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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五餠二魚
2008년 05년 11일 성령 강림 대축일 **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님 **
<살자, 생기 있게!>
부처님 오신 날도 됐고, 지난 부활에 선암사 주지스님으로부터 축하 화환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부처님 오신 날
축하드린다.’ 는 프랭카드를 성당 앞 도로에 붙여놨더니 반응들이 재미있습니다. 역시 성당 사람들은 그릇이 크다,
는 말씀도 들리고, 종교인들끼리 싸우지 않는게 보기 좋다는 평도 들었지만, 지나가는 몇 명은 그 프랭카드를 두고
“이래서 천주교는 이단이야.” 그러십니다.
용감한 건지, 무식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때로는 적지 않은 종교인들의 무지막지한 편견과 장벽은 산다는 일을 섬
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안과 밖, 나와 너, 차이와 차별, 높음과 낮음, 우리들은 수도 없이 많은 벽들에 둘러싸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는 그 안만 완전하고 또 안전하다고 강변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도 그러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불러 앉히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한 번쯤
은 들어보셨던 교리겠지요. 아주 배타적으로 이 말을 이해하고,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니 이 배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
은 노아의 방주 때처럼 모두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그래서 성당 건축물들 가운데 배 모양으로 성당을 짓는 것이 유
행이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절대 명제는 누가 구원되고 누가 영벌(永罰)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운명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이 우리의 공통된 믿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 적어도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따라서 구원
은 교회를 통하여 누리게 되는 그리스도와의 전적인 일치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교회 ‘안’에 있다하더라도 그가 그리스도와 일치하지 않고 있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거스르면, 교회 밖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교회
에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사랑에 항구하지 못하여 교회의 품 안에 ‘몸’으로만 머물러 있고 ‘마음’으로는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는 매서운 가르침을 되새기게 만들어줍니다. (교회헌장 14).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교회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면서도 사실 교회를 ‘나가는’ 무엇으로만 한정지을 때가 많습니
다. 그러니까, 성당에 다니는 존재, 그저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며 성당에 ‘다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를 느끼게 하고,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세상에 드러내며, 남이 나를 보고 교회를 보았다 혹
은 하느님을 보았다 하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아주 귀한 표지들인 셈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거나 교회를 보조하고,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온갖 고통과
어려움, 단점과 약점, 때로는 좌절과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그 자체로 ‘교회’를 세상에 드러내는 위
대한 존재가 바로 천주교회 신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천주교 신자들은 그냥 ‘다니기’만 하는데 급급합니다. 그런 세월이 조금만 지나면 그냥 관성화 되어
가지요. 개신교회에서 개종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동소이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뜨거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신교회에 가면 뜨거운 체험이 있고 속 시원한 찬양도 있고 철저함이 있는데, 그래서 주일 예배가 “기다려지는데”,
성당 신자들은 가만 보면 꼭 못죽어서 억지로 “끌려나오는” 사람들 같다는 겁니다.
준비가 없으니 말씀을 들어도 다가오는 것이 없고, 신부님들의 강론은 건조하기만 하며, 성가는 축축 늘어지니, 헌금
을 해도 2천원 이상을 하면 죽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장로를 하다 오신 분의 이 이야기를 듣다가 속이 뜨
끔해졌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 천주교회가 과연 그런 곳입니까? 왜 우리는 신앙생활 20년 30년을 하면서도 아는 것은 별로
없고, 그저 본당 신부님이 뭘 하자면 겨우겨우 따라가기 바쁘고 이 신앙생활이 내 인생에 아주 기가 막힌 활력과 생기
를 제공하는 하느님의 자양분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매 주일 말씀을 듣고 성체를 나누며 예수님의 살과 피로써 새로이 길러지고 있음에도 우리 마음 안에는 왜 설
레임도, 기다려짐도,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간절한 갈망도 없이 신앙해야 할까요? 답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성령에 대한 인식과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주 그렇고 그런 복음과 미사를 “때우기에” 급급한 이유는 성령,
곧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 체험을 내 것으로 심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어봅시다. 여러분들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언제 받으셨습니까? 성령도 받지 않았는데 신앙생활
을 하고 계신단 말입니까? 흔히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면 막 이상한 말을 해야 하고, 벌벌 떨며 뒤로 넘어가야 하고 또
박수를 치고 괴성을 질러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난 다음 찾아오신, 전혀 다른, <다음, next 하느님>
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이미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함께 사신 분이었습니다.
성령, 하느님의 숨결로 인하여 예수님은 잉태라는 육화(肉化)로 드러나신 분이었습니다(마태 1,18). 성령의 인도로 광야
에서 하느님의 뜻을 향한 처절한 자기비움을 이루시고(마태 4,1), 세례를 받으실 적에 하느님의 영, 성령을 체험하였습
니다(마태 3,16).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루가 10,21). 아버지의 일, 아버지의 사랑
을 전하고 실천하는 것만이 바로 당신의 사명이라 여기셨습니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성령과 함께 하셨고, 사람들은 그러
한 예수님을 보고 바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으셨습니다.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깨달음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 자비로운 아버지셨습니다. 악한 인간이라도 “생선을 달라
는 아들에게 뱀을 대신”(루가 11,11) 주지는 않는다 하신 그분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러면서,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 같이”(루가 6,36) 각자 스스로도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하느님의 것이었다는 믿음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성령은 바로 하느님의 숨결이요, 하느님이 지금 나와 함께 살아계심을 깨우쳐 주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 모
두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시간이 바로 기도이고, 그 아
빠 아버지라는 밥을 영하는 시간이 성체성사, 곧 미사인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앉아 깨작깨작 젓가락질을 하면 부모님께 혼이 납니다. 밥상이 들어오면 얼른 제일 밥상머리에 착 달라붙어
신명나게 흥겹게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밥 한 공기 올리기 위해 애쓰셨던 아버지도 흐믓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천
주교회 신자들은 밥상머리의 기쁨을 자꾸만 잃어가는 것입니다.
맨날 반찬 타령에 짜네 맵네, 신부타령, 수녀타령, 신자타령, 맛있게 차려내신 아버지를 기쁘게 할 생각은 않고 뜨거움이
있네 없네, 말씀이 좋네 나쁘네 타령만 늘어놓습니다. 성령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나를 변화시키시기 위하여 이미 당신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성령이 하느님의 “숨결”이라고 했지
요. 숨결이 없으면 그는 이미 죽은 시체입니다. 죽은 시체는 딱딱합니다. 숨결이 없으면 굳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사람을 빚어 당신 숨을 불어넣으셨다.’(창세 2,7)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인들이 쉬는 숨은 나의 숨이
아니라 하느님의 숨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숨으로 산다!> 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하느님의 숨으로 살 때 달라집니다. 어떻게 달라집니까? 사도들처럼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그들은 시체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두려워 다락방 문을 닫아걸고 그야말로 숨 죽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령 강림 날,
성령을 받고, 곧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그 체험을 하고
난 다음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손사레를 치던 그들이, 문을 박차고 나가 회당에서 예수를 전하고 증거하
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부정했던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 걸어가라고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본적도 없던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오로지 보고 들은 것이라고는 제자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제자들만 보고서도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변화된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죽어 사라지지 아니하고 제자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와 실천 속에 함께 계시며 그들을 통하여 끝없이 부활하고
또 부활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이 살아계시게 만드는, 그런 하느님을 체험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숨결이
십니다. 이 숨결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당신도 당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의지, 나의 숨결에 의해 살아
가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자고로 인간의 의지와 인간의 정신력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정신력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숨결에 자신을 내어맡긴 사람들이 신앙생활, 깨어있는 생활을 진득하니 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압니다. 옳고 그름을 복음의 눈으로 헤아릴 줄 알고, 오만과 편견,
독단과 독선을 하느님의 영으로 내리누를 줄 압니다. 우리는 크거나 작거나 모두가 한계와 약점을 지닌 인간들입니다. 우
리는 저마다의 장애와 장벽에 둘러싸인 사람들입니다.
누구는 잘났고 누구는 못났고 누구는 높고 누구는 낮고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것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
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런 모든 장벽과 장애를 넘나들게 하십니다. 오늘 1독서와 2독서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물이 산을 가르지 않고 휘돌아 감는 것처럼, 성령은 뿔뿔이 흩어졌던 마음들을 다시금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자비로운
마음, 베풀고 너그러운 마음을 우리 안에 뿜어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그러면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요한 20,22-23)
딱딱한 마음에서 용서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이 아니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입니다.
죽은 마음이지요. 그러나 성령이 머무르시는 마음은 살아있는 마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이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입
니다.
딱딱한 얼굴들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남의 말을 좋게 하십시오. 성당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즐거운 학교이자 하느님을
받아 모시는 기쁜 식사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성령이 머무르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미 교
회요, 성령의 궁전 아니십니까?
그런 우리들이 호부 개신교회 신자들로부터 뭐 뜨거움이 있네 없네, 간절함이 있네 없네, 소리 들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령은 불꽃 모양으로 사도들에게 내렸다, 하였습니다. 태우시는 불이십니다. 내 안에 오늘 성령을 충만히 채우십시오. 그
래서 부질없는 것들, 막고 가두고 세웠던 모든 마음의 벽과 금들을 말끔히 태우십시오.
그리고 자유로운 바람처럼, 자유로운 마음과 뜨거운 불꽃처럼 간절한 희망이 가득 차오르게 하십시오.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내 정신이 아니라 하느님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눈 감은 사이, 코만 아니고 내 온 영혼을 돈에 팔아
버리고 바꿔버릴 그런 세상입니다.
돈만 되면, 실용만 되면, 염치도 양심도 한 방에 팔아버리고도 뻔뻔하게, 믿으라 믿으라 만 반복하시는 장로 대통령의 나라
에서 살려면, 성령 충만, 원기 충만, 희망 충만 되어야 합니다. 머슴한다고 큰소리만 쳐놓고 살림세간 다 들어내기 전에 아
닌 것은 아니라고, 성령으로 깨어있고,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살아계실 때,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아니라 산 신앙, 숨 쉬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은 재미도 없고
기쁨도 없는 노역이 아닙니다. 성령이야 말로 우리 신앙에 새로운 숨과 생기를 불어넣어주시는 하느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수에넨스 추기경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으로 강론을 맺습니다.
“성령이 없다면 하느님은 너무 먼 분이 되시고, 성령이 없다면 예수님은 과거의 지나간 인물에 불과하며, 성령이 없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합니다. 성령이 없다면 교회는 사회 복지 단체에 불과하며, 성령이 없다면 권위는 봉사가 아니라
권력에 불과하고, 성령이 없다면 전교는 선전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차원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생기 없는 화석에
불과합니다.”(수에넨스 추기경의 강론 중에서)
우리 신앙에도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그런 성령 강림 대축일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우리 죽전1동 교우들에게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강의 잘 보았습니다. 늘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