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쥐셴산(九仙山) 불사 이야기
1988년 봄 나는 미국에 계시는 사부님에게 편지를 써서 쥐셴산 링쥬옌사가 빨리 중건되었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사부님은 나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주시며 링쥬옌사를 중건하기로 하였다. 그해 10월 사부님이 미국 Monterey Park 시 반야수덕선당 신도들의 불사금을 가지고 오셔 링쥬옌사 중건의 주춧돌을 놓았다. 이때 반야수덕선당의 먀오파 거사와 함께 오셨는데 나는 사부님의 조수로서 열심히 도와 부근 마을의 군중을 모아 중건에 참가하도록 조직하고, 11월 들어가 바로 “쥐셴산 문화재 옛 절 재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준비위원회를 보면 관징 스님이 위원장을 맡아 전체 일을 주관하고 더화현 정치협상위원회 주석을 명예위원장으로 모셨다. 부위원장에는 미국에서 반야수덕선당의 왕쩐 . 먀오파 부부와 실질적으로 가장 큰 자금을 낸 장나이런 . 쉬츄화를, 현지에서는 더화현 문화국 국장인 쉬용창과 상용향 향장을 넣었다. 12명으로 구성된 위원들 가운데 첫머리에는 관징 스님과 법형제인 수귀칭 거사가 들어 있으나 이 거사는 이 위원회가 구성된 다음 해인 1989년 세상을 떠나 그렇게 소원했던 링쥬옌사 재건을 보지 못했다. 수귀칭 거사를 빼고도 뀌거촌에서 절반인 6명이 위원이 된 것을 보면 실질적으로 전체적인 재건사업이 뀌거촌 사람들 위주로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윈루촌에서 참가한 두 사람도 정씨로 8명의 정씨는 모두 사실은 관징 스님의 전생 정원사의 후손들이다. 그 가운데서 나는 실제로 사부님과의 연락 같은 모든 일을 맡아서 하였다.
관징 사부님은 이 절을 짓는데 돈만 가져다주고 준비위원회에 이름만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직접 기획하고 감독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당시만 해도 아직 사찰 건축에 대한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설계 도면까지 작성했다.
이처럼 큰일을 하면서도 그의 생활 자체는 매우 검소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였다.
1990년 링쥬옌사를 완공하고 난 뒤, 1991년 톈마사 불사를 시작하고, 1992년 10월 9일 바로 가까이 있는 미륵대전을 세워 완공하였다. 미륵동굴은 관징 스님이 극락에서 돌아올 때 깨어났던 곳이고, 그 뒤로도 몇 년간 숨어서 수행했던 곳이기 때문에 관징 사부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나는 더화현의 준비위원회를 도와 링쥬옌사는 물론 이어서 미륵대전 . 천연정 . 연못 무지개다리를 세우고, 산을 깍아 길을 내서 관음동굴 . 마윈동굴 . 기상대로 통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왔다. 1988년부터 1994년까지 6년 동안 쥐셴산 링쥬옌사 및 미륵대전을 위해서 모두 370일간 일했다. 낙성을 한 뒤에는 절 안의 장사를 맡아서 하면서 한편으로는 절과 문화재의 보호 임무를 맡아서 하였고, 현금 1,800위엔, 곡물 400근, 주방기구 등을 대면서 링쥬옌사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또 방생못을 만들 때도 불사금 1,200위엔을 내고 18일간 노동봉사를 하였다.
1989년 9월 9일, 공사 도중 대웅보전 가운데 들보가 갑자기 심하게 무너져 내려 나는 상용촌과 뀌거촌의 신도와 목공 정신탕 . 슈귀 . 신허 . 진샤오 . 쟈쓰 들과 함께 급히 통나무를 가지고 가서 대들보를 받쳐가지고 대들보가 안전하게 하여 큰 손실을 방지 하였다. 이때 정수곡 씨가 떨어지는 통나무에 맞아 아주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다. 나는 바로 기상대로 가서 380위엔을 빌려서 상용의원에 가서 치료했던 기억이 새롭다.
1990년 2월 17일, 줸저우시 인민정부는 이 절을 대외에 개방하여 불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승인하고, 같은 해 11월 3일 점안식과 낙성식을 가졌다. 2년에 걸쳐 링쥬옌사는 대웅보전, 관음전, 조사전 선방, 종루와 고루, 승방, 객당, 바깥 산문 같은 9채의 건물을 잇달아 낙성하였다. 전국 정치협상 부주석이며 불교협회 회장인 자오푸추가 친필로 편액을 써 주었고, 홍런 황화와 왕쩐 먀오파가 미얀마 옥불 3존, 태국 금동불 2존을 보시하여 천년 옛 절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점안식 날 기적 같은 이야기가 일어났다. 옥불 3존을 대웅보전에 모신 날 저녁 8시 호랑이 한 마리가 대웅보전에 와서 옥불을 향해 3번 절을 올렸고, 점안식하는 날에는 짙은 안개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는데, 사부님꼐서 자리에 오르시자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문득 하늘가에 부처님의 광명이 나타나며, 그 불광 속에 추공 조사의 불상이 뚜렷이 나타난 이적을 많은 현지 주민들이 목격하여 그 지역에서는 관징 사부님의 법력이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1995년 8월 25일 나는 링쥬옌사 문화재보호 소조의 조장으로 임명을 받았고, 1997년에는 상급 임원들과 관징 사부님께서 나를 링쥬옌사 재무감독으로 임명하셔서 32만 위엔이 넘는 자금을 조성하는 등 쥐셴산 사찰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그러나 1998년 이후 상용향 뀌거 . 윈루 . 촨허 세 마을 책임자들이 현의 통전부와 문물관리위원회에 새로운 문화재보호조를 만들어 보고하면서 나를 제외시켰기 때문에 젊은 날 사부님을 모시고 세운 쥐셴산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5년 뒤인 2003년 3월 19일 누전으로 불이나 대웅보전이 다 타버렸다. 나는 또 사방으로 열심히 뛰면서 다시 세우는 일을 준비하였다. 아울러 다시 사부님에게 연락하여 2003년 4월 7일 관징 대사가 그 절 대웅보전과 옥불을 재건해 낙성을 할 수 있는 불사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2003년 9월 초 낙성식 테이프를 끊게 되었다. 미국 돈 400만 달러를 써서 세운 링쥬옌사의 대웅전이 타버리자 당시 79세의 노구를 이끄시고 다시 권선문을 각국의 제자들에게 돌려 17만 위엔(한국동 약 2억 5천만원)을 모아서 7개월 만에 재건하는 성과를 올리셨던 것이다.
5) 가업을 잇고 사부님의 가르침을 이어 택일관으로 회향
3개 촌 문화재보호조에서 쥐셴산을 맡아서 하게 되자 나는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와 아버지의 가업을 잇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미 100년 전부터 ’양화당‘을 세워 음약역법인 [통서] [춘우도]를 출간하여 조상 무덤의 풍수와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대소사의 택일을 통해 원만한 가정사를 이루도록 주변 사람들을 도왔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연히 아버지로부터 이런 비법을 전수받았고, 특히 관징 사부님도 시간이 나는 대로 자신이 신계로부터 배운 비법을 전수해 주셨다.
관징 사부님은 불법은 물론 풍수나 역법에 대해 아주 높은 법력을 갖고 계셨다. 내가 쥐셴산 불사를 할 때 늘 가까이 모시면서 자연스럽게 그 진수를 배울 수 있었는데, 사부님께서는 자신이 쓰시던 풍수나침판을 비롯하여 역법에 쓰이는 핸드북을 모두 나에게 물려주셨다. 나는 천주로 가서 계성당 . 홍수청 . 홍택륜 . 이풍성 같은 택일관에서 실무를 익힌 뒤 덕화에 ’성룡당‘이라는 택일관을 열어 일하고 있다.
나는 쥐셴산을 떠나 시내로 나왔지만 동생 정신학은 아직 쥐셴산 미륵대전에서 사부님의 뜻을 잇고 있다. 나도 홈페이지를 통해서, 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잊지 않고 쥐셴산을 선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쥐셴산에 찾아가 사부님과 함께 세운 불교유적을 찾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힘이 닿는 대로 사부님의 기념관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기온이 확 내려갔네요
건강관리에 더더욱 집중하시길....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