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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고린도전서 11장 23-29절
성찬의 의미와 참여
성찬
지난주에 성례에 대한 부분, 그리고 세례에 대한 부분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중심으로 잠시 살폈고, 유아세례의 정당성과 그 교훈에 대해 창세기 17장을 근거로 살폈습니다. 오늘은 성찬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면 세례와 마찬가지로 성찬 역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임을 밝힙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물론 바울의 경우 주께서 처음 성찬을 행하실 때 사도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께로부터 받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계시를 받아 전한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후 내용을 보면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내용과 다르지 않는 내용을 증거 합니다(마26:26-28, 막14:22-24, 눅22:19-20 참고). 23절 중간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을 보시면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성찬이란 무엇인가와 관련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성례다. 그래서 떡과 포도주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했을 때 떡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포도주, 오늘 본문에서는 잔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보고 만지고 먹을 수 있는 재료로서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떡과 포도주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성찬과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 보면 오병이어 사건이 있은 후 떡과 관련하여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3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모세 시대 때는 만나가 내렸지만 만나 자체로는 생명의 떡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명기가 잘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신8:3). 그런데 그 ‘말씀’의 본질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35절로 넘어가시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심지어 53절 이하 55절에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6장에 근거하면 성찬을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바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만이 우리의 참된 생명임을 알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떡이 우리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여 지탱시켜주는 것처럼 주님의 몸은 우리의 영혼을 먹이시며 생기 있게 하신다는 것이요, 포도주가 우리 몸에 활력을 더해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주님의 피는 우리 영혼에 영적인 기쁨과 힘이 되어 준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이상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총회 공과).
같은 요한복음 6장에서는 어떤 말씀도 앞서 하시는가 하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즉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했을 때 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6:27-29).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일, 즉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는 것이며, 이것이 무엇과 연결이 되느냐 하면 성찬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찬이란 무엇인가 할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례이지만, 그 참여는 무엇을 따라 해야 하느냐 하면 반드시 믿음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양식, 우리 영혼의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지만, 그리스도를 실제로 먹고 마실 수는 없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기독교에 대해 성찬을 오해해서 야만인 종교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6장 35절처럼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말씀을 감각적인 표식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성례가 뭐냐? 바로 성찬인 것입니다. 때문에 단지 성찬을 행하는 그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 성찬을 제정하신 의미와 뜻을 알고 또한 그 의미와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참여할 때 그것이 곧 영적인 양식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6문을 통해 “주의 성찬은 무엇입니까?” 물을 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의 정하심을 따라 떡과 포도주를 주고 받음으로 주의 죽으심이 증거되는 성례입니다. 성찬을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육체적이며 정욕적인 방식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예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들과 함께 그들의 영적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은혜 가운데 자라게 됩니다.” 외적으로는 떡과 포도주이지만 그 의미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것이고, 바로 그 의미하는 바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들과 함께 그들의 영적 영양분이 공급을 받으며 은혜 가운데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찬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과 관련하여 반드시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즉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몸을 의미하는 떡을 주실 때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몸을 내어주실 때 누구를 위해 내어 주셨느냐? 너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주와 관련해서는 그런 말이 없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떡이든, 포도주든 다 ‘너희를 위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눅22:19-20). 때문에 포도주 역시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즉 누구를 위하여 피 흘리셨는가? 우리를 위해 흘리신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우리를 위함이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인 겁니다.
그럼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만 했는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초인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을 모든 인류의 대표로 정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를 아담 안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행위언약이라는 것을 맺으셨는데, 우리가 잘 아는 선악과 명령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언약을 어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스스로 타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그 안에서 함께 타락한 자가 되었는데,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고 말한 것이 사실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류는 아담의 죄를 전가 받아 죄악 가운데 출생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인류 개개인이 죄에 대한 책임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그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그 스스로 죄를 짓게 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배우지도 않은 죄를 그렇게 잘 짓는가?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낯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죽음으로 갚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 말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로마서에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롬6:23).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서 보자면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한번 죄의 삯을 사망이라고 하셨으면 사망이 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누구를 죽이시느냐 하면 성부의 아들이신 성자를 인간의 몸을 취하게 하셔서 죽이신 겁니다. 인류 어느 누구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 인간이 없습니다. 다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혹 죄 없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 있다 해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 값어치는 다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죽을 수 없지만, 그런 분이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죽으셨습니다. 그 값어치는 어느 누구도 따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죽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이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오직 택자만을 위해 죽었다고 성경을 통해 고백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 것도 아니며, 모든 자를 위해 죽으셨지만 효력은 믿는 자들에게만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런 방식으로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더욱 많은 부분은 모든 사람을 죽으셨지만 그 유효성은 믿는 자들에게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을 강조하지만 믿음보다 앞선 하나님의 선택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오직 택자만을 위해 죽으시고, 그 효과 역시 오직 택자에게만 있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시고, 또한 때가 되어 친히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은혜를 누가 받았는가? 저와 여러분이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한다고 할 때 이런 속죄에 관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성찬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찬은 단순한 먹고 마시는 것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찢기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시면 27절 이하 29절에서 성찬의 시행과 관련하여 참여하는 자들이 어떤 자세로서 해야 하는지를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즉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럼 성찬에 합당하게 참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소요리문답 97문에 보면 “주의 성찬을 합당하게 받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에 대해 이렇게 답변합니다. “주의 성찬에 합당하게 참예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님의 몸을 분별하는 지식, 주님을 양식으로 삼는 믿음, 회개와 사랑과 새로운 순종이 있는지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만일 합당치 않게 오면 그들은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소요리문답을 바탕으로 정리하자면 첫째, 우리 자신에게 주의 몸을 분별하는 지식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고전11:28,29). 주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그의 몸과 피를 속죄제물로 드리셨음을 알아야 하고, 또한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저주로부터 구원하고 생명을 주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앎이 곧 믿음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 자신에게 주님을 양식으로 삼는 믿음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요6:35, 고후13:5). 그분만이 우리의 양식이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얻게 되는 모든 은택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자녀가 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되고, 또한 거룩하게 하심을 입으며, 영화롭게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접붙여져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돌보시고 양육하신다는 사실도 믿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 자신에게 회개할 죄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새로운 순종이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고전5:7,8, 10:16,17, 11:31). 비록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죄를 지으며 살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합니다. 요즘 세월호 사건으로 구원파의 교리가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참된 교회는 결코 구원 받은 자는 결코 회개할 것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이 우리 삶의 규범으로서 역할을 하게 됨으로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하게 되며, 혹 죄를 지었다면 날마다 그것을 돌아봄으로 죄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다시금 마음을 잡는 방향으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합당하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성찬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성찬이라는 표지가 보증하는 은혜들을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으로서 이것들을 고백하고 있는가? 또한 그 믿음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가? 만약 이것이 없다면 성경은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기 때문에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주의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찬의 경우 아무에게나 시행하도록 하지 않고, 반드시 이런 사실을 돌아볼 수 있는 자들, 즉 자신을 살피고 또한 오늘 본문에서 알리고 있는 것처럼 주의 죽으심을 증거 할 수 있는 자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경우는 지난주에 살폈지만 유아들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은혜언약으로서 약속하신 대상은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성인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찬의 경우 주님의 몸을 분별하는 지식이 없는 사람, 또한 주님을 양식으로 삼는 믿음이 없는 사람,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와 주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새로운 순종에 대한 다짐이 없는 사람에게는 줄 수가 없기 때문에 유아들이나 어느 정도 신앙의 고백이 분명하지 않는 이상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물론 참여한 자들 가운데서도 지식적으로 부족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한 믿음이 없는 사람,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나 순종에 대한 각오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사람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받고 일정한 나이가 되어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자들, 그리고 성인의 경우 그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믿음의 내용으로서 고백하는 자들은 성찬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런 고백이 거짓된 고백으로 있다면 오늘 본문 27절 이하 29절의 말씀이 그들에게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혹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말씀, 그리고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신다는 이 말씀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니 죄 지은 것이 많고, 그래서 성찬에 참여하기가 찔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죄악 가운데서도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죽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의인으로 불리기 전, 즉 죄인으로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죄악 가운데 살아가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로 하자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로 이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때문에 아무리 우리의 죄가 많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사랑을 생각하신다면,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를 생각하신다면, 그리고 그런 은혜와 더불어 주님의 이런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신다면 감사함으로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시행과 관련하여 한 말씀 드리자면 성찬을 시행할 때 반드시 말씀의 선포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성례는 말씀과 함께 말씀의 보조수단으로 주신 외적이고 일상적인 거룩한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통해 약속된 것은 성찬의 의미,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몸과 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외적 표지로서 주고 계신 것이 성찬입니다. 때문에 외적 표지로서 주신 성찬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붙잡아 주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찬을 통해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에 대해서는 약간의 구별도 있어야 합니다. 즉 외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통해 거룩하게 되고, 또한 기도를 통해 거룩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오늘 본문에도 보면 ‘축사하시고’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축복하셨다는 말로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되어 있는데, 언어상으로는 다를 수 있지만 그 의미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육신을 위한 떡과 육신을 위한 포도주이지만,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찬 때 행해지는 떡과 포도주는 육신을 위한 떡과 포도주와는 구별이 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성찬 때 행해지는 떡과 포도주는 거룩한 용도로서 사용이 되는 겁니다.
당연히 성찬에 앞서 말씀의 선포가 먼저 있고, 또한 성찬을 행할 때 기도함으로서 성찬을 행하는 것은 단순히 일상생활 속에서 먹는 그런 떡과 포도주로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백성을 위해 주신 거룩한 예식으로서 인식하시고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성찬과 관련하여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만 말씀드리고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위 “성찬이 베풀어질 때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신가?”하는 물음과 관계된 것인데, 왜 이 문제가 중요하냐 하면 카톨릭의 경우 화체설을 주장하고, 루터주의 경우 공재설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화체설의 경우 떡과 포도주가 거룩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 그러나 그 외형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주장입니다. 공재설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혹은 떡과 함께 공존한다는 주장인데, 떡과 포도주의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그 요소들과 함께, 안에, 아래에 임재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경우 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임재를 말한다는 점에서 그릇된 입장으로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본래 신성으로서 참 하나님이셨지만,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시고 난 뒤부터는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으며,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칼케돈 신조의 고백입니다. 칼케돈 신조의 일부를 읽어드리면 “... 우리는 유일하신 한 분 성자시요, 주시요,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는 두 본성으로 인식되지만, 두 본성은 혼합이나 전이나 나눠지거나 분리가 되지 않음을 인정한다. 인격적인 연합은 각 성의 특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성은 각 본성의 특이성을 보존하면서 하나의 품성과 자질로 연합되어 있다. 두 품성은 분열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한 분이시고 유일한 독생자이신 로고스 곧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것이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성경을 통해 고백한 신앙고백입니다.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지 않으며, 전이되지 않으며, 나눠지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는다. 때문에 신성이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면 인성 역시 나눠지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기 때문에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과 인성은 각 성의 특성을 없애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칼케돈 신조 자체도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신성으로서는 어디에나 계실 수 있지만, 인성으로서는 어디에나 계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결코 나눠지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은 채 역사하시는 것,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화체설이나 공재설은 뭐냐? 성찬을 행할 때 그리스도의 인성이 실체로 임한다고 말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죽으시고 부활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심판하실 때 다시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다시 오시기까지는 그분의 인성이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뿐입니다. 때문에 성찬을 행할 때 그리스도의 인성이 실체로 임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저희 교단에서 나온 소요리문답 공과책에 보면 이렇게 정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찬에 임하시는 예수님은 ‘편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임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서로 혼합되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으며, 서로 나눠지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땅에 계시지 않고 지금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인성만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계십니다. 역시 영원히 편재하시는 그리스도는 신성만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계십니다. 이와 같이 신성과 인성이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는 그리스도이시지만 신성과 인성은 반드시 구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식 때 예수께서 임하신다고 말할 때 아무리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육신도 임했다는 말을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성찬 때 어떻게 임하십니까? 실제적으로 임하십니다. 실제적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임하시지만, 그리스도께서 가상적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임하십니다.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시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측량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미 세례와 성찬을 행하기 전 주일오후에 기독교강요 초판에 나오는 성례 부분을 살피면서 잠시 설명 드린 바 있지만, 지금 이 부분이 totus, totum에 관한 내용입니다. 전 그리스도가 임하되(totus Christus),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임하는 것은 아니다(totum Christi).
“그리고 이 성찬의 신비는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운 임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단순히 예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인쳐준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이 진리가 우리에게 항상 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찬을 통해 실제로 임하시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이 성찬을 통해 그것이 확인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하셔서 더욱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