르테미스가 계속
진행했으며, 실제로 완성된 시기는 그녀가 사망한 후인 기원전 3백50년경으로 추측된다. 모솔왕의 누이동생이자 부인인 아르테미스 여왕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슬퍼하면서 포도주에 모솔왕을 화장한 재를 넣어 마신 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겠다고 맹세했다. 이 전설은 그 후
중세시대에 부부간의 애정과 미덕으로 여겨졌고 수많은 자수에 새겨진다.
모솔레움은 다른 불가사의(피라미드는 제외)와는 달리
중세시대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돼 있었지만, 십자군이 전략 요충지로 삼으면서 수난이 시작된다. 할리카르나소스에 주둔하고 있던 십자군들은
할리카르나소스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모솔 궁전의 폐허 위에 커다란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당연히 커다란 돌과 모르타르가
필요했다. 그들은 도시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모솔레움에 눈독을 들였다. 커다랗고 잘 절단돼 상태가 양호한 돌은 즉시 건축용 자재로 재사용될 수
있고, 손상이 심한 것은 모르타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벽돌이나 돌을 접착시키기 위해 처음에는 진흙, 점토, 역청 등을
사용했는데 로마인들은 새로운 모르타르를 발명했다. 바로 석회석을 용광로 속에서 가열해 석회를 얻은 후 모래와 물을 섞은 것이다. 이 방법은
사용이 편리하고 견고하기 때문에 현재도 많은 건축현장에서 사용된다.
대영박물관 직원이
발굴 허가 얻어
모솔왕의 무덤에 대해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다. 1856년 11월, 전직 대영박물관의 직원이자 로도스섬의 영국공사 찰스 뉴턴경은 모솔레움을 발굴할
허가를 얻었다. 뉴턴은 발굴 자체로 보면 아마추어 수준이었지만 1855년 모솔왕의 유물을 발굴할 경우, 대영박물관에서 구매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영박물관에서는 그의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1백50명의 발굴전문가와 인원을 파견하면서 그를 지원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 때
처음으로 발굴현장을 사진으로 찍었다는 것. 1839년 프랑스의 다게르가 실용적인 사진기를 처음 발명한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안목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발굴현장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 사진기를 동원했다는 것은 유물 발굴사에서 혁명적인 것으로 그 후 많은 유물 발굴현장에 영향을
끼쳤다.
한편 발굴장소 북쪽에서 대리석판이 덮여 있는 것이 발견됐다. 중세시대에 석회가 되는 것을 다행히 피한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것이 피테오스가 조각한 무덤 정상의 4두 마차의 파편과 사자상으로, 현재 대영박물관의 전시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일러스트레이드 런던 뉴스’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술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할 고대의 대리석들이 대영박물관에
도착했다. 대영박물관에 모솔레움의 유물들이 도착했다는 사실은 영국의 문화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계기를 거울삼아 국가적인 차원에서
발굴작업을 더욱 지원해야 할 것이다.”
영화‘레이더스’의
모델
뉴턴이 발견한 대부분의
작품은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당시의 작업과정이 바로 영화 ‘레이더스’의 모델이다. 뉴턴은 이 공적으로 특별히 창설된 유물관의 책임자가
됐고, 고대 그리스를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뉴턴이 19세기에 모솔레움을 발굴했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발굴작업은 계속 추진돼
모솔레움의 1층 평면이 알려졌다.
셍피에르 요새의 천장이나 벽 속에 모솔레움을 장식했던 조각된 돌이 있다는 사실이 근래의 연구에서
밝혀졌다. 특히 수많은 돌에 당시 성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의 이름과 문장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모두 모솔레움으로부터 온 것이다. 요새 안에는
그리스식과 로마(라틴)식의 교회가 하나씩 있는데 모솔 시대의 돌임을 보여주는 정교하게 절단된 커다란 석회석 돌이 요소 요소에서 보인다. 아직도
많은 학자들은 모솔레움의 놀라운 작품들이 교회의 지하부분에 매장돼 있거나 두터운 벽 속에 보관돼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모솔레움이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될 정도로 고대인들을 찬탄하게 만든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보편적인 설명은 모솔레움이 무덤으로서 당시에
가장 큰 규모인데다(피라미드 제외) 사자의 영원함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과장된 용기를 유감없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무덤의
규모가 당시 소아시아에서 건설됐던 어떤 것보다 매우 거대했다. 특히 그리스에서 ‘거대하다’라는 말의 ‘colossal’은 바로 이 건물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모솔레움이 당대에 있어서조차 무덤이라는 특성을 제외하면 가장 큰 건물이거나 가장 잘 건축된 것은
아니면서도 불가사의에서 제외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바로 1층의 36개 기둥 안에 설치돼 있던 놀라운 조각들
때문이다. 1521년 세사리아노는 이 조각을 일컬어 당시의 조각가들이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한 보석이라고 적었다. 이 무덤을 그렇게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외부에 설치돼 있던 조각상들이었다. 조각들은 알바트르 돌로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뉴턴이 발견한
남녀 한쌍의 조각상만 남아 있다. 남자상은 건장하고 수염이 있으며 머리는 매우 섬세하게 조각돼 영국 대영박물관의 최대 수장품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가 입은 옷도 매우 정교하며 조각기술이 눈부실 정도로 탁월하다.
그리스 건축의
새로운 규범 제시
모솔레움은 그리스 건축에 있어 새로운
규범을 부여해 준 것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당시 무덤의 개념은 피라미드 형태의 지붕을 한 죽은 사람의 집으로 인정돼 공물을 제공하는 장소로
간주했다. 그러나 모솔레움은 이러한 과거의 형태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복잡한 건축과 조각들을 조화시킨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운 개념을 불러 일으켰고, 모솔레움 유적에서 발견된 파편은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수많은 상상력을 북돋아줬다. 일부 학자들은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시대에 걸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솔레움으로부터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모솔레움이 갖고 있던
조각상들과 건축의 영향은 제단뿐만이 아니다. 무덤에 조각상들을 배치한 기법은 곧바로 다른 석관, 제단, 무덤들의 규범이 됐고 특히 조각상을 기둥
사이에 배열한 것은 추후의 건축가들이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다. 파피루스와 그밖에 남아 있는 몇몇 자료에 의하면 피데오스라는 이름은
고대에 광범위하게 알려졌고, 신전을 건설하는 건축가와 신을 조각하는 조각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또한 그는 알렉산더의 초상을 그린 아펠의
아버지로도 알려졌으며, 당대에 이미 예술 분야에서 진정한 혁명을 일으킨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피데오스는 헬레네 시대의
진정한 건축가라고 볼 수 있다. 모솔레움이 피데오스의 작품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세계의 불가사의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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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이(Moai)와 이스터섬> ![img1.gif](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niceemail.com%2Fmonster1%2Fimg1.gif)
칠레에서 약3800km 떨어진 남태평양에 위치한 이스터섬.
모아이(Moai)로 유명한 이곳에 불가사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초점이 과연 이 거대한 석상을 누가 만들었나
하는 문제와 왜 만들었느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모아이 크기는 3m에서 10m까지 숫자도 대략 1000개 이상 미완성 된 것도 수백개가 넘습니다. 무게도
수톤에서 20톤이 넘는 것도 있습니다. 위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는 섬의 원주민들도 1877년에 노예사냥꾼에 의해 섬주민 대부분이
끌려갔습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상징어인 "롱고롱고"를 알고 있던 지배계층과 제사장이 완전히 사라져서 현재 어느누구도
롱고롱고를 아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이스터섬은 원주민이 사라진후 칠레의 땅이 되어 목장으로서의 역할과 현재는 세계관광지가
되었습니다.
모아이가 만들어진 연대는 대략 10세기 전후에서 많이 만들어졌고 오래된 것은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습니다. 섬의 인구도 많았을 때는 만여명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섬의 최후의 날이 닥쳤을 때 노예사냥으로 3천명이 끌려가고 노약자
100여명만 버려두었는데 결국 원주민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모아이는 누가 만들었나? 이 질문은 의외로 쉽습니다.
원주민이 만들었다. 물론 감독이 따로 있을 수가 있지만 처음 그 기술을 전수해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노예로 잡혀가기 직전까지 원주민이 직접 만들고 세웠다는 것은 현재 버려진 모아이나 돌을 채취한 현장을 보면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 만들었는지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현재까지 나온 학설은 대략,
종교설: 모아이가 종교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모아이는 원주민의 조상이나 그들이 추앙하는 신의 형상인지
모릅니다.
고향설: 조상이 어디로부터인가 이섬에 오기까지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향을 바라보는 상을 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
파수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거나,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그것을 위해 세워 놓았다는 설. 일종의
망부석과도 같다. 구체적으로 UFO를 기다린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남극에서 떠내려오는 빙산, 그들은 하얀섬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요즘과 달리
옛날에는 큰 남극의 탁상식 빙하가 계절에 따라서 이곳까지 떠내려 왔었답니다.
그러면 그들이 난생 처음보는 얼음에 놀라고 그리고 큰 빙하가 떠내려오면 제사장이나 그섬의 일부지배계층이 그것을
무작정타고 먼 바다로 떠내려가서 결국은 얼음과 같이 바다에 사라졌겠지만 그들이 그 빙하를 신이 보낸 선물로 여긴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고가면 천국에 가는 것이지요.
결론:
이스트섬은 특별한 바다자원도 육상자원도 각박한 곳이고 다른 섬이나 대륙과도 많이 떨어져 있는 섬입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문명이 자체발생적인지 다른곳에서의 유입이든지 간에 경이로운 것만은 틀림없습니다.섬전체를 걸어서 도는데도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
상황에서 인구 수천명이 그와같은 거대한 석조상을 천여개 세웠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석상이 누구를 나타내며 왜 세웠는지 명확한 해답입니다. 안타깝게도 석상을 만든
원주민의 후예들은 노예로 사라지고 다만 그들이 폴리네시아인일 것이라는 추측 뿐입니다.
Chupacabra "goat Sucker" 피빨아서 죽이는 괴물
Chupacabra means "goat Sucker".
염소, 말, 소등의
가축을 피를 빨아먹고 사는 놈들입니다.
한번 빨았다 하면
온몸의 피가 없어질 때까지 빱니다.
그래서 고트 서커라는
이름을 얻었지요.
동물의 목 주변에
구멍자국만 남기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괴물이 UFO가 가지고 온 동물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합니다.
푸에르토리코를
비롯해서 미국남서부, 멕시코 지역에서 자주 목격 되었습니다.
혹자는 실험용으로
만들어진 동물이라고 생각 하기도 합니다.
아뭏튼 잡히면
알겠지요.
![img1.gif](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niceemail.com%2Fmonster1%2Fmon13-1.gif)
크기는 약 130-150cm 정도의 큰개만 합니다.
대형 오징어 The World's Biggest Flasher
세계에서 자기 스스로 빛을 내는 최대 크기의 생명체 입니다.
깊은 바다에서 삽니다. 몸길이는 2m 정도,몸무게는 약 60kg 입니다
약 수백미터에서
1000미터 정도의 깊은 바다에서 발견 됩니다.
먹이는 다른 종류의 물고기
혹은 같은 오징어 종류를 먹지 않나 추정 합니다.
모양은 우리가 흔히 먹는
오징어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더큰 오징어는
10미터도 넘을 수 있습니다.
이것 말려서 먹으면 온동네
사람 다먹을 수 있고, 초장 찍어 먹으려면
최소한 고추장 항아리
하나는 없어지겠습니다.
미래의 식량자원으로도
연구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소한
한국인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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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뮤다(Bermuda)의
삼각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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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뮤다의 삼각지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shihwa.net%2Fpandora%2Fmystery%2Fbermuda%2Fs_bermuda01.jpg) |
아름다운 버뮤다 섬의 해변 | '마(魔)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머뮤다 삼각지대는 미국의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버뮤다, 푸에르토리코를 잇는 3각형 모양의 바다를 말하는 것이다. 대략 북위(北緯) 20도에서 40도까지, 서경(西經)
55도에서 85도에 이르는 4백만㎢의 면적을 차지한다.
예전부터 이 지역을 통과하는 많은 선박과 항공기들이 괴현상을 보거나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기록은 1492년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워드 로젠버그는 1973년
U.S. Coast Guard는 지난 세기 동안 8,000건의 조난 신호와 50척 이상의 배와 20대 이상의 비행기가 버뮤다 지역에서 사려졌다고
한다.
이 괴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가설들이 나왔는데,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으로는 지구 자기장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지구의 자기장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매 20~25만 년마다 자장이 바뀐다.
현재도 자장의 변화는 계속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자기적인 지진이 갑자기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며 버뮤다 삼각지대가 바로 대표적으로
자장이 불안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공간이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가 사라지므로 대비책을 세울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이론들로는 아틀란티스의 침몰지점, 외계인의 지구인 납치설, 4차원의 세계로 통하는 문, 바닷속의 메탄 가스설(oceanic
flatulence: 바닷속의 메탄 가스가 갑자기 위로 솟아나와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는 주장)등이 있다.
사람들에게 자주 인용되고 있는 여기에 실린 사고들에 관해서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로렌스 쿠시는 전면 재검토를 행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고들에 대해 지극히 자연스러운 원인을 상정해볼 수 있었다. 아래에 열거된 사건들 가운데 *표가 붙어 있는 항목은 후일
다른 사람에 의해 이론이 제기 된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shihwa.net%2Fpandora%2Fmystery%2Fbermuda%2Fs_bermuda02.jpg) |
버뮤다 삼각지대 상공에서 훈련배행 도중 사라진 아벤저 뇌격기 편대
| 1. 로절리 호(버려진 배)* 1800년, 좌초됐으나 선원은
구조됐다. 2. 메어리 셀레스테 호(버려진 배) 1872년, 아직도 수수께끼다. 3. 애틀랜타 호(소식이 끊긴 배)* 1880년,
심한 폭풍에 의함. 4. 엘렌 오스틴 호(버려진 배)* 1881년, 이야기의 출처가 불분명. 5. 프레이어 호(버려진 배)
1902년, 태평양의 해저지진으로 침몰. 6. 조슈아 슬로검 호(선원이 증발)* 1909년, 질병의 만연 또는 배의 전복. 7.
사이클로푸스 호(해군의 수송선) 1918년, 악천후. 8. 캐럴 A. 디어링 호(버려진 배) 1921년, 아직도 수수께끼다. 9.
라이후쿠마루(소식이 끊긴 화물선) 1925년, 악천후. 10. 고토파쿠시 호(화물선) 1925년, 기록적인 폭풍우.
11.
사다후코 호(괴물에게 잡혀먹혔다는 화물선) 1926년, 엔진 폭발. 12. 존 앤드 메어리 호(버려진 스쿠너) 1932년, 엔진 폭발.
13. 라 다하나 호(바닷속에서 나타난 '유령선') 1940년, 침수로 조정불능. 14. 글로리아 코리타 호(버려진 스쿠너)
1940년, 폭풍우에 의함. 15. 크로테우스 호와 네레우스 호(형제선) 1941년, 어뢰로 침몰. 16. 루비콘 호(버려진
화물선, 개가 살아 있었다) 1944년, 폭풍우에 의함. 17. 제 19비행중대(행방불명이 된 5대의 폭격기)* 1945년, 단순한 항법
실수. 18. 시티 벨 호(버려진 수쿠너)* 1946년, 악천후. 19. 스타 타이거(사라진 여객기) 1948년, 의문의 실종.
20. 엘 스나이더(사라진 조타수) 1948년, 기록적인 돌풍.
21. DC-3(사라진 비행기) 1948년, 조종 실수.
22. 스타 에어리얼(사라진 여객기, 19번과 자매기) 1949년, 미해결. 23. 샌들러 호(사라진 화물선) 1950년,
폭풍우로 인함. 24. 요크 트랜스포트(군사 수송기) 1953, 악천후. 25. 수퍼 컨스텔레이션(미해군기) 1954년, 미해결.
26. 서전 디스릭스 호(해군 화물선) 1954년, 폭풍우. 27. 콘네마라 4세 호(버려진 요트) 1955, 허리케인에 의함.
28. 해군의 정찰폭격기 1956년, 폭발. 29. 레바노크 호(사라진 요트) 1958년, 폭풍우로 인함. 30.
KB-50(사라진 공군기)* 1962년, 미해결.
31. 마린 설펴 퀸 호(화물선)* 1963년, 여러 가지 자연적 원인으로.
32. 스노포이(사리진 낚시배) 1963년, 악천후와 화물 과적. 33. 2대의 KC-135(공급 급유기)* 1963년, 공중
충돌. 34. C-119 '플라잉 복서'(공군기) 기술적 결함. 35. 체스 YC122(수송기) 1967년, 기체구조의 결함.
36. 비치크라프트 보난자(경비행기)* 1967년, 엔진 고장. 37. 파이퍼 아파치(경비행기) 1967년, 악천후 또는 엔진
고장. 38. 위체클라프트 호(순양함)* 1967년, 폭풍우로 인함. 39. 스코비온(원자력 잠수함) 1968년, 구조적 결함.
40. 테인마우스 일렉트론(버려진 세계일주 요트) 1969년, 자살.
41. 파이퍼 코만치(경비행기)* 1970년, 비행사
실수로 인한 엔진 고장. 42. 엘 칼리브 호(사라진 화물선) 1971년, 공중납치로 보인다. 43. V.A. 포그호(사라진
유조선)* 1972년.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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